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불어불문학연구검색

Etudes de Langue et Litterature Francaises


  • - 주제 : 어문학분야 > 불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6-4350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85권 0호 (2011)

사르트르의 전쟁의 글쓰기와 여성

조영훈 ( Yeung Hun Cho )
6,800
초록보기
본 논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소설 『자유의 길』3부작 (『철들 무렵』, 『유예』, 『영혼 속의 죽음』그리고 미완의 『기이한 우정』)과 ≪야릇한 전쟁≫ 기간 동안 병사 사르트르에 의해 쓰인 『전쟁 수첩』과 편지를 중심으로 사르트르의 여성관을 재조명하고 있다. 전쟁 소설에서 여성들은 부수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 병사가 될 수 있는 <특권>이 박탈되어 있는 여성들에게 전쟁은 소설 사회 속에서의 시민권을 거부한다. 원시시대 이래 전쟁은 노동의 성적 분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생명을 부여하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걸면서 인간은 동물 상태를 넘어선다. 따라서 인류에게 있어서 우월성은 낳는 성이 아닌 죽이는 성에게 부여되었다" 라고 지적한다. 『구토』에서 『자유의 길』에 이르기까지 소설가 사르트르는 여성 인물들의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범용하고 보수적인 면모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여성적인 것에 결정론적 <본성>을 부여하는 듯하며, 사르트르에게 있어 남성/여성의 이분법과 자유로운 존재/응고된 존재의 이분법이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여성성의 부정적 표상은 철학자 사르트르의 자유의 인간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무엇보다도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기하는 자이다. 실존철학은 이미 결정된 본질로서의 그리고 영속적 규정으로서의 인간 본성의 관념을 거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Dorothy Mac Call은 실존철학은 그 자체 논리 속에서 페미니즘을 포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철학적 이념과 소설적 재현 사이의 모순은 쉽게 해소될 것 같지 않다. 이상주의적, 교화주의적 자유의 철학을 설파하는 철학자 바로 옆에 좀 더 사실주의적이고 비관론에 사로잡힌 소설가를 보는 셈이다. 따라서 Suzanne Lilar와 Michele Le Doeuff 등과 함께 사르트르의 철학적 이론과 허구의 작품 간에 모순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 봐야 한다. 비평가들은 사르트르가 여성을 주로 <점액질visqueux>이라는 물질적 이미지로 비유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점액질>의 물질성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구토』 의 체험은 인간과 세계와의 진정한 만남은 기존 질서체계의 의미를 벗어버린 사물들과의 몽환적 접촉에서 시작되며, 이때 <점액질>을 포함한 범람, 유동, 증식의 물질성은 진정한 창조적 모험의 출발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점액질>은 긍정적, 부정적 두 방향으로 여가(與價)되어 각각 <바다>와 <식물>의 테마를 발생시킨다. 사르트르에 있어 여성의 이미지는 수동성을 의미하는 <식물>의 테마와 유사성을 보인다. 『구토』에서 이미 꿈틀대기 시작한 <바다>는 『유예』에서 거대한 운동의 힘으로 드러난다. 『구토』에서 화자가 빈번히 드나드는 "역부회관"은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로 구성되며, 작품의 결구에서 로캉탱은 순수한 운동으로 표상되는 <재즈>의 세계를 선택하며 기차를 타고 모험을 떠난다. 『자유의 길』에서 <교통기관에 승선하기>는 가장 중요한 라이트 모티브를 형성한다. 『유예』에서 징집병들을 전선으로 실어나르는 <기차의 옆질roulis du train>은 전쟁의 위기의 가속화를, 『영혼 속의 죽음』에서 포로가 된 병사들이 종착지도 모른 채 실려가는 기차의 선로의 분기점은 집단적 운명의 갈림길을 상징한다. 『유예』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기선은 뮌헨 협정의 위기를 통과하는 전 유럽을 환유한다. 이때 <배의 키질tangage du bateau>은 작품의 모든 요소들을 동조화시키는 공명기로써 작용한다. 『구토』에서의 모험-운동의 세계와 여성-식물의 세계의 대립은 『자유의 길』에서 교통기관에 승선하기-전쟁에 들어가기와 교통기관에서 하선하기-전쟁에서 나오기의 대립으로 확대 발전된다. 많은 비평가들은 『구토』의 Anny와 『자유의 길』의 Ivich 만은 사르트르가 여성에게 가한 부정적 판단에서 벗어난 인물이라고 믿는다. 안니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프루스트식의 <완벽한 순간>을 추구하는 여성이다. 안니의 예술적·연극적 삶은 언제나 로캉탱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로캉탱은 안니와의 재회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모색한다. 안니는 사르트르가 몇 년간 관계를 맺었던 실제 여성을 모델로 가장 심혈을 기울여 형상화한 인물이다. 그러나 ≪야릇한 전쟁≫ 기간 동안 병사-작가 사르트르에 의해 쓰인 편지에는 『구토』의 작가가 보여준 바와는 사뭇 다른 태도가 나타난다. "내면적 자아"의 신화를 신봉했던 여성은 전쟁의 위협 앞에서 로 환원된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한다. 