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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연구검색

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4권 0호 (2017)

매산홍직필(梅山洪直弼)의 시문학 일고(一考)

이동재 ( Lee Dong-jae )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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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의 산림처사로 추앙받았던 梅山 洪直弼이 젊은 시절에 지은 시를 중심으로, 첫째, 闢邪衛道의 의지, 둘째, 尊明排淸義理의 추구, 셋째, 山居를 통한 自靖의 실천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서 홍직필의 문학세계를 이해 하는데 일조하였다. 첫째, `闢邪衛道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홍직필은 조선이 末世가 된 것은 斯道가 洛論과 湖論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자신들의 의론이 옳다고 다투는 사이 천주교와 같은 異端이 闖入한 것이 원인이라고 여겼다. 그는 사도의 부흥은 분열된 학파의 통합과 함께 선현들을 ?揚하고, 제자들을 독려하여 사도에 귀감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기강을 바로 세워야한다고 하였다. 둘째, `尊明背淸義理의 추구`를 드러내고 있다. 홍직필이 살았던 18세기 전반은 일부 老論 집권층을 제외하고 백성들은 명나라의 再造之恩에 대한 의식이 거의 퇴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문적 자부심과 학문적 배경으로 尊明義理가 남달라서 명나라가 망했어도 그 은혜를 잊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 하였다. 그의 존명의리는 排淸意識으로 확대되어 청나라를 `개`라고 비하하는 등 적개심을 드러내고, 이를 물리쳐서 문명화된 중화세계를 회복시키는 일을 자임 하였다. 셋째, `山居를 통한 自靖의 실천`을 드러내고 있다. 홍직필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한 이후 과거공부를 단념하였다. 그는 39세에 世子洗馬로 8일간 出仕를 했다가 사퇴한 이후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평생 출사하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현실이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의 파행과 斯道가 점점 쇠퇴해지고 여기에 더하여 서구에서 전래된 천주교가 나날이 성행하는 현실을 말세라고 인식하고 守身安分을 위해 산림에 거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기르겠다는 自靖의 의지를 드러냈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는 홍직필의 중후반기 이후에 주로 지어진 일상의 시들의 분석하고, 그의 시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하여 19세기 한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상을 찾아보는 연구는 추후 과제로 남긴다.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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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山 洪直弼은 많은 수량의 傳狀과 碑誌를 창작하였다. 본고는 이들 작품의 양상을 살핀 후에, 그 의의를 검토하였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로서, 그는 당대의 세상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응하여, 이로써 현실을 바르게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매산이 살고 있던 19세기 전반은 시대의 상황이 다른 시대와는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말세를 치유하는 처방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런 시기에 忠, 孝, 貞烈을 알리는 것이 말세를 치료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忠孝와 貞烈을 실행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비록 이들이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는 항상 이들에게 傳狀과 碑誌를 기쁘게 작성해서 주었다. 그는 세상에 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운 덕행[潛德]과 감추어진 훌륭한 행실[幽光]을 알려서, 이를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많은 수량의 비지와 전장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연구에서 매산이 작성한 이런 기록들을 검토하여 창작 의도를 추적 하였다. 특히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귀감으로 삼을 수 있는 인물들을 발굴하여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19세기 전반 조선의 문학과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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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山 洪直弼(1776~1852)은 19세기 전반기 洛論 학술계를 주도했던 학자이다. 