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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udes de Langue et Litterature Francaises


  • - 주제 : 어문학분야 > 불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6-4350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81권 0호 (2010)

발자크 소설에 나오는 세 명의 "팜므 파탈": 베아트릭스, 발레리, 그리고 푀도라

정예영 ( Ye Young Chung )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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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작품 속에서 수많은 여성을 등장시켜 깊이 있게 탐구하였다. 그의 여성 인물들은 항상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작가는 그 뒤에 숨은 비밀을 발견하려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들을 그린다. 그러나 그녀들 중 상당수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사랑한 남자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본고에서는 『인간극』에서 `팜므 파탈`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세 명의 여인들을 중심으로 발자크의 남성적인 관점이 창조해낸 여성상을 살펴봄으로써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서 그녀에게 투영된 환상들과 욕망, 두려움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팜므 파탈`은 무엇보다 남성적인 환상의 산물이다. 베아트릭스(『베아트릭스』), 발레리 마르네프(『사촌 베트』), 푀도라(『나귀 가죽』)는 모두 베일에 가려진 인물들인데,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은 그녀들에게 욕망과 환상을 품는다. 즉, 이 세 인물은 `눈속임`과 `은폐`로서 남성을 조종하는 것이다. 또, 그녀들은 타자가 필요 없는, 스스로 충족되는 욕망의 구조인 나르시시즘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완전함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퇴행적인 특성이 남성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비로움와 나르시시즘의 기저에는 근본적인 결여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푀도라, 베아트릭스, 발레리 모두 알고 보면 숨길 것이 있는 여성들이다: 푀도라는 서민적인 출신, 베아트릭스는 빈약한 몸, 버림 받았다는 사실, 사촌 베트의 분신이자 복수의 도구인 발레리는 그녀의 열등 의식과 복수심. 이복수심이라는 것이 이 여인들의 진정한 동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팜므 파탈`의 모티브와 흔히 얽혀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여성에게서 오는 이런 위협 역시 남성적인 거세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것으로, 여성이 자신에게 결여된 남근을 탐낸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인간극』의 팜므 파탈들은 주변의 남성-연인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들까지-들을 모두 무력화시킨다는 데서 `남근적 어머니`의 모습을 띤다. 발자크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그렇지만, 특히 이 세 작품에서 여성은 쌍을 이루어 등장한다. 타락한 `팜므 파탈`과 대비를 이루는 성녀 같은 어머니상이 나오는데, 자세한 분석의 결과 두 여인은 궁극적으로는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결국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여성상은 남성 문화가 그녀를 `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위의 세 여성 인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은 그런 정의의 틀을 항상 벗어나고 남성 헤게모니가 규정한 범주 속에 갇히지 않는, 부유하면서 그런 범주들의 임의성을 고발하며 위협하는 존재이다. 베아트릭스, 발레리, 푀도라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녀들의 위력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것은 남성의 자기 환멸일 뿐이다. 발자크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바라보면서도, 남성들의 환상,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여성상을 해체시키고 있다.

『잠자는 남자』, 숨은 "나"