『철들 무렵』의 이비크는 마티외에게 젊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러시아 혁명 때에 망명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세계적 위기 상황에 민감한 이 인물은 소설의 공간 속에 <배의 갑판 위의 이민자들emigrants sur un pont de bateau>라는 테마를 발생시켜, 스페인 전쟁 패배 후 미국으로 망명한 고메즈, 『영혼 속의 죽음』의 프랑스 군대의 패주 속의 마티외, 포로들의 집단적 강제 유형, 그리고 『기이한 우정』의 수용소에서 레지스탕스를 조직하는 브뤼네에게 연속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나, 정작 본인은 교통기관에 승선하여 현기증나는 운동 속에서 전쟁이라는 <여행-시련voyage-epreuve>을 체험함으로써 존재론적 상승을 하는 <특권>을 향유하지 못한다. 가령, 『유예』에서 최초의 척추병 환자들의 강제 수송에서 짐짝처럼 화물칸에 실린 샤를르와 카트린느가 기차의 질주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며 사랑을 획득하는 것처럼, 이비크와 마티외의 사랑도 교통기관 안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리 도심을 통과하는 택시 속에서다. 택시는 잦은 멈춤과 느린 속도로 인해 일상적 시간성의 엄습으로부터 사랑의 자발성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그것은 막 태어나자 마자 이미 낡아버린 사랑으로 전락한다. 사르트르 소설에서 문제가 없는 유일한 관계는 『유예』와 『영혼 속의 죽음』에 등장하여 마티외와 단 한번의 사랑을 나누는 Irene와의 관계이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도 모른채 로서 "익명의 하룻밤"을 공유한다. 이렌느 외에 긍정적으로 표상된 여성으로는 『구토』에서 재즈를 부르는 흑인 여가수와, 셍고르가 편집했던 『불어로 쓰여진 아프리카 흑인 시전집』의 서문인 「검은 오르페」에서 사르트르가 인종 차별 없는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가장 혁명적인 시라고 찬양한 <네그리튀드Negrutude>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을 들 수 있다. 특히, <네그리튀드>의 원천으로서 "인간과 자연과의 합일", "흑인 남성과 여성과의 결합" 그리고 "식물적 상징들과 성적 상징들 간의 깊은 융합"을 들고 있는 「검은 오르페」는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여성과 식물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르트르에게 기존 질서 체계의 전면적 붕괴와 새로운 세계의 묵시록적 탄생이라는 전쟁관을 배양한다. 『자유의 길』3부작은 전쟁의 운동 상태에 연결되지 않는 여성성의 여가작용을 부인한다. 1940년대의 사르트르는 계급투쟁과 여성운동은 서로 접목되어야 하지만, 계급투쟁을 가장 시급한 1차적 투쟁으로 여성운동을 부수적 2차적 투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75년에 사르트르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대담에서 여성운동을 가장 시급한 1차적 투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그 근거로 부르주아 여성과 하녀 또는 가정부 사이에, 또는 사장의 부인과 노동자의 아내 사이에 가능한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들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유예』에서 노동자 모리스의 아내 제제트가 뮌헨 협정의 위기 속에서 전쟁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는 부르주아 여성단체 앞에서 보이는 계급의식과는 묘한 대조를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르트르의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의 대립은 글쓰기의 <성적> 규정에까지 작용한다. ≪야릇한 전쟁≫ 기간 동안 병사 사르트르는 일기체 글쓰기로 『전쟁 수첩』과 편지들을 남기고 있으며, 『구토』와 『자유의 길』3부작 중 특히 전쟁의 글쓰기가 극대화된 『유예』또한 날짜가 매겨진 일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작품들은 잡다한 이종 교배식 글쓰기라는 공동 특징을 지닌다. 각 작품은 동일한 주제 또는 동일한 상황에 연관된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요소들은 서로 매우 이질적이고 항용 미완성이고 언제라도 새로 시작하며 때로는 상호 파괴적이다. 텍스트는 특히 운동과 자유로운 흐름, 즉흥성과 예측불가능성에 의해 의미를 생산한다. 사르트르에 있어 일기체 글쓰기는 혼란과 동요, 파열과 붕괴가 지배하는 세계 즉 현란한 운동 상태의 세계를 재현하는 탁월한 수단이다. 즉, 사르트르에 있어 일기는 무엇보다도 <전쟁 일기journal guerrier>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일기체 글쓰기가 지닐 수 있는 내재적 위험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로캉탱은 "내 느낌을 예쁜 새 공책에 계집애들처럼 매일같이 쓰는 일을 그만 두겠다"라며 일시적으로 일기 쓰는 일을 포기하며, 병사-작가는 ≪야릇한 전쟁≫ 기간 동안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여러 작가들의 일기를 읽으면서 "일기의 문제는 진실성이다"라고 개탄한다. 병사 사르트르에게 다른 작가들의 평화로운 시절에 쓰인 <점액질>의 시간성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일기가 어떻게 보였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의 사르트르에게 있어 운동과 비 운동의 대립, 전쟁 상태와 비 전쟁 상태의 대립은 이처럼 전횡적이어서 자의적 장르 개념을 낳고 있다.

