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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in International Context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216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9권 0호 (2013)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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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서는 한국의 고전공간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18세기 후반 전라도 영암의 사족 박이화가 지은 장편가사 「낭호신사」에 나타난 마을강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박이화는 18세기 후반 자신이 살던 전라도 남부 구림마을이라는 반촌공간을 마을강호로 만들었다. 「낭호신사」 속에 마을강호는 풍수공간, 연원공간, 풍류공간, 향풍공간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박이화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 곧 고전공간으로써의 마을강호의 모습을 구성하는 네 가지 특성일 것이다. 「낭호신사」는 강호가사 중에서 마을강호를 구현하고 있는 유일한 가사이다. 이것은 18세기 동족촌 등 반촌마을이 늘어나면서 마을공간의 이념화가 중요해진 시대적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마을을 강호라는 고전공간의 이념형 중 하나로 만들 필요성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낭호신사」에서는 구림마을이라는 마을강호의 구심점으로 간죽정과 회사정으로 잡고 있다. 이것은 여러 성씨가 모여서 구림대동계라는 구심점 아래 살고 있는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낭호신사」는 다른 강호시가들처럼 바로 이 간죽정과 회사정의 모임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남한강(南漢江) 심상(心像) 지리(地理)

허원기 ( Heo Weon-gi )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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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남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다산 정약용의 문학 세계를 살펴보고 그의 심상지리를 재구한 것이다.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약용은 평생을 물과 함께 지냈다. 그러나 정약용은 물의 속성과는 상반되는 `그만 두지 못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다. <여유당기>와 <수오재기>는 다산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 대한 자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본성은 `불`로 표상되는 것이다. 정약용은 <적기행>, <추록마행>, <종응편>과 같은 작품을 통해 불의 속성이 강한 동물을 형상화하고, 여기에 자신의 자화상을 담았다. 그의 사주에도 불의 속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정약용은 `불처럼 그만두지 못하는 마음`을 `그만두는 마음`으로 제어하려 했다. `그만 두는 마음`은 물의 속성으로 표상된다. 불같은 성격을 제어하는데 `물`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물과 친화적이었던 다산의 삶은, 불의 인품을 지닌 그의 성격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둘째, 정약용은 남한강 물길을 따라 여러 차례 충주, 양평, 여주, 원주, 단양 등을 방문했다. 충주의 하담은 다산의 선대 조상들이 여러 번 거처한 기록이 있으며, 할머니 풍산홍씨의 고향이다. 그리고 다산의 조부와 조모,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가 이곳에 있었고, 형 약현과 약전도 이곳에 묻혔다. 정약용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담을 방문했고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하담 인근의 목계나루와 가흥창, 탄금대도 방문하여 여러 편의글을 남겼다. 이곳에는 김상우, 박두채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양평에서는 사천, 용문산, 현곡, 현계 등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 사천에서는 유헌, 조가교 등과 교유했고, 두 번에 걸쳐 용문산에 올랐다. 현곡에는 숙부인 정재운과 정재진이 거주했다. 특히 정재운은 정약용을 친아들처럼 아꼈고 양자로 삼으려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말년의 벗 여동근ㆍ여동식 형제가 현계에 거처했는데 그들과 깊은 교분이 있었다. 여주에서는 영릉, 청심루, 신륵사, 이포나루를 방문하고 윤용겸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그리고 원주에서는 흥원창과 법천을 다녀갔다. 법천에는 집안의 어른이며 18세기 후빈 근기 남인 문단을 대표했던 정범조가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방문이 잦았다. 또한 단양의 팔경과 제천의 한벽루를 찾아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셋째, 정약용에게 남한강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산수와 조상의 심상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친보본의 심상, 세속을 잊고자 하는 마음과 산수자연을 즐기고자 하는 심상, 세간 민중의 삶에 대한 따듯한 시선, 달관한 노년의 심상이 남한강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현되었다.

