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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Bangyo Language and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2734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8권 0호 (2010)

국어학 : 동사어간 "□->허-"의 변화 원인과 분포 양상

정영호 ( Yeong Ho Jeong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28권 0호, 2010 pp. 5-26 ( 총 22 pages)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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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허-` 변화의 원인과 분포의 양상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여, `□->허-` 변화 원인을 `ㅓ`의 후설화로 간주하였고 그 변화형이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쪽 해안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19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허-` 변화를 `ㅓ`의 후설화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보는 이유는 `□-`(爲)와 `하-`(多)의 의미 대립 관계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관계로 인해 `□-`는 `ㆍ`를 오랫동안 유지하게 되었고, 결국 이 시기에 일어난 모음체계 내의 `ㅓ` 후설화에 의해 `허-`로 변화하게 된다. 문헌 자료에서 `□->하-` 변화가 `□->허-` 변화보다 많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하-`와 `□->허-`가 별개의 규칙으로 `□-`에 적용된 것을 의미한다. `□-`에 `ㆍ>ㅏ`가 적용되어 `□->하-`를 보이는 예도 있지만 `하-`(多)가 어휘 체계에서 존재했던 시기에 이와 변별되었던 `□-`(爲)가 `ㅓ`의 후설화로 `허-`로 변화하는 것이다. 현대국어에서 `□->허-`형의 분포를 계량화하여 `□->허-`의 개신지는 전북지역이고, 그 개신의 방향은 서쪽 해안지역으로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국어학 : 대구 동상면 호적의 노명(奴名)에 관한 고찰 -1684년, 1786년, 1867년-

최연화 ( Yeon Hwa Choi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28권 0호, 2010 pp. 27-55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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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표는 17세기-19세기(1684, 1786, 1867) 대구 동상면 호적의 노명(奴名)을 분석하여 여기에 나타난 차자 표기 이용 방식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첫 번째로, 고유어 인명과 한자어 인명 및 혼종어(混種語) 인명의 판정 기준을 제시하였다. 즉 대응되는 고유어가 있으면 고유어 인명으로 보았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으면서 대응되는 고유어가 없으면 한자어로 보았다. 다음으로, 2장의 판정 기준에 따라 노명(奴名)을 12가지 유형(용모, 성격, 시간, 순서, 노(奴)의 역할, 도구, 동물, 식물, 인물, 자연, 지명, 기타 등)으로 분류 및 해독하였다. 한편 노명(奴名)의 해독을 통하여 근대국어시기의 국어사적 특징(두음법칙, 원순모음화, 자음탈락, 모음탈락, 활음탈락, 연철표기, 중철표기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국어학 : 글쓰기의 국어학적 분석

정희창 ( Hui Chang Jeong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28권 0호, 2010 pp. 57-85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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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는 논리적인 사고 외에도 국어학적인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다. 국어학적인 능력은 표기와 표현으로 나눌 수 있다. 표기는 한글 맞춤법과 같이 글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이고 표현은 문장과 텍스트 차원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의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과 관련해서는 문장 성분 간의 호응, 조사나 어미의 사용, 어순, 능동, 피동, 서법, 시제, 높임법 등 문장 내적인 요소와 문장 간의 의미 연결이나 외국어 투의 사용 등과 같은 문장 외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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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번역의 형태를 일반번역과 연구번역으로 나누고 양자 사이의 서로 다른 점들을 따져본 뒤, 번역 형태에 따라서 주석을 어떻게 다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인재유고』의 국역 및 주석의 실례를 통해 고찰하였다. 일반번역은 일반대중을 독자로 하는 교양서적의 번역 방식으로, 직역보다는 의역에 비중을 두어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번역문체를 평이한 현대어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주석을 달 필요가 있는 말은 본문에 풀어 쓰거나 주석을 달 경우도 이미 검증된 사실에 바탕을 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으로 간략하게 처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연구번역은 전문적인 학습자나 연구자를 독자로 하는 전문서적의 번역 방식으로, 의역보다는 적극적인 직역에 비중을 두어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평이한 현대어로 옮기되 편지글이나 대화 등 옛말의 맛을 살릴 필요가 있는 경우는 의고체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주석은 이미 검증된 사실에서부터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실까지도 가능한 한 추적하여 달아줄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연구번역에서 요구되는 주석의 형태를 일반주석·정보주석·연구주석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미 검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붙이는 것을 일반주석이라 하였고, 일반적이거나 상식적인 내용의 범위를 벗어나는 용어의 경우 설명의 근거가 되는 출전을 제시하여 독자들이 한층 전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이를 정보주석이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거나 혹은 기왕의 주석에서 미상으로 처리되었던 것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며 새롭게 밝히는 데까지 나아가는 주석방식을 연구주석이라고 명명하였다.

