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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문학 장르 "생리학"의 유행과 발자크의 『프티부르주아』
La Vogue des "Physiologies" et Les Petits Bourgeois de Balzac
김인경 ( In Kyoung Kim )
불어불문학연구 88권 199-230(32pages)
UCI I410-ECN-0102-2012-860-002940175

``생리학(Physiologie)``이란 단어는 프랑스 문학의 장에서 19세기 전반기를 풍미했던 일종의 총칭적 제목이다. 특히 1840-1842년 동안 프랑스에서 대유행했던 시리즈출판물의 문고판(삽화) 책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문학 장르인 "생리학"은 문학사적 위상에서 하위문학에 속한다. 본 연구는 문학 장르인 "생리학"의 사회문화적 발생 배경과 그 특성들을 고찰하고, 이 "생리학"이 발자크의 『프티부르주아 Les Petits Bourgeois』의 구상과 집필, 중도포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회적, 출판사회학적 그리고 텍스트적 상관관계가 어떠했는지를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는 5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가장먼저 "1840년에서 1842년까지의 생리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소한 특징들 내에서 "사회적유형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함께 다양한 사회현상의 개요를 일별할 수 있게 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과학 분야의 생리학이 어떻게 대중적인 독자를 겨냥한 담론으로 확장되는지 그리고 마침내 문학계의 "생리학"으로 진화하는 지를 추적한다. 그런데 당대 출판계에서는 "생리학"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으로 발자크를 선전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문학계에서는 그렇게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세 번째 부분은 일종의 사회현상처럼 한참 유행이던 1840-1842의 "생리학"과 발자크의 "생리학" 관련 작품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1843년부터의 "생리학"의 급격한 쇠락이 목격되고 1843년 말경 발자크는『프티부르주아』가 총서『인간희극』에 반드시 필요하며, 그 작품은 너무나 거대하고 대중적으로 매우 크게 성공할 것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이 연구의 네 번째 부분은 생리학과 경쟁하는 문학작품으로서의 『프티부르주아』의 창조를 추적한다. 마지막 결론은 작가가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왜 "생리학적인 접근"의 텍스트표상에 그치게 되는지, 그리고 어째서 글쓰기를 중단하게 되는지에 관해서 "생리학"과의 사이에서 수립될 수 있는 상호적 관계를 밝힌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생리학이란 이름으로 장식된 풍속연구"(19세기 라루스백과대사전)를 공부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역사적 · 사회적인 상황 분석이 되고자 했던 "생리학" 장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출판의 사회역사적인 상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19세기 전반기로 문학의 장에 위치하게 된다. 19세기 초에 ``생리학``이란 단어는 문학 분야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의사와 자연학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과학용어였다. 1825년부터 점차 그 주제가 무엇이건 1830년경까지 무게 있고 과학적인 모든 연구에 적용하기 위해 ``생리학``이란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특히 문학에 있어 ``생리학`` 등장과 그 확대에 발자크가 선두는 아니라도 동참했으며, 그의 기여가 상당했다. 사실 샤바랭의 『미식의 생리학』, 발자크의『결혼의 생리학』등의 책의 성공에 뒤이어, 1830년의 주간지 『라 실루에트』의 『생리학적인 갤러리』라는 글들의 인기에 따라 차츰 이 단어는 그 사용에 있어 통속화되기 시작한다. 1840년부터 마치 현대 사회의 첫 번째 산업적 복제품과 같은 『***생리학』 시리즈물의 출간과 그 유행은 1842년까지 파리의 출판물시장을 뒤엎고, 1843년 시장에서 빠르게 사라지게 된다. "생리학" 출판물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의 생리학』으로 표시되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발한 제목들이다. 모든 제목은 다양한 카데고리 속에서의 인간유형들을 표현하였으며, 그 유형들 중 커다란 부분은 당대의 부르주아들 그리고 파리지엥들이 차지했다. 그런데 이러한 대유행과 몇몇 작가들의 성공에 비해 발자크의 "생리학"들은 독자로부터 외면당했다. 제목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발자크의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분석의 ``생리학`` 관련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쉽고 가볍게 소비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제목의 일치로 발자크를 "생리학"의 작가로 혼동하고 있다. 1843년 말경, 왜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발자크가 『파리의 부르주아』를 가지고 이러한 종류의 주변문학과 다른 거대한 작품과 경쟁하고자 했는지 추적 조사한다. 실제로 발자크에게 이 소설이 "모든 것을 시시하게 할 걸작 들 중의 하나"이고, 작가는 당시의 시리즈물 "생리학"의 성공과 그의 쇠락, 위젠느쉬 등의 연재문학의 성공 등의 모두를 시시하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19세기의 ``부루주아``, 특히 이미 19세기 전체의 사회인 『인간희극』의 보루가 될 것임을 확신한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기다리고 있는 형성 중에 있는 ``프티부르주아``를 소설로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이 작품에서 발자크가 기도했던 "부르주아(Le bourgeois)"를, 더 구체적으로 "프티부루주아"를 구축하고 소설 속의 사회를 구성하는데 점차 작가의 상상력이 따라주질 못한다. 마치 발자크가 글을 쓰던 당시의 실제의 세계가 그러했듯이, 프티부르주아들의 갤러리 즉 "생리학적인 접근"으로서의 "프티부루주아들"의 용모의 특징들로 제한되고, 발자크가 그리려고 했던 "프티부르주아"를 그려내는 데 실패하고 글쓰기의 진행은 중단된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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