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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영호남사림(嶺湖南士林)과 금남최부(錦南崔溥)
嶺湖南士林及錦南崔溥
최한선
UCI I410-ECN-0102-2012-810-002473084

崔溥(1454-1504)는 耽津人으로 자는 淵淵호는 錦南인데 進士澤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異質하여 剛毅精敏했다고 한다. 금남은 점필재의 문하로서 戊午士禍(1498) 시 그의 집안에 점필재집이 있다는 이유로 訊問을 받고 杖刑을 받은 뒤 端川에 유배되었다가 甲子士禍(1504) 때 處刑되었다. 금남은 호남인으로서 占畢齋의 학문을 직접 받아들여 이 고장 士林의 발흥에 크게 기여한 첫 번째 세대로 평가받고 있다. 그 당시 점필재와 어깨를 나란히 한 호남 선비로는 竹林曺秀文인데 그는 담양 竹林書院에서 배향되고 있거니와 그의 아들 雲穀曺浩는 점필재의 문하로서 汝忠, 汝諶등 문학으로 훌륭한 후손을 많이 배출했다.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로 이어지는 학맥은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金宏弼로 이어지는 학맥과 함께 호남 사림의 깊이와 폭을 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최부는 후생의 敎導에 미미不倦하였는데 해남의 邑을 밑아 있을 때 그 곳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文學이란 게 없고 禮儀또한 荒陋했는데 금남은 正論으로써 陋俗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이때 漁樵隱尹孝貞과 林遇利그리고 柳桂隣등을 부지런히 가르쳤는바 이들을 보고 온 고을 사람들이 翕然하여 마침내 文獻之邦이 되게 했다고 한다. 호남의 사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 말 할 수 있겠다. 먼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王朝交替期(1392)와 世祖의 王位簒奪事件(1455) 때 입향 또는 낙향해 온 세력과 다음으로는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로 이어지는 이른바 영남을 통하여 호남에 뿌리를 내린 계열을 들 수 있겠다. 호남 사림은 대체로 金宏弼, 崔溥, 宋欽, 樸祥, 李恒, 金安國계열 등으로 나누는데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樸祥을 제외한 모두가 金宗直淵源임을 알 수 있다. 宋欽도 김굉필을 私淑했으니 송흠을 연원한 박상도 어떤 면에서는 같은 뿌리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최부 계열은 주로 海南과 羅州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금남 학맥은 尹孝貞, 林遇利, 柳桂隣, 羅질, 尹衢, 尹巷, 尹行, 尹復, 柳成春, 柳希春, 李仲虎, 鄭介淸, 羅士침(錦南의 外孫子), 羅德明등 6 兄弟, 羅緯素(羅德埈의 子) 등으로 이어진다. 최부의 호남학맥은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1454-1504)로 이어지는 사림의 正脈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사림들은 韓國儒學史上 또는 韓國文學史上과 韓國義兵史등에서 뚜렷한 足跡을 남긴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문하들이 이룬 호남학에서의 문학적 성과는 浪漫的情緖라는 風流性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보였다는 데서, 곧 溪山風流를 표방한 부류와는 시 세계를 달리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의 史學, 文學, 經學등 학문적 영향은 해남과 나주를 중심으로 湖南學의 정립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특히 文學에서는 17세기 중반까지(羅緯素: 1582-1666) 약 2세기 동안 그 전통이 활발히 이어져 나왔고, 그 이후에도 羅景煥(性菴家藏), 鄭錫珍(蘭坡遺稿), 羅允煦(錦坡集), 羅燾圭등으로 20세기까지 계승되면서 근현대 문학으로 移行되었다.

