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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월콧 / 혼혈의 시학
Articles in English : Derek Walcott / A Poetics of Hybridity
노저용(Jeo Yong Noh)
현대영미시연구 7권 173-197(25pages)
UCI I410-ECN-0102-2009-840-004434104
* 발행 기관의 요청으로 이용이 불가한 자료입니다.

데릭 월콧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카리브 해의 작은 섬인 성 루시아(St. Lucia)의 수도 캐스트리스에서 1930년에 쌍둥이 아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대부분의 카리브인이 그렇듯이 월콧도 혼혈아였다. 즉 그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노예 출신의 유색 할머니와 네덜란드 출신의 백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또 그의 아버지는 백인계 영국인이었다. 루시아 섬에서의 월콧가의 시작은 데릭의 할아버지 되시는 찰스(Charles Walcott)가 농장을 매입하기 위하여 바바도스 섬으로부터 이주한 이후부터이다. 찰스는 손자인 데릭의 시에 서출로 기록되어 있다. 또 그는 워드로프(Christina Wardrope)이라는 짙은 갈색 피부의 여인과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가졌고, 그 중 첫 아이가 바로 시인 데릭이 태어난지 1년 6개월이 되지 않아서 34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워릭이다. 워릭은 예술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유양돌기염으로 죽기 직전까지 공무원이었다. 또 데릭의 혈통 못지 않게 복잡한 것이 성 루시아의 복잡한 역사이다. 데릭이 태어난 루시아 섬은 약2000년 전에 최초로 아라왁 인들이 정착한 곳으로 알려졌다. 그 후 약1350년경에 원주민이었던 아라왁 족은 캐립 족에 정복을 당하여 멸종한다. 아라왁 족을 멸종시킨 캐립 족도 18세기초에 유럽인들이 정착한 이후로는 그 섬에서 사라졌다. 루시섬이 유럽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이유는 그 섬이 전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항구 중에 하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후로 영국과 프랑스가 열 두 번 이상 그 섬의 주도권을 주고받은 쟁탈전 이후 1803년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섬은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언어적으로는 프랑스어와 아프리카 언어의 합성어 이루어진 프랑스어 크레올이란 방언을 주로 사용하는 곳이다. 프랑스의 세력이 약화되어 영어가 프랑스어 대하여 우위를 차지하여 캐스트리스의 시민, 공무원, 교육받은 자의 언어가 된 것은 20세기에 와서 일어난 현상이다. 성 루시아에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수단으로 강제 유입된 것은 1763년 파리조약 이행으로 그 섬이 프랑스로 넘어간 직후부터 영국 정부에 의해서 노예해방이 선포된 1830년대까지로 알려졌다. 20세기에 와서 노예를 노동력을 대치하기 위하여 상당수의 계약제 노동자들이 인도로부터 이주했다. 그리하여 월콧이 태어난 1930년대에 루시아 섬의 총 인구는 8만을 헤아릴 수 있는 정도였고 그 중 백인은 2%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대부분이 공무원이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카리브 섬의 복잡한 역사, 인종, 문화적 배경을 첨예하게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데릭 월콧의 대표작 『오메로스』를 통하여 그 본질을 드러내는 데 있다. 월콧은 이 작품에서 역사가 남긴 복잡한 카리브 인의 상처를 드러내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카리브 인의 정체 의식의 회복이 급선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체 의식의 회복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하고 카리브 해의 복잡한 다문화는 신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메로스』에 나타난 월콧의 시학은 바로 혼혈문화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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