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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in International Context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216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73권 0호 (2017)

국어사 시대 구분과 20세기 초의 문법 변화

허재영 ( Heo Jaeyoung )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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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국어사 시대 구분에서 20세기 전반기의 국어를 현대 국어로 설정하는 문제의 적절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선행 연구에서 국어사의 시대 구분이 일치하지 않고,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른 학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국어사학에서도 모든 연구성과가 획일적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학문의 분화와 전문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통설`이나 `일반설`이 형성되고, 그것이 마치 상식처럼 해당 분야의 학문 세계에 전수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현재 국어사학계에서 국어사의 시대 구분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문제는 이미 김종택(1985), 김상돈(1984) 등과 같이 비교적 오래 전부터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국어사 설정에서 가장 논란이 심한 `근대 국어`와 관련해서는 홍윤표(1994, 1995), 정광(1992) 등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홍윤표(1994, 1995)의 문제의식은 기존의 국어사 시대구분이 `음운`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문법사`나 `어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이 점은 19세기∼20세기의 문헌을 연구하는 국어사학자들이라면, 그 시기의 국어 현상이 1920년대 이후의 국어와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국어사 시대 구분과 관련한 쟁점 세 가지를 살펴보고, 이 시기의 문법 변화를 고려할 때, 이 시기의 국어를 현대 국어와 구분하여 근대 국어로 설정하는 것이 적절함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국어 변화에서 주목할 사실은 1900년대와 1920년대 국어의 모습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문체상의 변화와 국어의 단문화 경향이다. 이 점에서 이 시기를 현대 국어 시기에 포함하는 것은 다른 학문 분야의 시대 구분과도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인지이론으로 본 방향대립어의 대립성 약화ㆍ중화 현상 연구

김진수 ( Jinsoo Kim )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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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방향대립어의 대립성 약화와 중화에 대한 인지 의미론적 분석이다. `사다/팔다` `나다/들다`등의 대립관계에 있는 동사들이 특정한 요소와 결합하거나 합성어를 이루었을 때 의미의 대립성이 사라지고 동일한 의미를 공유하거나 대립쌍을 이루는 두 단어 가운데 어느 한 동사의 의미에 윤곽부여 되거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현상을 프레임 이론으로 분석하는 연구이다. 대립관계에 있는 동사들이 합성어를 이루는 과정에서 대립어가 가지고 있던 방향성의 대립이 약화되면서 결국엔 행위나 동작으로 인한 상태를 드러내는 의미로 전환하게 되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분석의 대상이 되는 대립어를 밝히는 이론으로는 인지의미론의 프레임 개념, 특히 상황 프레임의 개념이 개입되어야 함을 밝혔고 이 상황 프레임을 바탕으로 동사와의 공기관계에 있는 명사와 담화영역과 관찰자의 시점이 대립성 약화되거나 중화되는 현상에 영향을 끼침을 밝혔다.