고전문학 : <악장가사본(樂章歌詞本) 어부가(漁父歌)> 재고(再考)

박해남 ( Hae Nam Park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28권 0호, 2010 pp. 123-150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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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는 사대부들의 가치관-특히 출처(出處)의 태도와 관련하여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다수의 작품 창작이 이루어졌다. 이는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벗어나 초월적 공간에서의 분방한 생활을 꿈꾸는 인간의 보편적인 이상을 어부의 삶에 기대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그 중에서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어부가`를 주 대상으로 다루었다. 지금까지의 <악장가사본 어부가>를 다룬 연구를 보면 어부가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한 경우가 대다수이고, 이 작품을 독자적으로 분석하고 다룬 경우는 많지 않다. <악장가사본 어부가>에 대한 여러 오해를 불식 시키기 위해서도 논의의 중심이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에 놓여질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인식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악장가사본 어부가>의 형성 시기와 배경, 작자, 구성 방식 등에 대해 차례로 다시 살폈다.

고전문학 : 낭원군이간(朗原君李간)의 시조 연구

육민수 ( Min Su Yook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28권 0호, 2010 pp. 151-180 ( 총 30 pages)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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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원군 이간은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서 『영언』이라는 가집과 30수라는 많은 시조 작품을 남겼지만 상대적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었다. 이 글에서는 낭원군의 시조가 왕실의 종친연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적 실천 상황 속에서 창작되었음을 살펴 선현들이 삶의 국면마다 멋스러운 풍류를 즐겼던 것을 확인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청진』의 「이하조 발문」에서 이하조가 『영언』에 수록된 작품을 `跌宕山水之間`, `愛君圖報之願`, `勅身自警之意`의 세 유형으로 나눈 점을 바탕으로, 현전하는 낭원군 작품에서 이와 같은 특성이 나타나는 양상을 고찰하였다. 한편 『청진』, 『병가』, 『해일』, 『시가』 등 17개 가집에서 낭원군 시조의 수록 양상을 살펴 그의 작품이 19세기 초·중반까지 전승되다가 이후 『가곡원류』 시기에는 전승이 거의 단절되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고전문학 : 조선후기 예학과 실학, 그리고 시악(詩樂) -문체반정과 악풍반정-

