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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연구검색

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18권 0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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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한문산문서사문학의 특징과 성격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前代와 비교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 시대 문학의 특징과 성격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주제, 내용, 구조, 어휘 등에서 새로운 면모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자생적인 관점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漢文學의 특성상 중국적인 원인에 착안하여 관찰하였다. 이 시대 한문서사문학의 변화가 자생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그 폭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변화의 빌미가 중국, 특히 淸代의 작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변화를 청대 중국서사문학의 流入으로 간주하고,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이 시대 한문서사문학의 성격과 의의를 `傳奇문학에서 탈피한 근대화`, `白話漢文體를 수용한 담론의 자유화`, `주제와 내용의 사실화·현실화` 등으로 잡았다. 이러한 성과는 중국문학과의 비교연구를 통해서 얻은 것으로, 우리의 漢文學 연구에 있어서 이 방면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안눌 「증유곡역리(贈幽谷驛吏)」의 연구

김창호 ( Chang Ho Kim )
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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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李安訥의 시 「贈幽谷驛吏」와 관련한 前代의 문학 전통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 작품의 내용과 구성 방식을 분석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조선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한시 창작 전통의 일면을 살피는 동시에,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시인인 이안눌 시의 주제적, 문체적 특성을 展望할 입지점을 마련하고자 했다. 「贈幽谷驛吏」는 이안눌의 시가 도달한 주제적, 미학적 차원의 최종적 수준을 해명하기에 적절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의 시 정신과 작품 내용상의 보편적 성향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事實 記錄의 精神과 家門意識이라 할 수 있다. 여러 詩話나 詩選集은 穆陵盛世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안눌을 표지할 작품으로 주로 「四月十五日」, 「聞歌」 등을 거론해왔다. 그리고 그간의 연구 성과들도 이들 작품을 중심에 놓고 그의 문학적 성취를 가늠하려 했다. 최고 수준으로 논의되는 작품의 분석을 통해 해당 작가와 작품의 특성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 시대 다른 시인과 변별되는 주제적, 미학적 좌표점을 설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해당 작가의 가장 일반적인 작품이 무엇이고, 또 그 일반성을 보장할 작품의 속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한시사가 역사적 존재들의 삶과 정신을 포괄하는 정신사의 실질적인 영역을 擔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贈幽谷驛吏」는 이안눌 시의 보편적 성향을 해명할 주요 근거를 보여주는 한편, 그의 시가 當代 문학사에서 도달한 주제적, 미학적 성취를 가늠하게 할 기준점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산문발달의 원인과 추이 연구

