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한국한문학연구검색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8-128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4권 0호 (2014)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의 『임하이십육영(臨河二十六詠)』 연구(硏究)

신두환 ( Doo Hwan Shin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54권 0호, 2014 pp. 5-44 ( 총 40 pages)
8,000
초록보기
이 논문은 藥峯 金克一(1522~1585)의 대표적인 산수시 작품인 「臨河二十六詠」을 연구한 논문이다. 「臨河二十六詠」은 작가가 살았던 경북 안동 임하 천전의 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산수경관을 의경으로 삼았다. 작가는 이곳의 승경 26곳을 설정하고 그 점경들을 시로 읊어 「臨河二十六詠」이라 명명하였다. 그 형식은 주희의 「雲谷二十六詠」의 체제를 상상하고 「도산잡영」 중 도산의 경관을 읊은 「陶山二十六詠」을 전망한 것으로 작가의 미학이 총동원된 걸작이다. 작품 전반에 걸쳐 작가의 신선한 구상과 아름다운 미의식 넘쳐나고 있으며 그 미학적 근간은 주희의 성리 철학이었다. 이것은 주희에서 비롯되는 26영을 의경한 산수시가의 대표작으로 그 문학적 위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던 16세기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학파의 산수시가 작품으로 농암에서 퇴계로 퇴계에서 약봉으로 계승되고 있는 강호가도의 맥락이라는 점에서 그 당시의 사림파 문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 된다. 약봉은 臨河의 二十六景을 성리미학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8,000
초록보기
본고는 청나라 강희제의 요청에 따라 1713년(숙종 39) 대제학 宋相琦(1657~1723) 등이 간행한 別本 『東文選』의 편찬 과정을 재구하고, 조선중기 산문을 중심으로 산문 선발의 방향과 양상을 구명하였다. 아울러 별본 『동문선』이 지닌 산문선집으로서의 위상을 따져보았다. 본고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편찬 및 간행 과정을 상세하게 재구하였다. 『승정원일기』 등을 검토해 본 결과, 별본 『동문선』의 편찬.간행은 1713년 3월 15일부터 약 6개월이 소요되었으며, 본격적인 시문 선발이 시작된 4월 12일을 기점으로 보면 약 5개월이 걸렸다.(윤5월 포함) 대제학 송상기가 주관하면서 홍문관ㆍ예문관의 관원이 참여를 하였으나, 책의 전체적인 규모 등 중요한 결정 사항에서는 좌의정 李?命(1658~1722)의 역할이 더욱 컸다. 특히 시문 선발의 전체적인 방향은 金春澤(1670~1717)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으며, 조선중기 산문 선발에 있어서는 金昌翕(1653~1722)의 역할이 컸다. 한편 洪世泰(1653~1725)는 교정관으로 선발되어 시문의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둘째, 산문 선발의 방향과 조선중기 산문의 수록 양상을 고찰하였다. 청나라에 忌諱가 되는 글은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질적 성취 여부를 떠나 중국에 알려진 글은 우선적으로 선발하는 선문 기준이 있었다. 특히 김춘택은 「東文問答」에서 道學文字 위주로 산문을 선별할 것을 주장하고, 구체적인 문인과 시문 목록을 제시하였다. 성리학과 관련 글이 지나치게 많이 선발된 것은 김춘택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중기 산문가 가운데 최립과 장유가 비중 있게 선별된 것은 김창흡의 견해가 많이 반영된 결과였다. 셋째, 산문선집으로서 별본 『동문선』이 지닌 위상을 평가하였다. 별본 『동문선』은 『동문선』ㆍ『속동문선』 이후 왕명에 의해 편찬된 유일한 시문선집이고 조선중기 산문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위상을 지닌다. 그러나 선발된 문인의 대표성이나 성리학 관련 글이 지나치게 많은 점 등을 염두에 볼 때, 산문선집으로서 문제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선집에 수록된 글은 질적으로 좋은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데, 별본 『동문선』에 수록된 산문에 대해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옥새론(玉璽論)」의 주제의식과 그 의미