허남춘 ( Nam Choon Heo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28권 0호, 2010 pp. 181-221 ( 총 41 pages)
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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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근대는 숨 가빴다. 서구가 2, 300년에 걸쳐 구축한 근대를 불과 100년 이내에 압축적으로 수용하여 체화하다보니 부작용이 많았다. 우리의 근대는 서구적 근대라고 해 왔다. 그러나 남이 준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마련한 것도 있다고 하며 자생적 근대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목한 것이 `실학`이다. 17, 18세기 실학의 등장을 근대성의 출발로 부각시키면서 희생양이 필요했다. 주자학을 중세 봉건의 중심 사상이라 여기고 이를 극복 대상으로 삼았고, 반대로 실학의 가치를 부풀리기에 나섰다. 실학의 주변은 선(善)이고, 주자학의 주변은 악(惡)인 것처럼 이분법적인 사고를 착근시켰다. 너무 심하게 실학을 띄우고도 도덕적으로 반성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 여겼던 근대성이 파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파탄의 시발점에 서구적 근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학도 작용하고 있다니, 심한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이제 실학의 실체를 차분히 들여다봐야 하고, 더불어 중세 주자학의 긍정적·부정적 가치도 재론해야 할 때가 왔다. 아니, 근대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탈근대의 새로운 방식을 찾기 위해서는 중세 학문을 변증법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마치 근대를 마련하기 위해 고대적 가치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선 예(禮)를 들여다 보았다. `예`는 이미 검증을 거친 사회 관습과 관행의 역사적 테두리이니, 혼란과 파탄을 거듭하는 우리 사회 속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덕목이어야 한다. 예치(禮治)는 무력으로 다스리는 무치(武治)에 대비되는 문치(文治)의 전통이고 평화를 구축하는 방식이니 이 또한 문명권끼리 각축하는 현실에서 유효하다. 조선시대의 예치는 단순히 당파 싸움의 근원이 아니라, 붕당 정치의 전개 과정이었다. 그것은 왕권 견제와 왕권 강화의 이념적 긴장 관계였다. 조선후기 영·정조대는 문예 부흥의 시대였다. 영조와 정조는 예(禮)뿐만 아니라 악(樂)을 강조했다. 예와 악이 보완 관계임을 잘 알았던 왕들이다. 특히 정조는 악을 중시하면서 당대의 촉급한 음악을 비판하고 고악(古樂)으로 회귀를 주장하는 악풍반정(樂風反正)을 시도했다. 잘 알다시피 패사소품의 유행을 차단하기 위해 연암류의 문체를 비판하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도했다. 이것들은 한편 청(淸)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청을 비판하는 문체를 버리는 친청정책(親淸政策)`이었고, 속악을 멀리하고 아악을 중시하는 친중국적(親中國的) 태도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문학과 음악에서 변풍(變風)을 극복하려는 정책으로 그 방법을 원시 유학과 예악에 두었던 태도였다. `예악형정`은 통치 방식이었다. 유교 국가에서는 형정보다 예악을 중시했다. 조선후기 예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전통을 강건하게 하여 흔들리는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근대를 맞이하고, 근대는 예악보다는 형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형정 즉 법치에 치우치는 법치 국가로 흘러왔다. 이제 예악을 다시 중시할 때이다. 예악과 형정은 상호보완적 관계다. 조선후기 예악을 중시했던 문풍을 중시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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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문광서림(文光書林)에서는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출간하였는데, 출간에 붙는 서문이 변영만과 정인보에 의해 작성되었다. 정인보는『성호선생문집』에서 누락된 『성호사설』을 몇 이본들과 대조하여 결락과 오류들을 바로잡아 교간본(校刊本)을 간행하려는 뜻을 갖고 있다가, 마침 문광서림 주인 홍익표(洪翼杓)의 동의를 얻어 반년간 공을 들인 끝에 간행하게 되었으며, 『곽우록(藿憂錄)』을 추가하게 된 것도 자신의 의견임을 신문 칼럼에서 말한 바 있다. 이 1929년 문광서림판 『성호사설』의 서문을 통해 드러나는 변영만과 정인보 두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적해보고, 그 의미를 탐색해보려 한다.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와 산강 변영만(山康 卞榮晩)은 20세기 전반 근대 서울의 한문학 대가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던 분들로 꼽히고 있다. `민족의 얼`을 내세우며 국수(國粹)를 탐구하여 국학고전을 학적 영역으로 확보한 이가 정인보였다면, `자득의 경지`를 강조하며 도덕적 문장관으로부터 한문학을 쇄신하여 문예적 진정성을 추구한 이가 변영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구문명을 성찰하는 방식과 제시하는 시대적 요구는 당연히 동일할 수가 없었던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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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애국계몽기부터 1920년대 미디어 소재 전래동요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국 전래동요 텍스트가 수집·분류되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한국 전래동요의 장르적 규범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애국계몽기에는 총독부의 후원 하에 일본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동요가 채집되거나 계몽적 지식인에 의해 수집·개량되었다. 당시 `동요`의 개념은 보편적인 의미의 `민요`의 대체어이거나 `참요`라는 전통적인 의미의 `동요`라는 의미였다. 이 시기는 동요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으나, 주로 개량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전승된 텍스트의 보존에는 소홀했다. 이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보다는 근대화에 대한 염원이 강렬했던 근대초기의 의식 성향에 따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합방이 된 후 1910년대에는 이러한 움직임마저 미미하다. 물론 지속적으로 근대적 민요시가(詩歌) 창작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지만, 이마저도 당대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성이 사장된 형태로 진행된다. 무단통치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고 문화통치기에 이르자 상황은 급변한다. 1920년대에는 민족적 전통의 인식이라는 문화주의적 관념 하에 개별 미디어를 통해서 전래동요가 채집되기 시작한다. 게다가 『어린이』지를 중심으로 한 `아동의 발견`과 이를 기반으로 한 아동문화운동,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서구적인 근대 창작 동요가 유입되면서 점차 `아동의 노래`란 의미의 `전래동요` 개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개념은 관념적이었고, 이론상으로는 초기 전래동요가 채집되고 이에 대한 이론적 맥락을 제시했던 일본 관변학자들의 식민주의적 논리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즉 조선민족의 수동성을 민족적 특성으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민요의 성격을 온순함과 애닯음으로 규정했던 인식이 매체의 수집자에게 주입되면서 슬프고 애닯은 동요가 `전래동요`란 인식이 확산된다. 여기에 `천사동심주의`라는 근대적 아동관, 문학 내부에서 벌어지는 장르의 위계화된 질서 등 매우 복잡한 논리들도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노래`라는 양식적 특성을 갖춘 전래동요는 그 고유의 발랄한 솔직성과 정서적 깊이, 그리고 뛰어난 형상성이라는 장르적 속성으로 인하여 이 식민주의적 논리를 뚫고 자생적인 텍스트의 원형을 복구해 내는 데 성공한다. 이는`노래`라는 구비 장르가 서구에서 유입된 창작방법론에 의해 창작되는 `시`에 비해 훨씬 더 공고하게 자기 성격을 유지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는 가히 `이론`에 대한 `텍스트`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현대문학 : 식민지 조선의 번역/번안의 위치 -1910년대 저작권법을 중심으로-

