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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in International Context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216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75권 0호 (2017)

조선시대 한글편지를 활용한 국어와 한국사의 융합교육 방안 연구

이승희 ( Yi Seunghee )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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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토대로, ‘소재’를 중심으로 한 국어 교과와 한국사 교과의 융합교육 가능성과 그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19세기 한글편지’ 자료를 중심으로, 고등학교 ‘언어와 매체’ 교과목에 포함된 문법 교육과 ‘한국사’ 교과목에서 다루는 조선 후기 역사 교육을 연계하는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조선시대 한글편지는 당대의 구어를 반영하고 다양한 일상의 어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서간문 갈래의 형식과 특유의 생략 표현 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지극히 사적(私的)인 사연과 함께 당대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특히 19세기의 한글편지에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내용이 자주 발견되므로, 하나의 자료를 중심으로 국어 교육과 한국사 교육을 함께 수행하는 데 유용하다.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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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적 교육의 ‘통합’이란 언어를 하나의 전체로 작용하며 언어의 의사소통적 특성을 강조하고 학습자들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총체적 언어교육을 이론적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실제로 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다른 영역과 통합적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통합’ 교육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단절된 문법교육에서 벗어나 문장을 생산할 수 있는 통합적 문법 교육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였다.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통합적 문법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학습자 중심 교육, 표현 중심 교육을 그 원리로 삼아 교수·학습 모형을 탐구하였다. 학습의 도입에서 평가에 이르기까지 학습자 중심 교육이 이루어지며, 교수자의 강의보다는 학습자의 활동을 우선시 하였다. 문법교육이라 하여 문법 지식만으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교육이라 하여 글쓰기의 과정만 배우고 글을 쓴 결과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재구성하고 평가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제안한 통합적 문법으로서의 글쓰기는 학습자들의 언어 생활에 대한 실제성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으며 언어사용 기능 영역의 발달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연구는 학습자의 실제 사례가 아직까지는 많이 적립되지 못했고 또한 제시한 교수·학습모형에 대한 검증도 아직까지는 미비한 상황이다.

한국어 튜터링 챗봇을 위한 말뭉치 구축의 필요성과 방법론

김한샘 ( Hansaem Kim ) , 한지윤 ( Jiyoon Han ) , 최경호 ( Kyungho Choi ) , 정해영 ( Haeyoung Jung ) , 곽용진 ( Yongjin Kwak )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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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학습 발화는 발화 턴 간에 규칙화된 인과관계가 강하고 자연 발화에서의 출현율이 낮으며, 일반적으로 어휘부, 표현 제시부, 대화부로 구성되고 커리큘럼과 화제를 고려하여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기존의 말뭉치는 이러한 교수-학습 발화의 특징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어 교육용 튜터링 챗봇을 개발하는 데에 활용도가 떨어진다. 이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자연스러운 언어 사용 수집, 도구 기반의 수집, 주제별 수집 및 분류, 점진적 구축 절차의 원칙에 따라 교수-학습의 실제 상황을 반영하는 준구어 말뭉치를 구축한다. 교실에서 발생하는 언어학습 상황을 시나리오로 구성하여 대화 흐름을 제어하고 채팅용 메신저와 유사한 형태의 도구를 통해 말뭉치를 구축한다. 이 연구는 한국어 튜터링 챗봇을 개발하기 위해 말뭉치 구축용 챗봇을 활용해 한국어 학습자, 한국어 교수자가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발화문을 생성하는 준구어 말뭉치 구축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규방가사의 문학사적 위상과 의의

김창원 ( Kim Changwon )
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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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규방가사의 문학사적 위상과 가치를 논한 것이다.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시가사는 사뇌가에서 시조를 거쳐 가사로 발전해 왔다. 가사는 우리 민족의 생활 감정을 보다 폭넓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가 형식이라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가사는 민족어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의 각종 사회 현실과 모순에 진지하게 대응해 온 본격 문학으로서, 우리 민족어시가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가사의 발전사에서 규방가사는 그 정점에 놓여 있는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규방가사는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남성들에 의해 출발하였던 가사가 그 반대편에 있는 여성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문학양식으로까지 확장, 발전되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규방가사의 의미는 지역적 편중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규방가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그것이 영남이라고 하는 특수한 지역,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유교문화가 가장 정형화된 형태로 발전한 지역에서 일생을 살았던 여성들이 침묵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표현하였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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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천택 편 『청구영언』에 수록된 무명씨 작품들의 배열 방식과 그 내적 체계를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간 『청구영언』 무명씨는 주제·내용별 분류에 의해 작품이 배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학계 통설이었다. 그러나 『청구영언』 자체가 당대 가곡 연창의 실질을 담고 있는 ‘가집’이라는 점과 가객 김천택의 적극적인 관여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음악적 색채가 짙게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양상을 무명씨 작품들에서 확인하고 그 내적 원리와 체계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검토한 결과 『청구영언』 무명씨는 어휘, 소재, 이미지, 내용, 주제 등 다양한 연상 원리에 의해 작품이 배열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상 작용에 의한 작품 배열은 일반적으로 19세기 중후반 가곡원류계 가집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 논의를 통해 이 같은 원리의 시작이 18세기 초반 『청구영언』에서부터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청구영언』의 무명씨 작품들은 19세기 가집들처럼 공통 어휘나 관습구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며 길게 이어지는 양상을 띠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환기되는 이미지들이 복합적인 연상 작용을 거치면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후 가집들과의 변별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작품 배열의 연상 원리는 이후 18세기 중후반 가집들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이러한 작품 배열의 내적 질서가 축적되면서 19세기 초반 가집들에까지 전승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민학교의 창가 가창 양상

