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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31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8권 0호 (2017)

방법으로서의 에도-조선후기 학술과 에도 문화지성사의 다섯 가지 비교-

심경호 ( Sim Kyung-ho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8권 0호, 2017 pp. 9-34 ( 총 26 pages)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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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 교수는 새로운 중국학 연구방법으로 ‘방법으로서의 중국’이란 개념을 제시하여 일본 漢學의 자의성과 중국 학문의 의도적 편협성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암암리에 한국의 한학, 중국학, 동아시아학에 대해 자성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종래 한국의 전통인문학울 연구하는 학문은 ‘독자성’과 ‘발전’을 확인하려는 목적성이 강하여, 타자에 대한 사실론적, 의미론적, 횡적 연관을 살피는데 게을렀고, 그 때문에 결국 자기 역사의 종적 관계를 명료하게 분석하지 못한 면이 있다. 에도를 방법으로 삼는 일은 그러한 자성의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종래의 華夷秩序와는 상이한 전근대 공간이 형성되었다. 이때 조선과 일본은 상대방의 경험을 참조하면서, 외부의 학문성과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용하여 자국의 학술과 문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본고는 17세기 이후 근세 한국과 일본의 학술 및 문화를 객관적으로 비교 연구할 것을 제안하는 뜻에서, 문자학문 권력의 구현 양태와 博學, 日本 朱子學과 李滉, 朝鮮通信使가 양국 학술문학 발달에 끼친 공헌과 한계, 日本 古學 및 청초 고증적 훈고학과 丁若鏞 등의 논점을 설정하여 평소의 견해를 밝히기로 한다.

마츠시타 타다시(松下忠) 선생의 『에도시대의 시풍시론(江戶時代の詩風詩論)』과 에도시대 한문학 연구의 현재

고야마린타로 ( Rintaro Goyama ) , 송호빈(번역)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8권 0호, 2017 pp. 35-79 ( 총 45 pages)
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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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마츠시타 타다시 선생의 『에도시대 시풍시론: 명·청의 시론과 그 섭취(江戶時代の詩風詩論 -明·淸の詩論とその攝取)』(明治書院, 1969. 이하 ‘이 책’이라고 칭함) 간행 시의 상황과 오늘날의 연구사적 의의를 밝히고 아울러 戰後(1945년 이후) 근세 일본한문학에 관한 硏究史를 소개하고자 한다. 마츠시타 타다시 선생(1908~1994)은 도쿄문리대학(東京文理大學. 現 筑波大學)文學科 漢文學科에서 배운 뒤 와카야마대학(和歌山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기온 난카기(祇園南海)의 影寫說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에도(江戶) 한문학의 詩論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책은 장년에 걸친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1972년에 일본학사원상(日本學士院賞)을 수상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8년에는 중국어역이 간행되어, 본서는 앞으로 더욱더 국제적으로 조명될 기회가 늘어나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1천 건 이상의 근세 일본 漢詩文의 용례를 인용하면서, 근세 일본 한시의 양상을 통일적 기준으로 고찰했다는 점에서 획기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연구의 기초로 여겨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근세 漢詩壇 전체와 약 60명의 儒者·漢詩人에 대하여 ① 經學과 詩文 어느 쪽을 중시했는가 ② 唐詩·宋詩·明詩 가운데 어떤 스타일의 시를 주장했는가 ③ 格調說·性靈說·神韻說 중에 무엇을 지지했는가, 라는 시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근세기 漢詩壇의 전체상을 다루면서 여러 유익한 知見을 제공하고 있다. 근세 일본을 네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의 개황을 서술한 것이 그 하나이다. 또한 시대가 내려오면서, 詩文이 經學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혹은 唐詩·宋詩·明詩 등 詩風의 차이를 차츰 자각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근원으로서의 ‘唐詩’를 의식해가며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시풍을 선택하는 쪽으로 변화하였다는 등의 지적도 중요하다. 또한 格調·性靈·神韻이라는 말을 근세 일본 한시 연구에 정착시킨 점도 이 책의 큰 의의이다. 儒者·詩人 개인의 詩論과 詩觀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이미 서평 등에서 지적된 것처럼 과제도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는 실제 작품에 관한 분석이 적다는 것, 에도 漢詩史上 중요인물(賴山陽 등)이 고찰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것 등이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또 明淸詩論의 섭취라는 점에서 보아도, 예를 들어 시인에 따라서는 같은 袁枚를 지지하지만 文學觀은 크게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 이 책과 같은 검토 방법은 유효하게 작동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간행된 이후 약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근세 일본 한시문에 관해서는 여러 새로운 연구 조류가 일어났으며 특히 일본문학 연구자의 조사에 의한 많은 知見이 축적되었다. 예를 들어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보다 자유롭게 詩文을 평가하게 되었다. 더욱이 와카(和歌)·하이카이(俳諧) 등 다른 문학장르와의 관계를 살펴보아가며 한시의 동향을 고찰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儒者·漢詩人의 문학활동에 대해서도 많은 역사자료를 사용하면서 상세하게 고찰되었다. 몇 가지 문제점과 간행 후 연구의 갱신 상황에 유의하면서, 본서가 갖은 풍부한 내용을 앞으로의 고찰에 활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의 상업관에 관한 소고(小考)-『도비문답(都鄙問答)』을 중심으로-