문학번역에서 환유와 제유: 문제점과 번역의 제안

최미경 ( Mi Kyung Choi )
7,500
초록보기
문학텍스트에 나타나는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 중의 하나인 환유와 제유법은 기존 언어의 표현을 대체하면서 문체의 효과를 노리는 방식으로 고대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온 문채이다. 수사학자들은 환유와 제유를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환유가 장소, 특색, 내용, 형태 등 다양한 특징을 잡아 전체를 표시한다면 제유법은 지시대상의 일부만을 일컬어 전체를 표현한다. 그런데 환유와 제유는 이미 단일 언어 및 문화권에서도 처음 사용 되는 경우에 이해를 위해서 공유하는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자주 사용하여 굳어진 표현의 경우에는 수사학적 신선미를 잃고 일반 언어의 용법으로 간주된다. 이런 이유로 번역작업에 서 환유와 제유의 처리는, 특히 한국어와 불어라는 언어적, 문화적 연관성이 적은 언어간 번역에서 더욱 흥미로운 관찰거리를 제공한다. 환유와 제유는 상황 및 문맥, 공유하는 지식을 기반으로 기능하며, 그 효과는 표현의 간결, 신선함, 반복을 피함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유법은 언어 현상 자체에서도 관찰이 된다. 각 언어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지시 대상의 특성 중 일면을 선택하는데 이 선택방식은 언어, 문화에 따라 다르다. 이런 언어 자체의 제유법 현상으로 말미암아 번역과정에서 번역가는 각 환유, 제유의 경우를 분석하며, 사용된 언어형태의 재사용가능여부, 기존의 등가 의미의 형태로의 대치, 새로운 기법의 추구 등의 시도를 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한-불 문학번역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부족하나마 상기 현상을 고찰하며, 한국인 번역가와 불어 원어민 감수자의 재표현 추구과정을 통해 환유와 제유의 번역과정 구축을 관찰, 분석한다. 특히 원래 사용된 언어적 표현의 대응어로의 번역만을 추구하기 보다는 등가의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해당 표현의 문맥과 의미, 효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표현을 추구하는 방식을 적용하였으며, 원어민 감수자가 가독성을 1차 검증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가스통 미롱의 또 다른 얼굴 -"한(恨)"과 "누님"의 시학으로 본 ≪꿰맨 인간≫