안영길 ( Yeong Gil Ahn )
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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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산문 문학이 부각되었다. 즉, 전대와 달리 시문학이 약화되고 반면에 산문이 중심 장르로 등장한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단순한 장르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지배적인 의식구조의 변화를 가리키며 향후 18세기의 소품문학과 다양한 글쓰기의 토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시에서 산문으로 중심축이 변화되는 動因은 무엇인가를 규명하여 정리했다. 먼저 기온의 강하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가 전염병과 식량부족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에 대응한 농경서적과 같은 실용서 발간이 일반화되었다. 다음으로 45년간 4차례의 전쟁을 치루면서 실기문이 발달되었다는 점이다. 전란의 체험을 각양의 산문형식으로 표출하여 그 참상을 징언하고 재발을 막고자 하였다. 또 비지문에 대한 전범을 세우고자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김창협이 나름대로의 작법론을 제시했다는 것은 산문쓰기가 활발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한편으로 임란 이후 가문을 중흥시키려는 노력과 관료 진출을 꾀하는 문인들의 팽창 등은 산문의 양적 증대를 가져왔다. 또 조선 전기의 평화롭던 상황과 달라진 시대상 역시 한시의 형태만으로 당대의 표현 형태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산문의 부상은 필연적이었으며 양적 팽창에 따른 난삽하고 질적 저하를 막기 위해 나름대로 중국의 古文을 끌어 당대의 산문에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明末 淸初 문단을 참조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산문 창작에 질적 변화를 촉구하게 되었다. 즉, 의고파의 수용이 계기가 되어 조선에서 산문 비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산문의 양적 증가에 따른 변화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부정적인 시각에서는 문장의 질적 하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다량의 산문이 산출됨으로써 그 중에는 수준 미만의 작품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글쓰기의 시도는 개성의 역동적인 표출로 산문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산문의 지향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장편화이다. 전대와 달리 개인의 문제에서 가정이나 사회문제로 대상의 범위가 확산되었다. 특정한 시간대가 아니라 일생을 다루거나 좀 더 복잡한 인간관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장편화는 필연적이었다. 다음으로 전범화를 추구했다. 명말 청초 문단에 대한 참조는 산문쓰기에 새로운 인식을 갖게 했다. 즉 先秦兩漢의 古文을 표준적으로 설정하거나 唐宋의 古文 역시 전범으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산문 쓰기의 질적 향상을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실용화를 지향했다. 임란 이후 전란의 체험에 따른 실기문이 발달하였고, 열악한 농경을 극복하기 위한 농경서 발간이 일반화되었고, 실생활에 쓰는 비지문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즉 이처럼 실생활과 직결된 글쓰기를 주도했다. 이것은 조선 전기와 다른 글쓰기 형태의 변화를 의미하며 산문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진 것을 뜻한다. 즉 17세기에는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문인들의 인식도 달라졌고, 문학적 성향도 바뀌어 기존의 산문과 다른 형태의 글쓰기를 가져왔다.

농암(農巖) 금창협(金昌協)의 제문(祭文)에 나타난 문장기법 연구

오석환 ( Seok Hwan Oh )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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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지은 문장 가운데에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글은 죽은 사람의 영전에 고하는 애제류(哀祭類)의 글일 것이다. 애제류의 문장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이의 영혼에게 글로써 추모하고 위로할 수 있는 문류(文類)이기에 내용이 슬프고 처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고대의 제문은 흠향을 고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는데, 중세 이후의 제문에는 언행을 아울러 찬미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을 내려오게 함은 여러 수식을 발하는 것보다는 진실에 힘써야 하니, 정성과 슬픔이 그 본질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농암 제문의 대표작으로 제시한 작품들은 모두 그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과 스승, 그리고 형제에 관한 글인 만큼, 농암이 심혈을 기울였으리란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슬픔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문장기법에서 농암은 먼저 `품고 드러내지 않는` 기법을 사용하여 질박한 표현으로 사실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더욱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문장의 기세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같은 구절을 겹치거나 중간 중간에 삽입하여 억양을 반복시키고 있다. 세 번째로는 `말과 뜻이 하나를 이루는` 기법을 사용하여 형식과 내용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게 함으로써 문장을 생동감 있고 확연하게 하고 있다. 네 번째로는 `사물에 뜻을 담는` 기법을 사용하여 물상(物象)과 정의(情意)가 융합된 명려(明麗)하면서도 심원한 독특한 경계를 구성하였다. 산문의 일반적인 기능은 실용에 있다. 특히 제문은 죽은 사람의 영전에 고하는 글이다. 따라서 그 주안점은 당연히 추모와 슬픔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의 아름답고 화려한 글 솜씨가 있더라도, 내용에 슬픔이 결여돼 있거나 죽은 자와 산 자로 하여금 절실한 슬픔을 느끼게 할 수 없다면, 이는 죽은 글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이고 사실적으로 슬픔을 표현한다면 이는 글이 천박해질 뿐이다. 농암의 제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철저히 슬픔에 그 주안점을 두었고, 다양한 문장기법을 통하여 슬픔에 대한 노골적이거나 사실적인 표현이 전혀 없으면서도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가 되고, 함께 흐느끼며 슬픔을 주체할 수 없게 한다.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의 「고려궁사(高麗宮詞)」 소고(小考)