고영란 ( Young Ran Koh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8권 0호, 2017 pp. 81-105 ( 총 25 pages)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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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심학(石文心學)의 시조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1685-1744, 이하 바이간)의 사상이 담긴 <도비문답(都鄙問答)>(1739), <검약재가론(?約齊家論)>(1744), <이시다 선생 어록(石田先生語錄)>(출간년 미상)의 세 서적에서 설파되는 상업 관련 언설을 통해, 바이간이 꿈꾼 이상적 상업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본 연구의 목표가 있다. 기존의 연구는 바이간의 학문과 설교가 상인의 윤리의식을 고취시키고 상가의 학문적 토대를 이끌어갔다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간의 논의는 바이간이 꿈꾼 상업이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본 연구는 <도비문답>, <검약재가론>, <이시다 선생 어록>에 묘사된 상업과 관련 언설을 살펴보았다. 연구의 결과, 바이간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적 위계 하에서 경제적 공생(共生)을 도모하는 윤리적 영위로 수렴되는 행위를 상업이라고 생각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위정자인 무사계층의 법과 관습에 위배되지 않는 태도를 준수하고 검약으로써 상거래를 영위하여 이득의 일부가 사회에 환원되는 것을 바이간은 상업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바이간이 설파한 상업이란 현실적인 상행위 그 자체에 관한 논의이기도 하지만, 하늘 아래 마땅히 실천되어야 하는 사농공상 모든 신분의 윤리적 태도인 ‘사람의 도리’와 관련된 논의이자 ‘성인의 도리’로 확장되는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이간의 상업 관련 논의는 사농공상 모두가 궁극적으로 ‘성인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수렴되며, 이에 성인과 사농공상의 위계적 간극을 좁혀주는 것으로서 탈봉건적이고 반주자학인 성격을 띠고 있는 문제적인 발상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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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前田勉(마에다 쓰토무)는 일본 사상사에 병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병학이 武威를 합리화하여 일본 유학자의 武國 관념을 형성하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문명권 내부의 평화를 지향하는 유학자의 정체성과 무위에 기반한 무국 관념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닐까? 伊藤東涯의 경우를 보면 종족적, 지리적 화이론에서 탈각하여 문명의 유무에 따라 중국도 ‘夷’가 될 수 있고 일본도 ‘華’가 될 수 있다는 문명적 화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서는 이러한 화이관이 균열을 보인다. <三韓紀略> 서문에서 東涯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복속했다는 자국중심적인 인식을 보인다. 여기서는 무위에 의한 우월의식이 간취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왜구의 침략이나 임진전쟁에 대해서는 무력의 남용으로 양국의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고 하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文’을 통치이념으로 삼는 유교 국가로 거듭날 것을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東涯의 문명지향성은 荻生?徠와 비교할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 유학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위와 문명의 사이를 위태하게 오가면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적 문명성은 무위가 폭주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그러나 서구의 침탈에 직면해 균형추는 무위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갔다. 일본의 사상사 연구는 일본의 주체성, 개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조선을 ‘방법’으로 삼았을 때 근세 일본의 탈중화적인 면모가 꼭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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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한문 문장의 읽기와 쓰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荻生?徠와 그의 문인들은 그 흐름의 선두에 위치하였다. 고문의 辭를 문제 삼았던 만큼 이들은 자신의 논의를 해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근거와 사례가 필요하였다. 荻生?徠의 <四家雋>, <古文矩>는 고문의 서사, 자구의 운용, 전환, 함축 등에 각별히 주목한 산문 비평서이다. 소라이의 비평 방식은, 산문에서 서사의 회복이 중요하며 이는 수사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그의 문학론을 반영한 것이다. 소라이의 비평은 전후칠자마저도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진한고문론의 수사론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太宰春臺의 <文論>은 재도론에 의거하여 전후칠자의 문학과 소라이의 문학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산문 비평서이다. 훈고와 고증의 방식을 통해 문학 비평을 수행했다는 점, 그리고 문학적 수사에 대해 강한 경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문론>이 보유하고 있는 독특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조선문단에서 시행된 산문 비평과 비교해 보았을 때, 소라이와 슌다이의 산문 비평은 전후칠자 문학을 대상 텍스트로 하여 구체적으로 비평을 가하고 있다는 점, 자구 위주의 촘촘한 비평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들의 비평 방식은 한문 산문에 대한 한일 양국의 문사들의 입장차를 유추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규보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의 기사(紀事) 선택(選擇)과 구성(構成)에 관하여