김명숙 ( Myoung Sook Kim )
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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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칭 소설 형식으로 쓰인 『잠자는 남자』는 페렉이 시도한 새로운 형태의 자서전적 글쓰기이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제된 `나`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누가 이야기하는가?` `나는 어디 있는가?` 이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필립 르죈느와 제라르 쥬네뜨의 자서전, 소설에 관한 형태론적 정의와 고찰을 살펴보았다. 『잠자는 남자』의 경우 이야기의 차원에 있어 화자와 주인공이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함으로서 고전적인 장르 구분을 벗어나 있다. 이중의 독서가 가능한 이 작품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위해 `페렉은 왜 이와 같은 글쓰기를 시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위해 페렉이 완성하지 못한 자서전 계획과 이후 발표된 작품들을 아울러 고찰함으로써 이 작품이 페렉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았다. 이차세계대전으로 부모를 잃은 페렉의 극복하지 못한 상처의 불완전한 초상인 `너`는 `나`를 쓰기까지의 작가의 고뇌를 반영한다. 페렉은 『잠자는 남자』를 마치면서 `너`로부터의 갈등에서 벗어나 『W 혹은 유년시절의 기억』의 `나`의 이야기를 찾아가게 된다.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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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는 젊은 시절 소네트 「오르페우스」에서 《신전 건축》의 정경을 묘사했다. 약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유사한 주제를 다룬 『암피온』의 주인공은 그의 옛 작품 속에 등장했던 오르페우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본 연구가 발레리의 `건축의 주제`의 선택에 대해 특히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가 신화적 배경을 재창조하여 그 자신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그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적, 존재론적 비전을 표현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이다.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보는 주체의 관점과 관련된 풍경"이라는 각도에서 작품 속 풍경에 접근하고자 할 때 두 주인공 오르페우스와 암피온을 둘러싼 풍경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시인 자신의 비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 본 연구가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이라는 『창세기』적 풍경이 반복되고 있는 점이다. 작품 말미의 "신전-리라"의 "찬가"에 의해 암시되고 있는 조화로운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들의 첫 배경은 아직 태초의 혼돈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연을 보여준다. 「오르페우스」에서 주인공은 창조를 주도하는 "신"으로 묘사되며, 그의《노래》는 정돈되지 않은 원시의 공간을 순화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해 "신전-리라"의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신전"은 신의 원리와 대지의 물질, 초자연과 자연의 결합으로부터 탄생한 창조물이다. 이 놀라운 `종합 synthese`의 예는 『암피온』의 신전 건축 장면에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처음부터 자연을 지배하는 신으로 등장하는 오르페우스와는 반대로, 암피온은 `동물상태`에 가까운 원시의 사냥꾼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아폴론에 의해 정화되고 리라를 넘겨받은 이후에야 원시적 존재에서 초인간적 존재로 변화하며, 신전 건축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아폴론에 의해 정화된 암피온은 그 스스로 무질서의 자연을 순화한다. 이 과정은 오르페우스에 의한 자연의 순화 과정과 매우 유사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 속 풍경은 `혼돈`으로부터 `문명`으로의 이행을 묘사하고 있다. 신전 건축의 풍경 속에서 암피온의 이미지는 문명의 창시자이며 인간의 구원자인 아폴론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표현된다. 마침내 완성된 신전은 "대지 위에" 실현된 "천상의 예지"를 상징하며 그 조화로운 풍경은 자연의 혼돈에 작용한 신의 질서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오르페우스」와 『암피온』의 풍경 속에서 발레리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은 혼돈과 암흑`의 공간을 다듬어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를 건설한다. 이 작품들 속에 표현되고 있는 `혼돈`과 `조화`의 풍경은 미쉘 콜로 Michel Collot에 의해 부각된 "카오스모스 Chaosmos"라는 용어를 환기시키지만, 이 용어가 의미하는 바의 `코스모스의 공간 안에 카오스의 공존`이나 작품 전체에 걸쳐 표현되는 풍경의 양면성은 아니다. 본 연구가 발레리의 두 작품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카오스모스적" 풍경과는 구분되는 "혼돈에 대한 질서의 승리", "혼돈의 극복"인 것이다. 한편, 신화적 공간에 대한 발레리의 고유한 해석은 그의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과 작품 속에서나마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천상의 질서가 대지의 혼돈에 조화를 부여하고 "대지는 필연적으로 천상을 지향하는" `종합적 synthetique`인 유토피아의 개념을 의미한다. 「오르페우스」와 『암피온』의 풍경은 천상과 대지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는 궁극적 공간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며, 이는 발레리가 그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는 도달하지 못했던 유토피아의 궁극적 형태인 것이다.

랭보 작품에 나타난 시적 현존(現存)

