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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Bangyo Language and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2734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9권 0호 (2015)

<책머리에>

반교어문학회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39권 0호, 2015 pp. 7-13 ( 총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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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자생적 근대가 없어도 역사서술은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문학에서 자생적 근대문학이 없어도 문학사 서술은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1876년 이전까지 근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어느날 문득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타·자율적 과정을 거쳐 드디어 근대에 도달했다는 서사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 조선후기에 내재적 근대가 있어야 한다는 설정 자체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근대를 원칙으로 하고, 근대란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근대를 역사적 목적지로 삼을 경우, 전근대는 근대를 향한 과정으로 존재할 뿐이다. 전근대는 독자성을 상실한 시대가 되고 말 것이고 그시대 자체로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서구와 아무런 접촉도 없었던 시대에 서구의 역사에서 추상한 고대-중세-근대의 도식을 가져다 대며, 조선후기사에서 반드시 근대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그것은 연구 주체인 나 자신이 이미 국민 /민족으로 제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민족 혹은 국민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나는 세계에 피투(被投)된 존재로서 나의 존재 기반인 시공간은 선택의 결과가 아닌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나는 우연과 강제에 의해 한국인으로 제작되었을 뿐이다. 내가 이 시공간에 갖는 애정이 있다면, 그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시공간적 애향심일 것이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 ‘사회’일 뿐이다. 필요한 일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근대를 냉철하게 객관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왜 이 지옥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반성해야 할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내재적 근대를 설정한 국문학 연구 역시 전면적으로 재검토가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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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1930년 발표한 「조선문학원류초본」은 자신의 시대적 고민과 요청을 고대문학에 투영하여, 조선문학의 원류적 가치를 구상한 것이다. 구성상의 특질을 요약하면, 개괄적 설명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 것은 남아 있는 고대문학 작품에 비해 부여하고 싶은 의미가 더 컸기에 초래된 결과라는 것, 각론에서 문학 대신 문예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남아 있는 고대문학작품에 외부 맥락을 통해 다른 각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에 초래된 결과라는 것, 한문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중국과 다른 우리말의 문법에 충실한 작품에 더욱 높은 가치를 두었다는 것, 고구려-신라-백제의 순서로 각론을 배치한 것은 각국의 문학에 부여한 가치 평가의 순서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구상한 고대 조선문학은 민족공동체 내부에 대해서는 인애(仁愛)를 보여야하고, 민족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에 대해서는 무위(武威)를 드러내며, 공동체의 진솔(眞率)함을 유지하여 서로 감촉이 소통되도록 해야 하고, 공동체의 경계선은 의자불의타(依自不依他)의 정신으로 지켜내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인보가 상상하는 민족 국가의 도덕률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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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은 1928년에서 1934년까지 간행된 기독교계 종합월간지로 종교, 철학, 과학, 보건, 역사, 농업, 교육, 문예 등 다양한 분야의 읽을거리를 제공한 교양지였다. 특히 한시, 전설, 민요를 포함하여 시조, 가사 등 전통 시가를 다양하게 소개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 글은 근대 잡지 『신생』에 수록된 전통 시가의 현황을 살펴보고 전통 시가가 배치되는 구체적인 양상을 검토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나아가 전통 시가가 수록된 배경을 살펴보고 근대의 고전 활용의 의미와 전통 시가 전승의 향방도 탐색해 보고자 하였다. 『신생』에 나타난 전통 시가의 존재 양상을 살펴보면 첫째, 계절이나 특정 시기를 고려하여 고시조를 배치하고 지면 구성을 다양하게 한 점을 들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등 계절에 어울리는 작품이나 어머니날 또는 칠월 칠석 등과 같은 특정 시기를 고려한 작품이 배치된 예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고시조’라는 제목 아래 작품이 배치되는 경우도 있으나 특정 표지 없이 지면의 내용 구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된 경우도 있다. 