19세기 여항문인 조희룡의 유배와 신안 임자도

한영규 ( Han Young-gyu )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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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서리층의 전기 작품집 『壺山外記』를 편찬한 又峰 趙熙龍(1789~1866)은 19세기의 대표적 여항문인이다. 이 논문은 새 자료를 동원하여, 1851년부터 약 2년간의 임자도유배 생활이 조희룡의 문학 예술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았다. 또한 전남 신안군이 2004년부터 추진 중인 조희룡 유배지 현양 사업의 현황을 학술적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조희룡이 임자도에서 경험한 가장 큰 사건은 먼저 유배와 있던 전임 통제사 金鍵(1798~1869)과 긴밀하게 교유한 일이었다. 그동안 김통제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일성록』을 통해 김건이 헌종 사후인 1849년 7월에 유배되어 1852년 4월에 임자도를 떠났음이 확인되었다. 조희룡은 10개월 동안 전임 통제사 김건과 어울리며 깊은 교분을 나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분류되며, 정치적으로 안동김씨 외척 세도를 반대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공통성을 지녔다. 임자도는 이들에게 遠惡地이기도 했으나, 정치적 동지를 만나 교유하는 새로운 문화적공간으로도 작용하였다. 조희룡이 임자도에서 『화구암난묵』 등의 여러 시문 서화를 창작한 것은 그에게 유배 경험이 문화적 활력소로 기능했다는 점을 반증한다. 19세기 임자도의 경제적 문화적 풍요도 조희룡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임자도 유배를 계기로 조희룡의 시문 서화가 `번화미` `격동미`의 방향으로 질적 비약을 이룩했다는 최근의 연구결과와 상통된다.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최태문 등 여러 식자와 교유했으며 또 홍재욱 같은 제자를 배출하는 등 문인서화가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장시키는 생활을 지속하였다. 조희룡과 임자도의 인연은 해배 이후에도 이어졌다. 1862년 임자도에 유배된 金?은 섬에 남아있던 조희룡의 시문을 접하고 그에게 경도된 심정을 「艱貞日錄」에 남기고, 서울로 글씨를 부탁하는 편지를 조희룡에게 부치기도 했다. 전남 신안군은 조희룡의 유배지로서 임자도를 관광자원화 하는 방안에 착목하여, 2004년 `조희룡 기념비`를 세운 이래 최근에는 `조희룡길`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임자도가 조희룡의 문예적 흔적을 매개로 다시 환기된다는 점은 조선후기 여항문예와 관련지어 매우 주목할 만한 사안이다. 다만 신안 임자도의 장소성이 보다 항구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조선문인화의 聖所`와 같은 표현이 학술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서인 노론계 문인들의 구곡시와 장소성

이효숙 ( Lee Hyo-sook )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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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장소로서 `구곡`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를 작품을 통해 살펴보고는 데 있다. 조선 후기 문인 학자들에게 구곡은 은거지 차원을 넘어 집단의 이상이 집약된 상징적인 장소로 존재했다. 작품에 나타난 구곡의 다층적인 의미를 밝히기 위해 E. 렐프의 장소이론을 도입하였다. 2장에서는 공간의 여러 가지 성격을 제시하고, 공간 내 의미 중심인 `장소`의 본질을 설명함으로써 구곡이 `장소`로서 성립 가능함을 밝혔다. 송시열의 은거지였던 `화양동`이 제자들의 노력으로 `화양구곡`으로 재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구곡이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폈다. 옥계구곡에 대한 기문을 통해 구곡이 `장소`로서의 본질을 갖추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 다음으로는 개별 작품 분석을 통해 각각의 구곡이 지닌 정체성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우선 3장에서는 각 구곡의 물리적 환경, 그 속에 이루어진 행위(경험), 구곡을 통해 작자가 부여하고자 했던 의미를 밝힘으로써 작품에 형상화된 구곡의 정체성을 밝혔다. 4장에서는 구곡을 접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구곡의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음을 밝혔다. 한번 형성된 구곡에 대한 정체성이 집단으로 확산·변화하는 과정을 밝혔다.