권정희 ( Jung Hee Kwon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28권 0호, 2010 pp. 297-320 ( 총 24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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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 조선의 번역/번안을 1910년대의 저작권과의 관계에서 분절되는 계기를 탐색하여 그것이 식민지 조선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과 연관되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1908년 일본의 저작권법이 적용된 식민지 조선에서 저작권법제화가 번역/번안을 재조정하고 관여하는 과정은 도쿠토미 로카(德富蘆花)의 <호토토기스(不如歸)>라는 동일한 원작을 번역과 번안의 두 가지 방식으로 출판한 조중환의 <불여귀> 와 선우일의 <두견성> 의 판권에서 명징하게 포착된다. 번역은 원저자의 허락이 요청되면서 번역자의 위치가 자리매김 되는 데 반해 번안은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저작물로 간행되었다. 이러한 법제에서 번역은 원작과 결부되는 데 반해 번안자는 창조적인 저작자의 위치로 변환되었다. 즉, 번역은 창작과 뚜렷하게 변별되는 데 반해 번안은 창작과의 모호한 경계에서 오리지널이 중시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제도화와 연관된 양자의 위치의 차이를 확인했다. 종주국 일본에서 번역/번안은 국어(일본어)의 문제와 관계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대다수 번안은, 번역과 식민지주의가 서양 원작의 일본어 번안을 재번안하는 프로세스에 중첩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제국 안의 식민화된 신민으로서 종속시키는 한편 번역의 오리지널의 문제를 재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 1910년대 저작권법의 저작권등록을 하지 않은 `위작(僞作)`으로 부르는 대부분의 번안 작품의 법적지표는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주체의 형성과도 관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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