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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31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7권 0호 (2013)
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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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중종~선조 년간에 활동한 權擘(1520~1593)의 시에 나타나는 ``孤獨``의 양상과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화기에 벗 윤결이 옥사하면서 권벽은 폐쇄적인 내면지향의 삶을 살아간다. 이 같은 태도는 정치현실에서 積薪신의 상태로 이어지고 배척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구축한 고독의 영역의 안에서 ``시``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표 현하고자 했다. 사화 직후의 시들에는 상승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상승의 이미지를 통해, 폐쇄 적 내면세계로의 방향 전환이, 간험한 정치현실과 거리를 둠으로써 禍를 멀리하고, 정치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며, 자신의 고결함을 유지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벽의 시에는 ``愁``의 정서가 지배적인데, 사화 이후 벗의 죽음으로 인한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나 정치 현실에서의 무력감이 ``수``로 집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경험 단위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표현의 어려움이 음울하고 어둡고 시름겨운 정서(愁)로 응축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愁``의 정서는 일부 작품에서 역 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나타나기도 한다. ``愁``는 존재의 불안감과 결합하면서 정치현 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 無望한 현실에서의 체념 비판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 데 후자가 보다 강한 색채를 띤다. 한편 세상의 입장에서 패배자로 보일 수도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항구적 가치를 통해 세계에 대한 대응의 지점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맛없는 술``, ``못생긴 아내``, ``부드러움``, ``어리석음``, ``우졸`` 등 세상의 관점과 상반되는 가치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당장의 효용이나 외양적 화려함이 아니라, 더디고 투박해 보일지라도 내면의 견실함을 바탕으로 한 항구적 가치를 추구했다. 그리고 소소한 일상이나 행위에 유의 함으로써 폐쇄적 삶에서 유희적 즐거움을 느끼며, 일상생활에서 유념할 가치를 점검 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려져있거나 드러나지 않은 가치에 대한 주목은, 고독의 영역으로 돌아선 자아의 세계에 대한 대응방식이자, 고독의 생활 속에서의 정신적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 가능하다. 사화기 한 시인으로서의 권벽은 폐쇄적 내면지향의 고독을 추구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정치현실을 떠나지 않았던 만큼 사유와 정서는 정치현실에 대한 반응의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 그의 고독은 혼란한 세상에서의 처세의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정치 행위적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08년 남산 아래 유몽인의 처지와 심경-『終南散閑錄(종남산한록)』散考(산고)-

이승수 ( Seng Su Lee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37권 0호, 2013 pp. 31-53 ( 총 23 pages)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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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 유몽인은 1608년 1월 28일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다. 도승지는 왕의 지척에서 왕명 출납의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된다. 하지만 유몽인은 이 자리에 오래 머물 지 못했다. 이틀 뒤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했는데, 권력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유몽인은 12일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로부터 유몽인은 이듬해 4월까지 관직을 얻지 못하였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남산 아래 은거하면서 39수의 시를 남겼다. 이 글은 39수의 시를 텍스트로 삼아 당시 유몽인의 처지와 심경을 고찰 한 것이다. 유몽인은 심각한 소외감에 시달렸으며, 그 결과 심리가 크게 위축되어 죽 음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죽은 자를 호명하곤 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가 남달랐던 유몽인은 당시의 상황을 용납하기 어려웠으며, 이는 자학과 집권자에 대한 혐오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정서적 소모를 겪으며 유몽인은 극심한 노쇠감에 시달렸다. 그가 처한 것으로 인식했던 궁벽진 산골도, 풍설이 몰아치는 곳도 기실은 그의 내면 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삶은 1611년까지 변화 속에서 지속된다. 유몽인의 독특한 기질은 정치적 부침을 겪으면서 뚜렷하게 드러났고, 이는 그의 문학 세계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이글은 그중의 일단을 조명한 결과이다. 유몽인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매우 복합적 인물이다. 특정 시간을 단위로 하는 세 부적 조명은 유몽인의 삶과 문학을 입체적으로 재구하기 위한 유효한 방법의 하나로, 다른 시기들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남궁선생전>에 나타난 도가적 고독 -곽상의 독화론적 고독 과 근대적 외로움 의 탄생-