김영은 ( Young Eun Kim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54권 0호, 2014 pp. 85-112 ( 총 28 pages)
6,800
초록보기
본 논문은 燕巖 朴趾源(1737~1805)의 「玉璽論」을 분석하여 작품의 주제의식을 규명하는데 초점을 둔 연구이다. 나아가 연암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 고찰하여 그 상관성을 밝혔다. 「옥새론」은 연암이 쓴 총 세 편의 ‘論’ 가운데 하나이다. 金澤榮의 『麗韓十家文抄』에 실릴 만큼 명편이지만, 「옥새론」을 분석한 개별 논문은 없었다. 「옥새론」은 총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표면적 주제는 단지 보물에 불과한 옥새에 집착하지 말고 덕을 지녀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전의 권위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새롭게 변환시키는 연암의 글쓰기 방식으로 봤을 때, 「옥새론」의 옥새는 ‘권력의 무한함’이라는 의미를 넘어 심층적인 맥락을 갖고 있다. 연암의 문집에는 평소 刻名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는 글이 자주 나타난다. 이런 글들을 종합해서 분석한 결과, 연암은 무언가를 새기는 행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주려 한다. 3장은 이러한 연암의 刻名 행위에 대한 갖는 세계관을 보여줌으로써 「옥새론」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파악하였다. 4장은 연암이 「옥새론」을 지었을 당시를 주목해 보았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많은 옥새가 대량 생산되었던 것도 문제인 시기지만, 무엇보다 당시 조선은 대명의리론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명나라 옥새의 흔적을 찾아 소중화로서의 자부심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 깊은 문제의식을 느꼈던 연암은 옥새로 대변되는 명분론과 대명의리론의 허상을 비판하였다. 또 「옥새론」의 형식과 주제는 『熱河日記』에 실려 있는 「黃金臺記」로 이어져 새롭게 변주된다. 「황금대기」는 「옥새론」의 인과적 구성, 주제의식 면에서 상당 부분 동일하여 「옥새론」을 파악하는데 새로운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요컨대 「옥새론」은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刻名의 허망함을 인식한 바탕 아래, 현실 비판의 맥락에서는 옥새로 대변되는 헛된 명분을 비판하는 ‘중층적’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18세기 문학에서의 색채 표현과 강세황의 회화

고연희 ( Youen Hee Kho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54권 0호, 2014 pp. 113-138 ( 총 26 pages)
6,600
초록보기
姜世晃(1713~1791)은 영향력 있는 文人畵家로서 設彩의 특성이 인정되는 회화제작을 하였고 그의 색채감각은 중국채색화보의 적극적 이용과 채색안료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세대 뒤의 문인들 李德懋나 朴趾源 등의 시문에 드러나는 새로운 색채표현에도 회화안료의 색채명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특성이 나타난다. 회화와 문학에서 드러나는 색채표현의 상관성은, 이들이 동일한 문화적 환경에서 새로운 서적으로 채색감각의 표현을 익히어 문학적으로 회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시대의 문예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강세황은 문인화가로서 설채에 특장을 보임으로써 18세기 색채감각의 문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연구는, 강세황의 시문에 나타나는 색채표현이 그의 회화적 색채감각을 이해하고 확인하는 자료로서 가치와 성과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도 말하였는데, 이는 문학사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함은 아니라, 강세황이 관심을 가지고 표현한 채색의 세계가 이덕무나 박지원 같은 문인들의 색채인식 및 색채표현과 함께 18세기 문예사의 특징적 양상으로 드러나는 색채감각으로 긴밀한 상호상관성을 가지며, 강세황 회화의 채색작업이 이러한 문학적 연관성 속에서 문예사적 의미를 확보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조선조 후기 문예(文藝) 공간에서의 왕세정(王世貞)

진재교 ( Jae Kyo Jin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54권 0호, 2014 pp. 139-171 ( 총 33 pages)
7,300
초록보기
이 논문은 조선조 후기 문인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왕세정의 글을 열독한 사실을 주목하고, 그것의 문화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은 문예 公論 場에서 ‘七子’를 비롯하여 王世貞이 남긴 글을 秦漢과 盛唐의 의고로 바라보거나, 模擬와 模倣 혹은 剽竊로 이해하여 비난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그들의 창작 능력과 작품을 고평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조선조 후기 왕세정 열풍은 단기간에 그치지 않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비판과 반 비판, 긍정과 부정 등의 극단적 시선으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왕세정이 남긴 다양한 흔적을 탐색하고, 그 자체가 일국을 넘어선 문예적 이슈라는 인식을 제시하였고, 결국 이러한 현상은 동아시아에서 시공간을 넘어 상상의 문예 공화국으로도 기능하였음을 밝혔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동래박의(東萊博議)』 수용의 의의