곽민석 ( Min Seok Kwak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1권 0호, 2010 pp. 87-109 ( 총 23 pages)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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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랭보는 항상 한 곳에 정체하거나 멈추지 않고 부단히 미래(l`avenir)와 미지(l`inconnu)를 향해 움직이는데, 바로 이런 랭보 특유의 경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시적 시간이 바로 그의 시 세계에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현재(present)`다. 왜냐면 시인에게 있어 `현재`는 다른 어떤 시간보다 생성(devenir)의 순간을 가장 잘 표현하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의 한 철 Une Saison en enfer』에서 보여준 정신적·예술적 위기를 뒤로한 채,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하려는 랭보의 시적 의도와 경향을 바로 `현재`라는 시간이 가장 잘 드러내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시집에서의 시적 배경과 진행의 주된 시간은 현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랭보 시 세계의 주된 시간은 다른 어떤 시간 영역보다 현재에 대한 선호와 함께 시인의 시 세계가 전개하듯 시간의 `경계(seuil)`에 위치하면서 그 시적 시간의 이미지들이 형성하는 `즉각성(또는 순간성instantaneite)`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런 관점에서『일류미나시옹 Illuminations』 시집은 랭보가 그의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어느 정도로 시간 개념을 중시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어느 이성(理性)에게 A une Raison」라는 시에서는 랭보의 시 세계가 새로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바로 `새로운 조화(nouvelle harmonie)`, `새로운 사랑(nouvel amour)`이다. 그리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시인은 "우리들의 운명을 바꿔라. 재앙들을 거르라. 시간으로부터 시작해서(《Change nos lots, crible les fleaux, a commencer par le temps》)" 라고 외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서의 한철』이 보여주는 미혹적이고 몽상적인 시 세계와 시인 자신의 자기 파괴적인 내적 고찰을 통해, 이전의 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 세계를 추구하려는 랭보에게 있어, 모든 시적 시도는 먼저 시간(temps)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특히 『일뤼미나시옹』이 잘 보여주듯 시적 시간은 다양한 다른 시적 요소들과 서로 상호 작용을 아주 짧은 시간에 신속하면서도 그러나 강렬하게 이뤄진다. 현실의 모든 것을 파괴 또는 해체하며, `장소와 사람들을 변형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모든 모습들 사이에서 온갖 특성을 지니는 존재들과 함께 여러 감정적 집단의 강렬하면서도 신속한 꿈꾸기"로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하게 되는 기본적인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강렬하지만 순간적인 이러한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시 세계는 문학에서 그를 침묵으로 이끌고, 문학에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해체하고 현실에서 일상인으로서의 랭보를 재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 자신을 포함한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한 끝없는 파괴, 해체 그리고 재창조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쥘 쉬페르비엘의 작품 속에 나타난 죽음과 추억의 거리

이주현 ( Goo Hyun Lee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1권 0호, 2010 pp. 111-134 ( 총 24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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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쥘 쉬페르비엘의 시 작품 속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죽음과 거리의 인식, 그리고 존재의 추억들이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이해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시인은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태어나는데, 그가 8개월 되던 때 그의 부모는 녹청이 섞인 수돗물 음독사고로 두 분 모두 남프랑스의 올로롱-쎙뜨-마리에서 사망한다. 삼촌과 숙모를 부모로 여기며 자라나던 그가 아홉 살의 나이에 우연히 알게 된 부모의 죽음은 자신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시킨다. 자신과 주변의 존재들에 대한 낯섦과 죽음은 시인을 떠나지 않는 하나의 화두로서, 그는 죽음과 삶, 산자와 죽은자들 사이에 가로놓여있는 거리에 대한 인식에 천착(穿鑿)하게 된다. 쉬페르비엘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주요한 단초가 되는 이러한 전기적 사실은 그의 시 전반에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드리워져있는 죽음과 죽은 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그의 부름의 방식을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쉬페르비엘은 절대적인 듯 보이는 죽음으로부터 그림자이며 침묵이던 것들의 고백을 듣는다. 시인은 죽은 자들을 회합시키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석회지붕 위로 올라 하늘을 향해 우뚝 선 아이 같은 모습으로 피레네 하늘의 밤을 울리는 "인간추 battant humain"가 되려한다. 멈출 수 없는 성난 부름으로 죽음 저편의 세상에서 오는 응답을 기다리는, 시인이 지닌 힘겨운 소통의 욕망은 산자와 죽은 자의 거울인 "우리 nous"라는 개념 속에서 삶과 죽음을 나누는 시공간의 거리를 지우는 듯하다. 산자와 죽은 자들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에 대한 도저한 인식은 시인이 지닌 존재론적 의무로까지 확장된다. 세상의 모든 장소에서 오는 죽은 자들의 고백이 시인의 하얀 종이 위에 내려앉을 때, 죽은 자들은 쉬페르비엘이 두 번째 죽음으로 간주하는 망각의 밤으로부터 구원된 "르브낭 revenant"이 된다. 르브낭은 시인에게 있어서 유령이라기보다는 회귀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 저편의 존재들은 이곳으로 돌아오는가? 회귀자들은 세계의 본질이 재생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주고자 한다. 인간의 추억은 죽은 자들에게 존재의 각본을 부여하는 또 다른 재생의 방식이다. 그래서 시인이 "촉촉한 기억 la memoire mouillee"이라고도 부르는 추억은 꿈의 거리에 있는 여행자의 가방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며 찬란한 태양의 이미지를 지니게 된다.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은 추억으로 가득한 시인의 가슴에 의해 다시 그려지는 것이다. 추억의 개념에는 다시금 죽음이 부각되기도 하는데, 시인에게 죽음이란 익사자의 현기증이나 꿈의 세계를 여는 깊은 잠 같은 것이다. 강과 바다는 쉬페르비엘에게 있어서 죽음의 장소라기보다는 깨어남의 장소로서 어머니-자궁-원천의 의미소들이 물과 함께 형상화되어 익사자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한다. 지상에서의 죽음이 죽을 수 없는 천상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익사자는 그렇게 푸른 창이 있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 창은 무한한 우주로 열려있다. 그것은 또한 본 연구가 "이 곳은 영혼이 말을 갈아타는 역참이 분명하다"라는 시인의 묘비명을 상기해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뫼르소, 이인으로 남은 이인