그는 農巖 金昌協-渼湖 金元行-近齋 朴胤源으로 이어지는 낙론의 학맥을 계승한 학자로서, 당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영향과 위상에 비해 매산 性理說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미미했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는데, 첫째는 매산이 논쟁을 기피하는 태도를 지녔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조선조 유학사 연구에서 19세기 전반기 낙론에 대한 연구가 대체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세기 전반기 낙론 학술계의 지향을 살피고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학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산 성리설에 대한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본고는 매산 성리설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서, 매산 성리설의 핵심이 되는 心說을 고찰하였다. 매산이 속한 낙론은 栗谷 李珥를 宗師로 한다. 따라서 `모든 발생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며[氣發理乘一途說]`, `理로 인하여 본체의 근원적 동일성이 담보되고 氣로 인하여 현상적 차별성이 생겨난다[理通氣局]`라고 하는, 율곡의 宗旨를 계승한다. 율곡의 이러한 학설에서는 본체(理)의 온전한 실현 여부가 氣에 달려있게 되는바, 주자학의 용어로 말하면 `理의 온전한 실현은 理가 湛一精爽한 本然의 氣를 탔을 때에 가능하다`라는 것이다. 낙론에서는 이 本然의 氣를 心으로 보아 心을 본체 실현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데, 이는 매산 역시 마찬가지로, 이 때문에 心說이 매산 성리설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매산은 心이 性만큼이나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매산에 있어서 心은 개체의 心이라는 점에서 개별자이지만 차별적 氣質과 구분된다는 점에서 보편자이다. 心의 근원적 동일성과 보편성을 定式화한 것이 心體本善說이며, 이 이론은 氣質의 氣와 心의 氣를 구분함으로써 성립한다. 또 매산은 『大學』의 明德에 대해서 明德主氣와 明德無分數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명덕은 心을 가리킨 말이며[明德主氣] 그 心은 보편성을 갖는다[明德無分數]`는 것을 밝힌 이론으로, 이 역시 心의 근원적 동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이론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심체본선설과 명덕설 두 가지 이론을 중심으로 매산의 心說을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매산 심설에서의 심은 형이상과 형이하를 통섭하고 본체와 현상을 통일하는 주체로서 그 존재론적 위상을 정립함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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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李鎭玉이 편찬한 『梅山先生禮說』 通禮의 綱 가운데에 宗法, 出後, 次養, 侍養, 攝祀 등의 항목를 통해 洪直弼의 宗統 傳承에 대한 인식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程朱性理學을 國是로 삼았던 조선조에서 종통의 전승에 관한 예법인 `종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기초 질서였는바, 이는 매산의 예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매산은 家系의 승계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次子가 아닌 嫡長子로 종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원칙을 강력하게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옛법을 고려하여 차자에게 傳重하는 것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또 嫡庶의 구별에 있어서는 嫡子와 庶子의 구분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지만, 천륜 관계를 배제하지 않아서 서자가 부친과 적자인 아우의 喪을 주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서자가 집안의 嫡統을 계승하는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族子를 양자로 들이기보다는 핏줄이 직접 닿아 있는 서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이 국법에서도 허락하는 바이고 禮經에도 근거가 있는 바이며 人情에도 부합하는 바임을 들어서 그 타당함을 밝혔다. 本生家에 대해서는 그 屬稱과 예법을 所後家와 엄격히 구별하여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다만 인정을 참작하여 本生父母의 墓道文字 등에서는 자신을 `不肖從子`라고 칭하여 여느 伯ㆍ叔父母와 다름을 보이면서도 본생부모에 대한 사사로운 정을 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次養과 侍養에 대해서는 세속에서 시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예법에 없는 것임을 밝혀 원칙적으로는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시양은 길러준 인정을 고려하여 시양손의 당대에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는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매산은 예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할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에 항상 `經`이라는 원칙을 우선하면서 人情과 實情을 함께 고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원칙적인 예법을 고수하는 가운데에 人情을 참작하여 `變通`의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는바, 이는 經의 범주 안에서 알맞은 길을 찾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종통 전승에 관한 예설 저변에 일관되게 깔려 있다.