백진우 ( Jin Woo Baek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54권 0호, 2014 pp. 173-214 ( 총 42 pages)
11,700
초록보기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힌 저술 가운데 하나인 『東萊博議』의 수용 양상을 살피고 그 의의에 대해 논하였다. 『동래박의』는 조선 초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래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널리 수용되고 유통되었다. 특히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필독서로 인정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인 의의가 있다. 하지만 열독 현상과 중요도에 비해 아직 연구가 미진한 저술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동래박의』에 대한 연구가 아직 시작 단계라는 점을 감안하여, 통시적 관점에서 『동래박의』의 수용 의의를 확인하는 데 주력하였다. 『동래박의』는 宋代의 성리학자인 呂祖謙의 저술이다. 그가 서문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본래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날카로운 역사 논평, 치밀한 논리, 수려한 문장 등으로 인해 수험서 이상의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긴 시간 동안 이 책을 애독하였다. 이 책은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읽힌 수험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동래박의』 수용과 열독 현상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확인하였다. 첫째,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역사 평론서로서의 의의이다. 특히 『동래박의』가 조선에 최초로 소개될 당시에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었다. 저자인 여조겸은 朱熹와 함께 성리학 입문서인 『近思錄』을 저술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조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역사 평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둘째, 실용적 목적의 과거수험서로서의 의의이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수험서 가운데 『동래박의』는 단연 가장 많이 읽혔다. 『동래박의』가 비록 송대에 나온 책이지만, 조선은 송대의 과거제도를 답습한 원대의 과거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수험서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또한 상세한 풀이를 통해 작문의 의도를 일일이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수험서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문장력 강화를 위한 지침서로서의 의의이다. 이러한 측면은 우리나라에서 과거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동래박의』가 지속적으로 읽혔다는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은 『동래박의』가 문장의 논리.기세.작법이 하나의 지침이 될 만큼 의미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물론 이 세 가지의 의의는 선을 그은 듯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때로는 서로가 겹쳐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시대의 환경과 문인지식인들의 의식 변화에 따라 비중과 농도의 차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동래박의』가 처음 유입되던 조선 초에는 ‘성리학 기반의 역사 평론서’로서의 의의가 크고, 16세기 후반부터 86편을 수록한 축약본이 목판본과 필사본을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시기에는 ‘실용적 목적의 과거 수험서’로서의 의의가 크며, 과거제가 폐지되고 수험서로서의 의의가 줄어든 조선말기 이후로는 ‘문장력 강화를 위한 지침서’로서의 의의가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병서(兵書)를 읽는 두 가지 방법 -조선 중후기 병서 비평자료를 중심으로-

김홍백 ( Hong Baek Kim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54권 0호, 2014 pp. 215-275 ( 총 61 pages)
13,600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 중후기의 병서 담론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그 경향과 의미를 조망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16세기 말 이래 조선의 병서 담론에는, 전법이나 무기 체계 등 군사 분야의 전문 서적으로서 특정하여 접근하는 시각을 제외한다면,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이 존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병서를 제자백가 내지 선진양한의 고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며, 둘째는 병서에 내장되어 있는 병 담론을 이용후생을 위한 제도적, 사회경제적 쇄신책의 일환으로 전용하는 경향이다. 물론 두 흐름은 때로 한 지식인 안에 공존하는 경우도 존재하나, 대체적으로 김석주, 홍석주의 경우처럼 문장가로서의 면모가 강한 지식인에게는 전자의 경향성이 발견되고 이익, 정약용의 경우처럼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강한 지식인에게는 후자의 경향성이 발견되는 듯하다. 아울러 조선 중후기의 적지 않은 유가 지식인들이 병서를 단초로 삼아 ‘왕(王)=패(覇)’ 내지 ‘문(文)=무(武)’ 간의 관계를 균형적이고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했음이 주목된다. 이는 유가의 왕도 정치[經道, 文學]와 법가의 패도 정치[權道, 武學]를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상보적, 병행적 관계로 이해하려는 태도이자, 문학에서의 고문 글쓰기와 작문의 방법론을 병법과 용병의 전술과 유사한 차원의 것으로 등치시키려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처럼 조선 중후기 지성사는 일정부분 병서를 매개로 하여 유학과 병학 내지 전쟁(정치)의 영역과 문학의 영역이 상호 밀접하게 교섭하면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