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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문학연구검색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Hanmun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8-128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62권 0호 (2016)

조선시대(朝鮮時代) 부비흥(賦比興) 논의(論議)의 인식층위(認識層位)에 대한 고찰

김수경 ( Su Kyung Kim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7-43 ( 총 37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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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시대 『시경』 부비흥론의 양상과 성격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그 내부에 존재하는 인식의 층위를 탐구하는 데 중심 목적을 두고, 그 시론적 성격으로 층위가 선명한 ‘朱熹 賦比興 체계상의 논의’와 ‘새로운 層位에서의 賦比興 논의’로 구분해 서술하였다. 아울러 朱熹 賦比興 체계에서 확장된 것으로 사료되는, 詩經體를 모방한 詩創作에서의 賦比興 표기와 作詩法 이론의 賦比興 援用 事例를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첫째, 조선시대 賦比興 논의는 주희의 賦比興 체계 내에서의 논의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나 모든 논의가 賦比興 체계 내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주희의 賦比興 체계해석과 관련된 무수한 논의들에는 해석자의 해석공간이 존재함을 제시하였다. 둘째, 성호와 다산의 賦比興論은 그 논의가 이론적으로 비교적 완정한 체계를 갖추면서 기존설과 다른 새로운 구도를 모색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 詩篇 분석에서도 이론의 적용 양상이 확인됨을 밝혔다. 셋째, 조선시대에서 표현창작기법을 중심으로 한 부비흥 인식이 시창작의 구체적용과 창작이론 등으로 활용된 양상을 고찰하였다. 본 연구는 추후 조선시대 賦比興 인식과 『시경』및 시문학 인식간의 심층 맥락을 고찰하는 데 참고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상서(尙書)』 형정(刑政)의 이념과 현실 적용

유영옥 ( Young Og Yu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45-86 ( 총 42 pages)
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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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는 儒經이자 史書이므로, 본고는 刑政 대목에서 德治를 추구하는 儒經으로서의 『상서』와 현실성을 담보하는 史冊으로서의 『상서』의 실체를 포착해보고자 하였다. 『상서』의 刑政은 이미 堯舜시대에도 존재했는데, 그 刑政의 근본이념은 無刑이나, 三代로 내려갈수록 無刑의 이념은 퇴색하고, 刑政은 점차 상시적이고 법제화된 정책으로 고착되어 治道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堯舜三代는 모두 無刑을 지향하되, 唐虞刑政의 실제 핵심은 ‘寬’이며, 西周 刑政의 실제 핵심은 愼罰에 근거한 ‘공정성’이었다. 그런데 西周는 형벌의 공정성을 내세우면서도 5대 穆王에 이르면 五刑의 贖환 금액까지 상정하게 된다. 조선 경학가들 다수는 蔡沈의 견해에 따라 「周書」 < 呂刑 >에 수록된 五刑의 贖刑을 목왕이 궁핍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民財를 취한 것으로 古法이 아니라고 비판했지만, 星湖와 茶山 등은 그것을 < 舜典 >에 나오는 官刑ㆍ敎刑의 속형과 같은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또 채침은 오형의 속형을 비판했기에 < 여형 > 1장의 ‘모荒’을 史官의 貶辭라고 단정했지만, 오형의 속환을 비판하는 조선 경학가들 조차도 ‘모荒’에 있어서만큼은 蔡說에 동조하지 않고 < 여형 >의 經文으로서의 가치를 존숭하였다.