어문규범 갖추기에 쏟은 조선어학회의 노력

리의도 ( Lee Ui-do )
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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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사전 편찬은 국어연구학회(1908)로부터 조선어연구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어학회의 중요한 과업이었다. 초창기부터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1929년 한글날에 조선민족 각계의 인사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기하여 사전 편찬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하지만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 1936년 4월에는 편찬회를 해산하고 모든 일을 조선어학회에서 실행하였다. 그렇게 사업을 진행하는 중에도 여러 위기를 겪었다. 재정적인 어려움은 기본이요, 말로 다할 수 없는 `조선어학회 수난`까지 겪었으며, 민족 분단과 6·25 전쟁의 피해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하여 1957년에 `민족적 권위`를 가진 대사전을 완간하였다. 조선민족의 머리와 손과 힘으로 이루어 낸 한겨레말 사전, 『(조선말) 큰사전』이었다. 그것은 조선민족 말글살이의 준거가 되었으며, 그 이후 모든 한국어사전의 본보기가 되고 출발점이 되었다. 사전 편찬과 병행하여 「한글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일본어음 표기법」 등을 제정하였다. 그 모두 조선민족의 자유 의지로 이루어 낸 `조선어의 한글 표기법`이며, 『(조선말) 큰사전』 탄생의 초석이 되었다. 특히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조선어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조선민족의 지혜를 결집한 것으로, 단기간에 한국어 공동체의 공식 표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어휘 수집과 표준어 사정(査定), 각종 표기법 제정, 대사전의 편찬과 간행, 그 하나하나가 방대한 사업인데, 조선어학회는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렵던 질곡 속에서 그런 모든 일을 한꺼번에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그러한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8·15 광복과 동시에 한겨레는 시행착오 없이 겨레말 교육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런 일들을 광범위한 참여 속에서 진행했다는 점이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여건과 능력에 따라 참여하게 했으며, 자유롭지 못한 여건 속에서도 공론의 과정을 거치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폭넓은 관심과 공감과 신뢰를 얻게 되었고, 그것은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실로 조선어학회의 어문규범 갖추기는 민족의 총력―지력, 금력, 심력이 조화롭게 융합된 결정체였다.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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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한국서지』(1894-1896, 1901) 출판 및 유통의 의미를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한국`이란 공간 속에서 규명해보는 것이다. 쿠랑의 『한국서지』는 한불조약(1886)이 체결된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한국관이 전시되는 시기(1900)에 출판되었다. 쿠랑이 작성한 파리 만국박람회 소개책자에서 그는 『한국서지』 「서설」에서의 관점과는 달리, 제국-한국 사이의 수평적인 교류와 소통을 향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서지 보유편』 「서문」(1901)과 조응되는 시각이기도 하며, 한국의 고전세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쿠랑이 도달한 이해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쿠랑의 새로운 지향점과 시각은 불행히도 새로운 그의 저술로는 구현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사건은 그가 발견한 한국고전의 가능성을 구현할 길을 차단한 셈이다. 쿠랑의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쿠랑의 『한국서지』 「서설」의 번역과정, 그를 한국도서를 세계에 알린 개척자로 기억·기념하는 과정 속에서 망각되었다.

1920년대 초기 아일랜드 희곡 수용의 의미

김지혜 ( Kim Ji-hy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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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기 아일랜드 희곡의 수용이 증가한 사실은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되어 왔다. 본고는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현철의 번역으로 『개벽』에 실린 「달 □ 때」와 「바다로 가는 자들」, 그리고 김우진이 무대화하고 『동명』에 작자미상으로 실린 「번□이는 문」을 `텍스트`와 `번역자` 및 번역극이 실린 `매체`의 아일랜드 담론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수용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가 아일랜드와 조선의 정치적 동일성을 전제로 하고 번역극의 의미를 밝힌 것에 비해, 본고는 1920년대 초기 민족담론 형성의 중심 매체였던 『개벽』과 『동명』이 구축하는 아일랜드 담론과 번역극이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당시 근대극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현철과 김우진이 조선의 근대극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아일랜드 연극을 참조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구체적으로 현철은 「달 □ 때」와 「바다로 가는 자들」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구의 모범적인 `근대극`을 소개하기 위해 선택,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수록 매체인 『개벽』이 구축해가던 `식민지`로서의 아일랜드와 두 텍스트가 조응하면서 `아일랜드 연극`이 `민족`의 차원에서 전유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달 □ 때」의 경우, 주동인물인 독립운동가가 반동인물인 경찰을 민족적 동질감에 근거해 회유하는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독자에게 탈식민의 상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음으로 『동명』에 실린 「번□이는 문」은 궁핍과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절망적 운명을 다룬 텍스트로서,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후계자이자 세계적인 위상을 갖는 작가 던세이니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동명』에서는 민족이라는 특수성보다 세계문학이라는 보편성의 차원에서 「번□이는 문」이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김우진이 번역 연출한 「찬란한 문」의 의미는, 평소 아일랜드 연극을 `민족어 수립`의 차원에서 참조했던 그의 연극의식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시 김우진은 `민족어수립`을 통한 근대극 형성을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삼았으며 그 대표로서 아일랜드 연극을 주목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연극적 의도를 드러내면서도, 대본과 무대에서 이중 검열이 있었던 식민지 공연 환경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김우진은 의도적으로 아일랜드 번역극 「찬란한 문」을 공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3.1운동 후 `아일랜드`라는 기표가 상징하게 된 `민족의식`을 겨냥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의 낭만화, 욕망의 팰럼시스트(palimpsest)