이민규 ( Lee Min-gyu )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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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학교는 1909년부터 1937년까지 연해주에서 많은 한국인 학생들을 배출하면서, 창가를 교육시켜왔다. 다른 학교들은 창가집들을 편찬하며, 창가를 민족주의의 수단으로 교육시켰다. 반면 한민학교의 경우에는 아쉽게도 이러한 창가집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 공문서인 「명치 44년 8월 22일차 포조사덕지방 조선인 동정(明治四十四年八月二十二日次浦潮斯德地方朝鮮人動靜)」과 「한민학교 아동용 창가 등 역보의 건(韓民學校兒童用唱歌等譯報ノ件)」은 한민학교 학생들이 창가를 가창했음을 알려준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보국가>, <대한혼>, <한반도가>, <애국가>, <국기가>, <운동가>, <국민가>, <소년건국가>, <부모은덕가> 총 9곡들이 한민학교에서 가창되었다고 한다. 이 9곡들 중에서 <대한혼>, <한반도가>, <애국가>, <국기가>, <소년건국가>, <부모은덕가> 6곡들은 다른 신문들과 창가집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반면 <보국가>, <운동가>, <국민가> 3곡들은 오직 한민학교와 관련된 일본 외무성 공문서들에서만 가창 양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민학교의 창가 가창 양상은 반드시 일본 외무성 공문서를 통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본고는 한민학교의 창가 가창 양상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노랫말들의 변개 양상도 함께 살펴보겠다. 그리하여 한민학교를 다니며 연해주에서 거주하던 근대 한국인들이 어떠한 창가를 가창했는지까지도 함께 살펴보겠다.

『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의 편찬과 이본현황

유정란 ( Yu Jeong-r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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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前間恭作(Maema Kyosaku, 이하 마에마로 칭함)이 작성한 『校註歌曲集』의 편찬과정과 이본 현황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마에마는 1891년 조선에 입국하여 1911년까지 거주하면서 조선의 역사, 문화, 문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인물이다. 『교주가곡집』은 1929년에 저술이 시작되어 1931년에 1차 편집이 완성된 고시조 집성집으로 17권 1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마에마와 손진태가 주고받은 서간문을 바탕으로 『校註歌曲集』의 작성 년대 및 제반 환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는 조선에 거주할 때부터 조선의 가집을 수집하였고, 일본으로 귀국한 이후 시조 작품을 집성하여 가집을 편찬할 계획을 갖게 되었다. 이후 마에마는 1931년에 자신의 저서를 동양문고에서 출판하려고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가집 체제의 특징은 가능한 한 많은 시가 작품과 조선의 악곡을 보여주려 했던 마에마의 의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교주가곡집』은 1931년 일본에서 1차적으로 완성되었고, 1936년까지 마에마에 의해 수정이 거듭되었다. 이후 마에마 친필본인 원본은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현재는 이화여자 대학교 도서관 고서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 원본은 조선진서간행회(朝鮮珍書刊行會)의 설립자인 오한근에 의해 소장되다가 1965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구입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편, 1931년 1차 편집된 가집을 저본으로 하여 필사된 『교주가곡집』 이본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사실도 밝혔다. 서울대본 『교주가곡집』은 1934년 이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출판을 목적으로 1차 편집된 본을 필사하여 마에마가 조선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태서문예신보』 소재 소설 「충복」 연구 - 번역 양상을 중심으로