재외동포 대상 한국어 관련 연구 현황 및 전망

원미진 ( Won Mijin ) , 유소영 ( Yoo Soyoung )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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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 가운데 한국어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한국어교육과 관련되어 이루어진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재외동포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언어 문제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한국어교육과 관련하여 다양한 연구 성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성과는 재외동포의 언어 사용 문제에 있어 한국어교육의 중요성을 증명해 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본고는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 사용과 관련된 선행 연구를 귀납적으로 수집하여, 먼저 시기, 지역, 주제별로 분석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총 345편이며, 1972년부터 연구가 수행되었으나 연구의 절반이 201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귀납적인 연구 주제를 범주화하여 재외동포의 한국어교육, 재외동포 한국어 관련 언어 정책, 언어 정체성과 언어 발달, 한국어 사용 실태에 관련된 연구 총 4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각 범주는 다시 세부 주제에 따라 2개에서 8개 하위 범주로 나누었다. 이를 통해 현재 연구의 경향을 파악하고, 향후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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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우는 백대진, 주요한, 김억과 함께 1910∼20년대 한국 근대시 논의를 주도한 대표적 시인 중 하나이다. 20세기 초 과도기에 접어든 근대 한국 문단에서는 새로운 시에 대한 담론이 강하게 나타났다. 계몽적인 목적의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에 대한 필요성은 많은 시인과 비평가들에 의해 주장되었지만 구체적인 방식과 방법을 누구도 제시하지 못했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계속 담론화되면서도 무엇이 새로워야하며, 어떻게 새로워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근대문단에서 `새로움`에 대한 해답의 열쇠는 바로 자유시였다. 자유로운 정서표현과 자유로운 형식의 추구는 자유시를 근대적 문예양식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자유시에 대한 모색을 주도한 주요한, 김억, 황석우는 모두 1910년 중반에 등장한 신인들이자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상징주의 이론의 도입에 앞장섰다. 그러나 상징주의는 한국문단에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짧은 기간동안 논의되었다가 사라졌으며,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이 글에서는 자유시=상징시 등식이 가능할 정도로 영향력을 보였던 상징주의의 실패 요소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로 상징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 두 번째로 상징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 마지막으로 아나키즘과 상징주의의 상반된 성격의 충돌이다. 상징주의 수용 양상을 살펴보면 상징주의는 백대진을 시작으로 김억, 주요한, 황석우를 통해 한국문단에 소개된다. 백대진은 상징주의를 가장 먼저 언급했지만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을 짤막하게 소개한 수준으로 본질적 내용과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억은 백대진에 비해 비교적 깊이 있는 소개를 시도했지만 김억의 베를렌느적 취향은 시가와 시의 경계가 애매모호했던 당시 문단의 과도기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어 상징주의에 대한 폭넓은 수용을 방해하였다. 상징주의가 추구하는 감각의 결합, 인간의 내면세계 확장은 국가를 잃은 조선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외래성과 전통성, 세계성과 민족성, 자율성과 타율성 등 서로 다른 경향들과의 대립과 충돌을 겪게 되었다. 일본을 통해 한국문단에 수용된 상징주의는 이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도 또 다른 실패 원인이다. 프랑스 상징주의에서 나타내는 감각이나 상상력에 대한 개념이 상당한 차이를 가지며 상징주의의 개념 설명에서도 일본 상징주의 시인인 미키로후의 관점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황석우는 「일본시단의 2대 경향」에서 예의츠의 상징론을 바탕으로 상징주의를 구분하려는 노력을 보였지만 시단에 큰 의미를 주지 못했고, 상징의 이해를 본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을 보이며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더불어 황석우의 초기시에서 나타나는 상징은 이상세계에 대한 희망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상징주의에서 추구하는 감각의 확장, 내면에서의 새로운 발견보다 자유의 억압에서 드러나는 해방의 욕구는 황석우의 아나키즘적 면모와 상징주의의 충돌로 해석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은 민족 분단과 국가의 주권을 잃은 시대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아나키즘적 면모는 이론에 대한 이해부족과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상징주의를 실패로 이끌었다.

『신흥』과 경성제대의 학지

윤대석 ( Yun Daeseok )
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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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인 졸업생들만의 잡지로서 졸업생들 사이에서 감정을 공유하는 장, 곧 `우정의 공동체`였다. 이러한 감정 구조는 경성제대의 학지라는 장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그에 대한 조선인 학생의 대항과 저항의 힘이 동시에 작동한 결과였다. 그것의 첫 번째 특징인 교양주의는 서양어와 서양 문헌에 대한 의존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은 서양 학문의 번역을 강조했던 경성제대의 학지가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고 조선의 학예를 서양의 그것에 직접 연결함으로써 일본의 시각을 배제하려는 저항의 힘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신흥』에는 서양 지향성과는 반대의 조선 지향성도 보이는데, 경성제대는 학문적 보편성을 표방하며 조선의 내셔널리티를 배제하고자 했지만, 조선인 학생들은 조선의 내셔널리티를 학문적 보편성으로 번역하고자 했다. 조선인 학생들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제국을 괄호 안에 넣음으로써 경성제대의 학지를 식민지인의 학지로 전유하고자 했다. 그 전유의 방법론은 『신흥』의 세 번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로 드러났다. 그들은 `사회과학`, 즉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하여 경성제대를 장악하고 있는 학지인 신칸트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다. 이들은 신칸트주의가 표방하는 이념성과 현실성의 조화로서의 `문화` 개념을 부정하고 이념과 문화의 역사성과 당파성을 주장함으로써, 식민지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경성제대의 학지에 도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성제대의 학지와 문화자본을 불균등하게 공유함으로써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만들었으나 큰 성과 없이 끝나고 그와 함께 『신흥』도 막을 내리게 된다.

