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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핵심 키워드

중국의 지역별 전통적 생산성과 환경조정생산성의 비교

박혜란 ( Hae Ran Park ) , 강상목 ( Sang Mok K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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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중국의 28개 성과 자치주를 대상으로 성장회계분석에 기초하여 전통적 생산성 성장과 환경조정생산성 성장을 비교함으로써 각 지역의 생산성에 미치는 환경요소의 효과와 경제성장의 주된 요소를 실증적으로 계측하고자 함이다. 추가적으로 환경조정 생산성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서 중국 지역별 SOx의 잠재가격을 측정할 것이다. 1997년~2005년 동안 중국은 장기적으로 10.06%인 고도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지역별로 동부의 성장이 가장 빠르고 중부의 성장률이 가장 낮다. 전통적 총요소생산성은 평균적으로 3.56%로 나타났고 지역별로 동부가 가장 높았다. 환경조정된 생산성 증가율은 평균적으로 3.57%로서 전통적 생산성 증가율과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이는 세지역에서 오염저감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중국 정부에서는 환경규제를 부단히 강화시키거나 제정된 환경규제를 엄격히 집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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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65년에 있었던 `한일 기본협정` 체결을 전후로 한 한일수교 과정에 대한 중국의 공식, 비공식적인 인식과 시각을 살펴보고 있다. 이를 통해서 당시 중국이 어떤 시각으로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왜 그러한 시각을 갖게 되었는지 그 맥락을 살펴보려는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 관방(정부 성명서, 고위 관료의 인터뷰 자료 등) 자료와 연구자의 2차 자료를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한일수교 시기를 중심으로 중국의 인식과 반응을 재구성하여 그 맥락과 인식의 흐름을 검토하고 있다. 중국은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한일 기본조약`을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따른 국제 환경의 산물로 인식하고 있다. 당시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으로 인한 불안감을 폭넓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한일 회담이 가져오는 경제적인 파급효과 등 긍정적이고 미시적인 변화에 천착하기 보다는 진영 논리에 입각한 체제 안보라는 최우선 가치로 한일수교 과정을 바라보았다.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 발전에서 노출한 많은 산적한 `내부`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은 당위론 차원에서는 한일수교의 `불합리성`과 `침략성`을 인지했지만 제대로 대응 전략을 펼치지 못했다. 여기에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경제적 요인이 있었다. 따라서 한일수교가 동북아에 격랑을 몰고 오는 핫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두 트랙 접근을 통해서 북한을 달래고 일본과 손을 잡는 이중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맹`도 `국가 이익`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일수교를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시아정신(亞洲精神)』과 현대 중국 문화 건설

판윙충 ( Fan Wing Chung )
중국사학회|중국사연구  80권 0호, 2012 pp. 203-250 (총 48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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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중국 사상계에서의 문화논쟁은 이미 90년이 지나갔다. 이들 문화논쟁은 당시 중국 지식인 계급의 서방 문명이 중국 전통문화에 오랫동안 충격을 준 것의 반영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동서 문화의 본질에 대하여 토론하고, 서로 다른 문화 체계 간의 차이점과 우열을 비교함과 동시에 미래 중국 문화의 정확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던바, 궁극적으로는 귀중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남겨 주었다. 이 논문은 1910년대 신문화운동기 전반서화론자들로부터 촉발된 동서문화우열론을 내용과 전개 양상을 집중 검토하였다. 특히 양계초(梁啓超)와 양수명(梁漱溟)의 동서문화론, 과학과 현학 논쟁, 타고르의 중국 방문과 그 반향, 중국과 인도 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및 아시아적가치 등을 설명하고, 각 시기의 문화대안론을 거쳐 전반서화론에 대한최종적 대안으로서 손문의 ‘왕도문화(王道文化)’를 제시하였다.

