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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近代日韓における女子茶道敎育 -その背景と關連性-
천본리회
일본어교육 41권 179-196(18pages)
UCI I410-ECN-0102-2009-730-008447355

193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의 여자고교·여자전문학교에서의 일본다도교육의 실시에 대해 한국다도계에서는 식민지교육의 일환이란 단순한 견해가 대부분이며, 그 배경과 구체적 의미에 관한 상세 연구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한편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 다도에 관한 연구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발간된 한국 차문화의 역사와 차분포지 등을 기록한 몇 권의 책을 제외하고는 1945년 이후 전무한 상태에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일련의 식민지정책 과정중에 실시되어진 조선에 있어서의 여자 다도 교육과 메이지후반부터 일본의 각 여학교에 전파된 다도 교육에 대해 각각의 배경과 관련성을 고찰함으로서 일한의 근대 여자 다도교육의 구체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본최초의 근대여자 다도교육은、1875년 토쿄칸다쿠에서 신설한 아토미학교의 수업과목중에 점차를 가르킨것이 시초가 되었다. 또한 카조쿠여학교에서도 가사과중에 다도를 포함시켰으며、그후 다른 여학교에서도 다도교육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아토미학교 이외에、오쿠다쇼조도 일본의 여학교에 다도 교육을 도입 시킨 선구자이다. 오쿠다는 문부성사상국의 의뢰를 받아 일중전쟁이 일어난 1937년『로변한상』을 집필하였는데 거기에 표현된 그의 차에 대한 사상은 도덕적이며 정신적 세계를 중시하는「와비차」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의 모든 욕구를 버린 와비다인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은 시대는 전란시대라고 일컬어 지고 있으며、전쟁의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쇼와시대에는 여자 다도교육에 있어서도 시국에 부응하는 다도의 사상이 강조되었다. 즉 간소한 생활과 정숙을 통해 정신적인 깊은 수양을 얻는 종교적 다도가 요구 되었다고 볼수있다. 1940년 수정 발표 된 『고등소학독본』 여자용 교과서에서는 전시적교육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용이 보인다. 거기에는 부자·부부간의 애정과 집착을 버리고 비상시의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그것은 개인이 아닌 일본의 여성이란 국가의식을 강조한 덕목이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 있어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행하여졌다. 1938년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을 기점으로 당시의 각 여학교에서는 일본식 다도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전쟁이 격화된 1941년에는 『중등가사교과서』에도 다도가 실리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청일·러일 전쟁 이후 일본에서 다도를 배우는 전쟁 미망인이 증가함과 함께, 여학교의 다도교육도 상류사회의 예절교육의 범주를 벗어나 전시에 있어서의 정신 수양교육의 일환으로 다도가 채택되어진 것과 동일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즉 근대 한국에서 실시된 일본식 다도교육은 단순한 식민지 문화정책 이라기 보다 일본 본토와 동등한 차원의 배경과 목적을 가진 전시태세의 여자교육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이 한국고유의 다도가 반영되어지지 않은 일방적인 일본식 다도교육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논문에서는 근대 한일 여자 다도교육의 배경과 관련성을 고찰함으로써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써의 다도교육이었다는 종래의 막연한 견해를 벗어나 전쟁과 함께 변모한 일본 다도의 역사를 검토해 보았다. 결국 한일양국에 있어서의 여자 다도교육은 전시에 필요한 「황국여성」을 키우는 심신수양 수단으로써 교육에 도입됐다고 볼 수 있으며, 다도의 도덕적·정신적 측면은 비상시에 동요하지 않고 후방에서 국가와 가정을 지키는 여자교육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다도의 간소(Simplicity)·정숙(Calmness)·탈욕(Unconditioned Freedom)과 같은 종교적 요소가 전쟁국가에 있어서의 여자교육에 용이하게 부각되어 정책적으로 쓰여졌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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