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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과 활동에 관하여
A Study on the Pansori Learning and Activities of Kim Yeon-su
최동현 ( Choe Tong Hyon )
구비문학연구 37권 333-372(40pages)
UCI I410-ECN-0102-2018-700-003722850
* 발행 기관의 요청으로 이용이 불가한 자료입니다.

본고에서는 김연수의 학력, 판소리 학습과 판소리 활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 동안 김연수가 서울로 유학하여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연수의 친구였던 노희상의 증언을 찾아냄으로써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김연수가 한문 공부를 한 것은 맞으나 신식 교육을 받은 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14세(1920년)까지 9년 동안 한학을 공부한 다음 1935년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를 배우기까지의 15년 동안에 김연수는 무엇을 했을까? 1942년에 김연수가 만들어 발매한 <아우를 생각코>라는 노래의 가사에는 김연수가 유성준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전에 이미 소리를 배우고 있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또 이경엽은 유성준으로부터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을 받기 이전에 지방의 소리꾼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증언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김연수는 유성준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이전에 이미 지방의 소리꾼들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연수는 본격적인 판소리 학습을 시작한 이래 유성준, 송만갑, 정정렬에게 배웠다고 하였으나, 정응민으로부터도 많은 부분을 배웠다.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의 특징은 세세한 부분까지 판소리 전승형을 익히는 방식이 아니고 사설과 장단을 위주로 하여 대강의 뼈대를 익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것이 후에 김연수 판소리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김연수는 배운 대로만 소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소리나 신소설, 신재효 사설 등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새로 판소리를 짰다. 그래서 김연수의 판소리는 이전의 판소리와는 전혀 다른 판소리가 되었다. 정정렬 같은 사람은 이를 ‘자작’이라고 하였다. 김연수의 판소리 활동을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김연수의 해방 전 활동을 대표하는 것은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연수 자신은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직속의 <조선창극좌>의 대표를 맡았다고 했으나, 이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는 ‘조선의 일류명창 여섯 분’이라고 일컬어지는 등 판소리계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었다. 해방 전부터 김연수는 일부 창극에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총 76면에 이르는 음반을 발매했으며, 수차례 방송에도 출연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김연수국악단>, <우리국악단> 등의 창극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김연수국악단>의 창단 공연 작품인 <장화홍련전>에서 김연수는 배좌수 역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이어서 <단종과 사육신>도 큰 성공을 거두어 창극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김연수는 6.25 후 <우리국악단>을 창단하여 공연에 나섰으나 연이은 실패로 재기하지 못하고, 마침내 1956년 창극계 일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창극계에서 물러난 김연수는 대한국악원장, 국립극극단장(현 국립창극단장)을 맡아 창극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64년 최초로 판소리 부문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며, 74년 3월 9일에 별세하였다. 김연수는 생전에 판소리 사설집을 정리했는데, 『창본 춘향가』는 1967년에 『창본 심청가ㆍ흥보가ㆍ수궁가ㆍ적벽가』는 1974년에 출판되었다. 김연수의 판소리 일생을 한 마디로 한다면 ‘창극과 함께 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연수는 창극이 본궤도에 접어들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부터 창극에 관여하기 시작해서 해방 후 창극의 전성기에 가장 인기 있는 창극인이 되었으며, 창극과 함께 판소리가 흥행예술로서의 생명을 다하게 되자 창극단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다시 대한국악원장을 거쳐 초대 국립국극단장이 되어 창극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김연수의 최후를 지킨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김연수는 끝까지 창극을 놓지 않았으며, 자신이 새로 짠 연극적인 판소리의 전승에 온 힘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김연수의 업적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바디 판소리는 그 뛰어난 전달력으로 인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판소리의 양대 산맥 중의 하나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김연수의 판소리는 김연수의 선택과 지향이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The aims of this study are investigating the new facts of academic background, pansori learning and pansori activity of Kim Yeon-su.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belows. 1) Kim Yeon-su have never attended Jungdong Middle School. 2) Kim Yeon-su already had learned pansori from unknown country singer before he met Yu Seong-jun. 3) Kim Yeon-su learned much from Jeong Eung-min. 4) The characteristic of Kim Yeon-su's pansori learning is to learn the important structure instead of details. He created the details of his pansori. In that way, his pansori became unique. 5) Kim Yeon-su worked in Joseonseongakyeonguhoe(The Society of Korean Traditional Vocal Music). He made an appearance in some changgeuk(pansori theatre) works and issued 76 sp pieces of pansori before 8.15 Liberation from Japanese Occupation. 6) Kim Yeon-su organized pansori theatres such as Kim Yeon-su Kugakdan(Kim Yeon-su Pansori Theatre Company), Urigugakdan(Uri Pansori Theatre Company). He won a greate fame as the Baejwasu character in pansori theatre Janghwahongryeonjeon(The Story of Janghwa and Hongryeon). He was the first president of National Pansori Theatre Company of Korea. 7) Kim Yeon-su wrote his whole pansori literature in two books. 8) Kim Yeon-su was designated as an intangible cultural asset in 1964, at first time in Korea. He died in 1974. We can say that the lifetime of Kim Yeon-su is a life together with the changgeuk(pansori theatre).

1. 머리말
2.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
3. 김연수의 판소리 활동
4. 맺음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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