한대균 ( Dae Kyun Han )
5,500
초록보기
가스통 미롱의 시집 ≪꿰맨 인간≫은 지배당한 퀘벡 역사에 대한 슬픔과 절망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늘 희망이 동반되고 있으며, 현실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민족적 정서에 대한 호소가 함께 담겨있다. 우리는 시집의 이런 특수한 감정의 형태를 한국의 한의 개념과 견주어 비교하고자 한다. 역사의 희생자인 유대 시인 파울 첼란의 ``르상티망``(원한) 혹은 윤동주와 같은 한국 시인이 담고 있는 민족의 한은 그렇지만 ``생산적인 슬픔``이다. 이 역사의 언어들은 개인적 서정의 틀에서 벗어나 집단적 운명의 앞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김춘수 혹은 기형도의 존재론적인 슬픔 역시 그 근본에는 한이 있으며, 이것은 1960년대 조용한 혁명기의 시편들인 ≪꿰맨 인간≫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꿰맨 인간≫에는 늘 동반하는 ``여인`` 혹은 ``소녀``가 존재한다. 때로는 조국으로 때로는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화신으로 시에 드러나 있는, 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존재는 우선 일제 강점기 시대 한용운의 ``님``을 연상시키고 있다. 또한 가스통 미롱의 이 ``여인``은 해방 이후 가난과 시대적 허무주의에 빠진 한국시인들의 ``누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시어의 함의를 담고 있다. 고은이나 신경림의 시편들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가스통 미롱의 언어의 리듬은 민족의 감정에 대한 뛰어난 표출이며, 시의 역사성에 대한 문학적 성취로 볼 수 있다. 시인이 말하는 ``슬픔의 유산``은 ``한의 시학``이며, 이런 강독을 통하여 우리는 문학이 서사적 언어와 서정적 감성을 통하여 그 보편성이 획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희극』의 미완성 소설 -『프티부르주아』, 『농민』, 『아르시의 의원』

김인경 ( In Kyoung Kim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5권 0호, 2011 pp. 99-128 ( 총 30 pages)
6,500
초록보기
『다양한 작품들』2권을 살펴보면, 불완전하게 끝이 난 텍스트, 중지된 텍스트 또는 포기된 텍스트가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더욱이 수많은 초안과 단편들 혹은 포기된 제목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상당하다. 따라서 "중단된" 미완성은 발자크의 글쓰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텍스트확정(etablissement de texte)"에 주력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플레이야드 판 『인간희극』12권과 생성자료(dossiers genetiques)의 최종 자료를 검토한다면,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게 될 ``미완성``은 『인간희극』의 프로그램화와 중요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플레이야드판 『인간희극』가운데 『프티부르주아』와 『아르시의 의원』은 결말이 없는 미완성 소설로 출간되었고, 『농민들』은 결말이 있는 소설로 출간되었다. 사실 발자크는 이 세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하게 된다. 미완성의 이 세 작품은 발자크 사후에 에브 드 발자크 (Eve de Balzac-마담 한스카)와 샤를르 라부 (Charles Rabou)에 의해 결말이 맺어진 후, 완성되어 출판되었다. 라부가 『아르시의 의원』 과 『프티부르주아』를, 에브 드 발자크가 『농민들』을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프티부르주아』 와 『농민들』은 이러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지 않고, 『아르시의 의원』만이 "Ch. 라부에 의해 종결된"이라는 문구가 작은 글씨로 소개되었다. 20세기 후반 발자크연구가들에 의해 『아르 시의 의원』과 『프티부르주아』는 라부가 쓴 완성부분을 제외한 발자크의 미완성 소설로 출판된 반면, 『농민들』은 에브의 결말 그대로 출판된다. 물론 『농민들』의 완성정도, 작품 성, 규모나 그 중요도는 『프티부르주아』와 『아르시의 의원』과 비교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완성 소설``이라는 본 연구는 세 작품의 생성과정과 『인간희극』의 프로그램화를 함께 고려해서 진행된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희극』시스템"의 피할 수 없는 역기능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이 세 작품은 발자크가 『인간희극』총서를 기획 구상한 이후에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된 작품들이다. 본 연구는 각 소설의 내용과 결말이 『인간희극』이 지니는 긍극성에 맞추어서 그리고 『인간희극』안에서의 그 이야기의 삽입에 따라서 다양한 각도에서 중단, 재고 혹은 수정이 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발자크의 미완성소설 『프티부르주아』, 『농민들』, 『아르시의 의원』(글쓰기의 중단 순으 로)을 통해서 총서『인간희극』의 미완성에 대한 문제인식을 펼치면서 구체화한 연구를 진행한다. 즉 총체화하려는 기획으로서의 『인간희극』과의 관계에서 각 작품을 탐색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 작품들 각각의 특수한 점들을 구체적인 생성자료(육필원고와 다양한 판본들)를 통해서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생성자료는 발자크 글쓰기의 과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인간희극』의 시스템에서 야기된 문제들이 각 작품의 미완성의 주요원인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결말을 지어야 한다는 강압에 대한 서사구조의 저항(『프티부르주아』의 경우), 소설의 줄거리자체를 손상시키는 여러 갈래로의 이야기 증식(『아르시의 의원』의 경우), 소설적 논리의 발전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 『인간희극』의 토대까지도 위협할지 모른다는 벽 앞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거부(『농민들』의 경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세 개의 미완성 소설 『프티부르주아』, 『농민들』, 『아르시의 의원』은 시스템을 갖춘 『인간희극』과의 조화를 꾀하기 어렵게 되고, 발자크는 더 이상 글쓰기를 진전시키지 못한 것으로 본 연구는 결론짓는다.