이기언 ( Kie Un Lee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1권 0호, 2010 pp. 135-203 ( 총 69 pages)
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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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이인』이 출간된 지 곧 70년이 된다. 그렇다면,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리고 결코 낯설지 않은 뫼르소가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 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이인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뫼르소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본 연구는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폴 리쾨르의 해석학 이론을 빌려 『이인』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 텍스트에서 뫼르소는 화자이자 주인공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뫼르소는 무엇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리쾨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기 인식" 혹은 "자기 이해"를 위해서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자기 인식"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전통과는 달리 "간접적인" 인식이다. 즉, "자기 인식"은 3중의 매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자기 행동"을 통해서, "자기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타인들이 자기에게 내리는 "도덕적 평가"를 통해서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의 간접성은, 너무나 우연하게도, 『이인』 텍스트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뫼르소는 "자기 행동의 주체"이고, "자기 이야기의 화자이자 인물"이고, 타인들이 내리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매개들을 분석하면서 이인 뫼르소의 다르고 특이하면서도 다양한 얼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 얼굴들의 합이 뫼르소의 정체성을 규명해 줄 것이다. 『이인』에 대한 우리의 해석학적 읽기는 뫼르소가 "자기 행동"을 통해서, "자기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도덕적 평가"를 통해서 자기 인식 혹은 자기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첫째로, "자기 행동의 주체"로서의 뫼르소에 대해서는 장례식에서의 행동, 살인 행위 그리고 교화 신부에게 퍼붓는 분노 행위 분석을 통해서 뫼르소의 "특이성" 혹은 "이인성(etrangete)"을 확인하고 있다. 장례식의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심함"을 보여주는 "내면 의식"이 비어있는 인간이지만, 자기 육신과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간이다. 한 마디로, 그는 "육신의 인간(home de chair)"이다. 운명의 날, 그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태양을 이기고자" 그리고 "태양을 떨쳐내고자" 사력을 다한다. 육신이 심각한 위협에 처한 그는 "불가항력(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의미에서)"에 이끌려 아랍인의 칼날에 반사되어 그의 두 눈을 파고드는 태양을 향해 발사한다. 해석학적 차원에서 『이인』 텍스트는 뫼르소가 첫발을 아랍인에게 발사했다는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태양을 향해 겨누었다는 해석을 낳게 하도록 되어 있다. "태양을 사랑하는" 그리고 "육체적으로 태양에 종속된" 뫼르소는 태양 살해자이다. 그는 자기의 `사랑`과 `자기의 주인`을 동시에 살해한 "부조리한 인간"이자 "반항인"이다. 사르트르가 지적했듯이, "부조리한 인간은 반항에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교화 신부에게 퍼붓는 분노 행위에서는 "반-기독자"로서의 뫼르소가 삶과 운명에 대한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처음으로 드러내는데, 무엇보다도 이 분노 행위를 통해서 "새 뫼르소(un nouveau Meursault)"가 탄생한다. 둘째로, 뫼르소는 『이인』의 화자이자 인물이다. 화자 뫼르소는 장례 기간 동안 자기 몸의 욕구와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세밀한 묘사를 하고 있지만, 정작 장례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관 장면은 언급하지 않는다. 자기 내면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화자의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다. 살인 장면에서도 생자의 몸에서 흘러나왔을 붉은 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역시 화자의 전략이다. 마치 그가 살해한 태양은 `피가 없다`라는 것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감추기 전략의 대가인 화자 뫼르소는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치 남에 대해서 얘기하듯이 혹은 남이 자기에 대해서 얘기하듯이 말한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이인』의 "나(je)"는 "그(il)"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 화자가 자기 자신을 `타자(他者)` 혹은 `이인(異人)`으로 만들고 있다. 