김영죽 ( Young Jook Kim )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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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추재 조수삼(1762-1849)의 「高麗宮詞」에 대해 분석 고찰한 것이다. 추재는 承文院 胥吏출신의 中人으로서, 2,700여 수에 달하는 시작품을 창작하며 名實相符 조선 후기의 걸출한 시인이었다. 6차례에 걸친 燕行 경험을 모두 시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紀俗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歲時記를 짓거나, 竹枝詞를 창작하는 등에 힘을 기울였다. 「高麗宮詞」 역시 그의 이러한 기속의 特長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하지만 「高麗宮詞」는 추재의 작품 가운데에서 매우 독특한 형식과 소재를 취한 것임에도, 기존의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고려궁사」가 저작되기까지의 경위와 작품이 지니고 있는 意味를 본격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高麗宮詞」는 총 22수로 되어있으며, 小識가 첨부되어 있어 그의 창작 경위를 밝히고 있다. 소지에 의하면, 추재는 『靑湖稗史』를 읽고 要領을 얻어 竹枝調를 본떠 작품을 짓는다고 하였다. 『청호패사』는 그 현전여부가 아직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추재의 「고려궁사」를 통해서 오히려 그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데, 高麗朝와 관련된 逸話나 野史가 아닐까 여겨진다. 「고려궁사」는 宮詞라는 시의 형식으로 인해, 조선조에 창작되었던 宮詞의 전개 양상 속에서 논해야 함은 당연지사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이를 그의 전체적인 작품 경향의 한 축에서 살펴보아야 그 면모가 입체적으로 드러날 듯하다. 즉 그가 평소에 문학작품을 저작함에 어떠한 태도로 임하였는가, 어떠한 문학적 형식을 선호하였는가, 저작시기에 있어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었는가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추재는 「고려궁사」를 통해 고려조 宮中의 雜事를 다양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에 대한 史料가 조선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을 감안 하였을 때, 추재의 「고려궁사」가 일종의 史料로서의 가치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기존의 宮詞들이 묘사한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긍정적 시선을 지니고 궁중의 풍속을 창작했다면, 추재의 宮詞는 화려한 궁중 풍속 이면에 있던 사회적인 문제점-예를 들면 고려조 불교의 폐단, 환관의 실상-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개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추재는 「奇異」나 「上元竹枝詞」, 「歲時記」 등 當代의 풍속세태를 素材로 하여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사적 資料를 남겼다. 「고려궁사」 역시 그러한 창작 정신의 일환이었을 것이며, 이는 고려조 궁중 풍속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 당시의 사회상을 읽어내는데 더 없이 중요한 자료로 자리매김 한다고 보여진다.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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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동해 조종진의 서예론와 문학론이 氣의 함양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고 있음을 고찰하였다. 동해는 시대가 하강할수록 자연의 원기는 혼탁하게 된다는 사고관에서 발로하여 후천적으로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흐려지는 氣를 배양하기 위해 養氣를 강조하고 있다. 우선 문예창작 과정에서 氣는 문학적 원리가 되는 理와 기본축을 이룬다는 대전제 아래, 여타의 창작요소와 조화를 이루어 작품을 통어하는 원천적인 요인이 된다고 보았다. 또한 작가의 심리적 창작기제인 天機의 발현은 인위성과 의식성이 배제된 후에야 神이라는 범주의 가장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천기의 발현에도 氣의 역할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서예론에서 동해는 學古와 養氣를 주요한 요소로써 추구하고 있다. 원기의 손상과 서법의 폐단을 되돌리는 방법으로 古法을 익히고 명산대천의 유람을 통해 창작주체의 내면에 氣를 온축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氣를 涵養하여 서적을 통한 학습이라는 주관적 한계에서 벗어나 高雅한 인사들과 유람하며 체험을 확대하고 心胸을 키워 주체의 내적 역량을 개조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함양된 양기는 작품을 총체적으로 通御하는 심미적 기준이 되며, 氣를 중시할수록 작품의 내면적 구조의 完整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청대(淸代) 논서시(論書詩) 소고(小考) -형식론(形式論)을 중심으로-