윤채근 ( Chae Keun Yoon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37권 0호, 2013 pp. 57-79 ( 총 23 pages)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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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선생전>의 주인공 남궁두는 비록 우발적일망정 도가의 독화론적 ``고독``에 진 입하여 신선이 되려했다. 이는 현실계와 초월계의 정신적 합일을 통한 화해로 연결 되곤 하는데 이를 존재론적 고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남궁두는 애초 정신적 초월을 목적으로 한 인물이 아닌 탈주범이었으며 당연히 영적 초월을 육체적 초월로 이해 하게 된다. 그리고 육체적 초월마저 실패하자 남궁두에게 남은 삶은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으로서 ``외로움``의 형식을 띠게 되는데 이 지점은 근대적 폭민이 성립되는 지점과 흡사하다. 그런데 남궁두는 暴民이 되는 대신 시정에 숨은 은둔자로 멈추고 만다. 그 이유를 추측하다보면 남궁두가 저자 허균이 상정했던豪民이른바 으로서, 평범한 폭 민 이상의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말하자면 폭동을 이끄는 민중 지도 자 상에서 실천력이라는 마지막 고리 하나를 결여한 잠재적 영웅이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작품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허균으로선 남궁두의 그러한 가능성을 소설을 통해 모두 실현시킬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남궁선생전>이야말로 홍길동이라는 민중 지도자의 현실적 탄생 과정을 해명해줄 수 있는 <홍길동전>의 다른 짝패임을 추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홍길동의 탄생은 ``근 대적 외로움``의 주체로서 근대적 주체를 예고하는 현상이었음도 더욱 분명해진다.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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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田 沈魯崇 (1762~1837)은 아내에 대한 悼亡詩文을 대표로 하는 感傷的인 글들 이 기존에 소개되었었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1801년부터 1806년까지 機張縣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생활을 빠짐없이 일기로 남겼다. 본고는 심노숭의 유배일기를 중심으로 小品작가의 문학에서의 孤獨의 표출 양상을 해보고자 쓰여졌다. 그 기초 단계로서 심노숭이 유배에 처하게 된 가문적, 정 치적 내력과 유배일기 『南遷日錄』및 이것의選錄인 『山海筆戱』 에 대한 문헌적 고찰을 2장과 3장에서 우선 알아보았다. 『山海筆戱』는 『南遷日錄』에서 총 551話를選錄한 것이다. 4장에서는 流配人 심노숭의 고독의 양상과 그 消遣方法으로 택한 ``문필`` 활동을 소개하였다. 사실 심노숭 유배일기에서 확인되는 심노숭의 孤獨은 全面的 이지도 않 고, 큰 분량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다만 感情 의 여린 선을 그 어떤 문인보다 강하게 가지고 있던 인물이기에, 유배일기에도 특유의 孤獨 과 感傷 이 종종 드러나 있다. 이를 소개해보았다. 심노숭은 유배지의 고독과 고통을 다양한 글쓰기 작업 즉 ``文筆``로 해소했다. 일기 의 형식으로 생활의 모든 것을 담아 고향으로 보냈는데 모친을 위해 諺文으로 번역하 기까지 했다. 아우의 일기와 交換 도 겸하였다. 그의 일기 속에는 유배지의 낯선 風光 과 事物·物産, 역사와 인물, 자신이 겪은 政爭 과 당대의 정치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수준 높으면서도 감동력 있는 人物記事, 事件記事, 문예성 있는 잡록 등 자유 로운 문체의 들이 탄생했다. 향후 심노숭 유배일기를 동시기(이옥, 김려 등)의 유배문학 및 선후의 유배문학과 대비 고찰을 통해 그만의 독특한 특성을 추출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있다. 심노숭 문 학에의 깊은 영향으로서의 蘇軾·元진과, 불교 도교조차 자신의 삶과 생활에 밀착시 킨 심노숭의 독특성 등도 향후 考究 의 대상이다.