중국사 연구에서 엥겔스의 민족관습법 이론 응용

이위쥔
중국사학회|중국사연구  93권 0호, 2014 pp. 31-47 (총 17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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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관습법은 각 민족이 오랜 생산활동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형성된 해당 민족의 관습법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럽 민족관습법의 역사와 특징을 분석하여, 피통치민족의 관습법이 장구하게 보류될 수 있거나 철저하게 소멸되는 것은 생산방식과 민족 조직방식이 훼손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엥겔스가 말한대로 ‘법’의 기초는 ‘의지’가 아니라 사회물질생활이며, 곧 “상호제약적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이다. 민족관습법 방면의 엥겔스의 이론적 성과는 중국 역사연구에도 중요한 교훈적 의의를 지닌다. 1. 엥겔스가 논한 유럽 역사상의 민족관습법엥겔스는 자신의 저작『고대법』과『독일이데올로기』에서 법”의 기초는 어느 사회집단(일련의 개인은 더더욱 아니다)의 “의지”이며, 그것은 사회물질생활, “상호제약적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때문에 민족관습법을 생산하는 물질생활 기초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 민족관습법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민족관습법의 완강한 생명력에 대하여, 엥겔스는『게르만인의 고대역사』에서 상세하게 분석했다. 먼저 그는 고대 게르만인들의 민족관습법이 로마법과 만나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완강하게 천년 이상 보류된 사실을 서술했다. 충돌의 근원은, 한편으로는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인의 재산분배제도가 저촉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인들의 관습법의 법률 절차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게르만의 실제 통치자 바루스는 로마총독의 최고사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무력으로도 게르만인들이 자신들의 생산조직 형식과 맞지 않는 로마법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없었다. 민족관습법은 민족조직 형식과 생산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약 그 원래의 촌락조직, 혹 민족(혹은 씨족) 조직이 보존되어있기만 하면 민족관습법은 정복자의 법률과 맞서며 장기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새로운 통치자가 폭력을 동원해 당지 주민의 생산.생활조직형식(가령 씨족)을 파괴하고, 아울러 무기와 입법 수단에 의지해 새로운 법률을 추진할 때 민족관습법은 비로서 잔재만 남거나, 혹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2. 중국 역사상 민족관습법이 제정법과 조우한 후의 귀결점엥겔스의 민족관습법 이론은 중국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지도적(指導的) 의의가 있고, 동시에 중국 역사는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엥겔스가 유럽의 역사를 논술할 때 “민족관습법”은 모두 피정복민족에게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정복민족의 법률(가령 로마법)은 그것에 상응하여 국가제정법이 되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누가 통치 지위에 있든지 간에, 중원왕조의 법률은 언제나 국가제정법으로 표현되고, 소수민족의 법률은 그에 따라 민족관습법이 되었다. 이런 인식의 기초 위에서, 후자를 다시 설명하겠다. 유럽 민족관습법의 최후의 귀결은, 혹자는 장구하게 보류되고, 혹자는 부분적으로 남거나 심지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의 민족관습법은 거의 대부분 하나의 상황으로 귀결되었는데, 곧 우선은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연후에 최종적으로 제정법 속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요· 금 왕조가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요. 금 정권 초기에 소수민족 관습법과 중원왕조 법률은 언제나 처음에는 병존하다가 후에는 차츰 융합되는 추세를 보였다. 첫째, 건국 초기에 요와 금은 모두 한인 거주 지역에는 단독으로 한법을 실행하였는데, 곧 소위 ‘民族分治’이다. 요 태조는 건국 초부터 거란관습법의 성문법으로의 轉化를 촉진하였다(定制契丹及諸夷之法, 漢人則斷以律令)”. 요 태종 때에는“國制로 거란인을 다스리고 漢制로 한인을 다스리라”고 규정하였다. 사법 심리 방면에서는 南北二院의 분치정책을 실행하였다. 금 태조는 건국 초기, 법제상에서 주로 여진관습법을 채용하였다. 천보(天輔)2년 금 태조는 “國書와 詔令은 마땅히 屬文에 능한 자를 뽑아서 맡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여 마치 성문법 제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듯하다. 제3대 황제인 희종은 천권(天眷)3년(1140) 하남 등지를 공격하여 취한 후, 당지에 “형법은 모두 율문(즉 중원의 한법)을 따른다(“刑法皆從律文”)”고 선포하고, 이후 여진관습법을 강제하지 않았다. 