이기범 ( Gi Bum Lee )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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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서시란 시로써 글씨를 논한 시를 말한다. 이러한 논서시는 건안문풍의 일인자인 자건 조식의 악부시를 논서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며, 당대에 이르러 이백과 두보에 이르러 논서시의 전형이 형성·발전하게 되었다. 宋代에는 蘇軾와 黃庭堅에 의하여 `尙意`를 추구하는 논서시가 유행하였으며, 양적인 면에 있어서도 『全唐詩』에 100餘首에 불과했던 논서시가 『全宋詩』에는 900餘首로 늘어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元·明대에는 별다른 변화 없이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적인 서풍을 추구하고 선현들의 감회를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淸代에 들어서면서 논서시는 金石學·考證學과 더불어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는 단순한 양적인 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면에 있어서도 전시기와는 다른 본격적인 書法을 논하고 있는 詩들이 많아졌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짧은 시로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미진함이 있었기 때문에 절구의 연작 형태인 논서절구나 長詩의 논서시가 성행하였다. 본고에서는 역사상 가장 왕성하게 논서시가 창작되었던 청대가 전대와 다른 어떠한 새로운 양식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하여 당시의 논서시를 유형별로 분석해보았다.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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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 주자학의 수용은 佛敎를 統治理念으로 삼아 왔으나 후기에 이르러 사회제도적인 폐단이 만연하게 된 問題를 해결하고자 고심하는 가운데 시작된 것이다. 조선 건국 후 儒學은 새로운 왕조에서 정치·제도적 문제로서 이를 실천하여 나가는 時代的 課題가 되었다. 太祖 이래 崇儒政策으로 말미암아 性理學은 날로 발전하였고 많은 人材들이 배출되었으니 특히 世宗朝에 이르러서는 朝鮮文化의 黃金期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集賢殿 學者들을 中心으로 수많은 儒者들의 出現을 보게 되어 가히 東方의 儒學을 꽃 피울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세조 이후 절의파의 형성은 在野의 세력이 되고 여말 절의파 후손인 김종직은 士林派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들의 학문계통은 金宗直·金宏弼·趙光祖로 傳受되었다. 燕山朝에 勳舊勢力과 士林派 간의 士禍가 발생하여 사림들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中宗이 卽位하여 燕山君의 폐정을 개혁하고 風化를 振作하려 할 때, 道學政治를 실현하려고 하는 기운이 일어났으나 己卯士禍가 일어나 趙光祖와 같이 했던 신진 사림들의 이와 같은 뜻이 수포로 돌아갔다. 士禍以後로 士林들은 政治的 現實에 뛰어드는 것을 꺼리고 隱居하여 獨善에 힘을 기울이는 傾向을 띠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으로 조선의 유학이 이론과 사색의 경향으로 일변하게 되었다. 화담과 회재는 16C초 조선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 인물이다. 화담은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기피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기일원론을 주장하는 한국적 유학의 독특한 경지를 펴 나갔다. 그러나 화담이 추구하는 궁극적 경지는 이와 기가 합일되는 妙處인 것으로, 그를 이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주기론자, 심지어 유기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회재의 경학연구는 현실 정치와 관련시켜 연구했다는 점이 독창적이고 주자를 넘는 경지였다. 회재의 정치의식은 경학연구로 표출되었다. 회재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정치의 요체를 `인`으로 규정한 것은 그의 민본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결국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방도는 군주의 마음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16세기의 性理學의 特徵은 朱子學을 한국화 시킨 것이다. 따라서 朱子의 철학체계를 어떤 식으로든 재해석해 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朱子學의 변용을 통해 朝鮮 朱子學의 獨自性을 확보해 내는데 이르렀다.

