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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레진 로뱅의 "이주문학" 혹은 "이주 글쓰기" -『라 퀘벡쿠아트』를 중심으로
Litterature migrante ou ecriture migrante chez Regine Robin -autour de La Quebecoite
신옥근 ( Ok Keun Shin )
불어불문학연구 85권 299-316(18pages)
UCI I410-ECN-0102-2012-360-002252260

본 연구는 1980년대 변방의 문학에 지나지 않은 퀘벡 문학을 전 세계 독자로부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퀘벡의 이주 작가 레진 로뱅 Regine Robin의 글쓰기를 전통적 문학의 글쓰기로 볼 수 있는지, 아니면 그와 대치되는 전위적 글쓰기로 봐야 하는지, 요컨대 이주문학 ecriture migrante이 기존의 국문학(la litterature nationale) 차원의 퀘벡 문학의 정립과 관련해 글쓰기 자체에 부여하는 근본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레진 로뱅은 자신의 존재를 프랑스계 캐나다인 퀘벡 문학계에 유입된 이질적인 존재, 이방인 또는 외국인으로 규정한다. 작가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hors-lieu) 유형(exil)의 존재로서 근본적으로 이방인에 속하며, 이방인의 양태나 의식이 빚는 낯섦(etrangete)은 그 자체로 레진 로뱅의 글쓰기의 원리가 된다. 레진 로뱅의 첫 번째 소설인 『라 퀘벡쿠아트 La Quebecoite』는 기존의 문학적 글쓰기와 달리, 이야기도 순서도, 연대기도 논리도 없다. 오직 욕망으로서의 글쓰기와 낯섦이 드러내는 기억의 파편만이 존재한다. 독자들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낯선 도시에서 알 수 없는 언어와 과거의 희미한 기억이 파편으로 혼재하면서 떠도는 언어를 통해 이주 세계의 원형을 만난다. 이주 세계에서 개개의 존재는 부유하는 단어들처럼 그 어떤 일관성도 없다. 이렇듯 이질감과 낯섦은 글쓰기의 형식이자 동력 자체가 된다. 하지만 낯섦의 글쓰기는 기존의 퀘벡 문학의 전통에서 볼 때 큰 문제를 제기한다. 이방인의 상태를 기록한 글이 그 어떤 문맥도 줄거리도, 역사도 없다면 이들 작품을 퀘벡의 역사와 정체성에 뿌리를 둔 퀘벡 문학의 일환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레진 로뱅 같은 이주 작가들의 작품이 퀘벡은 물론 전 세계의 독자로부터 관심을 받으면 받을수록, 프랑스계 ``토박이``(souche) 퀘벡 작가들의 시야에 서 볼 때 이들의 작품은 퀘벡 문학의 역사적 사명이나 문맥과 더욱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계가 지배하는 캐나다 연방에 프랑스계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위한 노력이 지난 날의 퀘벡 문학의 전통이자 사명이었는데, 이주문학은 새로운 차원의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프랑스계 퀘벡인의 정체성이 온전하게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자들 의 존재로 인한 퀘벡의 정체성은 더욱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퀘벡의 상황은 영국계 캐나다 연방의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e가 다양한 차이의 동등한 인정이라는 미명 하에 퀘벡의 자주성과 차별성을 희석하는 논리가 되면서 이미 충분히 복잡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이주 사회가 내세우는 새로운 코즈모폴리턴의 전환문화주의 transculturalisme가 프랑스계 퀘벡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아니 기 때문에 퀘벡의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퀘벡성인가? 바로 레진 로뱅이 ``coite``(말 없는)라는 말 속에 묶어둔 침묵의 질문이 퀘벡성 또는 새로운 퀘벡인의 문제이다. 퀘벡의 여성작가를 암시하는 ``라 퀘벡쿠아트``는 말할 수 없다. ``라 퀘벡쿠아트``는 이주 사회와 더불어 새로운 코즈모폴리턴 퀘벡이 당면한 정체성의 한 단면이다. 프랑스계 퀘벡 작가 모니크 라뤼는 퀘벡 문학의 국문학적 성격과 관련하여, 이주문학을 측량사로 비유되는 기존의 퀘벡 문학에 유입된 새로운 항해사의 존재양식과 관련된 문학으로 보았다. 레진 로뱅이 자신의 글쓰기를 ``litterature``로 칭하지 않고 ``ecriture``의 영역에 둔 것은 항해사로 비유되는 문학적 존재양식과 무관하지 않다. 『라 퀘벡쿠아트』의 작가에 의하면 문학은 규범화에 저항하는 탐구이자 개척 정신에 속한다. 멀리 플라톤부터 최근의 보들레르나 랭보, 그리고 카프카 등이 그렇다. 또는 항해사의 과업은 앙투안 베르만의 ``낯섦``이나 이질성을 수용하는 번역과정과 다르지 않다. 타자의 언어를 모국어에 수용하는 낯섦의 수용과정이 이주문학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레진 로뱅의 글쓰기는 이주자 또는 유랑자의 다양한 자아처럼 ``같음``을 목표로 하지 않는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identite narrative)을 구축하고자 글쓰기에 집중한다. 이주문학-퀘벡의 이주문학을 지칭하는 ``ecriture migrante``는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이주 글쓰기``가 되겠지만 문학적 활동의 의미를 부각시킨다면 ``이주 글쓰기``보다 ``이주문학``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리라 본다 -에아방가르드의 전통을 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기존의 제도권 문학의 이데올로기나 미학을 부정하는 것이 레진 로뱅의 글쓰기(ecriture)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규범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langue``의 차원에 도전하는 행위를 닮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개체의 목소리가 이주문학의 정체성의 근본을 이루기 때문에 이주문학은 국문학이라는 집단적 의미 차원의 ``litterature``라는 개념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주문학은 현재 상황에서 본다면, 부정의 글쓰기이자 ``parole``의 글쓰기-레진 로뱅의 표현에 따르면 "parole immigrante"이다 -이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litterature``에 편입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모든 이주사회가 이주문학이 제기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 ``parole``이든 ``ecriture``이든 궁극적으로 이는 순수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보편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이주문학은 이주 상황이 집단화되고 보편화 될수록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의 보편성이나 문학성이 현재의 가치는 아니다. 우리가 고찰한 바에 의하면 레진 로뱅의 ``ecriture``는 이주자의 유랑하는(migrant) 상황과 근본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 문에 ``parole``의 영역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레진 로뱅의 이주문학은 체계나 시스템의 문학에 동화하기보다 동화의 거부이며, 집단의 정체성보다 개체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소수자를 옹호하는 ``유랑의``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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