둘째, 중원 한법은 농경문명에 적용되었기에 유목과 수렵 등의 생산방식에 기반한 거란과 여진 민족관습법보다 선진적이었다. 때문에 요와 금의 통치자들은 모두 주동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한법을 흡수하였다. 요대 건국 초기의 정책은 民族分治였고, 태종시대부터 차츰 漢制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는데, 가령 “발해인은 한법에 의거해 통치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거란인으로서 漢官을 받은 자는 漢儀를 따르고. 한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 제6대 황제 성종 즉위 이후, 전문적으로 율령(당시의 율령이라는 것은 당, 송의 율령을 가리킨다)을 번역하게 하여 요대 법률의 한화 과정이 시작되었고, “거란인과 한인이 서로 때려 죽음에 이르면, 그 법의 [적용]輕重은 균등하지 않다”와 같은 법은 폐지되었다. 제8대 황제 시기에는『重熙條制』를 修訂하도록 명을 내려, 중원 한법 율문인『咸雍重修條制』를 많이 흡수하고 실제로 이것을 적용하였다. 금조는 皇統 연간에 “본조의 舊制로써 수당의 제도를 겸하고 요송의 법을 참조하여 성문법전인『皇統制』를 편찬하였다. 이후『續降制書』.『大定重修制條』.『泰和律義』이 편찬되었다. 원대인 脫脫은『泰和律義』가 “실은 당율이다”라고 여겼다. 이때부터, 금조의 법제는 형식에서 내용가지 전면적인 漢化를 실현하였다. 요금의 민족관습법이 제정법을 만난 이후 병존하다가 이후 융합된 것을 설명하는 사료는 매우 많지만 여기서는 상세하게 논하지 않겠다. 3. 엥겔스의 이론으로 중국 역사를 연구할 때 나타나는 특징중국 역사상 중원에 입거하게 된 소수민족 관습법의 귀결은 대부분 “因俗而治”의 법제 방침 아래에서 우선은 중원왕조의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후자에 융합되어 갔다. 이는 비록 유럽의 상황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엥겔스가 밝혀낸 역사 규율에 부합된다. 왜냐하면 중원에 진입한 소수민족은 모두 농경문명을 받아들여 신속하게 봉건화 되고, 생산과 생활조직 형식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관습법의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因俗而治”는 중국 봉건왕조의 일관된 정책이고, 심지어 중화문화의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禮記. 王制』에서 “中國 戎夷五方의 백성은 모두 본성이 있어서 [강제로 바꾸도록] 推移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때문에 강역 내의 다양한 민족의 상황에 근거해 자신들의 풍속을 따르도록 하고 다양한 정치제도를 실행하였다. 秦昭王 시기 “巴郡랑中夷人” 과 맹약을 맺을 때, “秦이 夷를 범하면 黃龍 한쌍을 보내고, 夷가 秦을 범하면 淸酒 一鍾을 보낸다”고 했다. 한제국은 군현이 설치된 소수민족 지역에 “천자의 법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당지의 舊俗으로 통치했다. 수당왕조도 소수민족에 대하여 “추장을 나누어 설치하고 각각 그 부락을 통치하도록 한다”, “자신들의 풍속으로 다르스게 한다”는 민족정책을 취하였다. 요대의 南北面官制度, 서하와 금대에는 藩漢 官制가 있었다. 원.명.청 시기에는 이 방면에서 더욱 제도화. 법규화가 진행되었다. 역대 봉건왕조의 법치정책이 일맥상통하게 중화문화의 兼容하고 품는 특징과 개방적인 기개를 체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상에서 “大一統”의 전제 하에서 법률형식도 매우 다양했다. 중국 역사상의 국가제정법과 민족관습법이 병존하다가 융합되는 특징은 중화민족 다민족통일 융합이라는 필연적 역사 추세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유럽 내부에서는 많은 안정적 민족공동체가 있지만 통일되는 추세는 없다. 그런데 중국다민족통일 융합에는 필연성이 있다. 첫째는 지리환경적 원인, 둘째는 생산방식적 원인, 셋째는 중원문화의 개방적 성격이다. 요컨대, 엥겔스가 밝혀낸 민족관습법은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방식이 보류되는 기초 위에서 보류될 수 있는 역사규율은 중국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중원농경문명의 선진성 및 중원문화의 개방적 특징은 소수민족이 중원지역에 진입한 뒤에 대부분 주동적으로 중원문명을 받아들이고, 통치 지위에 있든 없든, 그들의 민족관습법은 항상 중원왕조의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융합되었다”. 이는 중국다민족통일과 융합의 필연적 역사추세와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중국법 체계하에서 탄소배출권의 법적 성질에 관한 소고

배덕현
중국지역학회|중국지역연구  2권 1호, 2015 pp. 97-130 (총 34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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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으로서 이산화탄소 등 대기오염 물질의 급속한 배출 증가와 이로 인한 환경오염은 중국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중국 정부도 이러한 대기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정책 조치의 일환으로 탄소 배출권 거래제를 시범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기존에 존재하던 제도가 아닌 환경보호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인류가 새로이 발명해낸 제도라는 점에서 탄소배출권의 법적성질이나 탄소배출권 거래를 규율해야 할 법원리 등이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중국 학계에서도 중국법 체계하에서 탄소배출권의 법적성질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학설들을 살펴보면 중국어l서는 탄소배출권의 권리성을 안정하는 것을 전제로 크게 사권(私權)으로 보는 견해와 공권(公權)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고 있으며, 사권으로 보는 견해는 다시 민법상의 재산권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민법 이외의 재산권으로 이해하는 견해로 구분된다. 