여암(厲菴) 정도현(鄭道鉉)의 생애와 학문세계

이의강 ( Eui Gang Lee )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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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려菴 鄭道鉉(1895-1977)의 저술과 부록으로 이루어진 『려菴集』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규명하였다. 정도현은 학자로서의 가치체계를 구축하고 그에 입각하여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라는 지극히 왜곡된 사회를 살아야만 하였다. 개인이 만약 사회적 요구와 자신의 가치체계가 부합하지 않을 경우 과연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의 해답을 탐색하는 데 있어, 정도현의 생애와 학문에 대한 연구는 일정한 참고를 제공해준다. 정도현은 고종 32년(1895) 7월 22일 함양의 薇川에서 鄭在沃과 豊川 盧氏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河東이고, 조선조 5賢의 한 분으로 성리학의 대가였던 鄭汝昌은 그의 14대 조이다. 정도현은 정여창의 삶과 학문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정도현은 7세부터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20세에 이르기까지 덕행을 지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정도현의 본격적인 학문 행보는 田愚(1841-1922)를 스승으로 섬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정도현은 전우로부터 性理學을 전수받았고, 전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성리학을 심화시켜나간다. 정도현의 학문 세계는 心性論과 禮論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로 구축되어 있다. 그의 심성론은 `心卽氣`의 입장에 서있는데, 이는 전우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性을 높이고 心을 낮추어야 한다는 `性尊心卑說` 및 性을 스승으로 받들고 心은 제자로서 性을 따라야 한다는 `性師心弟說`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정도현은 禮의 실천을 심성론 못지않게 중요시하였다. 예의 각 조항에 대하여 타당한 이론적 근거를 탐구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 그에게 있어 禮란 사교상의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을 말하는 `에티켓` 정도에 그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예론은 규범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는 `心卽氣`의 심성론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왜곡된 사회에 대한 개인의 대응 자세는 세 가지 유형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가치체계에 맞도록 왜곡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유형, 둘째는 자신의 가치체계를 지키며 왜곡된 사회가 바로잡히기를 기다리는 유형, 셋째는 자신의 가치체계를 바꾸어 왜곡된 사회에 영합하는 유형의 세 가지이다. 첫째 유형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고, 셋째 유형은 가장 비굴한 삶의 자세로 모두에게 지탄받아 마땅하다. 정도현은 자신의 삶을 "텅 빈 산에 알아주는 사람 없지만, 홀로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 향기를 보존하고 있는" 蘭에 비유하였다. 그 자신 性을 높이고 禮를 지키며 왜곡된 사회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蘭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蘭이 과연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양이 없다면 홀로 향기를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일까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방각본(坊刻本) 간찰교본(簡札敎本) 연구(硏究)

류준경 ( Jun Kyung Ryu )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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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은 민간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출판된 목판본 서적인데, 여타의 간본은 없고 오로지 방각본으로만 간행된 서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찰교본류이다. 방각본으로 간행된 가장 대표적인 간찰교본류 서적은 『簡式類編』, 『寒喧箚錄』, 『簡牘精要』이다. 『簡式類編』은 1739년에 경아전 출신 이인석이 전겸익이 편찬한 『簡式類編』을 金淨의 『東人例式』으로 증보하여 편찬·간행한 서적이다. 이는 최초의 방각본 간찰교본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현실을 반영한 간찰교본이기에 조선후기의 일반적 편지 작성 양상과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세기 들어 조선적 현실에 적합한,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는 『寒喧箚錄』, 『簡牘精要』 등과 같은 간찰교본이 간행된 것이다. 『寒喧箚錄』은 18세기 초중반에 간행된, 가장 풍부한 실례를 담고 있는 방각본 간찰교본이다. 특히 지방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집중적으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방관과의 친분을 유지하려는 계층의 이해를 반영하는 면모도 보인다. 『簡牘精要』는 1850년경에 최초로 간행되고, 다시 1861년, 1869년에 재차 간행될 정도로 19세기에 크게 성행한 방각본 간찰교본이다. 『簡牘精要』는 『簡式類編』, 『寒喧箚錄』과 달리 套式보다는 구체적인 예와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이며, 동시에 서울의 도시적 유흥의 분위기를 문화적 배경하는 중간층의 이해를 반영하는 면모도 보인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방각본 간찰교본은 실용적인 한문글쓰기 문화를 선도하여 한문문자문화의 확산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중간층을 중심으로 한 한문글쓰기 문화의 분화를 반영한다는 점에 그 문화사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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