구인모 ( Ku In-mo )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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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32년 김갑순과 노병운의 자살 사건이 신문의 기사, 유성기음반(SP record)의 대중서사 등으로 파생되었던 현상과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당시 이 사건은 사실과 무관하게 픽션의 서사들로 재구성되고, 대중적인 문화상품으로 소비되었다. 실제의 사건을 다양한 서사들로 만들어낸 동력은 당시 여급에 대한 엘리트 남성글쓰기 주체의 관음증적 시선, 낭만적 연애에 대한 대중적 욕망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의 형성 과정에서 근대의 번역어로서 연애의 개념은 확장되고 변용된다. 김갑순과 노병운의 자살 사건 관련 서사들은 근대기 한국의 공론장 혹은 문화장에서 사실이 다양한 발화주체의 서사적 실천에 의해 의미가 규정되고, 그것이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는 독특한 의사소통의 구조를 드러낸다. 특히 이 사건과 관련 서사들은 1930년대 이후 카페 여급과 지식인의 연애를 모티프로 한 서사들의 원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과 관련 서사들은 인간의 행동을 전체로 조직하는 의미 구조로서 서사의 본질적 국면을 훌륭히 드러내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삐라와 문학의 공통감각 - 한국전쟁기 북한 삐라를 중심으로 -

김은정 ( Kim Eun-jeong )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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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는 선전선동적 문구를 통해 감정을 조직한다는 점에서 심리전술의 일환으로 사용되어 왔다. 북한은 미국의 삐라에 의한 감정선동에 문학작품으로 대응함으로써 인민들의 감정적 이탈을 막고 적에 대한 증오심을 바탕으로 응전을 하고 있다. 즉 문학이 적의 삐라에 대한 응전의 방법으로 선택되고 있어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과 삐라의 영향관계와 호응의 정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글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인 미군삐라와 북한삐라의 대조를 통해 그 종류와 특성 및 미군삐라에 대한 북한의 대응 방식을 살피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살포된 감정선동물인 삐라의 효과와 북한 문학과 삐라의 영향관계 그리고 삐라가 전유, 사유, 왜곡되는 과정을 문학작품 및 기타 문건을 토대로 검토할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 비해 삐라 제작에 있어 비전문성이 강했다. 이글에서는 북한의 삐라 제작자들이 비전문적인 취약성을 극복하기위해 문학작품을 참고하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다. 당시 북한의 문학은 현장성을 종군작가로 참가한 작가들의 르포르타주나 취재를 통해 전달받아 작품으로 재생산되었고 다시 도시나 전선에 보급되는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생산된 담론이 유통되면서 문학과 삐라는 공통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김종삼 시에 나타난 음악적 기법 연구

조용훈 ( Cho Yong-hoon )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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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독특한 시적 개성을 선보인 김종삼의 시를, 음악과의 관련을 통해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시의 형상화 방식과 음악 기법의 연관성을 밝혀내기란 쉽지 않다. 언어를 매체로 하는 단형의 시(詩)는, 조가 바뀌며 화성에 의해 전개되는 음악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물론 시도 행이나 연 혹은 단어나 문장 등의 반복과 병렬이라는 음악성에 기초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음악과의 친연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복잡하고 정교한 음악의 구성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본래 가창돼 왔고 그런 점에서 음악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장르이다. 김종삼의 경우는 그것이 유독 강하다. 대위법이나 화성악 등의 기법이 김종삼 시의 제작에 일정량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초기시부터 상실과 부재 같은 심리적 불안과 죽음의식이 시의 주조였는데 그는 이를 행과 행, 연과 연 등의 반복과 변주, 도치와 생략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대략 세 가지 관점에서 음악과의 관련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첫째는 캐논형식처럼 모방적 반복이 강한 작품이다. `A는 B이다.`의 형식을 반복하고 병치시켜 주제를 비교적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두 번째는 세도막 형식처럼 시상이 3단계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들은 주제를 제시하고 전개시키다가 다시 재현하는 소나타 형식과 유사했다. 음악의 경우처럼 주제가 하나 이상 등장하고 조바꿈이나 화성 등을 통해 풍부하게 악상을 전개하지 않지만 나름 정교하게 구성했다. 셋째는 대위법적이고 화성이 동반된 작품이다. 이런 유형은 선적인 전개와 수직적 조성에 의해 시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풍부해 졌다고 판단된다. 김종삼은 이런 반복적, 회귀적 음악적 구성을 통해 죽음의 의미와 그것의 성찰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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