우선 탄소배출권을 민법상의 재산권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다시 물권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준물권으로 이해하는 견해로 구분되는데, 두 견해 모두 인간의 생존을 유지하고 자연의 훼손을 야기시키지 않는 전제하에서 자연이 수용할 수 있는 오염물 총랑을 의미하는 ``환경용량``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용량이라는 개념 자제가 물권의 객체인 ``물건``으로써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견해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견해들은 국가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고, 이에 대한 사용권을 개인이나 기업에게 분배하는 중국 특유의 사용권 모델을 탄소배출권 거래에 차용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지만 설사 환경용량의 개념을 인정 한다 하더라도 환경용량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탄소배출권을 물권 내지 준물권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수 있다. 다음으로 ``환겸용량``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탄소배출권을 공권의 일종인 환경권으로 이해하는 견해 역시 물권 내지 준물권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대한 의문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마지막으로 민법 이외의 재산권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탄소배출권에 재산권성을 과도하게 인정할 정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탄소배출권의 도입목적인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중국법 체계하에서 탄소배출권은 본질적으로는 공권이지만 온실기스 감축목표 달성을 위해 예외적으로 법률이 그 처분성을 허용한 젓으로 이해하는것이 타당하며, 이후 탄소배출권 거래제도 구축에 있어서도 이러한 관점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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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서구 학계에서 유입된 복지를 기본 인권으로 규정하는 인식론과 시각이 중국 학계의 사회보장 연구와 담론 형성 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중점을 두고 고찰하였다. 그 주요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는데, 한편으로는 복지에 대해 중국에 없던 새로운 사유방식과 개념이 소개되고 관련 논의의 증가가 이루어짐으로 써 중국 사회보장 연구의 폭이 확장되고 지적 팽창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이론과 시각으로 중국의 사회보장 문제를 논 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과 반발 작용을 일으켜 인권이라는 보편성보다는 중국의 역사 문화적 맥락과 정치 경제적 현실을 보다 중요시하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특수성이 반영된 이른바 중국 특색의 사회보장론이 더 활성화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중 국 학계에서 지식의 개방 이후 특히 서구의 지식과 이론에 대해 수용과 방어의 태도가 공존하면서 결국 ``중국 특색론``이 강화되는 현상은 비단 사회보장 연구 영역에서 뿐 아니라 중국의 많은 다른 학문 영역에서도 유사 하게 발견되고 있다

조선 연행사(燕行使)가 본청대(淸代) 중국 동북지구 형상

왕광의 , 리기기
중국사학회|중국사연구  75권 0호, 2011 pp. 265-271 (총 7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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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행록 문헌에는 중국 동북지구에 관한 많은 견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중국 동북 지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사 문헌이다. 연행사가 청대 중국 동북 지구에 대해 묘사 서술한 것은 이 시기 동북 사회의 역사 변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중국 동북사의 "회통"과 국제화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전통 중국인 핵심 가치관의 함의 -曲阜碑刻文獻의 시각에서

