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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31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2권 0호 (2015)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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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喜는 24세의 나이에 부친 金魯敬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들어가서 乾嘉學者에게 학문을 배우고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이후 평생 동안 청대 학계 동향에 대해 밀접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직접 翁方綱에게 배우며 石墨書樓의 풍부한 소장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후지츠카 지카시 박사 이후부터 여러 학자, 전문가들이 김정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이에 대한 착실하고 알찬 성과를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는 옹방강과 김정희 사이의 화상과 글로 맺은 인연에 초점을 맞춰 秋史와 <東坡笠.圖>의 인연으로부터 논제에 들어가고자 한다. 선물이라는 시각에서 김정희와 연경 문인들 간의 화상 교유 및 관련 문제에 대해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연구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첫째, 만나거나 이름을 들 때의 선물과 생일 선물로 화상을 주고받는 情誼, 둘째, 연경 교유를 통해 추사가 확립한 화상 시각, 셋째, 명청 화상문화와 조선 화상문화의 서로 대응하는 긴밀한 관계, 넷째, 조선 후기 화상문화의 새로운 변화 등이다. ‘화상 텍스트’가 근세 동아한문화권을 공동으로 구축하는 데 指標와도 같은 요소이므로 본고는 필자가 오래 전부터 주목해 온 명청 화상문화를 참조 기준으로 삼아 조선 화상문화의 변천 맥락을 고찰하고, 김정희와 연경 문우 간의 화상 교유의 구체적 단서를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조선과 명청 문인들의 개인 의식과 심미적 품위의 실질적 내용, 이동점, 추세 및 영향 관계를 밝히고, 조선 중후기 화상문화의 개황 및 변화 추세를 탐구하고, 명청 시야와 조선 화상 간의 대응 관계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자 한다. 이로 보아 김정희가 연경 文人圈에서 본 여러 가지 소중한 선물(화상)의 문화 효과는 나라와 지역이 다른 곳에서의 인연의 한 면일 뿐만 아니라 한중 교류, 더 나아가 동아한문화권 교류의 시각으로도 쓰기에 충분하다.

조선시대의 미인도와 여성초상화 독해를 위한 제언

박영민 ( Young Min Park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2권 0호, 2015 pp. 41-75 ( 총 35 pages)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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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학계와 미술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美人圖”라는 명명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의 그림에는 신윤복의 「미인도」 계열 畵像이 다수 전한다. 대부분 기생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화상 계열의 주인공이 아름다운 것은 분명하지만 각각의 그림을 모두 “미인도”라고 명명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신윤복의 「미인도」 계열에 “미인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근대 이후이다. 현재 신윤복의 「미인도」 계열 화상을 초상화로 볼 것인가 미인도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즉 미인도의 초상화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주장과 초상화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는 주장이 갈라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두 주장은 본격적인 논의의 장을 펼친 적이 없었다. 본고에서는 여성 전신 단독상을 미인도라고 부르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아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을 명명하는 관습적인 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정 대상을 명명할 때에는 설령 화가나 소장자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림의 특성이 드러나는 명명이 필요하다. 여성 전신 단독상을 모두 「미인도」 라고 한다면 각각의 그림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아 명명의 의미가 약해진다. 또한 본고에서는 조선시대에 미인도라고 명명했던 그림의 실체와 근현대에 미인도라고 명명했던 그림의 실체가 달랐음을 고증하고 신윤복 계열 그림을 일률적으로 미인도라고 명명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본고에서는 미인도라는 명명이 여성 화상을 남성의 감상의 대상으로만 보는 데에서 기인함을 밝혔다. 그런데 그림의 대상이자 주인공인 여성은 자신의 화상을 그릴 때에 깊이 관여하였다. 따라서 여성 대상 화상을 감상할 때에는 화가, 감상자뿐만 아니라 그림의 대상이자 주인공인 여성의 태도가 어떠하였는가도 살펴야 함을 강조하였다.

