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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ry History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7-0962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1권 0호 (2013)

책머리에 : 537분의 1이라는 운명을 생각하며

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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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둘째 아들의 서사-염상섭, 소세키, 루쉰

서영채 ( Young Chae S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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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둘째 아들의 서사라는 말을 화두로, 한중일의 세 작가 염상섭 루쉰 소 세키를 비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씌어졌다. 이 셋은 자국에서 근대문학을 열어간 작가들 로서, 냉소가 기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문학적 행로를 걸었다. 소세키와 염상 섭은 소설의 장인의 길을 갔고, 루쉰은 전투적인 문사의 길을 갔다. 장인의 길을 간 소세키와 염상섭이라 하더라도 자국의 문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차이가 난다. 이것은 작품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정황의 문제 때문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염상섭에 대한 평가는 식민지 상태였던 한국에서 무엇이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의 하나이다. 일본과 전쟁 중이었던 중국에서 루쉰은 매우 다른 글쓰기를 실천함으로써 대안적 보편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둘째 아들의 서사란 근대가 초래한 무한 공간 속에서 자기 불안을 책임지고자 집을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뜻한다. 소세키의 『그후』의 경우가 그런 서사의 표준에 해당한다. 둘째 아들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첫째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염상섭과 루쉰의 경우였다. 루쉰은 전쟁터 속에서 둘째 아들 노릇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진짜 둘째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었고, 염상섭의 텍스트는 서로 대극적인 인력을 지닌 문학과 현실을 하나로 움켜쥘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의 딜레마를 그려냈다. 이 논문은 이들의 모습을 아우름으로써 근대로의 전환기에 동아시아에서 펼쳐진 문학적 풍경의 한 모습을 담아보고자 했다.
8,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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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염상섭의 『광분』을 다음과 같이 독해하고자 했다. 첫째, 이 소설은 적성 단이라는 극단과 여배우의 공연활동을 통해 식민지 예술장의 초(超)규칙을 드러낸 소설이다. 공연의 장소인 극장은 남촌에서 북촌으로, 레퍼토리는 고급예술에서 대중예술로, 관객은 상류층에서 종족화된 조선인 청중들로 무대가 변화하면서, 그들은 반식민 봉기였던 학생시위사건의 목격자이자 참여자가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극단은 해체된다. 이 과정은 식민지 예술장에 이접된 사회적 공간이 부상하고 그 안에서의 위기와 갈등이 초규칙에 의해 폭력적으로 무마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둘째, 이 소설에는 사회주의와 모던 걸이라는 두 가지 색 ``레드``를 중첩시키는 서사적 전략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중첩은 사회주의(자)의 젠더 화나 성애화된 표현이 부상하는 것을 반영한다. 이는 반사회주의라는 지배언설을 전유하여 사회주의를 말하는 전략으로, 이것을 통해서야 사회주의는 대중서사의 제재가 될 수 있었다. 염상섭에게 있어 사회주의자와 모던 걸은 사회적 정상성에 긴장과 의문을 부여하고 위반을 감행할 때 생성되는 사회극의 주역으로, 이들을 통해 식민지 도시의 폐부와 함께 식민지적 삶의 사회적 과정을 그 심층까지 그려낼 수 있었다. 셋째, 식민지 예술장의 초규칙과 두 가지 레드가 교착되어 있는 『광분』의 서사는 ``치안방해``와 ``풍속괴란``이라는 식민지 검열 의 두 기준이 식민지 원주민의 문화적 텍스트에 관철되는 방식을 모방한, 검열의 미메시스였다. 특히 섹슈얼리티의 서사에서 에로티시즘의 불가능성을 드러냈다는 데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성적 자율성의 부인은 결국 모던 걸 경옥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기 때문이다. 좌익적 색채를 띤 연극단 ``적성단``이 자신의 성적 자율성을 위해 범죄를 불사하지 않는 ``카르멘``을 공연하고, 그 카르멘이었던 여배우가 아버지의 재산을 노린 계모와 그녀의 간부의 음모에 의해 타살된다는 이 작품은 검열을 포함한 식민지의 행정적, 사법적 폭력을 미메시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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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0년대 미디어에 대한 연구, 혹은 검열 연구에서 사용하는 ``독법``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우리는 문자(文字)에 집착하고, 활자화된 텍스트(문학과 논설)에 초점을 둔 ``읽기방식``에 길들어 있다. 그런데 이 관습화된 독법으로는 1930년대 이후의 매체들의 본질에 육박하기 어렵다. 또한 그것이 1930년대 미디어의 ``텍스트성``을 되살리는 방법도 아니다. 왜냐하면 1930년대 매체들은 검열의 강화와 고도화 때문에 ``발화[문자화]``에 근본적인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위장``과 ``은폐`` 혹은 ``침묵``을 자기화한 1930년대 매체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 혹은 독서방식이 필요하다. 필자는 그 대안으로 ``비문자 표상(非文字 表象)``에 주목해 보았다. 비문자 표상이란 목차, 표지, 화보, 광고, 사고, 공고 따위로 지금껏 우리의 관습화된 독법에 걸리지 않았던 대상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왜 1930년대 매체 연구와 검열 연구에 중요한지를 실증하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문 학 쪽에서 볼 때, 이 테마들이 모두 ``미지의 영역``이고 하나같이 크고 다층적인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실험적인 출발이다.

