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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 정치체제의 성립과정과 구조적 특질
百濟初期政治體制の成立過程と構造的特質
박기범
백제학회 2010.09
백제학보 4권 43-67(25pages)
UCI I410-ECN-0102-2012-900-001864777

백제사의 전개과정에서 3세기 후반 고이왕대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특히 정치사적인 측면에 서는 佐乎制와 官等制의 정비가 이루어진 시점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백제 정치기구의 골격이 이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고이왕대에만 주된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그 이전 시기의 정치구조와 고이왕대의 정치구조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편이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우선 고이왕대 이전의 정치구조에 대해 左·右輔制를 중심으로 검토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초고왕대 후반부터 주변 소국의 자치력이 통제당하여 小聯盟國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소연맹국 단계에서의 원활한 정국운영을 위해 고이왕대 초반에 우보가 설치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우보의 역할은 소연맹국에 참여한 수장층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의 실행에 있어 필요한 실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한편 좌평에 대해서는 그간 관료 내지 중앙정치기구적 성격을 부각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본고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 초점을 두어 좌평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했다. 고이왕대의 백제가 연맹왕국을 형성하긴 했지만, 당시 복속된 소국들은 아직 일정 정도 자치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면 좌평의 성격에 대해서도 재지 수장층들이 그들의 세력기반을 유지한 채 국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수여받은 칭호로 보는 것이 가능하게 돤다. 즉 좌평이 처음 설치될 당시에는 국왕 휘하의 일원적 관등제에 포함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당시 국왕 중심의 일원적 관료제를 목표로 정비된 것은 率系 이하의 관등이었다. 따라서 연맹왕국시기 백제의 정치는 국왕과 좌평을 칭한 세력들이 南堂에 모여 주요 국사를 의논하고, 그 실무적 처리는 솔계 이하 관등 소지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고이왕대의 정치기구 정비는 좌평 및 솔계 이하 관등의 설치, 그리고 남당회의의 탄생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두 국가 규모의 확대에 따른 조치로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보통 기존의 좌·우보제를 확대·개편하여 좌평제가 성립했다고 말하지만, 본고에서의 검토 결과에 따르는 한 우보가 지녔던 행정 관료적 성격은 솔계 이하 관등 소지자에게 넘어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렇게 보면 소연맹국 시기 후반과 연맹왕국 시기의 정국운영 방식은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면, 본질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백제에서는 기본적으로 연맹왕국에 가담한 주요 세력의 수장층들이 모두 정국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5부 혹은 5부의 지배층들만이 정국운영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고구려·신라의 정치구조와는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百濟史の展開過程において, 三世紀後半の古爾王代が占める歷史的な意義は大變大きい. とくに, 政治史の面でな佐乎制及び官等制の整備ガ行ゎれた時點といち點が注目され, 百濟の政治機構の骨韓がにのころかち形成されたと考えちれている古爾王代のみ關心が集中ちれたかち, その以前時期の政治構造と古爾王代の政治構造との共通點及び差異點についとは硏究が十分行われなかつた. そこで本稿ではまず古爾王代以前の政治構造について左·右輔制を中心に置き檢討を進めさせた. その結果, 肖古王代の後半よワ周迎小國の自治力が統制され小聯盟國體制が確立し, 小聯盟國段階での円滑な政局運管のために古爾王代の序盤に右輔が設置されたことぎ知ることができた. そのときの右輔の役目は, 小聯盟國瞬參與した首長層たさ間の會議で決定された事項の實行におい必要な實務を擔當するものだつた. 一方, 佐平についはその間官僚ないし中央政治機構的な性格を浮かび上がちせ理解する傾向が强かつたのに, 本稿ではこれとはゆゆ異なる面に焦点を置き佐乎の性格を把握しよちとした. 古爾王代ころの百濟が聯盟王國を形成したといつても, 當時の服屬きれた小國たちはまだめる程の自治力を維持していたかちだ. こちしたところた注目すれば, 佐乎の性格についても在地首長層たちが彼ちの勢力基盤を維持するままに國政に參與する過程で授與された稱號とみることができる. すなれち, 佐乎がはじめに設置されたときには國王麾下の一元的な官等制に包含された存在じゆなかつたといち意味である. その時において國王中心の一元的な官僚制を目標にして整備されたのは率系以下の官等だつた. したがつて聯盟王國時期の百濟の政治は, 國王及び佐平を稱する勢力たちが南堂であつまり主要な國事を議論し, その實務の處理は率系以下の官等所持者たちよつ行われる方式で運營されたといちことができる. 要するに古爾王代の政治機構の整備は佐乎及び率系以下の官等の設置, そして南堂會議の誕生で整理することができるが, こちいち變化はすへて國家規模の擴大にともなち措置だつといちべきものである. このことと關わりして, 普通は旣存の左·右輔制を擴大·改編して佐乎制が成立したといちが, 本稿での檢討の結果に從ちかぎり, 右輔の帶びた行政官僚的な性格は率系以下の官等所持者たちに讓ちれたと見るほらが妥當しよら. そのよにみれば小聯盟國時期の後半と聯盟王國時期との政局運營の方式臘規模の違いを除けば, 本質的な面では大きい差がなかつたといらことができる. 一方, 百濟では基本的に聯盟王國に荷擔した主要な勢力の首長層たちがみな政局運營に參與することができたと思われるから, 5部又は6部の支配層たちのみ政局運營で主要な位置をしめことができた高句麗·新羅の政治構造とは一定の違いがあつたといらべきである.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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