등장인물로서의 뫼르소는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극도로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소통 의지가 철저하게 결여된 인간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와도 성공한 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제대로 그를 이해하는 인물이 없다. 이런 배경에는 우리가 `등가 윤리(morale egalisatrice)`라고 부르는 그의 철학이 자리 잡고 있고, 그래서 그는 신조어로 표현하자면 `마찬가지주의자(ca-m`est-egaliste)`이다. 이처럼, 그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자기를 낯설게 하는 자이고, 사회가 그를 낯선 자로 만든다. 한 마디로, 이 사회에서 그는 `유별난 인간`, `다른 인간`, `기인(奇人)`이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인간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의 죽음, 즉 "태양을 사랑하는 동물의 육체적 두려움"과 맞서게 된다. 소설 마지막 장의 전반부(후반부는 교화 신부와의 대화에 할애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쪽수가 같다)에 묘사된 자신의 죽음과의 처절한 투쟁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뫼르소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토록 드러내지 않던 그의 내면 사고가 사형 제도에 대한 그의 담론에서 처음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명증한 정신으로 모든 생존가능성(탈출, 상고, 사면)을 하나하나 배제하고 난 후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래, 나는 죽는다(Eh bien, je mourrai donc)." 이제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죽음을 정복한 자`, 즉 `자기 죽음의 주인`이다. 셋째로, 우리는 타인들, 특히 법조인들(수사 검사, 변호사, 공판 검사)의 뫼르소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이인』의 소설구조 자체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 소설의 1부는 자연인 뫼르소를 기술하고 있고, 2부(1, 3, 4장)는 살인을 저지른 이 자연인 뫼르소에 대한 법조인들의 해석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석학적으로 볼 때, 1부는 읽어야 할 텍스트이고, 2부는 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법률학은 해석학의 한 분야이고, 법조인들의 작업은 심문과 증언에서 체취한 문서, 즉 텍스트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해석학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문제는 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의 원인은, 해석학적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법조인들이 "텍스트의 의도"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 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공판 검사는 뫼르소를 "도덕적 괴물(un monstre moral)"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인』 텍스트에는 두 뫼르소가 있다. 1부의 뫼르소와 2부의 뫼르소가 있는데, 같은 물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낯설고 다른 자이다. 이런 점에서, 뫼르소는 `이인(異人)`이자 `이인(二人)`이다. 이것은 죄수 뫼르소가 독방에서 자신의 얼굴이 비친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뫼르소가 "웃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울 속의 이미지는 "심각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카뮈 자신이 지적한 대로, "『이인』의 의미는 정확하게 2부 구조의 평행관계에 담겨 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인』 텍스트가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뫼르소의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앞에서 뫼르소가 때로는 보통 사람, 때로는 다른 사람, 때로는 특이한 사람, 때로는 예외적인 인간, 때로는 유일한 인간, 때로는 엉뚱한 인간, 때로는 이인(異人), 때로는 기인(奇人),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낯선 인간, 때로는 사회에 낯선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았고, 게다가 화자 뫼르소와 인물 뫼르소, 1부의 뫼르소와 2부의 뫼르소가 서로에게 이인(異人)이면서 이인(二人)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여기에다 뫼르소 자신이 말하는 "새 뫼르소"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모두에 던진 물음에 대해서 뫼르소는 `이인으로 남은 이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찾아낸 뫼르소의 정체성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글의 모두에 명시했던 우리의 해석학적 읽기의 전제, 즉 뫼르소가 "자기 행동"을 통해서, "자기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타인들이 자기에게 내리는 도덕적 평가"를 통해서 자기 인식 혹은 자기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전제의 결과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이론모델을 제공한 폴 리쾨르의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타자처럼 자기 자신(Soi-meme comme un autre)". 리쾨르의 이론을 따른다면, 이것이곧 뫼르소의 "이야기 정체성(identite narrative)"일까?