노칙권
중국사학회|중국사연구  93권 0호, 2014 pp. 13-29 (총 17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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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阜는 孔子의 고향으로서 여러 역대 帝王·賢臣·名士들이 존숭·배알하였으며, 아울러 수많은 碑刻을 남겨놓았다. 그 역사적 폭은 前漢에서 民國 시기에 이르며, 내용도 배알한 공적을 기록하거나 崇學 등을 서사하였다. 이러한 碑文은 전통 중국인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기록하였으며, 초월적 가치의 정신 신앙을 지니고 있다. 역사의식의 관점에서 이러한 碑文을 고찰해 보면, 우리는 “天人合一”이 전통 中國人 歷史理論의 출발점으로, 그 핵심 가치관의 초석임을 발견할 수 있다. 孔子는 天命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는 일찍이 “死生有命,富貴在天”·“獲罪於天,無所禱也”·“畏天命” 등을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天命”은 알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고, 이 때문에 “五十而知天命”이라고 말했는데, “知天命”의 주체는 분명 인간 그 자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以德配天” 사상을 한걸음 더 발전시켜 人事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아아! 舜이여! 하늘의 차례(曆數)가 그대 몸에 있도다. 진실로 그 中을 잡아라. 사해가 곤궁하면 천록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舜이 “진실로 그 中을 잡도록(允執其中)” 人事에 최선을 다해야 天命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처럼 天命의 신비적 색채는 점차 약화되었다. 孔子는 君子가 부단히 “修己”하여야만 “知命”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우고 위에 다다른다. 나를 알아주는 것은 저 하늘뿐이구나!”라고 하여, 인간 자신이 “德”을 수양하는 데서 “命”을 알고 실현할 수 있다는 사상을 말해 후세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또한 “天人合一”의 신앙 아래에서만 曲阜碑文 가운데 자주 보이는 “稽古”라는 말의 함의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 “稽古”는 결코 “복古”와 같지 않은데, 이러한 碑文의 대부분은 孔子와 관련되어 있어서 孔子에게 제사할 때 전통 중국인은 쉽사리 孔子의 古今觀과 서로 연관시켰다. 孔子의 古今觀은 복古가 아니다. 우리는 孔子가 말한 “周는 두 시대(夏와 商)를 본받아 찬란하구나, 그 문화(文)여! 나는 周를 르겠다.”라는 문구 속에서 복古의 함의를 읽어내기 매우 어렵다. 이 문구는 단지 공자가 春秋末期라는 시점에 서서, “文”의 기준을 “夏·商·周” 3代 중에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周를 따르겠다.”는 말이 孔子가 “복古”를 주장한 증거로 될 수 없다. “稽古”는 孔子가 3代 및 그 이전의 문화 전통에 대한 계승을 중시했음을 증명할 뿐이다. 孔子는 한편으론 전통을 중시했지만, “시기에 따른 제도의 확립”에도 중점을 두었다. 孔子가 부모를 위해 분묘를 쓸 때 이러한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修德”은 “天”“人”관계를 잇는 연결 고리로,전통 중국인이 가진 핵심가치관의 본질이다. “德”은 중화민족의 일관된 정신 추구이다. “德”字의 출현은 매우 일러서, 어떤 학자들은 商代 시기에 이미 출현했다고 본다. 예컨대 徐中舒 編著의 『甲骨文字典』·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著의『甲骨文編』에는 모두 “德”字를 수록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 “德”관념이 반드시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즉 周武王이 商을 격파하면서 周나라 사람들은 “天命無常”을 깊이 느꼈고, 德사상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周代의 “德”문화는 윤리학과 도덕철학의 범주를 초보적으로 확립하였던 것이다. 春秋戰國 시기가 되면,儒家는 德의 함의를 道德修養 쪽으로 한층 발전시켜, 德으로써 修身할 것을 더욱 강조하였다. 孔子는 처음으로 德과 인간 자신 수양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이후 儒學은 孔子의 德論思想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결국,德은 중국 고대 철학의 중요한 범주로서 중화민족의 정신적 지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曲阜碑刻文獻 가운데 “內在修德”에 대한 중시는 역대 중국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孔子의 德性에 대한 推重과 德性 교육에 대한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 修德은 실천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뿐만 아니라 孔子의 후손과 儒家를 기준으로 한 많은 관리들이 그 德性에 관한 공훈 및 업적 덕분에, 다른 사람에 의해 碑가 세워지고 칭송받았다. 