특집 : 종로의 사상지리와 임화의 “네거리”

정우택 ( Woo Taek J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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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종로라는 장소를 통해 시집 『현해탄』(1938)까지의 임화를 독해하고자 한다. 임화는 생의 전환기마다 ``종로 네거리``에 스스로를 세우고 역사와 운명을 가늠하는 시를 창작했다. 기존의 연구에서, 1920∼1930년대의 종로는 청계천 남쪽의 신마찌[新町]·혼마찌[本町]·메이지마찌[明治町]에서 배제된 모더니티의 타자적 장소, 또는 제국·내지(內地)·식민성에 대항하는 전통적 민족성의 표상으로 인식되었으며, 임화의 ``종로 네거리``도 이런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설명되었다. 그런데 임화의 ``종로``는 모더니티나 내셔널리티로만 설명되지 않는 사상지리적 특성을 갖는다. 이 연구에서는, 임화가 민족·계급·운동의 공간으로서 종로를 발견하고 표상했다는 기존의 관점과 달리, 종로가 임화의 신체와 시를 생성했다는 관점을 취한다. 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임화에게 종로는 시간과 장소, 운동성으로 교직된 구체적 사건들의 총합이었다. 그가 종로 복판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닌 1921∼1925년은 한국 근대사상·청년·사회운동이 과학적 틀을 갖추고 격렬하게 진출하던 때였으며, 그 거점이 종로의 공평동·청진동과 견지동 쪽이었다. 이후 프로예맹도 이 장소에 사무실(회관)을 두고 활동했다.(현재까지 파악한 프로예맹의 거처: ① 1925.8 창립총회: 견지동 80번지 서울청년회관 / ② 1927.3.5 프로예맹 회관: 견지동 8-3번지 / ③ 1927.9.1 프로예맹 회관: 견지동 60번지 / ④ 1928.1.18 프로예맹본부 사무실: 계동 73-6) 이러한 종로의 구체적인 장소성과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사회운동가이자 프로시인 임화가 탄생하여 성장하고 활동했다. 그래서 임화는 종로를 ``고향``이라고 표명했다. 임화는 종로라는 장소를 신체화하였으며, 그가 쓴 ``종로 네거리`` 계열의 시들은 신체화된 종로의 실체적·경험적 지각과 감각의 기록이자 확장이며 연장이었다. 1935년 종로경찰서와 경성법원의 검거선풍으로 좌익운동이 위축되고 종로의 장소성이 침탈당하자, 임화는 종로를 연장하는 대체 장소로서 ``현해탄``을 새로이 거점화하였다.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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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지』는 해방 이전 이기영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만주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자료 접근의 제한성 때문에 그 동안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그 동안의 연구는 식민지 주체에 의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전유와 제국적 주 체성의 문제, 혹은 우생학적 담론의 동원 등에 집중되어 왔는데, 텍스트의 표층에 드러난 협력의 수사들이 텍스트의 핵심 서사와 어떤 방식으로 관련을 맺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서사는 삼각관계의 애정갈등과 더불어 ``처녀지``를 개척하기 위해 나선 한 계몽적 지식인의 좌절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한 사람의 농민이 되고자 북만(北滿) 농촌을 찾아간 지식인 주인공이 최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와 ``의학 연구``로 방향전환을 하고 그 연구의 과정에서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어간다는 핵심 서사를 당대의 역사적 문맥과 결부시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남표가 정안둔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식민지 개척의학의 전개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일본의 제국 의료의 한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균전 부대에 의한 페스트 실험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모티프로 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밝혔다. 만주의 조선인 개척촌에서 농사 개량과 위생 보급을 통해 ``제2대의 선구자``로서의 ``문화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금욕적이고 노동지향적인 삶을 지향했던 주인공 남표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개척의학의 실천과정에서 페스트에 감염되어 희생된 것이다. 일본에 의한 동아시아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는 개척의학이 한 식민지 지식인의 육체를 잠식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이 작품은 ``위생의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시경(詩經)』『큰 쥐(碩鼠)』와 김시습의 「큰 쥐」 비교 연구

김대중 ( Dae Joong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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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큰 쥐(碩鼠)」와 『시경(詩經)』 「큰 쥐」의 비 교 연구이다. 김시습의 「큰 쥐」는 『시경』「큰 쥐」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김시습이 『시경』의 어떤 전통을 자각적으로 계승했는지, 그와 동시에 어떤 창의적인 전변(轉變)을 이루 었는지, 김시습의 「큰 쥐」는 『시경』「큰 쥐」에 비해 어떤 변별적인 특징을 갖는지 등등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두 작품 간의 비교 고찰이 필요하다. 비교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 비판시를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연구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과거에 민족문학론이 힘을 얻었을 때 현실 비판시에 대한 연구는 활기를 띠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본고는 이런 상황에서 현실 비판시를 『시경』이라는 고전적 전통과의 관계 속에서 재인식하기 위한 시도이다.

