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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Hanmun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8-128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7권 0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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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aims at reconsidering the problems existing in the cultural exchange in Eastern Asia. especially between Korea, Japan and China which might have exerted influences upon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Korean classical literature in Hanmun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literary men of late 15th century in Chosun. The major problem is about Sino-Barbarian doctrine shown politically or culturally from the three countries. Some literary men of the time did not regard ``sino`` and ``barbarian`` native, fixed or immutable, believing that they can always be reversed. The spirit considering literary superiority and morality as the true standpoint of the doctrine was deeply steeped in most Korean classical literature, Another one is about direction of reception between the countries: it was general view that literature and learning were transferred from China to Chosun and then from Chosun to Japan. The men of letters, however, looked upon the reception as mutual, not one-sided, and expected Chosun envoys leaving for Ming China to transmit their own culture in order to be of service to China, and learn Chinese resources in the interests of Chosun when returning. In that there were active and frequent mutual exchanges between Eastern countries from the 17th century on, the literary histories of the three countries appear to be thoroughly revie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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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l7세기초 조산문인의 시문집이 명문단에서 활발히 소개·간행된 사례들을 둘러싸고, 그러한 문화활동이 가능했던 배경에 대해 외적 요건과 내적 요건으로 양분 하여 고찰한 것이다. 특히, 기존의 연구가 양국 간의 교류에 대해 조선문단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반대로, 명문단에서 왜 조선문인의 시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주목하였다. 당시 명문단에 조선시문이 소개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전란으로 인한 교류의 확대라는 외부적 조건과 조선한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던 내부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임란 시기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은 명으로 돌아가 조선관련 서적과 조선한시선집을 편찬하였다.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신 교류를 통해 중국문인들이 조선문인의 시문집에 서문을 써주거나, 그들의 개인시선집올 중국에서 간행해주는 일도 나타났다. 이러한 외적 요건을 통해 명나라 문단에 조선의 한시가 소개될 수 있었다. 당시 명문인이 조선의 한시를 수집하게 된 내부적 요인으로는, 箕子가 전한 중화문명이 조선에 전해왔다는 자부심과, 주나라 관리들이 민간의 시를 수집하였던 ``采詩``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점을 꼽을 수 있다. 또한 명나라 문인들이 높이 평가한 조선한시의 성격으로 『시경』 의 『국풍』 에서 강조되었던, ``天然`` 의 성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한시의 성격을 명문인이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은, 당시 명대문단에서 문학 流派를 막론하고 ``眞詩``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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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아시아 문화교류란 측면에서 연행록에 담긴 환술기록의 흐름을 점검하고, 18세기 이후 변화된 환술가록의 형성배경과 특성을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조선사회는 환술이란 연회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연행록에는 환술을 견문한 기록들이 다수 발견된다. 