중국(中國) 역대(歷代) 직공도(職貢圖)의 한인도상(韓人圖像)과 그 인식

정은주 ( Eun Joo Jeo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2권 0호, 2015 pp. 77-124 ( 총 48 pages)
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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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貢圖는 고대 중국을 왕래한 외국 사신의 도상을 그리거나 중국과 각국의 대외관계, 역사와 풍속을 附記한 기록화이다. 직공도에는 주변 諸國이 入朝한 정황을 기록으로 남겨당시 중국의 성세를 과시하는 한편, 대외관계에서 각 시대별로 外夷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현존하는 직공도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배경 없이 각국 조공 사신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해당 사신의 국명이나 職方志를 적는 유형, 둘째는 貢路를 배경으로 무리지어 조공물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유형, 셋째는 배경을 생략하고 사신이 조공하는 동물을 제어하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중 韓人圖像이 포함된 것은 첫째와 둘째 유형에 해당한다. 본문에서는 <양직공도>를 비롯한, 중국에 현존하는 역대 職貢圖의 제작 배경을 살펴보고 그중 한민족에 대한 도상 묘사와 그에 대한 직방지를 분석하여 중국의 인식 변화를 파악하였다. 이는 중국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본 역대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통시적으로 고찰할 수 있으며, 중국 역대 직공도의 조선 유입 상황과 그에 대한 조선의 인식도함께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역대 한중관계사의 일면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인물과 풍속을 겸한 대외관계 기록화로서 직공도의 의의를 모색할 수 있었다.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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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靈璧石에 대한 기술 양상을 중심으로 『雲林石譜』와 『素園石譜』에 나타난 괴석 문화를 고찰한다. 두 석보는 모두 중국 각지의 괴석들을 집대성한 전문 서적이지만 내용과 형식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차이를 석보의 저자 杜館과 林有麟의 편찬 의도와 북송 말과 명말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논의한다. 특히 석보의 편찬과 영벽석 문화 사이의 관련성이 본 연구의 주관심사이다. 두 석보는 영벽석이 유행한 시기에 편찬되었고 텍스트에서도 영벽석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루지만 배치와 기술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雲林石譜』는 영벽석을 권1의 첫 번째 괴석으로 소개한 반면에 『素園石譜』는 영벽석을권2에서 첫 번째 괴석으로 다루면서 권1에서도 영벽석으로 만들어진 硏山을 대거 소개한다. 이는 명말에 이르러 영벽석 감상 문화가 이미 정착되었고 이중에서도 다시 小巧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벽석 연산이 문인들 사이에서 가장 선호되었음을 보여준다.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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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山 승려는 詩畵軸에 題詩와 題序를 함으로써 友社의 결속을 확인하고 예술적 취향을 공유했다. 본고는 五山 승려의 書齋圖 詩畵軸을 중심으로 그 題詩와 題序의 문학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溪陰小築圖』 등 五山의 書齋圖는 대체로 京都 南禪寺의 住職을 중심으로 하는 승단 내권력을 쥐고 있는 승려들의 교유의 장에서 제작되었다. 그들은 幕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공무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한적한 삶을 꿈꾸었다. 따라서 그들의 書畵鑑賞과 詩會에서 제작된 書齋圖 시화축에는 俗塵을 초극하려는 정신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러한 俗塵초극의 정신은 조선 안평대군의 『夢遊桃源圖詩卷』, 明末文士의 行樂圖製作 등에서도 보편적 心態로서 나타난다. 明末淸初에는 明의 遺民 등을 중심으로 塡詞가 유행하여, 行樂圖 속에는 像主의 塡詞 행위를 소재로 삼은 것도 제작되고 題詠도 詞 작품이 많이 부속되었다. 일본 五山의 시화축, 조선의 『夢遊桃源圖』의 題詠, 明末淸初 행락도의 題詠은 각각 문학사 전개의 相違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와 같은 그림"의 문화적 함의 -<소상팔경도>를 중심으로-

조규희 ( Kyu Hee Cho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2권 0호, 2015 pp. 187-208 ( 총 22 pages)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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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삼남인 안평대군은 1442년 6월, 세종에게서 ``匪懈``라는 堂名을 하사받았다. 이해 8월에 이에 대한 화답으로 여겨지는 <소상팔경시화권>을 제작하였는데, 이 시화권에는 당시 영향력 있는 重臣 및 집현전 학자 다수의 시문들이 포함되었다. 비해당 안평대군이 <소상팔경시화권>을 제작하여 당시 정계와 지식인 사회의 이목을 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그려진 <소상팔경도>는 현재 그림이 전하지 않아 이후 조선에서 활발하게 제작된 <소상팔경도>의 연원 및 원형으로서만 주목되어 왔다. 그런데 이 당시는 세종이 ``소리``의 문화 통치를 구상하던 시기였고, 이러한 세종의 문화 정책을 수행할 핵심 지식인들은 당시 ``시``로써 문단을 주도하던 비해당 안평대군을 따르던 집현전 학자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점에 제작된 <소상팔경도>를 이들이 ``시와 같은 그림``으로 주목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이렇게 ``시와 같은 산수화``로서의 <소상팔경도>가 북송 11세기 후반에 처음 출현한 배경 및 고려에서 명종의 어명으로 특정한 시기에 제작된 맥락을 살펴, <소상팔경도>를 1442년에 안평대군이 재조명한 문화적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 유행한 특정 畵題의 수용이 그동안 인식되어 온 것처럼 수동적인 영향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목적을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었음을 논증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와 같은 그림 제작이 이후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그림을 통해 우회적으로 우아하게 자신들의 뜻을 전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음도 살펴볼 것이다.