에세 장르 연구 -몽테뉴의 『에세』에 나타난 차용과 자아성찰을 중심으로

이선희 ( Seon Hee Lee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1권 0호, 2010 pp. 205-229 ( 총 25 pages)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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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의 진보로 말미암아 16세기의 문학은 작품집의 보급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수록내용 및 형태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경험한다. 에라스무스나 로디기누스의 작품집에서 그 특성을 볼 수 있듯이, 고대의 방대한 지식을 당대인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고대 문헌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발췌하여 "글모음집", "교훈집", "주해서" 등이 다수 발간된다. 프랑스 작가들 역시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이러한 경향에 동참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연구는 현재 상당히 미흡하다. "발췌집" 혹은 "잡언집"의 기원은 적어도 고대 아울루스 겔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 문학적 전통은 일화, 격언, 속담, 교훈 등을 수록하는 보나방튀르 데 페리에, 기욤 부쉐, 베로알드 드 베르빌 등의 16세기 작가들에게로 이어진다. 몽테뉴의 『에세 Les Essais』가 이러한 문학적 배경을 안고 집필되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첫 번째 목적이다. 앞서 언급한 아울루스 겔리우스에서 출발하여 16세기의 스페인 작가 페드로 메시아의 중간 단계를 거쳐 몽테뉴에 이르러서, 다른 작가의 글이 어떤 방식으로 한 작품 안에 수용되는지 살펴보면서, "에세 essai"라고 하는 장르의 형성을 고대부터 이어져온 문학 전통 속에서 찾아본다. 두 번째 목적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차용하는 데에 있어서 이전 작가들과 변별적으로, 몽테뉴가 『에세』에서 중점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글쓰기 방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일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글이 그저 남의 글을 짜깁기한 책이 아니라는 점을, 단순히 박식함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에세』 전체에 걸쳐 차용한 천오백 여 가지의 일화들은 원텍스트에 서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시 말하면 『에세』안에서 새로운 맥락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활용되어진다. 그것을 차용하는 몽테뉴의 방식은 다양하다. 원작가와 원전을 밝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등장인물과 이야기 전개는 원전과 동일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혹은 더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건 중요한 것은 몽테뉴가 전개하고 있는 단락의 흐름, 생각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차용해온 이야기, 다른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그 이물질들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의미를 지닌다. 일화의 차용과 시구의 인용으로 점철된 초기에 쓰여진 장들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말하자면 다양한 작가가 쓴 각양각색의 인생담을 빌어 자기 자신의 판단력을 시험하는 것, 비판적 자아 성찰로 이르는 것이 몽테뉴와 이전 작가들을 분명하게 구분 짓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과 『연인』읽기 -자전적 언술행위로부터 자아의 글쓰기로

피에릭미코티스 ( Pierrick Micottis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1권 0호, 2010 pp. 231-250 ( 총 20 pages)
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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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과 마르그리뜨 뒤라스의 『연인』은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자전적 언술행위를 시도한다. 이 두 작품에서 글 쓰는 행위는 자서전에서 제기되는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드러내는 언술행위를 통해 작품 초반부터 형식화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의 자전적 형식화는 또한 동일 인물의 입을 통해 행해진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움직임 속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적 탐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의해 그 탐구의 방법을 드러낸다. "자아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연인』의 뒤라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하나의 길도 아니고, 중심도 아니며, 그저 하나의 비전일 뿐이다". 폴 리쾨르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과거의 지나가버린 변화하는 자아와 영속적인 동일체로서의 자아 사이의 모순과 충돌은 유르스나르와 뒤라스로 하여금 각각의 등장인물을 통해 서로 아주 다른 자전적 비전을 제시하게 한다. 유르스나르에게 있어서 자전적 비전은 하드리아누스의 내면적 비전에 부의 역사적 지식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여기서 하드리아누스는 자기의 자전적 탐구 및 글쓰기를 스스로도 미처 송두리째 인식하지 못하는 낯선 누군가로 자신을 인식한다. 뒤라스에게 있어서 주인공의 내부와 외부 탐색의 촉발제가 되는 것은 바로 소녀의 얼굴과 소녀가 쓰고 다니던 남자의 중절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작가의 서로 다른 자전적 비전을 통해, 경험한 시간과 사물의 영속성 사이에서 `본질`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본질`이야말로 자전적 개인을 불변의 존재이자 기억할만한 존재로 위치시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고, 적어도 자기 역사의 설립자로서 자리매김 시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이라는 개념 다음에 강조되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역사를 매개로 출발 시에 제공된 자전적 본질의 순수한 확장으로서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연대기적이고 변증법적인 원칙 속에서 자전적 역사는 자아본질의 심화이자 확장이 되는 것이다.