德性文化는 무엇에 근거해 전통 중국인들에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바꾸어 말해 핵심 가치관의 동력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바로 儒家에서 강조하는 “道統”傳承이다. 碑文을 보면, 儒家 道統 의식의 기원은 매우 이르다. 漢代의 『建寧二年史晨前後碑』중에는 이미 이러한 의식이 있다. 魏晉 時期『黃初年間魯孔子廟之碑』에는 魏文帝가 議郞 공선(孔羨)을 책봉해 魯縣의 百戶 宗聖侯로 삼는 일을 기재하였는데, 이는 초기의 道統 傳承이 혈통에 기반을 두고 실현된 것임을 보여준다. 역대 왕조는 공자의 후손을 봉하였는데 이는 일견 문화전통에 대한 국가의 중시를 보여주기 위함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공자의 후손들이 공자의 혈통과 道統을 널리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공자 사상을 실천하는 하나의 모범을 수립하길 희망한 점이다. 唐朝 시기에는 후세의 道統觀이 점차 명확하게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宋代에는『太平興國八年重修연州文宣王廟碑銘』에서 道統과 正統의 변론이 그 당시 주목받는 命題였음을 반영해냈다.『康熙二十五年闕裏至聖先師孔子廟碑』에는 康熙 23년 孔子廟를 배알한 일을 기재하여,康熙가 “政統”·“道統”의 합일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孔子시기를 원점으로 하여 우리는 그 전 시기에 堯·舜·禹·湯·文·武·周公을 되돌아 볼 수 있었고, 그 후 시기에 孟子·董仲舒·朱熹과 王陽明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역사에서 역사로 나아가는 道統은 (시간을) 초월하여 변치 않는 특색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소위 “濟古維來”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儒家 학설의 대표성과 전승은 중화민족이 점차 형성한 공통의 사상문화 체계로 孔·孟의 이론에 그치지 않으며, 단순히 그들로 대표되는 儒學 일파만의 사상도 아니다. 요컨대 전통 중국인의 핵심 가치관은 이러한 역사적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즉 전통 중국인이 “天一合一”을 숭상하고, “內在修德”에 집중하며, “道統傳承”을 존중한 것은 유구한 중화민족에 대한 정신적 지표로서 전통 중국인의 문화 혈통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이러한 사상 관념은 우리에게 여전히 적극 귀감이 되는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중국 해양경제 발전전략 연구 -저장성을 중심으로-

최준환
중국지역학회|중국지역연구  2권 1호, 2015 pp. 23-46 (총 24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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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1개의 성·시가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어l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해양자원이 풍부하다. 이에 중국은 해양경제를 국가의 기간산업이며 미래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중국의 해양경제와 해양산업에 대하여 분석한 후, 중국 해양경제 발전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저장성의 해양경제 발전 전략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저장성 정부의 향후 해양경제 발전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정학적 위치와 자연 환경을 이용하여 경제의 글로벌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새로운 물동량을 창출하며 새로운 운송망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추진할 것이다.둘째, 중앙정부와 저장성 정부의 재정지원을 이용하여 신재생에너지 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다. 셋째, 지속적인 금융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금융상품 개발과 금융 보험 둥을 통하여 해양경제 건설에 필요한 자금 수요를 충족시켜 나갈 것이다. 넷째, 해양관련 교육을 통한 전문기를 양성하고 해양과학기술에 대한 R&D투자를 확대할 것이다. 다섯째, 글로벌 환경규제를 고려하여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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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吉林省東部邊疆和通過圖們江進入東海的問題發生了許多歷史性變化. 1858年“?琿條約”和1860年“北京條約”之後,淸朝失去了烏蘇里江以東的領土. 但是, 中國的船隻能勾通過圖們江進入東海. 然而, 由於淸朝使臣的無能和俄羅斯對東部吉林省的入侵,淸朝船隻無法通過圖們江進入東海. 但是, 1886年淸朝使臣吳大澄通過與俄羅斯的邊境談判恢復了俄羅斯入侵的東部吉林省領土. 日本占領滿洲之後,因爲與蘇聯的領土爭端, 1938年日本造成了張鼓峰事件,但被蘇聯擊敗. 這一事件導致日本封鎖圖們江口而阻止中國船隻穿越圖們江進入東海. 蘇聯也加强了對圖們江地區的控制. 結果, 中國失去了通過圖們江出海的權利. 自中華人民共和國成立以來,中國爲了恢復這一權利持續地努力. 但是, 因爲與中蘇理念爭端, 中韓邦交之後中朝關係惡化, 這個出海問題幷沒有解決. 最近中國正在通過借用朝鮮和俄羅斯的港口來實現出海戰略, 以提高其政治, 經濟和軍事地位. 我們必須針對這些中國推廣戰略制定各種措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