국한(國漢) 비교문학 시론(試論) ― 농암 어부가를 중심으로 ―

김성수 ( Kim Sung-su )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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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비교문학은 한국한문학계나 국문학계의 중요한 연구방법론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韓國漢文學이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중국문학하고는 별개의 존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 국문학은 중국문학을 직접 수용하기보다는 대개는 토착화된 韓國漢文學의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국문학계에서는 韓中 비교문학보다는 한국한문학과 국문학과의 비교연구가 더 가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의하여 國 漢 비교문학이라는 방법론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國漢 비교문학의 당위성을 밝히고, 그 구체적 실천사례로써 李賢輔의 漁父歌, 短歌를 통하여 시조문학의 형성과정을 추정하였다. 이현보의 漁父歌와 短歌는 비록 그 質量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할 수 없으나 시조문학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투박한 시어, 정제되지 않은 형식, 漢詩套의 詩語 등은 시조로서 아직 서툰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漁父歌9장, 漁父短歌5?, 歌詞 3首에서 간파할 수 있는 초창기 시조문학의 면모는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초창기 시조라고 하기에는 아직 성급한 면이 있지만 시조의 발생을 막연히 고려로 잡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이고 실증적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에서는 농암의 어부가를 통하여 그 타당성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그동안 시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지만 많은 방향착오와 오류가 있었다. 특히 시조의 개념, 본질, 장르규정, 발생 등에 있어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지면의 한계는 있지만 농암의 작품을 통하여 기존의 시조연구에 대한 문제점의 일면을 점검해 봄으로써 시조문학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國漢 비교문학의 의미 있는 성과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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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조선시대 여류예술가 申師任堂(1504~1551)과 그녀의 넷째 아들 玉山 李瑀(1542~1609)의 書畵 예술작품을 고찰하여 작품 안에 살아 숨 쉬는 예술철학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신사임당은 우리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500여 년 전 성리학 사상이 팽배해있던 조선사회에서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현모양처의 대명사이자 詩·書·畵에 능한 예술인으로 지금까지도 칭송받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인물이다. 이에 비해 옥산 이우는 어머니 신사임당과 형 율곡 이이에 비해 그의 행적이나 업적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임당의 예술적 자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16세기 말 詩·書·畵·琴에 모두 뛰어나 `四絶`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다. 본고에서는 사임당의 서화 작품에서 보이는 예술적 능력이 옥산 이우에게 어떻게 형상화 되어 나타났는지 같은 주제에 관한 예술작품을 중심으로 고찰해보고, 또 예술작품으로 전하고자 했던 예술철학의 정신까지도 살펴보았다. 먼저 書에 있어서는 사임당의 「초서병풍」과 옥산의 「옥산서병」의 초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畵에 있어서는 사임당과 옥산이 같은 화목으로 그렸던 소재의 작품을 중심으로 그 소재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까지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사임당과 옥산의 작품이 지금까지 높은 예술성으로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예술적 재능은 물론 仁과 德으로 완성된 인격이 합치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그 작가의 재능만이 담기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 인격까지 모두 담겨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예술가의 작품은 곧 그 작가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사임당과 옥산의 예술작품 속에 드러난 그 정신은 화해와 사랑의 마음이 바탕이 된 儒家의 仁의 미학이라 판단된다. 세월에 먹빛은 바랬지만 그 안에서 예술적 역량을 발휘했던 사임당과 옥산이 품었던 화해와 사랑의 마음과 함께 仁과 德으로 완성되었던 올바른 인격까지 같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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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봉림대군은 역시 청나라의 포로로 끌려온 9명의 명나라 선비들과 심양에서 만나게 된다. 그는 이들 선비들이 품은 反淸復明 의지에 깊이 공감하고 이후 함께 조선으로 들어온다. 이 9명의 명나라 선비들을 `九義士`라고 부른다. 九義士들은 봉림대군의 보살핌 아래 조선에 정착하였고 봉림대군이 즉위한 후에도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북벌을 준비한다. 하지만 즉위 10년 만에 효종이 승하하면서 북벌론은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실체를 상실하게 된다. 이로 인해 九義士의 존재 또한 묻히게 된다. 한편, 숙종, 영조, 정조대를 거치며 北伐論의 자리를 尊周論이 대신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명나라 역사와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게 된다. 명나라의 역사서를 조선의 손으로 편찬하는가 하면, 명나라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기록 작업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九義士의 존재가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고, 여러 문인들의 손에 의해 작품으로 탄생한다. 가장 먼저 李德懋의 「磊磊落落書」에서 이들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난 다. 그리고 연이어 成海應의 「皇明遺民傳」, 「八姓傳」, 국가차원에서 편찬된 『尊周彙編』에서도 九義士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들 기록들은 조선이 중화문명을 계승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로서 九義士들에 대한 내용 또한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九義士의 후손인 王德九는 『皇朝遺民錄』을 통해 조상에 대한 구체적 기록을 남겨 이를 통해 조선사회에서 九義士가 가지는 의미를 밝히고 하였다. 그리고 화서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金平默은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이들에 대한 傳을 지어 대명의리론을 강조하고 九義士들의 삶을 통해 당시 흔들리던 조선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다.