이희영 ( Lee Hee-you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8권 0호, 2017 pp. 165-192 ( 총 28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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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이규보가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기 시작한 시기에 지었던 「開元天寶詠史詩」43수에서 보이는 기사 선택의 양상과 구성 의도에 대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규보가 선택한 기사는 명황과 양귀비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용을 중심축으로 하여, 개원 연간을 보필했던 재상, 명황과 양귀비의 형제들, 이백·왕유와 같은 문인들, 당시의 풍속에 대한 내용들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태평성세에 목표를 잃은 황제의 관심이 美色으로 옮겨진 뒤, 나라가 쇠락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43개의 기사를 서문에서 언급했던 사항들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내용들을 선택하여 서사적으로 구성하였다. 개원 연간은 명황을 보필했던 재상과 형제들에 대한 정을 바탕으로 開元之治를 이루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영사시의 전반부에 구성하였으나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다. 이것은 천보 연간의 失政으로 인하여 나라를 혼란으로 이끌었다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기능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는 ‘명황’이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역사의 추가 변할 수 있다는 기사들을 구성하여 ‘歷史의 興亡’ 혹은 ‘權力의 無常’과 같은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이규보는 아버지 상을 마친 뒤 천마산에서 내려와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앞서 언급했지만 巨韻長篇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쓰고 있으며, 특히 구직 외에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至大한 것은 「東明王篇」이라는 서사시를 지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개원·천보’ 연간의 기사를 선택하고 구성하여 43수의 연작시를 짓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43수의 영사시는 이규보 개인이 역사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명황의 ‘經世濟民’에 대한 失策을 지적하는 것은 고려사회를 비판하는 寓意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규보가 더욱 중점을 둔 것은 명황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經世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원 연간의 기사는 그 시대의 정돈된 群臣 관계를 통하여 전성기를 구가한 모습을 본받고, 천보 연간의 기사는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나라의 기틀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평소부터 安易한 마음을 단속해야 왕조가 이어질 수 있다는 면을 보여준 것이다. 이규보는 사대부로서 지녀야할 정치적 이상을 43수의 연작시로 말했다고 볼 수 있다.