시 속에의 시체 묘사 -보들레르와 벤의 비교 고찰

김시몽 ( Si Mon Kim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5권 0호, 2011 pp. 129-151 ( 총 23 pages)
5,800
초록보기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발간된 당시 큰 논란을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시집의 불건전한 성향 때문이었는데, 이 불건전함을 대표하는 시가 시체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한 시체Une charogne」이다. 이 시는 오랫동안 시집 『악의 꽃』전체를 상징하는 시로 평가받아왔고, 그것은 바로 보들레르가 『악의 꽃』속에서 다루는 테마들이 이 시를 통해서 극단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시의 방향을 잡아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악의 꽃』발간 당시, 다수의 프랑스 시인들은 물론 주변 유럽의 시인들이 보들레르의 시집에서, 특히 「한 시체」라는 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의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의 초기 시들을 살펴보면 보들레르 풍의 시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시체공시장. 기타』(1912)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고트프리트 벤의 시집은 보들레르에게서 받은 영향을 승화시켜 그의 근대성을 한 단계 더 높였다고 평가된다. 고트프리트 벤의 시집 『시체공시장. 기타』가 발간된 당시, 그의 시집은 『악의 꽃』에 버금가는 혹평과 비판을 받으면서 독일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다. 본 논문에서는, 시체를 마치 의학적 보고서처럼 묘사 했던 벤과 보들레르의 시를 비교해 봄으로써 그들이 근대시에 미친 영향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들레르와 벤이 시를 쓴 상황은, 그 역사적 시점은 다르지만 사회·문화적 조건은 흡사했다. 보들레르가 1848년 혁명의 실패로 인한 환멸과 낭만주의의 과도한 서정성에 거슬러 죽음의 현실을 꾸밈없이 드러내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벤은 빌헬름제국의 자본주의 속에서 흥행하고 있는 신낭만주의의 위선적 서정성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응하려고 한다. 불건전한 주제에 객관성을 부여함으로써 낭만적 자아의 과시를 깨뜨리고자 한 벤은, 예를 들어 「아름다운 청춘Schone Jugend」이라는 시에서 사람의 시체는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물건으로 그려지고 반면 그 시체를 뜯어먹는 쥐들은 오히려 생기 있게 그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의 「한 시체」도 시인이 여인에게 너도 죽으면 한 시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얼핏 보면 보들레르 시의 결말이 메멘토 모리의 전통을 이어준다고 할 수 있지만, 시체 앞에서 죽기 전에 삶을 즐기자는 이야기보다는 죽음의 실상을 확인할 뿐이다. 벤은 이보다 더 나아가 니체가 주장한 신의 죽음을 확인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벤과 보들레르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이다. 보들레르의 시집은 선과 악, 미와 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제시하지만, 이 모든 문제들이 종교의 틀 안에서 제시된다. 보들레르가 사탄을 앞세울 때조차도 그는 기독교적 사고 속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벤의 경우는 신이 사라진 세상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벤에게서 신의 죽음으로 인한 실존주의적인 허무를 견디기 위해 제시된 것은, 보들레르가 윤리적인 허무를 견디기 위해 제시한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로 예술이다. 실존주의적 허무를 그린 『시체공시장. 기타』이후의 벤의 후기 창작 시들은 소위 절대시라는 이름으로 순수문학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이는 보들레르가 결국 예술[시]창작으로 인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 이다. 결론적으로, 시의 근대성을 이룬 이 두 시인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양차대전을 거친 20세기의 비극과 마주 칠 근대문학의 특징적인 성격, 즉 허무주의와 예술적 승화를 통한 극복이라는 특징들을 이들의 작품 속에서 미리 공통적으로 만나 볼 수 있었다.

