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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현실공포증. 『현혹 』에 나타나는 페터 킨의 현실 이해와 공간과 시간
Wirklichkeitsphobie. Raum und Zeit im Wirklichkeitskonzept von Peter Kien in der Blendung
신현숙 ( Hyun Sook Shin )
독어독문학 124권 303-330(28pages)
UCI I410-ECN-0102-2014-700-001473801

1930년 엘리아스 카네티 (1905∼1994)가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현혹 』은 그의 첫 번째 소설이자 그의 작품들 중 유일한 소설로서 1931년 그 초고가 완성되었다. 『현혹 』의 주인공 페터 킨은 그의 기이한 외모와 극단적인 생각 그리고 독특한 언어로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인물로서, 심지어 그의 그로테스크한 정신세계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카네티의 이러한 극단적인 인물 창조는 그가 1920년대 후반 빈과 베를린을 배경으로 체험한 당시의 카오스적인 현실이 기저가 되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와해되어가는 또는 와해된 세계를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방법은 바로 극단적인 인물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가능하다는 카네티의 새로운 소설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문학 사상은 비단 『현혹 』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중심을 이루고 있다. 페터 킨을 통해서 나타나는 와해된 현실의 모습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세계를 거부하며 자신을 이 주변세계와 단절시켜 나가는 그의 병적인 정신세계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의 병적인 정신세계는 현실을 왜곡하고, 심지어 조작해 나가는 데서 그 절정을 이룬다. 주변 세계와 분리된 페터 킨만의 현실세계는 무엇보다도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때로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그만의 지각방식에 의해 탄생된다. 『현혹 』이 각각 “세계가 없는 머리”, “머리가 없는 세계”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세계”라는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라면, 1부인 “세계가 없는 머리”에서는 바로 킨 자신만의 (극단적인)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로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특유의 지각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본 논문이 1부만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페터 킨의 현실 왜곡과 조작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극단적인 지각방식은 우선 그가 살고 있는 도시를 비롯해서 집 그리고 이 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개인 도서관, 나아가서는 그의 육체라는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세계가 없는 머리”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킨은 자신의 주변 현실 및 주변 인물들과 격리되어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며 살아가는 학자이다. 집에 2만 5천권의 책으로 채워져 있는 개인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는 킨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떠올리게 하는, 세계의 원인과 본질을 인간 세상의 밖, 즉 오로지 학문과 정신에서만 찾는 인물이다. 책에 대한 그의 광적인 집착이 바로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책과 개인도서관에 대한 집착이 커져 가면 갈수록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한 킨의 반응 능력은 더욱더 잃어가게 된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는 예를 들면 그에게 있어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야말로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부딪히고 교류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의 공간이 아닌, 서점들에 진열되어 있는 ‘낯선 책들의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도서관의 연장이다. 생동적인 인간들과의 접촉과 교류는 킨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도서관과 정신적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그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방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현실 세계는 킨에게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집과 도서관은 이러한 불안과 공포에서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의 육체 또한 집과 도서관처럼 바깥세상과 경계를 이루는 장벽의 기능으로 쓰일 뿐이다. 현실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킨에게 본능적인 감정의 세계를 더욱더 억제하고 멀리하게 한다. 눈과 귀를 시작으로 육체의 모든 감각계의 기능을 억누르고 싶어 하는 킨의 극단적인 욕망은 현실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본능적인 세계, 육체적인 세계에 대한 거부는 그를 로봇과 같은 기계적인 삶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1분 1초도 틀리지 않게, 하루일과를 마치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게 엄수해나가는 킨에게 있어 질서는 현실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질서는 곧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질서의 혼란은 곧 킨 자신의 붕괴를 의미한다. 현실세계에 대한 공포는, 다른 한편으로, 킨으로 하여금 현재라는 시간을 철저히 부정하게 하고 과거와 미래를 동경하게 한다. 그에게 고통스러울 뿐인 감각적 세계가 현존하는 현재는 과거라는 시간적 공간 속에서는 이미 (잊혀진) 과거일 뿐이고, 이러한 과거는 미래의 세상에서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속에서 은신처를 찾으려는 킨의 비현실적인 정신세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 사제처럼 몸이 석상으로 되어가는 그의 연기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킨은 또한 시간에 대항할 수 있고 동시에 공간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로서 실명을 제시하기도 한다. 육체가 정신세계의 거처라고 한다면, 육체의 포기는 곧 영혼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킨에게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변인물인 가정부 테레제 크룸홀츠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킨은 육체적인 면이 완전히 상실된 탈인간적인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혼란과 무질서만을 안겨다주는 대상으로서 두려움과 공포만을 야기할 뿐이다. 지식과 책을 향한 소위 그의 사랑조차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음을 바로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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