『호서기정(湖西紀征)』에 실린 화양구곡시(華陽九曲詩)에 대한 고찰(考察)

이상주 ( Lee Sangju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8권 0호, 2017 pp. 193-231 ( 총 39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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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聖學(1879~1957)과 그 동료 4명은 일제강점시대인 1937년 화양구곡 속리산 부여 등 호서지방을 기행하고 <湖西紀征>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공성학은 고려유민의 후손이며 개성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컸다. 林河永과 공성학 등은 고려말 두문동 72인에 제사를 지내고 尊周大義와 충절을 선양하기 위해 개성에 두문동서원을 창건했다. 또 <두문동서원지>를 간행했다. 부여 출신인 林河永은 7년 동간 위의 두 가지 두문동사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고향 扶餘로 돌아가는 임하영을 전송하기 위해 華陽洞과 俗離山 그리고 白馬江을 함께 여행했다. 이들이 杜門洞書院을 완공한 후, 그 노고와 환희에 대한 自慰 自祝, 그리고 고향 부여로 돌아가는 임하영을 편안히 귀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함께 여행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존주대의의식의 건축조형적 실천으로는 개성에 두문동서원을 창건했다. 시문학적으로는 화양구곡에 대해 지은 시와 「華陽九曲吟」를 통해 표출했다. 그리하여 두문동서원에서는 충절을 지킨 선현들을 참배하면서 그 의지를 견강히 했다. 화양구곡은 우암 송시열이 존주대의를 성지화한 명소였기에 탐방순례하여 그 의지를 견강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껏 1인이 독자적으로 화양구곡시를 지은 사례는 있으나 2인 이상 동행한 사람들이 모두 화양구곡시를 지은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다. 이도 주목할 사항이다. 조선 땅에서 도학의 연원을 계승하고 춘추대의정신이 극명하게 표상화된 곳이 화양동이었다. 이렇듯 이들은 개성의 두문동과 충북의 화양동 두 곳을 존주대의 충절을 선양 보존한 대등한 성지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화양동을 탐방하고 그 의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런 그들의 의식을 화양구곡을 읊은 시에 담았다. 첫째 杜門洞書院完工 自祝과 화양구곡기행에 대한 기대감, 둘째 화양구곡 道學 淵源과 그 계승의 현장으로 인식, 셋째 효종의 승하와 再造藩邦에 대한 想念 등이다. 이렇게 이들은 일제강점기 그들의 존주대의의식을 표출했다. 이들은 그런 의식을 문학을 통해 확산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5명이 지은 화양구곡시는 그 정경을 아름다운 시어와 비유법, 반어법을 사용하여 문예적 수준도 양호한 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기 개별적으로 화양구곡에 대한 지은 시에 견줄 수 있다. 이민응의 「展拜尤菴宋先生」 3~4구를 보자. 대개의 경우 명나라 神宗의 글씨 ‘非禮不動’, 毅宗의 글씨 ‘玉藻氷壺’를 원용해서 재조번방의 공에 대해 존모의 뜻을 표했다. 이민응은 선조의 글씨 “萬折必東”를 원용해서, 우암이 존주대의를 聖地化한 사실을 표현했다. 이점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湖西紀征>에 실린 華陽九曲에 대하여 지은 詩는, 일제강점기에 존주대의의식을 시에 표출한 시로, 그 시대적 구곡문학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고려대 소장 의안(醫案) 『경험방(經驗方)』의 저자 소백누인(小白累人)의 신원과 생애 고증