발레리에게 있어서 프시케의 재형상화 -「발걸음」에 대한 생성비평적 연구

김시원 ( Si Won Kim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5권 0호, 2011 pp. 153-170 ( 총 18 pages)
5,300
초록보기
발레리의 시 세계에서 시 「발걸음」은 다양한 변천과정을 거쳐 완성본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간행 텍스트들을 남겼다. 이 미 간행 초고들은 결정판 텍스트가 지워버린 시적 상상력의 소중한 변천과정을 간직하고 있다. 초기의 생성과정에서 "프시케", "프시케의 다가옴", 뒤이어 "녹턴" 이라는 제목이 부여되었던 이 시의 생성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또한 발레리의 시적 사고 안에서 ``프시케``라는 대상이 ``재형상화`` 되는 과정을 포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발레리에게 있어서 ``프시케``의 선택은 그가 자신의 내적 요구와 미학적 관점에 부합되도록 이 신화의 여인의 이미지를 형성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발걸음」의 생성 과정은 ``프시케`` 라는 대상에 투여된 시인의 다양한 동기와 심리과정을 보여주며 이미지와 가치들의 계속되는 전도로 특징지어진다. 관능적 아름다움과 지적 호기심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는 고대 신화처럼, 「발걸음」의 전 텍스트 avant-texte는 그 다양한 변천과정을 통해 관능적 이미지와 그에 대한 지적 비판, 부정적 강박이 대립되는 밤의 몽상을 표현하고 있다. ``프시케``에 대한 시적 명상의 초기인 1918년에서 1919년까지, 프시케는 관능적 욕망과 모성적 환상의 대상, 때로는 환멸과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나며, 밤의 어두운 공간 안에서의 관능적 환상과 금지된 욕망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부각되고 있다. 1921년 몇 년의 공백 후에 시인이 "발걸음"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로 돌아왔을 때 "프시케", "녹턴"에 이은 제목의 반전은 이 시의 생성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한다. 초기 판본들과는 상이한 이데올로기로 특징지어지는 결정판 텍스트에서 우리는 감각의 성향을 완화시키기 위한 시인의 부단한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밤의 환상을 대체하는 ``불면``의 주제는 시를 관능적 충동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지적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전 텍스트로부터 이어받은 "벌거벗은 발"과 "입맞춤"의 "내민 입술" 속에 표현된 감각적 육체성은 ``기다림의 순결함``과 "재능 don"의 주제에 의해 완화되어 있다. 밤의 환상과 의식의 갈등, 육체에 대한 욕망과 강박적 두려움 사이에 놓인 시인의 궁지는 시의 오랜 형성 과정에서 상반적 가치와 이미지들을 순화하고 통합함으로써 해소된다. ``프시케``에 그 고유한 특질들을 간직하게 하면서도 시인은 자신의 요구에 부합되도록 이 대상을 끊임없이 ``재형상화``하면서 전 텍스트의 내적 균열과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적인 자신의 프시케를 발견해 낸다. 발레리에게 있어서 ``프시케``의 재형상화 과정은 진정한 재능을 획득하기 위한 시적 모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발코니』에 나타나있는 작가의 심리 전이

김영은 ( Young Eun Kim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5권 0호, 2011 pp. 171-210 ( 총 40 pages)
7,500
초록보기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심리세계를 유추하는 일이나, 또는 작가의 심리세계와 작품세계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일은 진실이 왜곡될 여지가 있는 것이므로 매우 조심스럽고도 위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복합적이고도 심층적인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단면적으로 파악하게 됨으로써 커다란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지로 싸르트르가 주네 작품을 통하여 행하였던 작가 심리 연구도 한낱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 특히 그로 인하여 자신의 내부세계가 단일적인 논리에 의해서 명확하게 정의되는 것을 보면서 주네가 겪어야 했을 정신적 충격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네의 희곡을 대할 때면 우리는 유독 작가 개인의 인생관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가 범상치 않은 특별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까? 버림받은 사생아, 도둑, 거지, 동성연애자, 죄수 등,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자로서의 삶을 전철하였기 때문일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의 희곡이 가공의 현실에 머물러있다기 보다는 실제 현실 세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현실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명백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주네의 희곡은 주네 자신이 현실세계에서 실현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자 한 하나의 노력이었고, 실지로 존재하고 있지만 쉽게 지각되지 않는 ``불가능성``의 실재를 증명해보이고자 한 하나의 도전이었으며, 또한 불가능한 것만이 존재하는 이 현실 세계에서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고유의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고 이를 세상 천하에 알리고자 한 노력이었다. 그렇다면 그 희곡의 어떤 면이 이러한 정의에 도달하게 하는 것일까? 본 논문에서는 가공과 현실의 상관관계 문제를 가장 뚜렷하게 다루고 있는 희곡 중의 하나인 그의 희곡 작품 <발코니>를 통하여, 어떻게 현실과 가공의 세계가 서로 동반관계를 맺고 있고 상호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한다. 우선 주네 자신의 자서전적 소설에 투영되어있는 그의 자서전적 심리세계 에 대하여 이해하여보고, 이어서 이러한 그의 내면세계가 희곡작품에 어떠한 방법으로 전이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한다.