둘째, 율곡 이이의 연시조 <고산구곡가>가 반복 배치되어 있고 율곡 이이가 높이 평가되어 있는 점이다. <고산구곡가>는 16세기 사림파 문인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담은, 주자의 도통을 잇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최남선의 『소년』이나 『청춘』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사정을 감안할 때 『신생』에서 각별한 관심을 받았던 점은 자못 흥미롭다. 셋째, 가사 <농가월령가>가 시기에 따라 분할 배치되어 있고 농민생활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는 점이다. 당시 시조가 국민문학으로 부각된 데 비해 가사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상황에서 『신생』에 <농가월령가>의 8월령, 9월령, 정월령이 소개되어 있는 점은 무척 특이하다. 이들 월령이 선택된 것은 음력으로 8월에는 한가위, 9월에는 9월 9일 중양절, 정월에는 초하루 및 대보름이라는 중요한 명절과 절기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농가월령가>가 선택된 데는 『신생』이란 잡지가 농민의 삶이나 농민문예 등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생』은 각 방면으로 원만하고 건전한 인격을 수양하기 위한 ‘수양독본’을 지향했고 이를 위해 다방면의 읽을거리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전통 시가와 전설, 민요 등 우리(조선) 문학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이은상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드러나는데, 여기에는 일정정도 그의 문학적 안목과 소양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절이나 팔월 한가위, 칠월 칠석과 같은 세시풍속이나 민속 등을 고려하여 작품을 적절히 배치한 덕분에 독자들은 ‘옛 것’에 대한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읽고 감상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신생』은 조선 청년을 위한 수양독본을 지향함에 있어 고전을 적극 활용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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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식민지시기에 검열이라는 변수가 번역자의 태도와 식민지 번역장(飜譯場)의 형성에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주요 분석대상은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 『그 전날 밤』에 대한 조명희의 번역으로서, 그가 저본으로 삼은 일역본과 두 번역 판본(《조선일보》연재본과 박문서관의 단행본)을 각기 비교 검토하여 검열의 흔적을 밝히고 조명희의 검열 인식 및 대응을 살펴보았다. 러시아 여성 옐레나와 터키의 압제 하에 있던 불가리아 출신의 유학생이자 독립운동가인 인사로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그 전날 밤』은, 그 서사적 성격상 1920년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폭넓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식민지인들이 식민지 출신 주인공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관심이 그대로 문자화되기 어려운 곳도 식민지였다. 1924년 8월부터 10월 사이발표된 조명희의 《조선일보》연재본은 저본에 충실하게 번역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발췌역과 역자의 자체 요약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1925년에 나온 단행본 버전의 경우 신문연재 당시 축약된 내용이 정상적으로 번역되었다. 그 대신 연재본에는 없던 수백 자에 이르는 복자(覆字)가 새겨지게 된다. 이러한 훼손된 번역들의 배후에는 검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날 밤』을 온전히 번역하겠다는 조명희의 의도는 끝내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복자’의 경우는 원문이 존재하는 이상 ‘복원’이가능하기 때문이다. 단행본 『그 전날 밤』의 원문은 신문연재본이다. 비록 연재는 막다른 길에 봉착했지만 이미 원작분량의 약 80% 지점까지가 신문을 통해 충실히 번역·배포된 상태였던 것이다. 한편 단행본의 경우 많은 복자로 뒤덮여 있었음에도 신문연재 당시 축약된 부분만큼은 복자가 부재했는데, 이는 조명희가 복자 배치의 주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컨대 단행본의 복자는 신문을 통한 확인이 가능하며, 신문연재에서 축약되었던 부분은 단행본을 통한 확인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렇듯 조명희는 신문연재본과 단행본을 번역상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이도록 하였다. 식민지의 합법 출판물은 예외 없이 한 차례 이상의 검열을 거친 결과물이지만, 검열납본 원고와 대조해보지 않는 이상 그 과정에서 ‘걸러진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남은 것’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해당 텍스트의 존재 의미를 제대로 간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의 두 가지 경우는 ‘걸러진 것’의 실체, 즉 검열 이전과 이후의 텍스트 편차를 파악할 수 있는 여지가 허락되어 있다. 하나는 신문에 연재된 후에 단행본으로 간행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물이다. 전자는 식민지 조선에 적용되던 신문지법과 출판법의 편차로 인해 ‘신문연재본’이 원형으로서 남아 있고, 후자는 애초에 다른 법역(法域)으로 인해 훼손 없이 유통된 ‘번역 저본’(주로 일본어로 된)이 원형으로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명희의 번역소설 『그 전날 밤』은 두 가지의 ‘원형’이 모두 남아 있는 사례다. 