김하라 ( Kim Hara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8권 0호, 2017 pp. 233-260 ( 총 28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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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려대 소장 의안 『경험방』의 저자 ‘小白累人’의 인적사항 및 생애에 대한 고증을 수행했으며, 그 결과 ‘소백누인’이 풍기군에 거주하며 의원으로 활동한 任?(1684~1754)임을 밝혀냈다. 관료문인 任道三의 庶子인 그는, 戊申亂(1728)의 역모 죄인 任環의 형이라는 이유로 풍기군의 관노가 되었고, 함께 유배된 아들 任泰?와 더불어 이 지역에 정착해 의원의 경력을 이어나갔다. 『경험방』의 저자 임정은 의원이라는 진로를 선택한 경위와 수련 과정, 동업자들과의 관계, 평생의 이력 등을 自序에서 약술했다. 그는 일찍부터 의원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인 뒤 거의 독학으로 一家를 이루었고 통상적인 의학 이론을 따르지 않고 남다른 처방을 실행한지라 의원 집단 내에서 평생 질시와 폄훼에 시달렸다고 술회했다. 임정은 국왕과 조정의 신료들 사이에서 두 차례나 논란이 될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유력한 의원으로 판단된다. 『승정원일기』의 기사에 따르면 56세의 임정은 성범죄와 거주지를 이탈한 불법 의료행위로 고발을 받았는데, 6년 후 그에 따른 처분의 부당함이 제기되어 재심이 이루어졌다. 이 재심과 관련된 기사를 통해 경상도관찰사를 비롯한 상당수의 지방관들이 임정의 고객이었던 정황이 포착되며, 심지어 국왕 영조도 임정의 이력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이는바 이는 의원으로서 그의 영향력을 방증한다.

명(明)·청(淸) 교체기(交替期) 대명(對明) 해로(海路) 사행(使行)의 출항지(出港地) 고찰(考察)