연행 체험(體驗) 기록의 관행(慣行)과 그 매커니즘

김령죽 ( Kim Young-jook )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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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다룰 연행 체험 기록의 관행과 그 매커니즘에 관한 논의는 연행 체험자들의 일련의 `기록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만, 시기를 18세기와 19세기 초반까지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가장 활발하게 연행록이 저작되었던 점과 기록의 踏襲, 修整 및 擴張 등의 특징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金昌業의 『燕行日記』 이후 18세기 중반까지의 연행록 `體制`의 상호 답습과 자료의 확충은 유행처럼 번지다가 19세기에 들어서면 더욱 확연해진다. 대체로 18세기 중반까지의 연행록들은 『燕行日記』를 답습하고 연행 노정에서 이를 실증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18세기 중·후반으로 들어서면 이미 어떤 부분이 인용된 것이고, 어떤 부분이 스스로 기록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다. 연행록 데이터가 집적되고 검색기능이 늘어남에 따라 연구자들은 연행록들의 가치를 규명하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단일 텍스트의 `개성적` 부분이라 여겨진 것이, 결국 踏襲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를 모두 `沒個性的`이고, `沒價値`한 것으로서 置之度外할 수 있을까. 따라서 수많은 연행록들 속에서 흔히 보이는 기록의 유사성, 그 動因을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 아닐까 한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연행 기록의 관행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연행의 체험을 기록하는 과정이다. 작자의 기록적 욕구와 직접 체험의 한계가 있을 때에는 수행한 이들의 耳目을 빌어 기록한다. 즉 代理見聞에 의한 기록인데, 이는 연행록의 저자가 三使의 신분일 때 종종 그러하다. 둘째, 前代 연행록의 踏襲과 補完이다. 『燕行日記』는 18세기 이후 연행록의 `原型`으로 취급된다. 때문에 다수의 연행록이 이를 답습했으며, 나아가 저자 개인의 견문과 지식수준에 따라 수정, 보완하여 연행 관련 정보를 부연하고 확장시켜 나간다. 이에 이러한 경향성이 잘 구현된 연행록들을 분석하여 그 動因을 밝혀, 연행록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조선시대 강원도의 문화적 정체성과 현재적 의미

안세현 ( Ahn Se-hyun )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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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왕조실록, 지리지, 문집 등을 검토하여 조선시대 강원도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찰하고, 그것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풍속`조를 보면, 강원도는 경기도를 비롯한 여타 지역에 비해 유교적 문명화가 덜 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강원도가 유교문화의 미답지로 인식된 데에는 강릉과 원주를 제외하고는 향교가 활성화 되지 못하였고 향약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원도는 태초의 순박한 풍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토착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유교문화의 정착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강원도의 풍속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으나 자연 지리에 대한 인식은 달랐다. 관동팔경을 비롯하여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 강원도의 형승은 사대부 문인들의 대표적인 유람의 공간이었다. 고려 말 安軸의 『關東瓦注』와 李穀의 東遊記등과 같은 기행 시문을 통해, 강원도의 형승이 발견되고 사대부 문인들에게 문화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나아가 강원도는 세속의 명리와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속의 공간이자, 정치적 좌절에서 오는 우수나 번뇌를 해소하는 치유의 공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金時習과 淸平寺, 金壽增과 谷雲, 金昌翕과 雪嶽山 등을 살펴보았다. 이제 맹목적인 중앙 추수를 지양하고 지역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에 주목할 때이다. 강원도는 도시문명에 찌든 현대인을 태초의 시간으로 이끌어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현대의 도시문명을 좇아가기보다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시원적 공간, 지역의 토착문화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 형승과 산수가 가져다주는 휴식과 치유 등의 문화요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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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대전본 사서집주의 음주에 대해 고찰하고, 한문전문연수기관 혹은 대학교에서의 사서 강의에 음주의 활용이 필요한지, 또는 그것이 과연 유의미한지를 모색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서 교육은 전적으로 대전본 집주를 통해 이루어졌고, 현재 우리나라의 전문연수기관, 유관 단체, 대학의 한문학 관련 학과에서도 사서의 경우 대체로 주자집주를 교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대전본 사서집주를 대상으로 하였다. 다만 음주에 대한 정리는 사서집주 전체를 해야 되겠지만, 본 연구가 목표로 하는 주요 논의는 『대학』과 『중용』에 실린 音注만으로도 가능한 바, 논지를 명료화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대학』과 『중용』의 음주에 한정하여 논하였다. 사서집주에 나타나는 음주의 형태는 1 聲調, 2 如字, 3 `A讀B`, 4 `音B`, 5 反切, 6 두 가지 이상 병용된 것, 이렇게 6형태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여섯 유형에 대한 정리와 고찰을 바탕으로 본고는 `新儒學的 經學觀 표명에 관한 문제`, `新儒學의 經文 解釋에 관한 문제` `朱子 章句集注의 깊이 읽기와 새로이 읽기`에 대해 다루었으며, 아울러 `바른 음가 찾기와 언해음 고찰`, `경문의 문학적 장치-음악성의 이해` 등의 지점을 함께 고찰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대전본 사서집주에 음주를 단 목적을 추론하고, 그를 통해 오늘날 四書 강의와 한문교육에서도 음주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유의미하리라는 결론을 추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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