일부 연행록들은 중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상세하게 환술공연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l8세기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환술공연 기록은 이전까지 한 두 문장 정도의 소감피력에 그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18세기 이후 연행록중 金昌業의 『燕行日記』,李宜顯의 『庚子燕行雜識』, 姜浩溥의 『桑蓬錄』 ,洪大容의 『燕記』(「올병연행록」), 李押의 『燕行記事』, 朴趾源의 『熱河日記』, 徐有聞의 『무오연행록』, 李海應의 『前山紀程』,權復仁의 『隨椎閒筆』, 朴思浩의 『心田稿』, 金景善의 『燕轅直指』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18세기 이후 연행록의 환술기록들은 양적 증대 못지않게 질적 수준의 제고가 이루어 지고 있다. 환술기록의 형성배경에는 단순한 기록자의 관찰능력을 넘어서는 일정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환술가록의 질적 수준 향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간접경험의 경로로서 환술 관련 서적의 閱讀, 우리 야담필기류에 수용된 환술 관련 정보의 존재, 그리고 연행록에 수록된 환술기록의 축적을 들 수 있다. 18세기 이후 특히 주목되는 환술기록으론 홍대용의『幻術』, 박지원의『幻戱記』김경선의『幻術記』를 들 수 있다. 홍대용의『환술』은 최초로 환술을 독립된 주제로 다루고, 공연의 원리에 대한 본격적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박지원의 『환회기』는 양과 질 모두에서 수준을 획기적으로 제고시킨 최고의 환술기록으로,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하나의 논의로서 완정한 체계를 구축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또 기록 방식에 있어서도 구성의 변화와 내용의 윤색을 통해 기록목적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김경선의 『환술기』는 기록완비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견문한 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전대 환술기록, 특히 홍대용과 박지원의 환술기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환술기』 는 역대 환술기록의 집대성을 통해 우리가 견문한 환술의 역사(``幻史``)를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여행기록온 여행자가 여행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중심적인 소재 선택이 행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 선택에는 대부분 여행자의 관심과 취향이 큰 역할을 한다고 보인다. 18세기 이후 연행록에 나타난 환술기록의 변화도 그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전까지 극단적 부정과 의도적 외면의 대상이었던 환술 이 가치 있는 경험대상으로서 자리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록자인 연행록 작가들의 관심과 취향에 변화가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18세기 이후 연행록에 나타난 환술기록의 변화는 한문산문의 관심주제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은 만큼 양자의 관련성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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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8,l9세기 조선의 역관들이 동아시아의 지식과 정보를 매개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특히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역관의 역할 중, 주로 지식, 정보와 관련한 그들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역관의 존재 양상을 1) 지식·정보의 전달자, 2) 지식·정보의 중개자, 3) 지식·정보의 생성자, 4) 지식·정보의 발신자 등 네 측면을 논하였다, 1) 에서는 친지 등에게 부탁받은 서적을 통해 지식을 단순 전달함으로써 지식의 생성과 유통에 간접 기여하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2) 에서는 스스로 새로운 서적을 사서 지식·정보를 획득하여 국내에 유통시키는 측면을 고찰 하였으며, 3) 에서는 역관들이 지식, 정보를 국내에 유통시키는 것을 넘어 새로운 지식, 정보를 체득한 것을 토대로 스스로 지식·정보를 유통시켜 새로운 지식·정보를 생성하는 주체가 되는 경우를 살폈다. 4) 에서는 역관들이 스스로 지식·정보의 발신자가 되어 체험한 견문 지식과 정보를 서울 학계에 끊임없이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더러 서울과 연경의 學藝界를 향해 지식·정보를 발신하는 경우를 검토하였다. 이는 여항문학의 성과를 사대부 문학과의 거리를 언급한 것에 대한 재조명이다. 