성해응 문학에 표출된 고독의 양상과 의미

손혜리 ( Hye Ri Son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37권 0호, 2013 pp. 109-133 ( 총 25 pages)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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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후기 정조·순조 연간에 활동한 검서관 출신의 서족 문사인 硏經齋 成海應(1760~1839)의 문학에 표출된 고독의 양상과 의미에 대해 논의하였다. 성해응은 검서관으로 재직하면서 正祖의知遇를 받았지만, 정조가 죽은 후 관직에 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느낀 사회적 소외와 상실감, 오랜 田野생활에 흉년까지 겹쳐 지면서 심각한 수준의 궁핍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음의 병이 되면서 불면의 고통을 겪게 되고 심지어 눈병까지 발병하였다. 심적 경제적 신체적 고통이 동반되면서 그의 고독은 한층 심화된다. 아울러 이때 사랑하는 가족과 오랜 세월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의 죽음을 목도하였다. 반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잃고 어린 막내딸이 요절하면 서 그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더해 갔다. 또 그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로 좁지만 깊이 있는 교유를 추구했던 만큼, 지인들의 죽음으로 큰 비애와 고독을 느꼈다. 인생의 전성기를 공유했던 이들의 죽음을 통해 기억의 지층 아래 봉인해 두었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회한과 비통에 찬 글을 碑誌哀祭類의 문체로 다수 서술하였다. 가난, 불면, 눈병, 노쇠 등을 소재로 한 시에서도 고독은 많이 표출된다. 이 역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전야에 거주하던 시기에 집중된다. 그런데 성해응은 극한 고통의 상황에서 외로움과 쓸쓸함, 비애와 고독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다수의 시문을 저술하였으며, 胡蝶之夢등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생무상을 강조하고 현실에의 초 탈을 지향하였다. 또 우주무한의 논리로 현실을 초극화함으로써 고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고통이 상쇄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고독을 극복하고자 한 적극적인 대처방식이자 강한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의 미가 있다. 시문 저술은 방대한 분량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성해응이 고 독에 대처하고 이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와 하위주체의 고독

박역민 ( Yong Min Park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37권 0호, 2013 pp. 135-162 ( 총 28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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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시대의 하위주체인 기생이 일상에서 社會的인 조건으로 인해 겪는 고 난과 불행 그리고 고독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생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고난과 불행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런데 기생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고난과 불행은 신분제 사회에서 奴婢案에 등재된 賤民이자 奴役을 수행해야 하는 기생이라면 보편적으로 겪어야 하는 고난과 불행이다. 따라서 기생의 사회적 고난과 불행은 기생의 일상 앞에 미리 준비되어 있 는 근원적인 고난과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기생의 일상에서 사회적 고난과 불행 그 리고 고독은 다양한 차원에서 발생한다. 특히 신분제 사회에서 천민으로 살아야 하는 기생은 가족 사랑 정절 등 지극히 사적인 삶이라 할 수 있는 영역에서도 법과 제도 그리고 관습의 지배를 강하게 받는다. 기생은 사랑과 정절 역시 자신의 의지와 감정 에 따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법적 제도적인 질서뿐만 아니라 관습적 질서의 지배를 받는다. 법적 제도적 관습적 질서가 기생의 가족 사랑 정절 등 사적 영역 곳곳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기생은 신분적 성적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도 법적 제도적 관습적 질서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본고는 사회적 차원의 고통과 불행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치유받지 못하고 지독한 고독과 절망에 빠 져 자결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던 기생, 동료 기생과의 친밀한 우정을 통 해 사회적 고난과 불행에서 빠져나오려는 기생등의 모습을 통해 조선시대의 기생이 고독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독한 공간, 제주에 대한 제 인식