본고는 이 조건들을 활용하여 복자를 복원하거나 조명희의 텍스트 개입 및 검열 대응 방식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보다 폭넓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식민지시기 번역문학 연구에서의 검열과, 검열 연구에서의 번역문학이라는 요소는 공히 필수적 참조항으로서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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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0년대 후반 임화의 리얼리즘론의 핵심을 문학주의에서 찾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문학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임화 비평의 현재적 의의가 문학적 커뮤니즘의 정초에 있음을 주장한다. 카프 강제 해산 이후 ‘주체의 재건’을 슬로건 삼아 전개된 임화 리얼리즘론은, 좌익 문학 운동의 현실 정치상의 궤멸을 이론 차원에서나마 상쇄해 보려는 시도로 해석되어 왔다. 임화가 현실 추수적 경향의 “몰아적” 사실주의에 맞서 이상(理想) 실현을 목표로 고투하는 “주체”적 사실주의를 옹호하며 이를 낭만정신으로 개념화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때 ‘현실’은 주체적 개입이 불가능한 소여로, ‘이상’은 주체의 낭만정신이 자유로이 전개되는 장이다. 동시에 이때의 주체의 자유는 ‘현실’에 대한 절대적 충실성에 의해서만 보증된다. 요컨대 ‘주체의 재건’은 주체가 주체성을 자발적으로 완전히 포기할 때에만 역설적으로 가능해지며, 실상 주체성의 본질은 자기의 끝없는 부정에 불과하다. 이 글은, 임화 비평에서 이 주체성=자기부정성이 텍스트의 증상인 데서 그치지 않고, 글쓰기 주체인 임화의 자기반성 속에서 텍스트성 자체로 화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임화는 현실이라는 자기 글쓰기의 대상을 자기 밖의 것으로 보지 않고 글쓰기 순간들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임화가 구사하는 ‘문학’개념은 주체가 자기 현실을 글쓰기의 순간으로 환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문학주의에 의해 임화는 부정성으로서의 주체성을 지양하고 진정한 ‘주체의 재건’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때 문학은 글쓰기 주체의 일방적인 자기실현이 아니라 자기부정성의 현현인 만큼, 자기 바깥의 복수의 다른 글쓰기 주체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이를 이 글에서는 문학적 커뮤니즘으로 명명하며, 이 지점에서 임화 리얼리즘론은 현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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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세자부로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 일본프롤레타리아 문학사를 기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 이처럼 업적과 연구가 비대칭적으로 형성된 배경은 비단 일본프롤레타리아 문학연구가 최근 부진한 상태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는 야마다 세자부로가 프로문학활동 가운데 작품 활동보다는 잡지 편집, 발행이나 문학사 및 사전 간행 등의 조직 활동에 집중했던 것과도 연관된다. 그로 인해 야마다의 프로문학 시기 활동은 단독적인 연구대상으로 다뤄지기보다는 문학사 기술의 일부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야마다가 만주국 문화계에서 그 어떤 인물보다도 중심적으로 활약을 펼치다 일본의 패전 이후 소비에트 관헌에 연행돼 카자흐스탄 및 시베리아에서 억류 생활을 보내게 된 것도 - 전후 그의 공백 및 역사적 망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 그에 대한 평가를 더욱 어렵게 만든 요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사 검토를 통해 야마다의 『전향기』 3부작을 매개로 해서 다음 세 가지 각도에서 그의 만주국에서의 활동상과 만주국 붕괴 이후의 행적을 분석했다. 첫째, 야마다가 만주국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분석해 ‘전향’이 갖는 사상(신념)적 전환을 지리적 이동과 연동시켜 다시고찰 했다. 둘째, 야마다가 만주국에서 편집한 세 권의 각 민족 선집이 보여준 만주국의 문화 통합 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유사성을 분석했다. 셋째, 전향과 만주 및 소비에트를 둘러싼 기억의 재편 과정을 『전향기』 3부작에 나타난 의도적 기억 재편(과잉과 축소) 과정 가운데 찾아내 이를 일본 내 공산주의 운동 전개 과정 속에 위치시켰다. 본고는 이러한 세 가지 분석틀을 통해서 야마다 세자부로가 만주국에서 펼쳤던 활동상만이 아니라, 1950년대에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식이 노정한 문제성을 고찰했다. 그런 의미에서 야마다의 회상기는 전후 일본 지식인들이 전전의 기억을 1950년대라는 전후의 문맥 속에서, 전전의 기억을 전후의 현재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의도적 누락과 ‘의역’의 한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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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텍스트 번역에 대한 연구는 기왕의 번역 개념어 비교나 운동사, 사회사 연구를 기반으로 삼아, 번역자와 그 주변을 경유하여 나타난 효과를 보다 자세하게 논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써 이글은 우선 『자본론』 번역자들의 텍스트에 대한 태도와 이해방식을 고찰하고, 그 중 동아시아 최초의 『자본론』 완역자인 타카바타케 모토유키(高전素之)의 번역이 성립된 현실적, 이론적 조건을 논증하고자 한다. 타카바타케는 마르크스라는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써 번역이라는 방식을 선택했고, 이는 번역의 선취에 대한 욕망, 마르크스와 자기를 일치시키려는 실천이었다. 번역과 문필대리업에 있어서 근대적 형태를 취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글쓰기를 뒷받침해준 ‘매문사’는 이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는 이를 자신의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론적 배경을 구성하고 실행할 계기로 삼았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고자 했다. 