18·19세기 문학과 문화에 끼친 역관의 역할과 영항은 그들이 남긴 문학 작품과 그 성과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 문학 작풍을 포함하여 문화적 역할과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한 것 등, 제반 사항을 두루 살펴 논해야 그 실상에 다가갈 수 있다. 새로운 지식·정보의 국내 유입과 생성, 그리고 유통에 기여한 점과, 역관이 이국에서 체험한 견문지식 등이 당대 사회에 던진 파장을 두루 고찰해야 한다. 역관들은 실제 견문지식과 체험, 그리고 이국의 창을 통해 시각을 국내에 두지 않고 항상 시대조류와 호흡하고 세계사의 방향에 민감하게 인지하였다. 사대부 지식인들이 구축한 지식체계 속에 가두어 두고 역관의 문학과 문화 활동을 평가하는 구도를 전환시켜, 일국을 넘어 밖의 시각을 끌어 들여 역관이 남긴 자취와 역할을 평가할 때, 이전과 사뭇 다른 의미가 주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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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封淸 의식과 他 문물 수용 논리를, 팔자의 안목에 의거해 ``문화 수용``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접근해 본 것이다,華夷觀, 北伐, 北學 담론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먼저는 타문화 접촉의 핵심 공간이었던 북경의 유리창에 대해 살펴보고, 조청 간의 좋은 교류 여건에도 불구하고 교류를 가로막았던 요인을 생각해 보았다. 문화 교류를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북벌과 對明義理였고 그 이론적 기반은 화이론이었다. 북벌의 완고한 이념과 조선만이 中華라는 인식은 배타적 우월주의를 낳았고 정당한 문화 교류를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강대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을 살펴보았다. 특히 北學派인 홍대용, 박지원에 이르면 생활양식을 도덕 윤리로부터 분리하는 진정한 문화 의식이 이루어졌으며 지역, 민족, 문화의 상대성까지 이르렀다. 이를 토대로 小中華 의식과 朝鮮中華主義, 북벌과 북학의 인식 거리에 대해 살펴보았다. 북학파의 문화 수용 태도에는 먼저 자신을 반성하는 태도와 더불어 他者를 존중하고 타자와 相生하려는 의식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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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제11차 계미사행의 서기 원중거가 저술한 『화국지』 는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에 관한 총체적 정보와 자료를 담고있다. 『화국지』 에 기술된 원중거의 일본 체험은 l8세기 후반 조선 선비의 사고와 사각을 드러내고 있는 바 본고에서는 그 의의와 한계를 고찰하였다. 의의있는 점은 새롭게 본 일본과 일본인에 관한 내용이다. 원중거는 대마도인과 내지인을 엄격하게 구별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을 완화시키고 있다. 또한 일본의 우수한 기술문화와 文風이 홍기하는 변모상을 들어 일본을 더 이상 오랑캐로 야만시해선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보다 앞선 산업기술을 보유하여 물질문화가 발달한 나라 일본이,文風의 흥기로 말미암아 문명의 나라로 점점 성장해가는 면모를 바람직한 현상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바로알기에는 심각한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이 長기를 통해 아란타로부터 서양문물을 수입하여 국제화의 싹을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원중거는 한중일 삼국의 유교문화권에 고착되어 서양세계에 대한 관심의 결여와 일본의 진정한 변모상황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한 일본의 儒學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어서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 선비 의 한계성이 드러나 있다. 『화국지』 에 기술된 원중거의 일본 체험은 使行 이 갖는 여건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보다 깊이있는 탐구를 하지 못한 점이 있다. 『화국지』가 미래를 위한 것이면서 또한 미래지향적 전망이 부족한 데서 당시 조선이 놓여 있었던 국제적 위상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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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江 金澤榮(1850~1927) 은 개성의 무변 집안에서 태어나 갑오개학으로 총리에 오른 金弘集에 의해 편사국 주사로 발탁되어 史書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9월에 중국 南通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22년을 살았다. 그는 중국 남통으로 이주한 이후 줄곧 한국 국적을 유지하다가. 1912년 l월에 ``본분으로 돌아간다.`` 는 명분을 들어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는 1913년 10월에 『古本大學章句』 를 간행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韓史繁』을 편찬하였다. 이 두 책 속에는 그가 한국의 병합과 중국의 혁명이라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환기를 겪으면서 체계화한 문화비전의 특징이 온전히 실려 있다. 