랭보 문학 세계의 변증법적 시학

곽민석 ( Min Seok Kwak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5권 0호, 2011 pp. 211-228 ( 총 18 pages)
5,300
초록보기
랭보의 시 세계, 특히 그의 후기시집인 『일뤼미나시옹』은, 파괴적이자 동시에 창조적이고, 분산적이자 통합적인 상호 모순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시어들과 그 시어들로 형성된 시 세계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특성들로 인해 끊임없이 서로 대립되면서도 역설적으로 역동적 힘에 의해 통합된 이미지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심력 force centrifuge과 구심력force centripete이라는 상호 대립된 두 힘에 의해 각 시어의 이미지들은 부딪히며 충돌하고 서로 파괴하는 양상을 띠면서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역동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시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사실, 『일뤼미나시옹』이 보여주는 시 이미지들은 처음에는 견고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고,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다양한 시적 요소들로 구축된 시 세계는,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광경들, 결코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한 다른 시적 실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꽃놀이처럼 순간적이고 불안전하며 동시에 역동적이고 강렬한 효과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비록 시의 모든 요소들이 일종의 구심력에 의해 집중되고 압축되어 한순간 경이로운 시적 광경을 형성하지만, 동시에 랭보 시 세계의 한 특징인 개개의 이질적 요소들 상호간의 원심력 에 의해 이 공간은 끊임없이 분해되고 해체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의 대부분 시의 경우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며 어느 한곳에 고착되지 않은 채 다양하게 변형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재창조되는 새로운 시 세계의 탄생을 목격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랭보의 시 세계는 부단한 생성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성, 변화 그리고 역동성은, 랭보가 자신의 시 세계를 그 자체로 궁극적 목표나 도달점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행 passage`` 또는 과정의 단계로 간주하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
5,400
초록보기
1615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요토미 히데요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오사카 성에서 자살한다.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여성작가 고메즈 부인의 소설 『피더리, 일본 천황』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그녀는 히데요리의 아들, 즉 피더리라는 허구적 인물을 상정하여 이 역사적 비극에 해피엔딩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고메즈 부인은 일본과 함께 한국과 중국을 소설에서 등장시키며 이를 통해 18세기 초반 프랑스 사람들이 가졌던 동양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이미지는 매우 피상적이다. 작품 속에는 풍경이나 풍습 묘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한 지역적 특색도 드러나 있지 않다. 피더리를 비롯한 주요 작중인물들 역시 동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스테레오 타입에 불과할 뿐, 고유한 민족적, 인종적 특성은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러한 피상성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나타나는 동북아 3국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작중 인물들은 모두 지혜롭고 선량하며 이들 나라간의 국제 관계 역시 신의와 선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더리, 일본 천황』에 나타난 동북아 3국은 17세기의 유토피아 소설과 동화, 그리고 18세기 초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문학적 중국취미``의 합류점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이후의 동북아 3국의 이미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비평에 관한 성찰