김새미오 ( Sae Mio Kim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37권 0호, 2013 pp. 163-186 ( 총 24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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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시대 절대 고독의 공간이었던 제주도에 대해, 유배인 관리 제주문인 의 범주로 나누어 감정의 층위를 살펴보았다. 먼저 유배인들에게 제주도는 불안과 상 실감을 주는 공간이었다. 유배 자체가 형벌이었기에 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 과 사면에 대한 일말의 희망으로 버텨갔다. 게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소멸 되는 공간이기에, 그 고독감은 상실감으로 이어졌다. 관리들에게 제주도는 조선에서 홀로 유교문명을 모르는 곳이었다. 또한 자신이 지내왔던 익숙한 공간과의 결별을 통 해 고독감을 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공적인 힘이 있었기에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제주도를 변화시키고, 점진적으로 제주를 유교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제주 문인 들에게 제주도는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었고, 떠났어도 다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공간이었다. 매계 이한우의 경우 대과에 낙방하고 돌아와서 영주십경시 등을 지었는데, 이는 자신의 외로움과 상실감을 제주자연을 통해 표현하면서 승화시킨 것이었다. 부해 안병택의 경우 출륙금지령이 풀려 본토로 공부를 하러 갔지만, 끊임없이 제 주를 그리워하고 또 왕래하였다. 수은 김희돈의 경우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다시 제주도에 은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신이 선택한 은거가 아니라는 점 에서 또 다른 양상의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배인과 관리들에게 모두 제주도는 처음 경험하는 공간이었기에 이 자체만으로 도 고독한 곳이었다. 또한 제주문화가 본토와는 많이 달랐기에 차별적 시각을 가지고 제주도의 문물을 대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감정적 상황적 단절이지만, 결국 자신 이 익숙했던 공간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고독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제주 문인인 경우 자신들의 가지고 있던 자연과 문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 만 이들에게도 제주도는 자신들을 얽매는 공간이었기에 그 틀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 가 가득하였다. 이는 공간적인 단절에서 오는 고독감이었다. 이런 경향은 조선말 제 제가 풀려 제주도 문인들이 본토를 오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독감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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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 17세기 對中國貿易 관련 野談에 형상화된 중국의 이미지를 탐구한 것 이다. 중국에 관한 이미지는 주로 사대부 계층이 쓴 送序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士大夫계층은 명나라에 대해서는 문명국으로서의 선망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청에 대해서는 丁卯·丙子 胡亂등을 환기하며 반감과 울분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야담속에 형상화된 역관 상인 등의 계층은 몇몇 실패담을 제외하면, 대체로 중국 사행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기에 중국을 ``행운``과 ``기회``를 가져다 주는 땅으로 인식하였다. 본고에서는 우선 16 17세기 對中國貿易 관련 야담을 개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역관 상인 계층의 중국使行 동기가 富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고, 또 한 실제로 부를 성취하는 성공담이 실패담보다 훨씬 더 많음을 통해 당대의 역관 상 인 계층에게 중국 사행은 명 청을 가릴 것 없이 부를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나 계기로 인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역관 李華宗과 한 의주상인의 일화를 통해 야담속에 형상화된 역관 상인들이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富를 축적하게 되는 두 가지 유형의 실례를 살필 수 있었다. 燕行중에 우연히 귀중품을 주워 이를 시 장에 팔아 갑부가 되는 역관 李華宗에게 중국은 자기도 모르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땅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의 중국 무역 경험과 치밀한 계획을 토대로 실패를 딛고 다 시 성공하는 의주 상인에게 중국은 또 한번의 성공을 위한 ``기회``를 주는 땅이었다. 따라서 본고에서 분석한 결과를 일반화하거나 현실과 동일시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대중국무역 관련 일화에 나타난 역관 상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送序에 나타난 사대부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중국을 ``행운``과 ``기회``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月沙(월사) 李廷龜(이정구)와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의 교유 일 고찰