또, 타카바타케는 진화론의 이론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주장했다. 여기서 국가=국체와 사회주의라는 충돌하는 두 가치는 모순되지만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결합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고전이라고 불릴 만한 텍스트인 『자본론』의 번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 역동성을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론 번역의 검토는 일국 번역사안의 한 텍스트의 번역이라는 문제 뿐 아니라 한일 근대 비평의 개념적 장을 지배한 사회주의적 지식의 성립, 또 초기 자본론 번역의 예기치 않은 결과로서 형성된 국가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적 움직임 등을 다각적 차원에서 구명하는 데 유효할 것이라 여겨진다. 나아가, 근대 사회주의 텍스트를 대하는 주체의 접촉과 충격의 순간, 그리고 이를 전유하는 맥락을 어떻게 전파-수용-이식-확산이라는 도식을 지양하면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본고가 염두에 두는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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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시작된 쇼브라더스의 신파무협편은 이 스튜디오가 1960년대 내내 골몰했던 근대화와 지구화라는 목표에 가장 근접한 첫 번째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호금전의 <대취협>(한국제목 : 방랑의 결투)과 장철의 <독비도>(한국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화교문화권을 넘어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둬들였다. 1960년대 말 한국에서 이 영화들은 합작이 아닌 홍콩영화로는 최초로 흥행에서 성공했으며, 이 성공의 여파는 곧 일련의 한국산 검객영화를 낳았다. 여기에서는 이 영화들의 성공이 1960년대 초중반의 한국-홍콩 합작의 대규모 스펙터클 시대극이 실패로 끝난 지점에서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한국과 홍콩, 여타의 아시아 지역에서 무협영화의 성공을 낳은 당대적 공통성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가장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성공을 거둔 장철의 영화를 중심으로, 강력한 남성성을 의미하는 ‘양강’의 신체와 이 신체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협’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다. 오래된 ‘협’의 개념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중국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무협의 개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것은 드디어 산업화 시대에 ‘양강’의 상상력을 얻었다. 무협이 전전 동아시아의 힘에 대한 열망과 저항의 거점을 동시에 의미했다면, ‘양강’의 신체는 힘과 관련된 냉전의 질서와 전혀 무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동아시아 전체의 급격한 산업화와 그 과정에서 열망된 강건한 남성 신체와 관련 있으며 동시에 공장의 규율 속에 놓인 이 신체들의 상상적 전복과 관계있다고 할 수 있다.

한글마춤법통일안과 『동아일보』의 철자법 - 어문 규범과 언어 현실의 관계에 대한 고찰

안예리 ( Ye Lee An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39권 0호, 2015 pp. 281-304 ( 총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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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는 1933년 4월 1일부터 자체적으로 새 철자법을 시행했는데, 새철자법의 대원칙은 한글마춤법통일안과 유사하지만 세부 규정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같은 해 10월 29일 조선어학회가 통일안을 발표하자 동아일보사는 통일안에 따라 당사의 철자법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중모음 ‘ㅖ’와 ‘ㅆ’받침 표기는 광복 이후까지도 통일안을 따르지 않았으며 이는 어문 표준화초기에 발생한 규범과 현실의 갈등을 보여준다. 통일안은 종래의 ‘게’ 표기를 ‘계’로 바꾸도록 규정했지만 동아일보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당시 ‘계’를 [계]로 발음하는 지역은 서울뿐이었고 전국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이를 [게]로 발음하였다. ‘ㅆ’받침 역시 당시 중부지방에서만 발음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ㅆ’받침은 ‘있다, -었-, -겠-’ 등 고빈도 단어에 쓰여, 이를 채택할 경우 지면에 ‘ㅆ’이노출되는 빈도가 대단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ㅆ’받침의 발음이 존재하지 않는 대다수 지방의 독자들은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ㅖ’와 ‘ㅆ’받침 표기의 문제는 행정적 중심지의 언어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려던 조선어학회와 전국적으로 다수의 발음을 따르려던 동아일보사의 입장차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통일안에 서울말을 표준어로 삼는다는 총칙이 있는 것과 달리동아철자법에는 그러한 총칙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입장 차이가 확인된다. 이는 식민치하에서 국가권력을 대신해 언어의 통일을 도모하던 조선어학회의 입장과 전국적 판매망의 확보와 판매부수의 증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던 민간신문사의 입장이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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