이성형 ( Lee Soung-hyu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48권 0호, 2017 pp. 261-305 ( 총 45 pages)
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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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 사행기의 사행단은 대략 5척의 사행선에 18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었고, 사행선의 유지보수를 위해서 工手가 동행했으며,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사신들은 각자 외교 문서, 방물을 가지고 분산해서 승선했다. 해로 사행기는 겸행이나 동행이 일반적이었는데, 우선 황제의 생일이 겨울이나 이른 봄이었기 때문에 동지사가 성절사를 겸행하기 용이했고, 해로 사행사로 차출되는 것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사행사의 선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해로 사행의 항로는 1629년 이전까지는 登州를 경유했고, 이후로는 寧遠衛를 경유했다. 이때 ?島는 1622년에 東江鎭이 설치되면서 조명간 외교 교섭의 1차 관문으로서 해로 사행사들이 반드시 경유했던 장소였다. 平島는 항로상의 주요 분기처로 登州나 寧遠衛 경유 항로가 분기되는 장소였으며, 특히 인근의 老鐵山水道와 遼東淺灘는 항행상 위험성이 높아서 조선이 지속적으로 항로의 변경을 요청했던 장소였다. 조선의 출항지로 우선 安州牧의 출항지는 해로 사행기에 최초로 이용된 장소로 구체적으로는 元頭浦口로 추정되지만, 淸川江의 얕은 수심으로 일정이 많이 지체되면서 2차례 정도만 운용되었다. 다음으로 郭山의 宣沙浦는 1622년부터 丁卯胡亂 이전까지 운용되었는데, 宣沙浦의 위치를 宣川이나 鐵山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해로 사행도에서는 旋?浦로 개칭되기도 하지만, 기타 문헌에서는 宣沙浦가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石多山의 출항지는 丁卯胡亂 이후의 출항지로 운용되었는데, 1628년부터 1629년은 平壤의 大同江에서 출항해서 石多山으로 이동했다. 다만 大同江에서 출항할 경우 위험부담이 높고, 시일이 지체되어 1630년부터 육로로 石多山에 이동해서 출항했다. 명의 출항지로 우선 登州 출항지는 해로 사행이 시작된 1621년부터 운용되어, 寧遠衛 경유 노정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2차례 더 운용되었다. 다만 1631년의 동지성절사는 登州로 입항했지만, 귀로 시에는 寧遠衛에서 출항했다. 寧遠衛 출항지는 1629년에 袁崇煥에 의해서 해로 사행로가 변경되면서 1637년까지 운용되었다. 다만 노정이 변경된 직후에 山海關의 내지가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2차례 정도 登州 경유 노정이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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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대표적 경전인 『論語』에는, 孔子나 그 高弟, 또는 三家와 隱者에 의해 引用된 詩가 총 8편이 있는데, 이 중 <雄雉>와 <淇奧>, <巧笑?兮> 등 3편의 引用詩에 대해서는 이미 孔子의 學問觀과 文質論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나머지 5편의 引用詩들도 비록 錯簡 및 학자들 간의 異見, 詩 引用의 주체 등 여러 問題들을 안고 있으나 그 引用의 정황과 성격이 독특하다는 점과, 孔子의 핵심적인 思想은 물론 그 門人들의 性向과 價値觀 및 學問的 成就 등을 유추하는 데 중요한 端緖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 孔子의 詩敎論的 敎育 意圖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그 연구 가치가 높다고 본다. 本稿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이 5편의 引用詩를 중심으로 孔子와 그 門人들의 詩敎 및 價値觀 등을 조명하고, 詩 引用 상황과 목적, 詩 引用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가치 세계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그 意味를 심도 있게 탐색하고자 하였다. 또한 學派나 學者들의 觀點에 따른 詩 解釋의 다양한 見解를 살펴보고, 孔子 詩敎의 敎育的 意義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孔子의 仁 實踐 意識과 詩 引用에서는, 錯簡說을 적극 수용하여 孔子가 詩 引用을 통해 仁에 대한 抽象的 定義보다 實踐하고자 하는 意識과 확고한 實踐 意志가 중요함을 詩敎로 깨우쳐주고 있다고 보았다. 둘째로 孔子의 節義論과 詩 引用에서도 여러 학자들의 견해 중 程朱의 錯簡說을 수용하여, 齊景公과 伯夷叔弟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결국 영원히 칭송받는 것은 富貴가 아니라 節義와 같은 그 사람의 德이란 점을 詩敎로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 보고, 이를 儒學의 節義論的 觀點에서 분석하였다. 셋째로 曾子의 孝敬觀과 詩 引用에서는, 본인이 終身토록 실천한 孝敬을 弟子들에게 몸소 보여주면서 實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敎育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孝道와 恭敬을 평생 實踐했던 자신의 굳건한 意志를 보여줌은 물론, 孔子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완성된 孝敬觀을 詩敎로 弟子들에게 전수한 살아있는 敎育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넷째로 他人의 詩 引用에 대한 孔子의 反應과 價値觀에서는, 詩 引用의 주체보다는 孔子의 反應에 초점을 맞추어 그 가치관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三家에 의해서 周頌 이 참람하게 使用되자 孔子는 을 斷章하여 言及하면서 三家에게는 강한 경고를 보내고, 弟子들에게는 正名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詩敎論的 敎育 效果를 거둘 수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匏有苦葉>과 관련해서는, 儒學의 義理論 중 가장 기본적 양상으로서의 出處에 관한 信念과 가치기준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보았다. 孔子가 詩를 인용하거나 언급해서 弟子들을 敎育했던 이유는, 학문의 진보와 인격의 성장에 시가 기여하는 측면이 매우 크며, 때로는 자기의 뜻과 理想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孔子 詩敎의 특징은, 대체로 자기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感發과 自發的인 懲創을 통해 더 높은 인격의 진보로 자연스럽게 弟子들을 인도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詩를 통해 實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거나 가치 판단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孔子가 이러한 人才들로 인해 사회적 혼란과 분쟁이 終熄되고 理想的인 사회의 건설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孔子가 『論語』에서 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詩敎를 통해 敎育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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