분단 이후의 백석 시 연구

오성호 ( Oh Seong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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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4년에 걸쳐 백석이 발표한 열 편이 조금 넘는 시에 관한 것이다. 백석은 분단 이후 번역에 주력하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동시를 발표했고 이어서 삼수로 현지 파견된 이후 몇년 간 시를 발표했다. 이 시들은 동시와는 달리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 시기 북한 사회와 북한 인민들의 삶에 대한 백석의 입장과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시기 백석은 북한 체제를 적극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석의 동시에서 되풀이해서 강조된 주체성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 그리고 이를 위해 힘을 기르고 단합해야 한다는 주제 의식은 백석이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북한 사회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것은 전쟁기와 전후 복구건설과정을 겪으면서 그 나름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단기간에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것도 그렇지만 인민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무상배급체계`를 완성한 것은, 조선 후기 이래 국가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밖에는 보지 못했던 인민들, 그리고 백석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태도와 생각은 삼수로 현지파견된 이후에 발표한 시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자신이 참여하거나 목격한 협동농장 건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1959년과 60년의 시들은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인민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변화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 특히 백석은 협동농장 건설 경험을 통해 과거의 협소하고 폐쇄적인 친족, 혹은 촌락 중심의 공동체와는 다른 더 크고 새롭고 건강한 공동체 건설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공동식당」, 「하늘 아래 첫 종축기지에서」, 「돈사의 불」, 「전별」 등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백석은 전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미덕을 가진 인민들에게서 그런 아름다운 미래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것이 선전에 현혹된 결과였는지, 아니면 현실에서 실제로 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 시기 백석의 시에서 나타나는 현재의 긍정과 미래에 대한 낙관은 상당한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종파투쟁에서 승리한 후 북한 사회의 변화, 그 중에서도 천리마운동이 개시되는 50년대 말 이후 공산주의 교양과 항일혁명문예 전통이 강조되면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의 경향이 노골적으로 강회되는 상황을 백석도 비껴갈 수는 없었다. 그 결과 1960년을 넘어서면 백석 역시 당의 요구에 따라 선전 선동적인 성격이 강한 시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백석은 최소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에 대해서만큼은 일정하게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이 점을 시사한다. 1962년 이후 그의 작품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것은 체제의 경직성이 강화되고 개인숭배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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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결성되어 활동한 율동인은 한국 현대 시조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65년 동인지 첫 호를 발간한 율 동인은 1969년 까지 5권의 동인지를 발간하며 창작활동을 했다. 율 동인 구성원이었던 김호길, 박재두, 서벌, 조오현등의 주요 시조 시인이 현대시조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시조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본고에서는 『시조문학』 『경남신문』, 『율동인시조선집』등을 중심으로 율 동인의 활동상을 연구한다. 그동안 율 동인이 간행했던 5권의 동인지는 제 4권을 제외하고는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러나 1997년 『율동인시조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복간호를 발간한 바 있는데 그 책 또한 출간과 동시에 전량 파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율 동인의 탄생과 활동등을 조명할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인의 유족이 보유한 『율동인시조선집』을 확보하고 그 책에 수록된 동인 선언문과 머리글, 축시등을 확인하여 `율` 동인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본고는 『율동인시조선집』을 분석한 논문으로서 `율` 동인과 동인지가 20세기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서 갖는 의미를 점검하며 율 동인의 존재 의미를 탐구한다. 율동인은 현대 시조단의 대표적인 동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동안 연구가 부족했던 시조 동인과 시조 동인지를 조명함으로써 문학사에서 누락된 시조 동인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복원하고자 한다.