19세기 삼례서연구의 다양성과 고증학의 영향 -정약용, 심대윤, 이진상을 중심으로-

전성건 ( Sung Kun Jeon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87-115 ( 총 29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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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후기 삼례서연구의 다양성과 고증학의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으며, 연구 대상으로는 정약용과 심대윤 그리고 이진상을 선택하였다. 조선예학에서 삼례서가 갖는 위상은 대체로 『의례』를 본경으로 하고,『예기』와 『주례』가 본경을 보완해주는 예서로 인식되었다. 이는 이른바 의리예학으로 알려진 주희예학을 조선예학이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의례문화는 가례문화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사대부의 일상생활은 孝悌慈를 유교이념으로 하고 있고, 그것의 실현방식이 관혼상제라는 四禮의 家禮를 통해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가례』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는다. 주희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가례』는 未成書이자 未定說이기에 조선예학에서는 이를 해석과 고증 그리고 행례의 세 측면에서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보완은 삼례서에 대한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독례통고』나 『오례통고』 등 청대 고증학의 저서의 수용으로 인해 禮式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념과 기물 등에 대한 훈고와 고증이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학자들에게 고증학은 그 실천성에 있어 의문이 제기된다. 즉청대 고증학은 훈고와 고증의 장점은 있으나, 行禮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실천성은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예학의 주류는 역시 주희예학의 맥락 안에있는 의리예학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의리예학의 맥락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한주 이진상을 거론하였다. 한주는 당대 家禮書의 총집류로 평가받는 퇴계학파의 상변통고 와 율곡학파의 『가례증해』의 議論을 推說에 의해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주는 리학적 담론에 사용되던 의리의 방법을 예학적 담론에 적용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백운 심대윤과 다산 정약용은 가례를 비롯한 주희예학을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하고, 새로운 가례서를 작성하는 한편, 한주 및 조선예학자 일반과 달리 삼례서의 본경의 문제에 대한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백운은 예기를 본경으로 삼아 禮經을 재구성하는 데에 이르고, 다산은 주례를 본경으로 삼아 체재개혁을 위한 禮式의 규범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처럼 조선후기는 삼례서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등장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경학 연구와 고전집석학(古典集釋學)의 가능성 -『예기(禮記),악기(樂記)』를 예(例)로 하여-

김승룡 ( Seung Ryong Kim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117-141 ( 총 25 pages)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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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학연구에 있어서 집석적 이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경전에 대한 해석은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 왔다. 해석의 축적과정을 통해 확보된 다양한 해석의 지층을 공시적으로 배열한 뒤, 지금-이곳에서 가장 의미 있는 해석을 찾아내는 것을 고전집석학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예기ㆍ악기』를 예로 하여 집석적 이해 가능성을 점검하고, 이를 통해 경학연구에 있어서 집석적 방법론을 제언하고자 한다. 『禮記ㆍ樂記』는 그동안 하나의 경학 텍스트로 다뤄지지 않았다.『악기』는 두 가지의 경학적 과제를 갖고 있었다. 첫째, 인간의 마음과 외물(外物)은 어떻게 감응하는가? 둘째, 악과 정치는 어떤 관계인가? 이들은 『악기』가 경학 텍스트로 형성될 당시의 정치적과제를 해명하기 위해 던져진 질문이었다. 『악기』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유가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준비되었다. 『악기』에 대한 해석은 오랜 동안 축적되었다. 이들은 각 시대마다 요구된 해석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럼 21세기를 지나는 지금, 우리의 경학적 과제는 무엇일까? 『악기』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글은 『악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악기』가지향하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에 대한 긍정, 합리화되지 않은 마음의 인정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정연한 대답을 마련하기 위해『악기』에 대한 통시적 해석들을 공시적으로 재배열하고 이들 사이를 균형 있게 바라볼필요가 있다. 시간의 공간화를 통해서 해석의 평등성을 확보하는 순간, 경학 연구 주체의 시각은 균형 잡히기 시작할 것이다. 그즈음 집석적 이해는 하나의 방법에 그치지않고, 하나의 ‘학’으로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으리라 기대된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한시(漢詩)에 투영된 그의 실학자적(實學者的) 면모(面貌)