이기언 ( Kie Un Lee )
한국불어불문학회|불어불문학연구  85권 0호, 2011 pp. 249-269 ( 총 21 pages)
5,600
초록보기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비평가 알베르 티보데는 1923년에 발표한 「출처 논란」이라는 글에서 당대 프랑스 비평계의 두 권력인 대학과 언론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바 있다. 40년 후인 1963년, 모리스 블랑쇼도 「비평은 어떠한가?」의 모두에서 대학과 언론의 권력 다툼을 비판하면서 비평의 무용론을 개진했다. 블랑쇼에 따르면, 작품 앞에서 비평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평의 사라짐 자체가 비평의 존재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블랑쇼는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해석하면서 사용했던 ``종과 눈`` 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즉, 작품은 공중에 매달린 ``종``이고 비평은 이 종에 부딪쳐서 소리를 내고 사라지는 ``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이란 ``부질없는`` 말 혹은 ``헛된`` 말에 지나지 않은가? 그런데, 블랑쇼 자신의 비평들은 오늘날까지도 왜 사라지지 않고 있는가? 하지만, 블랑쇼의 진정한 비평론은 비평의 무용론을 개진한 후에 이어지는 글에 제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비평은 "문학 경험"을 추구하는 "창조적인 비평"인 바, 이 창조적인 비평은 "중재"를 점진적을 이행하고 "어둠"을 열어주는 "방황하는 활동"이자 "끝없이 다시 시작하기"라는 것이다. 블랑쇼의 언어가 늘 압축적이고 난해하듯이, 비평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고도의 해석 작업을 요구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 즉 ``비평 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된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답들이 있지만, 우리는 롤랑 바르트의 답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바르트는 저 유명한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모든 비평은 작품에 대한 비평이자 자기자신에 대한 비평이다. 클로델의 말놀이를 빌리자면, 비평이란 타자를 아는 것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바르트의 비평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해서 우리는 ``비평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비평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타자에 대한 앎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블랑쇼가 말하고자 하는 "문학 경험"이나 "창조적인 비평"이라는 것은 결국 타자 이해를 통한 자기 이해를 지칭하는 게 아닐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가다머와 리쾨르의 해석학 이론을 빌어 비평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 가다머와 리쾨르에 따르면,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것, 즉 "텍스트의 것"(가다머) 혹은 "텍스트의 세계"(리쾨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버리고 그 자리에 텍스트의 것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때 나는 독서 이전의 "나와 다른 자기" 혹은 "더 원대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나는 나를 더 잘 인식하고, 다른 자기를 발견한다. 이 "타자처럼 자기 자신"(리쾨르의 표현)인 다른 자기는 "독서의 산물"이자 "텍스트의 선물"이다. 이처럼, 직 접적인 자기 이해는 불가능하고 타자를 통한 간접적인 자기 이해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 다머와 리쾨르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해석학적인 사고이다. 하기야 이러한 자기 이해가 곧 우리가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문학 경험이 아닌가? 바로 이러한 경험이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 경험이고, 타자 이해를 통한 자기 이해가 창조적인 비평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가다머가 지적하듯이, 해석 작업은 "끝이 없는 실행 과정"이다. 왜냐하 면 한 편의 문학 작품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서 가다머는 "해석은 해석된 작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비평의 사라짐을 주장하는 블랑쇼의 입장과 일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다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자 이것이 역설적인 것이다. 해석이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오로지 그 해석은 정당하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사라져야 할 운명을 안고 있는 이 해석이 빛을 보아야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해 가능성은 그러한 중재적인 해석의 가능성에 달려 있다." 가다머의 말이 아니라 마치 블랑쇼의 말을 듣는 듯하다. 우리는 해석학적 사고의 에두르기를 통해서 블랑쇼에게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 에두르기 덕분에 우리는 이제 블랑쇼가 말하는 비평 개념에 대해 좀더 명확한 설명을 할 수 있다. 즉, 비평은 종 위에 떨어지는 눈처럼 사라진다-하지만, 비평의 흔적은 남는다. 왜냐하면 "중재적인 해석"을 통해서 자기를 더 잘 이해하고, 그리고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해석 작업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해도 끝이 없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에게 고유한 어둠은 결코 걷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해를 위해 "방황하는 운동"을 마다하지 않고 "끝없이 다시 시작하기"에 나선다. 바로 이것이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 경험이고 창조적인 비평일 것이다. 블랑쇼는『문학 공간』의 <경험이라는 낱말>이라는 소절 에서 "여기에서 경험은 다음을 의미한다. 존재와의 접촉, 이 접촉을 통한 자기 자신의 혁신-하지만 끝이 없는 시련." 그렇다면 ``악순환``이 아니라 이러한 ``악무한 l`infini vicieux`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가다머가 제시하는 단 한 가지 해결책만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가다머는 "이해한다는 것은 늘-다르게-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비평 개념에 적용한다면, 비평한다는 것은 곧 다르게 비평하는 것이고 다른 눈으로 자기 자신을 비평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른 눈으로 Allo eidos gnoseos는 해석학적 비평의 좌우명이다.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