역사인물 오자서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인식태도

윤세순 ( Se Soon Y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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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문제적 역사인물 오자서를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했는지 살펴서 이들의 의식의 한 단면을 들추어 보려 하였다. 오자서는 춘추시대 초나라 출신으로서, 성품이 강직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의 부친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초나라 평왕에게 죽임을 당하자, 오자서는 오나라로 망명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 이 일 때문에 오자서는 복수의 화신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반면 우매한 오나라 왕 부차에게 충간하다가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충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왕에 대한 복수와 충성이라는 오자서의 양면성은 그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가적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하다. 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오자서에 대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인식태도를 네 부분, 즉 ① 자식으로서의 처신, ② 초나라 평왕에 대한 복수, ③ 오왕 부차에 대한 신하로서의 면모, ④ 오나라 공자 광에 대한 지원과 협력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오자서를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 결과,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 사대부 지식인들이 충효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남한산성 호종신(扈從臣)의 병자호란 기억

장경남 ( Kyung Nam J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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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후의 정국은 인조와 친청파들이 반청 척화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다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역사 기록은 인조를 중심으로 정국의 주도를 잡은 주화파에 집중된다. 그러나 역사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억압되거나 무시되어왔던 사적인 기억들은 새롭게 조명 받게 되었다. 이 대항기억으로서의 기록이 바로 실기이다. 金尙憲(1570∼1652)의 『南漢紀略』, 南급(1592∼1671)의 『丙子日錄(南漢日記)』이 그것이다. 『남한기략』은 고위 관료인 예조판서 김상헌의 기록으로, 조정의 논의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보고 들은 내용을 적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작자는 이 일기를 통해 척화에 대한 굳은 신념과 이를 고수하려 했던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기록했고, 목전의 講和에 급급한 주화론자 특히 최명길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개전 초기에는 척화의 입장에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화론자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인 인조에 대한 기억이 눈길을 끈다. 일기의 내용은 주화론자의 행위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자신의 척화 주장에 따른 행동의 기록으로 점철된다. 『병자일록(남한일 기)』은 사옹원 봉사로서 산성의 최전선에서 방어 임무를 맡았던 하급관리의 실기이다. 작 자는 직접 성을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기에 자신의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적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굶주림과 추위와 싸워야 했던 군사들의 일상이 적나라하게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척화론자나 주화론자를 막론한 위정자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전란 중에 고통 받는 민중들의 고난상은 사실적으로 기록되었다. 두 扈從臣의 병자호란 체험 실기는 남한산성이라는 공통의 공간에서 겪은 사적인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의 기억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은 지극히 사적인 기억일 수도 있지만, 실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병자호란의 실상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했다. 대표적인 척화론자였던 김상헌은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을 중심으로 기억하면서 남한산성에서의 병자호란 체험을 알렸고, 산성 방어의 최전선에 있었던 남급은 위정자들의 싸움에 의해 무고한 민중들이 겪었던 고통을 잊을 수 없었기에 그 기억을 살려 병자호란의 실상을 전한 것이다. 이들 호종신의 실기는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은 사적 체험의 기록이면서 대항기억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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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강도몽유록」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해 기획되었다. 선행 연구자들은 「강도몽유록」의 창작 의도를 무능한 지배세력·功臣세력·무책임한 남성들에 대한 비판이나, 節義/貞節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寃鬼인 여성들의 하소연을 근거로 ``타자화된 여성의 연대``를 읽어내기도 하였다. 이런 관점은 「강도몽유록」을 상대적으로 약자/소수자들이 만들어낸 텍스트로 간주한다. 특히 정치적 담론으로 읽어낸 해석에서는 仁祖와 그와 세계관을 같이하는 공신세력/친청파세력을 작가의 대타적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 이 논문은 이와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강도몽유록」은 표면적으로는 ``비판/공격``을 위한 텍스트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변호/방어``의 목적이 있다. 물론 15명의 등장 인물 모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성 3대가 등장하는 金류의 가문은 이 독법으로 읽을 때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이 가문의 여성들은 남성(시아버지/남편/아들)을 비판 하고 있지만, 다른 등장인물처럼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비판하는 패륜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리고 비판의 내용은 대상 인물들의 잘못 가운데 이미 공인되어 변개시킬 수 없는 것, 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된다. 당시 기록물들에서 흔하게 보이던 패륜적인 내용은 삭제되고, 여성 3대가 모두 순절하는 사정이 강조되면서, 살아남은 가문의 후계자는 동정의 대상이 된다. 한편 尹宣擧의 부인은 순절을 거부한 남편은 말하지 않고, 한때 斥和의 기수였던 시아버지 尹煌을 내세워 가문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강도몽유록」은 병자호란에서 보인 행적으로 비판 받는 가문에서 부녀자를 내세워 家長이 병자호란에서 보인 그릇된 행적을 최소한만 보여주고, 이를 공인 받으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큰 텍스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강도몽유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누구를 모델로 만들어졌는가를 밝히고, 그 실제 인물의 삶을 기록한 글을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그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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