19세기 선서(善書)의 간행 유통과 삽화의 활용

정우봉 ( Woo Bong Chu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2권 0호, 2015 pp. 209-235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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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善書 제작과 간행 보급에 있어 조선의 편찬자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게 하기 위해 諺解本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삽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초월적 존재를 경배하는 차원에서 聖像으로서 활용하기도 하며, 선악 행위와 그에 따른 인과응보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의 일화로 기록하는 한편, 그 일화들을 한 장면 속에 묘사한 삽화를 적절하게 활용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후반에 활발하게 제작 보급되었던 善書들에는 각종 삽화들을 풍부하게 수록해 놓음으로써 그 사상적 내용들을 보다 다양한 계층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善書의 간행 보급에 있어 삽화의 활용은 서지학, 도상서사학, 출판문화 등의 관점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19세기 선서에 수록된 삽화는 인물도상, 서사도상, 문양도상, 기타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삼강행실도류의 삽화들이 일화 중심의 서사도상에 치중되었던 반면에, 善書 수록 삽화는 경배 대상으로서의 신적 존재를 초상화의 형태로 활용하기도 하고, 민간신앙의 기복적 성향을 반영한 부적 등의 문양을 활용하기도 하였으며, 그밖에 사당 건물, 대나무, 도장 등 다채롭게 도상을 활용하였다. 또한 중국 서적에 수록된 삽화를 복각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판각한 삽화들을 다수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삽화들은 문자 텍스트와 결합하여 조선의 토착화된 선서 제작 및 보급 유통을 더욱 촉진시켰다고 생각된다. 고종 연간 無相壇 소속 구성원들에 의해 편찬된 신형 善書는 그 제작 과정의 신이함을 여러 삽화를 통해 드러내 보임으로써,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경전으로서의 권위와 신성성을 확보하는 한편 종교적 신비 체험의 진실성을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대(淸代) 석성김(石成金) 『전가보(傳家寶)』 삽화(揷畵)의 "쾌악도(快樂圖)"와 기물 도안

김수현 ( Soo Hyun Kim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2권 0호, 2015 pp. 237-262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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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代 石成金이 편찬한 『傳家寶』는 권선징악적 훈계와 격언, 좌우명을 모은 勸善書이면서, 詩文, 俚語, 趣聞, 小曲 등의 문장과 각종 생활상식, 잡다한 지식의 내용이 담겨 있는 이른바 日用類書, 혹은 通俗類書라 불리는 실용 목적의 민간백과전서이기도 하다. 『傳家寶』에는 저자 石成金의 초상화, 箴言을 博古器物 도안 속에 적어 넣은 ‘眞益箋’, 여가와 취미의 장면들을 묘사한 ‘快樂圖’, 그리고 ‘快樂圖’와 짝을 이루어 화면의 내용을 다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다양한 기물 도안이 삽화로 들어 있다. 본 논문은 『傳家寶』의 삽화를 통해 명청대 출판시장에서 博古器物의 도안과 골동품 취미, 수집 취미가 갖고 있던 문화적 위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피고 염가대중본의 시대에 서적 삽화가 어떤 방식으로 문인계 층의 지식과 취향을 독서대중에게 복제, 전달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명대(明代) 양긍(楊亘)의 『무이지(武夷志)』가 조선에 끼친 영향

전병철 ( Byung Chol Jun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2권 0호, 2015 pp. 265-288 ( 총 24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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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학자들은 朱子를 존숭하여 그의 저술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이 있는 책들도 열람하기를 갈망했다. 더욱이 武夷山은 朱子가 은거하여 학문을 강론한 곳이자 武夷棹歌가 창작된 현장이므로, 朱子學을 추구하는 학자에게는 聖地로 인식되는 산이었다. 무이산과 관련해 20종의 山誌가 중국에서 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전래된 판본은 楊亘의 『武夷志』 외에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추론해본다면, 楊亘이 편찬한 『武夷志』의 방향성이 武夷書院을 비롯한 朱子와 관련된 사실에 중심이 있었으므로, 朱子를 존숭한 조선의 학자들에게 매우 부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武夷山志』의 전래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사실은 李滉의 문집에 보인다. 李滉 이후에 『武夷山志』를 열람했다고 언급한 학자는 鄭逑이다. 그는 楊亘의 『武夷志』를 수정하고 새로운 내용을 보완하여 朝鮮本 『武夷志』라고 일컬을 만한 새로운 판본을 편찬했다. 그 후 李萬敷가 편찬한 저술은 節約本의 성격을 가진다. 이처럼 楊亘의 『武夷志』는 조선의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朝鮮本 『武夷志』와 節約本 『武夷志』가 편찬되었다. 또한 조선의 山誌를 만드는 데에도 중요한 전범으로 작용했으니, 『淸凉志』가 바로 그 경우이다. 李世澤이 楊亘의 『武夷志』를 전범으로 삼아 『淸凉志』를 편찬한 까닭은 武夷山이 朱子로 인해 朱子學派의 학자들에 의해 聖山으로 존숭되는 것처럼, 淸凉山과 관련된 李滉 및 退溪學派 학자들의 작품 및 자취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긴밀한 연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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