세잔의 회화기법과 클로드 시몽의 파편화 fragmentation 글쓰기

문혜영 ( Hye Young Moon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1권 0호, 2010 pp. 251-285 ( 총 35 pages)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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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서술성으로서 클로드 시몽의 글쓰기는 파편적인 묘사를 통해 소설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 누보로망 이후 일관된 줄거리가 배제된 소설형식은 클로드 시몽에 와서 묘사들의 파편으로 이루어져 이로부터 생성되는 여러 이미지의 조합이 작품의 의미를 형성한다. 다양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시몽의 작품들은 시각예술, 다시 말해 회화, 사진, 영화와의 상호적인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특히, 회화는 글쓰기 과정에 대한 성찰의 기본바탕 topos을 이룬다. "나는 그림을 그리듯이 작업을 한다"라는 시몽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회화는 시몽의 글쓰기의 기본적인 특징이 된다. 실제로 클로드 시몽은 그림을 직접 그리거나, 사진집을 발간하기도 했는데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주요 화가들 가운데, 특히 세잔은 시몽의 글쓰기에 있어 "보호적인 형상"이며, 창조적 실체의 중요한 참조 referent가 된다. 창작의 의미나 창작과정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시몽과 세잔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세잔은 `인상 impression`이 주는 불안정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느낌을 생생히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눈`과 `뇌`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눈을 통해 지각된 자연의 풍경이 뇌에서 감각의 질서에 따라 정돈된다고 보았다. 시몽의 글쓰기도 눈으로 지각된 이미지들의 미세한 변화와 반복의 상호작용을 통해 총체적 의미를 구성한다. 이처럼 두 예술가의 창작기법은 `지각 perception`과 `감각 sensation`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세잔은 후기로 갈수록 지각의 변화에 따른 자연과 사물의 변화를 그림으로써 실제 이미지와 화가의 내면세계의 변화가 구축하는 파편적 순간을 재현하였다. 시몽 역시 불안정한 지각을 통해 인지된 파편적 이미지를 감각을 통해 조합하면서 작가의 복합적인 내면의 변화를 기술하였다. 특히 인간의 지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지각을 통해 인지된 것들은 전체적인 선이나 몇 가지 색깔, 희미한 형태 등 파편으로 기억되며, 지성을 통해 보완되고 완성된다. 시몽의 소설이 파편적인 묘사의 조각조각난 이미지들을 정립하면서 하나의 전체적 이미지를 구성하게 된 것도 이러한 지각의 불안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세잔이 구축한 `변조`와 `기하학적 도형을 통한 다양한 구도`라는 회화기법은 시몽의 글쓰기에 오면 불연속적 이미지에 새로운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의미망을 구축한다. 세잔은 파편화된 이미지를 "조화의 법칙 loi d`harmonie"을 통해 조합하였는데 시몽 역시 다양한 묘사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어떤 조화 certaine harmonie"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주제와 의미망을 재구성 한다. 이는 퍼즐의 원리로서, 분산된 각 조각들이 서로 맞추어졌을 완성된 이미지를 보는 것과 같다. 1973년의 『삼부작 Triptytique』은 이러한 기법을 드러낸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소설은 각각 「시골 la campagne」, 「교외의 공장지대 la banlieue industrielle」, 「해수욕장 la station balenaire」의 세 가지 픽션으로 이루어졌는데, 각각의 이야기는 공간적으로 서로 대치된다. 각 픽션의 장면들은 서로 교차되어" 액자소설 mise en abime"의 형식을 띠면서"이야기 recit"를 공간화 하는 방식이 된다. 이러한 액자소설의 방식은 "반사성 reflexivite"을 소설의 중요한 특성으로 내세워 이야기 자체의 시간성을 소멸시킨다. 마치 거울의 효과처럼 이러한 형식은 "유사성의 효과 effet des similitudes"를 통해 상반된 이미지에 연관성을 부여하게 된다. 작품 후반부의 "퍼즐"의 암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시몽의 파편적 글쓰기는 흩어진 퍼즐조각을 정성스럽게 맞추면서 하나의 완성된 풍경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시몽의 고유한 글쓰기 기법으로서, 이는 시간적 개념의 소설형식에 "동시성 simultaneite"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세잔의 회화 기법을 토대로 한 시몽의 글쓰기는 결국 "만들고, 찾아내고, 발견하고, 전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불연속적인 묘사의 파편들의 이미지망을 통해 저자가 묘사하는 "내적 풍경 paysage interieur"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은 고스란히 독자의 몫이 된다.