崔溥(1454-1504) 字淵淵,號錦南,明朝朝鮮全羅道耽津(卽今韓國康津郡),進士澤的兒子。崔溥是占畢齋(金宗直)門下,不幸戊午士禍(1498)時因家裏被發現占畢齋文集,他受杖刑後流放到偏僻端川,然後甲子士禍(1504)時被處刑。錦南崔溥被評爲韓國湖南士林人脈的第一個世代。連接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的一些人的學脈근連接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金宏弼的學脈對韓國湖南士林的形成和發展起了흔大的影響。韓國湖南士林分爲兩大類。朝鮮王朝交替期(1392)和世祖的簒奪王位事件(1455)時入鄕或被露鄕的勢力。前者是光州出身錦城範氏範世東、羅州出身河東鄭氏鄭地、天安全氏全新民、在鄕下隱居的沃川趙氏趙瑜、光山金氏金子進、金麟厚祖先蔚山金氏金穩、光州卓氏卓光武等。後者世祖的찬奪王位事件時在鄕下隱居的是順天金氏的金宗瑞、流放到長興的晉州鄭氏鄭분、在靈巖隱居的南平文氏文孟和、在光山隱居的樸祥的父親忠州樸氏樸智興、在務安隱居的務安樸氏樸益卿、在長興隱居的忠州金氏金麟、在高興隱居的礪山宋氏宋侃、在淳昌隱居的高靈申氏申末舟、在羅州隱居的慶州李氏李碩、在海南隱居的原州李氏、在潭陽隱居的洪州宋氏、在鹹平隱居的陽城李氏、在靈巖隱居的鹹平魯氏魯宗周等。其次是嶺南系的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學脈。湖南士林分爲金宏弼、崔溥、宋欽、樸祥、李恒、金安國系, 細看湖南士林的分類分析, 除了樸祥以外都是其淵源在金宗直。崔溥系主要是在海南和羅州活動的人物。崔溥學脈是尹孝貞、林遇利、柳桂隣、羅질、尹衢、尹巷、尹行、尹復、柳成春、柳希春、李仲虎、鄭介淸、羅士침(錦南的外孫子)、羅德明等6兄弟、羅緯素(羅德埈的兒子)等人。住在海南蓮洞的尹孝貞是孤山尹善道的高祖父, 以근海南鄭氏家婚姻爲跳板復興名門貴族。尹孝貞的三個兒子橘亭尹衢、尹行、杏堂尹復是公認的詩書門弟。尹衢的兒子曆任左參贊, 他的兒子尹惟幾曆任江原道觀察使。他抱養了尹善道繼承下來了海南尹氏家的榮譽。孤山尹善道寫瞭『孤山遺稿』『漁父四時詞』40首等75首詩歌。孤山尹善道與長歌松江一同稱爲韓國文學界的皇帝。此外尹氏家在壬辰倭亂和丁酉再亂中培養出了許多的義兵將,在救國運動中立了大功。尹衢的女서履素齋李仲虎是在光州初次實行鄕約, 以鄕校爲中心振作了儒學。他曆任全羅監査和大提學,有四子汲、潑、潔、직。杏堂尹復曆任全羅道使、忠淸道觀察使,寫出了『杏堂先生遺稿』及許多漢詩。杏堂的甥姪楓菴文緯世在退溪門下學了「八陳圖」,硏究了性理學。壬辰倭亂和丁酉再亂中근5個兒子、奴僕、弟子一起擧行了義軍蜂起,特別是在自籌軍糧米中做出了흔大貢獻。.柳桂隣有兩個出衆的兒子懶齋柳成春和眉巖柳希春。柳成春同尹衢、崔山斗被稱誦爲湖南三傑,又曆任了吏曹銓郞,但因己卯士禍時被流放到邊疆幷夭折的緣故沒留下特別的業績。柳希春寫出了有名的『眉巖日記』。『眉巖日記』是從宣祖卽位年(1567)起十年時間裏的公私內容的日記,在當時曆史硏究上흔有硏究價値。他校訂『朱子大典』,編纂『國朝儒先錄』,寫出『眉巖集』,還刊行外祖父崔溥的『漂海錄』。流放到鏡城的羅德明在流配地遇到壬辰倭亂,在戰亂中討伐鞠景仁等的叛亂留以功績。也有文學方面的知識流傳『嘯浦遺稿』。他兒子羅緯素是短歌『江湖九歌』的作者。他的詩歌作品和孤山尹善道的『漁父四時詞』相提幷論,又被評爲江湖詩歌潮流的繼承。羅德憲從流配地被釋放後壬辰倭亂和李適之亂(1624)時立下了功勳,而且善於外交的他訪問了三次瀋陽,被國王稱爲忠烈諡號。林遇利是善山人,其父秀的四個兒子元、亨、利、貞中排老三。林亨有五個兒子千齡、萬齡、億齡、百齡、九齡都是賢達。林千齡被追贈領議政,寫出了『遯庵先生文集』。林九齡曆任光州牧使以善政被稱爲淸官的稱誦。林百齡被追贈右議政,乙巳士禍時受禍了。林億齡(號石川)是韓國湖南歌詞的詞宗,被退溪、栗穀、聽松、玉峰、高峰、河西、龜峰等盛贊叫大詩人。同霽峰高敬命、松江鄭澈、棲霞堂金成遠等一起有時以朋友交流,有時以師弟關系交遊,開展了不拘一格,又不失氣稟和格調的講學與詩的創作活動。從上述來看崔溥的湖南學脈是連接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1454-1504)的韓國士林正脈。從崔溥門下輩出的人在韓國儒學史上、韓國文學史上、韓國義兵史上都有흔多影響。他門下一些人的文學方面的成就因근以前浪漫情緖的不一樣,근標榜溪山風流的當時詩歌派的不一樣,有著更深的意義,他們創作了新詩歌世界。他的史學、文學、經學等學問的影響對以海南和羅州爲中心成立的湖南學有흔大貢獻。特別是在文學方面直到17世紀中期(羅緯素1582-1666)還活潑地流傳了下去。此後以羅景煥(性菴家藏)、鄭錫珍(蘭坡遺稿)、羅允煦(錦坡集)、羅燾圭等形式繼承到20世紀的文學,現在移行到了近現代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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