조경덕 ( Cho Kyoung-d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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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코난도일의 소설 「The Three Students」(1904)의 번역, 「충복」의 번역 양상을 살펴보았다. 「충복」이 본격적인 추리 소설 번역임을 전제하고 번역 양상 고찰을 통해 근대 소설사에서 추리 소설이 어떻게 번역·수용되었는지 그 맥락을 규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먼저 동아시아에서 「The Three Students」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았다. 「The Three Students」는 중국에서 1906년에 번역되었고 일본에서는 1907년에 번역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1918년에 번역되었다. 중국이 일본보다 1년 앞섰고 한국은 중국보다 십여 년 뒤처졌다. 이것은 코난도일 추리소설의 동아시아 3국의 번역 상황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한편 기존 연구자의 견해와 같이 이 글에서도 「충복」의 번역자를 장두철로 보았다. 기존 연구자들의 근거는 장두철이 『태서문예신보』의 편집자이며 YMCA 영어 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The Three Students」의 화자는 왓슨이지만 한국어 번역 「충복」의 화자는 전지적 화자다. 번역에서 추리소설 시점의 묘미를 살리지 못한 것이다. 이는 번역자가 당시 관찰자로서 1인칭 화자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의 서사 관습을 고려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한편 번역자가 스스로 자신의 창작 역량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원작에서 왓슨이 한 역할을 번역자의 분신인 외부 화자가 맡아 이야기를 전개했고 번역자의 자유를 활용하여 원작에는 없는 추리 내용을 「충복」에 포함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번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기존 용어로는 ‘중역’과 ‘의역’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용어로 「충복」의 번역 태도와 번역 양상을 충실하게 포괄해낼 수는 없다. 『태서문예신보』는 “본문으로붓터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자 편집 방침이었다. 그리고 「충복」 번역자는 원문을 저본으로 번역하는 것에 강조점을 놓았다. 「충복」 번역자는 원본을 저본으로 하되 당시 독자의 서사 관습을 존중하면서 자신 나름으로 인물을 묘사하고 추리 과정을 덧붙여 번역했다. 시점을 교체한 것은 서사 관습에 관한 사항이면서 동시에 번역자의 자유를 확보하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작품 바깥의 화자가 왓슨의 역할을 맡으면서 번역자의 창작의 여지를 더 넓힐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에 나타난 단속적(斷續的) 주체와 법정 서사

이은선 ( Eun-seon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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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의 '엘니자벳트'는 '진정한 근대적 주체'라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엘니자벳트'의 '미숙함'은 작가 김동인의 '미숙함'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엘니자벳트'의 '감각'이 빈번하게 결락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엘니자벳트'에게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중대한 사건에 대한 과도한 압축과 생략을 '과소진술'로 규정하고, 이와 같은 '과소진술'이 실행된 것이 어떤 의미를 발생시키고 있는가를 검토함으로써 '엘니자벳트'라는 주체가 성립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엘니자벳트'의 '지각 작용'이 어떠한 방식으로 은폐되는지를 살피고, 이를 통해 단속적(斷續的) 주체의 정립 과정을 검토했다. 이어서 '엘니자벳트'라는 주체의 언어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 실패하는 지점에서 이 주체의 특수한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하고, '법정 서사'를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엘니자벳트'가 어떤 점에서 '진정한 근대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감각이 소거되고, 언어의 임계를 경험하여 법정에서 패퇴할 수밖에 없는 허약한 주체의 자리를 가리켜 김동인은 '약한 자'로 지칭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약한 자'의 형상은 이후 김동인의 텍스트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미주의자' 김동인의 '미'에 대한 강조를 떠올릴 때 빈번하게 감각의 결락을 경험하는 '엘니자벳트'의 존재는 상당히 기묘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박팔양의 만주체험과 작가의식 변화

조현서 ( Cho Hyeon-seo )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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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여수 박팔양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기, 그의 의식변화를 분석하였다. 박팔양은 그동안 월북문인이라는 굴레에 갇혀, 그의 문학적 성과와 관계없이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박팔양이 일제치하의 만주에서 활동한 것 때문에 그의 명망은 더욱 평가 절하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는 일제의 어용지인 『만선일보』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만주시인집』이라는 조선어 시인집을 발간하는 등 당시 만주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를 쉽게 친일 이력을 가진 월북작가로 규정하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표면에 나타나는 일제 친화적인 양상은 검열의 망을 피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박팔양은 절필의 의지를 보이며 저항하고자 하였고, 필요에 의해 글을 써야 할 때는 일제가 ‘오족협화’라는 환상으로 그렸던 만주를 허상이 가득한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활동한 이력들도 그의 이러한 우회적 저항의지를 잘 드러내준다. 박팔양은 만주에서 『만선일보』의 편집자로 활동하였는데, 이 신문은 비록 일제의 어용지였으나 당대 유일하게 조선어의 사용이 허용되었던 문학장이었다. 많은 문인들이 자국어를 사용한 작품을 신문의 ‘문예란’을 통해 게재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민족문학을 유지·계승하였다는 측면도 있다. 『만선일보』가 표면적으로는 국책적 견지의 지도기관이었으나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재만조선인의 민족지 구실을 하기도 한 것이다. 한편 재만 일본인 작가들과의 좌담회에서 그들이 조선인 작가들에게 작품을 일본어로 창작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박팔양은 이들의 논리가 타당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이 조선의 문인이라는 정체성 및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결국 박팔양은 일제가 만주를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독립국’으로 설정해놓은 것을 활용해 우회적으로 저항을 펼쳤다. 그렇지만 이런 여러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정치적·이념적 프레임으로 인해 박팔양은 그의 문학적 성과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온전하지 못했던 문학사 정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지금, 박팔양 문학은 그 매음새 역할을 하기에 적합하다. 게다가 저항과 협력이라는 대립적 논리로만 설명하던 만주시기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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