사드의 독자, 플로베르의 웃음

오영주 ( Young Ju Oh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1권 0호, 2010 pp. 287-310 ( 총 24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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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지옥의 작가` 사드를 금서감옥 속에 가두었다. 그러나 유황불의 지독한 연기는 감옥을 새어나와 많은 작가들을 사로잡았고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영향의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할 길은 없는데, 후작의 이름은 사적 글쓰기에서조차 검열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편지들은, 자발적인 소각과 사후의 소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드의 꾸준하고 열광적인 독자였음을 보여준다. 플로베르는 사드에게서 무엇을 읽었으며 왜 그를 `스승`으로 간주했을까? 플로베르의 사드 읽기는 두 시기로 뚜렷이 나뉜다. 1839년 최초로 등장한 사드의 이름은 1845년 이후 약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는데, 이 공백 이전과 이후가 그것이다. 첫 시기의 특징은 `심각한 사드`라 부를 수 있다. 젊은 플로베르에게 사드는 무엇보다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을 소리 높여 말한, 인간의 심연에서 부글거리는 어두운 힘을 백주에 드러내면서 당대의 위선적인 부르주아 도덕에 철퇴를 가한 작가였다. 사드의 악마주의에 매료되었던 이 시기의 독서는 `광란의 낭만주의`의 사드 독법과 구별되지 않는데,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플로베르에게 사드는 범죄와 타락을 시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최초의 시인이었던 것이다. 『마담 보바리』의 출판 직전부터 말년까지 쓴 편지에서 사드는 시종일관 폭소를 터트리게 하는 작품의 작가로 등장한다. 플로베르는 수신자와 자신을 사드의 인물에 비유하고 패러디하면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토해낸다. "이는 내가 만난 가장 유쾌한 어리석음이다", "악한 인물 중에서 오직 사드후작의 인물들만이 나를 웃게 한다"는 그의 말은 이 폭소의 의미를 풀 한 열쇠를 제공한다. 사드의 세계는 어리석다. 그러나 사드의 어리석음은 부르주아 사회에 만연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의 기계적인 반복으로 점철된 `소극적인 어리석음`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는 `적극적인 어리석음`이라는 점에서 유쾌하다는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는다. 두 번째 시기의 독서를 특징짓는 웃음은 플로베르가 자신의 낭만주의를 극복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이상 사드의 텍스트를 `재현`의 맥락에서 읽지 않았음을, 사드의 리베르탱들을 작가의 대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사실 범죄의 쾌락을 위해 세상에 대해 절대권을 행사하는 사드의 리베르탱과 달리, 사드는 사회적 도덕적 영향력을 전적으로 박탈당한 채글을 썼다. 이러한 글쓰기의 조건과 사드의 언어가 보여주는 특이함은 무관하지 않을 터인데, 사드의 언어는 도덕을 설파하는 작가들 혹은 그 담론이 아무리 반사회적이라 할지라도 사회의 게임 규칙 내에서 결국 정체성을 세우는 작가들의 언어와 대척점에 있다. 다시 말해 사드 텍스트의 최종 심급에서 말하는 자는 작가의 자아가 아니라, `비인칭의` 자아인 것이다. 허구의 차원에서 말해지는 것과 현실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단절을 가져온 `감옥의 레토릭`에 의해 사드는 푸코가 언어 자체 혹은 언어의 자율적인 권능으로의 회귀로 특징지었던 현대 문학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고, 바로 이 지점에서 플로베르는 사드에게서 `스승`의 모습을 보았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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