리듬과 소쉬르

장석원 ( Jang Seok-won )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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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메쇼닉의 리듬론은 현대시의 리듬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를 제공한다. 이 논문에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메쇼닉의 리듬론이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쉬르가 제시한 언어의 특성과 리듬의 특성이 어떻게 연동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소쉬르를 통해 얻은 언어의 본질과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리듬의 특징 사이에는 유사성이 발견된다. 리듬은 모든 디스쿠르에 존재한다. 이러한 리듬의 특성 중에서 우리가 논의의 중점에 둔 대상은 시 텍스트의 리듬이다. 시의 리듬은 제반 리듬의 양상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경우이다. 언어의 본질에서 파악된 `가치` `체계` `역동성` `자의성` 등등의 개념이 시의 리듬이 지니는 특성으로 전이될 수 있다. 시의 리듬은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의미와 연관되는 가변적 체계이다. 우리가 리듬과 언어의 근원·특성·기능을 `통사―체계―차이―가치`의 연합 과정으로 집약할 수 있었던 근거는 소쉬르의 언어학에 있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리듬이 언어의 본원적 특성임을 확인한다. 리듬은 담화 속에 출현하는 제 표시들의 조직화이다. 리듬은 의미와 담화가 창출하는 힘의 조직화이다. 다시 언급한다. 리듬은 형식적인 도식이 아니다. 리듬은 영원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리듬은 우주적 질서로 귀결되는 선험적인 운율학적 개념이 아니다. 리듬은 고정되지 않는다. 리듬은 도식이 아니라 변형이다. 리듬은 하나의 원칙이 아니라 다항을 구성하는 복수성이다. 리듬은 의미작용 전체를 관할하고 조직하는 힘이다.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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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전하는 향찰 표기 시가는 총 25수로 그 중 『균여전(均如傳)』에 기록된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를 제외하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14수가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소재 14수의 향가들 중 경덕왕과 관련된 향가는 <도솔가(兜率歌)>, <제망매가(祭亡妹歌)>, <안민가(安民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등 5 수가 있다. 향가 작품이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경덕왕대 이외에도 <서동요(薯童謠)>와 <혜성가(彗星歌)>가 기록된 진평왕대가 있으나 그 비율이나 양으로 볼 때 경덕왕대가 진평왕대에 비해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월명사 도솔가」조의 가사가 전하지 않는 또 다른 향가 <산화가(散花歌)>까지 포함한다면 경덕왕대의 향가 작품 수는 6수로 늘어나게 된다. 기록상으로 볼 때 향가가 집중적으로 향유되었던 시기는 진평왕대에서 원성왕대에 이르는 200여 년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5수의 향가가 기록된 35대 경덕왕(景德王: 742-765)의 시기는 그 중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중·후반부의 20여년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경덕왕대에 기록된 향가 5수의 『삼국유사』 내의 분포를 살펴보면 「기이」편에 2수, 「탑상」편에 1수, 「감통」편에 1수 등으로 여러 편목에 걸쳐 골고루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대의 향가 5수가 다양한 편목에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 편찬자의 편향적인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며 또한 경덕왕대에 채록(採錄) 가능한 다양한 소재의 향가 작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연구 결과 『삼국유사』의 5편목에 걸쳐 기록되어진 향가 작품들의 사상적 다양성은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되지 않은 경덕왕대의 사상적 경향, 나아가서 신라 시대의 전체적인 사상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 내었다. 그 과정에서 경덕왕이 사회 안정에 필요한 새로운 사상이나 사회 통합을 위해서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문학 장르인 향가를 적극 활용했음을 파악하였으며, 경덕왕대의 향가 5수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유교와 불교, 도교가 균형잡힌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였다. 이렇듯 경덕왕대에 5수나 되는 향가- 『삼국유사』 소재 14수의 향가 중 35%에 달하는-가 정착된 원인이나 의미를 분석하는 일은 향가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의미나 영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청학집(靑鶴集)』 내(內) 한시(漢詩)의 두 국면(局面)

강동석 ( Kang Dongseok )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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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후기 도교서인 『청학집』 내 한시를 중심으로 당대 도교인의 내면을 살펴본 데 목적을 둔 글이다. 『청학집』에는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헌인 『山堂肆考』나, 조선 후기의 문헌 『淸江先生?鯖?語』 와 글자의 출입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비슷한가 하면, 저자가 실존인물인가 하는 문제, 창작 당시의 연호의 표기 문제 등 여러 방면의 문제점에 노출되어 僞書로 보인다. 그러나 史料로서의 가치가 아닌 사상사와 문학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진위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즉 한국한문학에서의 도교서가 적다는 점, 도교인의 한시또한 소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등 자료의 희귀성과 더불어 『청학집』 내의 한시에 도교인의 사상이 잘 녹아 나타난 점 등이 도교인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는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청학집』 내의 한시에는 유자에 대한 경계의 시, 선계에 대한 동경과 지향, 미래를 예언한 시 등이 눈에 띈다. 도교인들은 당대 주류가 아니었다. 따라서 열린 세계가 아닌 닫힌 세계에서 보는 관점은 유자에 대한 경계를 비롯하여 애면글면 삶을 지향하는 방식보다는 마음이 편안한 선계에 관심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한국도교인의 시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경세제민을 표출한 시들이 상당 수 있음이 확인 된다. 물론 사상이란 인간의 삶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깊게 들어가면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청학집』 내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실제 국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하고, 어려운 백성들을 돕고자 하는 경세포부를 드러낸 점 등이 중국의 정통 도교와는 차별화된 한국문화에 흡수된 사상적 조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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