( Myoung Hee Lee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37권 0호, 2013 pp. 219-248 ( 총 30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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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당대 문단의 흐름 속에서 月沙 李延龜 (1564~1635)와 白沙 李恒福 (1556~1618)의 교유를 통해 상호간의 문학적 태도와 교감을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 었다. 기존의 연구가 월사와 백사의 무술년 사행에서 시작된 정치적인 동료였음을 밝 히는데 그쳤다면 본고는 여러 자료들의 분석과 비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무술 사행에 백사가 처음에 상촌 신흠을 부사로 천거했으나 선조 가 반대해서 월사가 가게 된 것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실록 기사를 통해 백사가 원 래 염두에 두었던 인물이 월사임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무술년의 사행으로 두 사람의 교유는 더욱 돈독해졌다. 무술 사행 이전에도 이미 두 사람의 인연이 있었 던 사실은 제문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특히 사행 기간 내내 이어진 차운은 서로의 문 학적 능력과 선호를 파악하고 충고도 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였으며 문학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이후 그들은 평생 정치적 문학적 동반자였다. 월사는 백사를 위해 묘지명을 지었으며 신도비를 지은 상촌 신흠이나 행장을 지은 계곡 장유보다도 훨씬 백사를 인정하고 추숭하였다. 이것은 월사의 문학적 인식이 상 촌이나 계곡과 다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월사와 백사는 이백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월사가 선별한 이백의 시를 백사가 쓰고 월사가 발문을 지은 『이백시초』를 만들기도 하였다. 월사와 백사의 이백시 선호 는 이들의 호방한 기질과 시적 경향에 결부시킬 수 있다. 월사는 백사가 지은 <율곡비명>이 논란을 야기하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백사의 문장을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작자로서의 역량과 원작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정보다 는 몇 마디의 가필만 하자고 주장하였다. 백사의 해학적 기질이 드러나는 조천록 의 일부 기록도 실상은 재기가 뛰어난 월사와 만나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서 물러나 떠난 도봉산 유람에서 달밤의 아름다운 경치를 놓칠 수 없다며 백사가 발로 차서 월사의 잠을 깨우는 장면, 이명한을 시켜 출사표와 적벽부를 읊게 하는 모습에서도 허물없이 교유하는 그들의 돈독함과 호방한 기질이 엿보인다.

栗谷(율곡)의 선비정신을 통한 公職者像(공직자상)에 관한 연구

이주용 ( Ju Yong Lee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37권 0호, 2013 pp. 249-283 ( 총 35 pages)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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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의미로 儒學을 공부한 儒生모두를 선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삶의 師表가 되었던 율곡의 삶과 사상을 통해 본 논문의 목적인 율곡의 선비정신과 이를 통해 나타난 공직자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儒者的지식인의 한사람이었 던 율곡은 해서는 出仕 관료로서, 退仕해서는 학자로서의 치열한 삶을 살았다. 오늘날 한국의 공직사회가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현실을 바라보며 의식 있는 이들 은 선비정신이 결핍되었다고 못내 아쉬워한다. 본 論文은 49세라는 전 생애를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힘썼던 율곡 의 선비정신과 이를 통한 공직자상을 살펴봄으로써, 지금의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덕 목은 무엇인지 새롭게 진단해 보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율곡의 선비정신에 있어 서의 특징적인 것으로써, 聖人을 목표로 한 立志, 誠을 통한 修已, 그리고 熙晧之樂 의 등이다. 出世觀 율곡은 이러한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를 통해 임금을 으로 만들 고자 하였으며, 깨끗한 朝廷, 엄정한 공직기강, 튼튼한 국방, 그리고 민생을 구제하는 데 사력을 다하였다. 따라서 율곡이 知識識勢의 안목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실천적 공직자상에서 오늘의 공직자상을 찾아보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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