이의강 ( Eui Gang Lee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143-172 ( 총 30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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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磻溪 柳馨遠(1622~1673)의 문학과 실학이 어떠한 접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반계 유형원의 문학과 실학을 아우르는 종합적 연구가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뜻에서였다. 반계 유형원의 磻溪逸稿 에 수록된 詩稿는, 그가 생전에 자신의 뜻을 반영하여 자신의 일생과 내면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결과이며, 그의 사후에 가까운주위 사람이 필사한 것이었다. 학회지에 게재된 시고의 원문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할때에는 오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반계는 시편을 읊을 때 자연물 소나무의 형상과 역사적 인물의 절의에 주체의 확립을 적극적으로 투영하였다. 이렇게 확립한 주체는 19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경세론을 독자적으로 체계화한 『磻溪隨錄』 완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반계는 제자리를 얻지 못한 식물, 동물, 사람에 대해 읊으면서 자신의 사회적 실천 의지를 반영하였다. 그는 조선의 잘못된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민생들이 제자리를 얻도록 함으로써 옛 성왕들이 구현했던 이상적인 ‘王政’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반계는 주체의 확립과 사회적 실천 양자를 끊임없이 성찰하여 일상과 이상을 조화롭게 수행하였다. 반계는 일상에서 실패한 영웅이 아니었으며,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이룩한 위인이었다. 반계는 30대 중반에 이미 자신의 사회적 실천을 목적성을 띠지 않는 경지로까지 승화시켰다. 반계 유형원의 경우 문학과 경학의 접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확인된다.

『논어회전(論語會箋)』에 인용된 강호(江戶)시대 경학가(經學家) 고찰(考察)

이규필 ( Gyu Pil Lee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173-202 ( 총 30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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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竹添進一郞(1842~1917)의 『論語會箋』을 고찰한 것이다. 『논어회전』은 江戶 시대 일본 경학의 주요 성과를 담은 『논어』 주석서이다. 何晏의 『論語集解』와 朱子의 『論語集註』를 하나의 책에 모두 수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독특한 체제는 일본 경학의 특징적 국면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논어회전』에 인용된 학자들은 그면면을 고찰하는 것만으로 일본 경학 학파와 학술의 흐름을 간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 아래 4개 학파 13명의 학자들에 대한 사승관계와 학문 지향을 소략하게 고찰하였다.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집해』와 『집주』를 수용한 『논어회전』의 체제는 『집해』와 『집주』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발전시켜온 일본 논어학 전통의 산물이다. 經文 아래 집주를 실은 것은 『논어』 해석에 있어 기본적 해석은 주자학을 따랐음을 표명한 것이며, 會箋에서 고학파에서 고증학파에 이르는 각 학파가 이룬 성과를 담은 것이다. 일본의 경학은 古學派로부터 본격화 되었으며, 朱ㆍ陽ㆍ漢ㆍ宋에서 心學ㆍ古學ㆍ名物까지 두루 아우른 折衷學派의 자유로운 기풍에서 폭과 품을 키웠으며,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주자학파들의 노력이 더해져 幕末에는 고증학이 출현하였다. 竹添進一郞의 『논어회전』은 이러한 일본 경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저작이다.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바라본 고전교육으로서의 유가경전

한예원 ( Yae Won Han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203-228 ( 총 26 pages)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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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휴먼’(Post-Human)이 대세가 되고 있는 21세기에 왜 고전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21세기야 말로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고전에 보이는 인문학적 통찰, 전환기에 있었던 인문학적 대안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다. 인간은 미래를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축적된 과거의 지혜를 살피면서 미래를 추측하고 예견할 수 있다. 과거로 되돌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점검하고자 할 때, 고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모델을 형성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것이 동양의 축의 시대의 정신적. 문화적 산물인고전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한문고전은 한문 문명이 형성된 이래로 2,000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우리 사회를 유지시켜 나가는 근간이 되고 있는 책이다. ‘古書’(오래된 책)일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典範이 되고 있다. 현재 한문문화권에서는 한문문명 형성기의 고전 중에서 특히 유가고전을 ‘經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고전교육을 생각할 경우, 중국에서 발생한 ‘讀經 論爭’(유교 경전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讀經 운동은 전통 회복의 시도 뒤에 중화주의와 중화주의의 뿌리인 유교 전통을 회복하여 사회주의에 대체하는 대안 정치 이데올로기를 만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독경논쟁을 검토 한 뒤에, 우리의 한자교육 찬반논쟁과 고전교육 방향잡기를 검토하였다. 우리의 고전교육은 21세기 동북아시아 미래를 이끌어갈 사상과 가치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삼아야 한다. ‘전통’에 근거하여 미래를 추론할 때의 위험성을 환기하면서 동아시아 문명사의 맥락에서 한자교육, 고전교육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 중기 배율 창작에 대하여