김택영은 옛 성현들이 기록한 경전의 오류를 주나라 말기에 공자가 바로 잡았고, 동한의 유향과 유흠 부자에 의해 체계화된 고문경학이 공자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생각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경학사상에 기초하여 『고본대학장구』 에서 주희가 새로 보충한 格物致知章은 증자가 처응부터 立傳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조산이 망한 원인 중의 하나로 주자학 일변도의 편협한 학문 풍토에 있다고 보고, 500년 이상 지속된 조선의 학술적 근거를 제공해오던 주자학의 입각점인 격물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주자학에 의해 성립된 국내 학문과 도통의 진실성은 물론 이를 근간으로 형상된 통치 질서의 합법성까지 흔들었다. 김택영은 삼국시대를 文보다 質이 우세했던 초기의 문명으로, 조선시대를 質보다 文이 우세했단 말기의 문명으로 고려시대를 文과 質이 조화를 이룬 중기의 문명으로 이 해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역사인식에 기초하여 『한사경』 애서 위화도 회군 문제를 거침없이 거론하면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는 고려왕조가 文과 質이 조화를 이루어 양한과 삼대의 정치를 완성한 것으로 파악하고, 건국에서 망국에 이르기까지 조선 역대 왕들의 실정과 붕당정치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위화도 회군에서 시작된 조선 왕조의 정통성은 물론 이를 근간으로 500년 동안 유지된 조선왕조의 합법성까지 문제시하였다. 김택영이 평생에 걸쳐 익힌 학문은 모두 중국의 성인에게서 資賴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양한과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편찬한 『고본대학장구』 와 『한사경』은 위와 같이 성인의 도덕으로 서양의 세력에 맞서고자 했던 복고적 문화비전을 실천하 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구한말을 전후로 한문을 수단으로 문학 활동을 한 한말 사대가의 마지막 주자였다는 점에서, 그가 보여준 이와 같은 복고적 문화비전은 수천년 간 중국과 한국 문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한문학의 역사적 소임이 마침표를 짝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선사(禪師)의 "여유로움"과 한국 선시(禪詩)에서의 구현

조상현 ( Sang Hyun Jo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47권 0호, 2011 pp. 237-273 ( 총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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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선사의 삶에 드러난 학者의 여유로움을 규정하고, 이것의 시적구현을 한국 禪詩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즉 이러한 선사의 여유로움을 ``대상에 無碍한 여유로움`` 과 ``生死에 自在한 여유로움``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구체적으로 ``대상에 무애한 여유로움``은 法界의 實相과 自我의 內面을 관조하여 그 본질이 空性임을 투철히 깨닫고는 현실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걸림 없이 자유로운 여유임을 밝혔다, 이는 또한 眞/俗이 다르지 않는 ``眞俗不二``의 여유로도 나타난다. 즉 臨濟 義玄(?~ 867) 禪師의 법문을 통해 선사들이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원인을 밝혔으며, 龐居士(?~?), 丹霞天然(739,824), 鏡虛 惺牛(1846~1912) 선사의 일화를 통하여 그에 대한 구체적 양상을 살펴보았다. 또한 ``생사에 자재한 여유로움`` 은 선사들이 삶을 유회하며. 죽음에 초연한 여유임을 논하였는데,普化 및 龐居士와 그의 딸 靈照의 입멸 이야기를 통해 선사들의 생사에 자재한 여유를 고찰하였다. 한편 이러한 선사들의 여유로움은 한국 선시에서도 구현되는데, 본고에서는 위의 특징 에 따라 ``대상에 무애한 여유로움``과 ``생사에 자재한 여유로움`` 이 구현된 시를 분석하였다. 즉 白雲 景閑(1299~ 1374) 의 ``無心``과 眞覺 慧諶(l178~l234)의 ``眞俗不二`` 등이 구현된 시를 통해 ``대상에 무애한 여유로움`` 의 시적 구현을 살펴보았고 ``생사에 자재한 여유로움`` 은 太古 普愚(1301~1382), 懶翁 慧勒(1320~I376),淸虛 休靜(1520~1604) 의 시에서 그 구현 양상을 자세히 파악하였다. 특히 선사들의 『臨終偈』 를 중심으로 선사의 ``생사에 자재한 여유로움`` 의 시적 구현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 懶翁과 淸虛의 『臨終偈』는 상호보완적 의미를 갖추고 있음을 확인 하였다. 즉 각각의 선시에는 ``卽心卽佛``의 唯識佛性思想 과 ``非心非佛`` 의 般若中觀思想에 의거한 생사자재의 선사낭이 나타난다. 하지만 括虛大師(1720~1789) 의 詩文에서는 兩者 融會的 사상이 나타난다. 특히 그의 『臨終偈』에는 그러한 사상이 선명히 구현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禪詩는 논리적 사상에 의거하여 창작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수행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自 에 의한 것임도 浮休堂 大師(1543~1615) 의 시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고려도경』과 고려의 문화적 형상

김보경 ( Bo Kyeoung Kim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47권 0호, 2011 pp. 275-301 ( 총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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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圖經 』은 인종 원년(1123) 北宋의 徐兢이 고려에 사행했을 때 견문한 내용과 고려에 대한 정보를 엮어 만든 使行 報告書이다. 본고는 이 책에 그려진 l2세기 고려 의 문화적 형상을 탐색하고 아울러 한국-중국의 관계 설정 방식을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고려도경』 에는 고려사회에 대한 조망성 높은 부감보다는 근거리 체험을 중심으로 한 집중도 있는 관찰 및 서술이 우세하다. 이는 사행의 시공간적 한계가 주요한 이유이다. 사행 기간은 총 석달, 개경에 머문 것만은 한 달 남짓이었다, 체험의 주 영역은 개경인데 그 또한 궁궐의 범위를 많이 넘지 못했다. 사물에 대한 자밀한 기술이 돋보이는 것은 그만큼 한정된 반경에서 일상적 사물을 접촉, 관찰할 기회가 많았던 반증이다. 인물이나 문학의 접촉 역시 협소하게 나타난다. 인물로는 族望이 높고 李瓷謙과 관련아 있는 사람들이 근거리에 있었다. 문학에서는 궁궐이라는 공간과 관련된 작품 또는 宴席에서 지어진 작풍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同文』의 ``唐之餘弊`` 운운이 부분적 사실일 수는 있어도 전면적 진실야라 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서긍이 ``말할 수 있었던 것`` 과 ``말할 수 없었던 것`` 사이를 헤치고 되짚어야 고려의 문화적 형상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한편, 그가 ``실제 말해 놓은 것`` 과 ``정말 말하고 싶은 것`` 에 대해서도 신중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려도경』은 華夷 理念 이라는 大主題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조직되어 있다. 그것의 최종 목적은 송의 우위를 전세로 송-고려의 문화적 동질성을 재확인하여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수호하는 데 있었다.``요가 멸망했으니 우리와 다시 책봉을 맺자`` 는 것이 그들의 정치 외교적 목적이라면, 『고려도경』 온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文化的 宣傳物인 셈이다. 그러나 그 간절하기까지 한 선전물은 역으로 역사적, 문화적으로 당당했던 고려의 위상을 내보여 준다. 인종은 송의 책봉 요구를 거절했고, 뒤에 假道와 請兵 요구도 거절했다. 『고려도경』은 ``그러했던 세계`` 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 ``그러해야 할 세계`` 에 대한 희구였다. 그 점에서 『고려도강』 은 체험의 기술을 넘어 비전 (vision)의 서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려도경』은 이후 중국이 우리를 이해하는, 또 우리가 우리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텍스트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고려도경』 을 화이 이념의 텍스트로 삼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서긍이 기획한 대로 화이 이념과 한국-중국 사이의 관계 설정 방식이 정형화, 고착화되어서는 고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의 문화적 형상을 규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국순전』 『국선생전의』 우언적 독해 -가전의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

윤주필 ( Ju Pil Yoon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47권 0호, 2011 pp. 303-338 ( 총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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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순전』 은 중세전기의 귀족문화가 왜곡되거나 단절되는 무신집권기의 상황을 풍유 했다. 『국선생전』 은 작가 자신의 생애를 빗대는 자탁전으로서 중세후기의 지식인상을 피력했다. 그간에 이 두 작품을 비교하는 논의가 많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특히 『국선생전』 은 『국순전』 에 대한 반의모방의 수법을 구사하여 가전글쓰기의 또 다른 특징을 보탰다. 이들의 접점과 차이를 따지는 것이 가전 양식을 더 깊이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두 작품은 사물의 속성과 역사 전고를 허구적 서사를 통해 결합시켜 반어적 골계를 조성하고 인간사에 빗대는 환유의 수사법을 구사했다.반어적 골계는 ``딴말하기`` 를, 환유의 수사법은 ``돌려말하기`` 를 지향하여 언어의 분열 현상을 초래하지만. 그것은 보편적 주제의 우의를 독자가 발견할 여지를 만들어 놓는다. 두 작품에서 비롯된 가전은 사물과 전고와 선행 텍스트를 모방하며, 인간사를 대비 시키며, 보편적 주제를 가상해 넣는다. 가전은 우언 갈래에 속하는 복합 양식이다. 그것은 서사적 교술에, 혹은 서사와 교술의 중간, 혼합 갈래에 소속된다. 두 작풍은 한국우언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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