이남면 ( Nam Myon Lee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229-264 ( 총 36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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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중기 배율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그 창작 배경, 현황과 특징, 작품세계, 의의를 살핀 것이다. 배율은 한시의 체식 중 하나로서 10구 이상의 율시를 가리킨다. 율시보다 긴 편폭 속에 평측과 압운을 엄격히 지켜야 하고 처음과 끝을 제외한 모든 연(聯)에 대장을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시체에 비해 창작이 어렵다. 그 때문에 한국 한시사에서 10수 이상의 배율 작품을 남긴 작가는 많지 않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오면 이전 시기에 비해 배율 창작량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창작이 장편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차천로, 남용익, 임숙영 등 특정 작가를 중심으로 칠언 배율 창작이 증가하였고, 여러 작가들에 의해 100운 이상의 장편이 지어졌으며, 速作이 크게 늘어났다. 그것은 관료 문인들이 어제배율 창작을 해야 한 점, 두시 배율에 대한 관심이 확대된 점, 문인 간 창작 역량 과시와 경쟁이 이루어진 점을 그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조선 중기 배율은 관료 문인 간에 공유하는 집단적 성격의 작품과 개인 서정, 영물, 기행 등의 작품이 동시에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이 배율 창작의 과시와 경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행된 창작의 장편화는 조선 중기 한시 창작의 수준을 높여주었다. 또한 관료문학적 성격의 작품 외에 시인의 내면을 진정성 있게 표현한 작품도 증가함으로써 조선 중기 시단은 더욱 풍성해질 수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배율은 작가층, 제재의 협소함이라는 문제를 노출하였고 당시 문단의 분위기는 창작 속도와 작품 길이를 중시한 측면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배율은 절구, 율시, 고시와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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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후기 안경은 독서계의 변화와 함께 지식ㆍ정보를 축적하고, 방대한 저술을 남기는데 기여한다. 일부 사대부 계층은 안경을 끼고 총서류 저술이나 다양한 필기를 남긴 바 있다. 또한 藝人들도 안경을 착용하여 자신들의 예술적 영감과 능력을 작품에 표출하기도 하고, 일부 계층은 오락을 위해 안경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조선조 후기에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은 안경을 활용하여 자신의 능력과 정감을 발산시킨다. 안경의 보급과 확산은 조선조 후기 문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견인하고, 한편에서는 문화변동의 자양분으로 기능한 것이다.

반구서원(盤龜書院) 건립(建立)과 반구대(盤龜臺) 상징화(象徵化)에 대한 소고(小考)

오상욱 ( Sang Uk Oh )
한국한문학회|한국한문학연구  62권 0호, 2016 pp. 299-338 ( 총 40 pages)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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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 金志를 비롯한 彦陽의 유림들은 반구대 상징화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1712년에는 언양의 반구대와 관련된 三賢(圃隱ㆍ晦齋ㆍ寒岡)을 모신 반구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 1713년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동 시기에 集淸亭이 건립되면서 반구대 상징화는 절정을 이뤄 반구대를 찾는 문인들은 더욱 많아진다. 특히 良洞문인들이 조상참배와 도통연원을 목적으로 반구서원을 찾아 참배하고, 반구대의 경치를 즐겼고, 빼어난 경치를 품은 반구대 일원은 포은과 반구대가 結付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膾炙된다. 앞서 언양의 유림들은 울산부의 구강서원 건립과 사액을 받은 일에 대해 자극 받아, 언양 역시 서원을 건립해 지역의 발전과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 三賢과 언양의 관계를 지나치게 천착해 의도적으로 반구대와 결부시켜 반구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원 건립 후 三賢의 참배로 반구대가 명성을 얻었고, 집청정이 건립되면서 반구대는 언양의 명소로 탈바꿈한다. 결국 포은과 반구대를 천착하면서까지 언양과 반구대를 연결짓고자한 의도는 언양유림의 순수하지만 모순된 마음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이는 단순 지방유림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지사족과 가문 존속의 연관관계에 의한 집단행동이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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