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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교어문연구검색

Journal of Bangyo Language and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2734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4권 0호 (2016)

『유몽천자(?蒙千字)』 국한문의 유형별 특성 고찰

이준환 ( Yi Jun-hwan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44권 0호, 2016 pp. 13-58 ( 총 46 pages)
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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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J. S. GALE(게일, 奇一)이 편찬한 _유몽천자(?蒙千字)_(1901~)의 국한문(國漢文)이 보이는 문체상의 특징을 「권 1」, 「권 2」, 「권 3」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고찰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하고자 하는 까닭은 같은 국한문이기는 하지만 「권 1」, 「권 2」, 「권 3」은 국문과 한문의 혼용 정도에 차이가 있고 한문의 역할과 한문의 문법이 반영된 정도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문의 역할과 한문 문법의 반영 정도를 살펴가며 구문상의 특징을 살피고자 하였다. 그러려면 언어적 분석을 위한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기준의 마련과 활용이 필요한데, 이 글에서는 ①한문 부사의 출현 여부, ②한문 접속사의 사용, ③한문 관형 구성의 등장, ④한문 어순에 따른 구문의 사용 등을 기준으로 삼고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와 비교하여 보았다. 각 권에서 보이는 문체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以`, `於`, `然`, `于`, `況`, `又`, `但`, `雖`를 이용하여 한문 전치사, 접속사, 감탄사, 부사의 사용 실태, `者`를 포함하는 관형 구성의 사용 실태, `有`, `無`, `不`, `如` 등과 같은 구문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권 1」은 한문의 문법보다는 국문의 문법이 지배적인 문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권 2」는 국문의 문법 위에서 한문의 문법이 작용하는 문체로 이루어졌으며, 「권 3」은 한문의 문법이 주가 되는 문체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특성을 『서유견문』과 비교하여 보면 『서유견문』은 대체로 「권 2」가 보이는 특징과 유사한 면을 보이되, 한문 전치사, 접속사, 감탄사, 부사의 사용 실태와 관형 구성의 실태에서는 「권 3」, 「권 1」의 특징도 섞여 나타나는 면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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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어 문법 체계의 확립 과정에 나타난 외부 언어와의 교섭 양상을 살펴보려는 연구의 하나로 1909년 『大韓文典』과 같은 해에 간행된 高橋 亨의 『韓語文典』을 통하여 일본인에 의해 기술된 한국어 문법의 체계와 품사의 문제 및 그 특징에 대하여 관찰한 것이다. 『韓語文典』은 『韓語通』, 『文法註釋韓語硏究法』과 함께 1909년 일본인이 간행한 한국어 학습서 가운데 하나로 한국어 품사를 10품사로 나누었으며, 각개별 품사의 구성은 名詞, 代名詞, 數詞, 形容詞, 動詞, 助動詞, 副詞, 接續詞, 感歎詞, 助詞와 같이 數詞를 독립된 품사로 취급하였으며, 大槻文彦에 의해 일반화되어있던 `天爾遠波`에 대하여 `助詞`라는 용어를 구현하고 있다. 이는 같은 해에 간행된 『韓語通』이 `?爾乎波`로 표현함으로써 大槻文彦의 절충문법 용어를 채택한 것과 『文法註釋韓語硏究法』이 `助動詞`를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助辭`와 같이 `辭`로 구현한 것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韓語文典』은 한국어 문법 항목을 `時`, `法`, `相`의 세 가지로 나누어 각각`시제`와 `서법`, `태`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문법 개념과 품사 체계 등의 설정에서 일본 학교문법을 포함한 당시의 주요 일본어 문법관과 입장들이 적지 않게 차용 또는 원용된 양상을 보인다. 이에 이번 연구에서는 『韓語文典』에서 다룬 한국어의 문법 항목과 품사 분류 체계 및 체언과 용언을 중심으로 품사별기술 사항을 관찰하고 여기에 나타난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일본인의 관점에서 다루어진 초기 한국어 문법의 모습을 조명해 보았다.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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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통속조선문고』에 수록되어 있는 호소이 하지메의 『남훈태평가』 번역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이는 그간의 선행 연구에서 호소이 하지메의 조선 문학 번역 작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고에서는 호소이 하지메의 부정적 번역관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오로지 시조 번역 양상만을 살피고자 하였다. 이때, 호소이 하지메의 시조 번역 양상을 살피기 위해 岡倉由三郞(오카쿠라 요시사부로)의 시조 번역을 앞서 검토했다. 그 결과 오카쿠라의 경우 시조의 정형을 살려 번역한 점이 특징적이었다. 이후 호소이 하지메가 번역의 대상으로 삼은 『남훈태평가』의 저본을 『남훈태평가』(하)로 규정했다. 구성상의 특징으로는 의식적인 배열을 꼽았고, 이때 작품선택의 기준은 한국인의 정서를 보다 잘 드러내는 노래작품인가에 있었다. 이후 시조의 번역 양상을 한자어와 구어체, 분리, 생략과 변경으로 유형화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호소이는 일본의 언문일치체에 맞춰 시조를 번역하려고 시도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본고에서는 호소이는 조선인의 부정적 심성을 드러내기 위해 시조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번역의 의의와 함께 그 오류와 한계를 아울러 검토하였는데, 대부분의 오류가 원작품에 대한 오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더불어 이 한계점이 호소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근거로는 사용될 수 없음을 말했다.

<갑자상소문>과 ≪훈민정음≫의 두 <서문>

김주필 ( Kim Joo-phil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44권 0호, 2016 pp. 113-151 ( 총 39 pages)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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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1446)에는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문>이 실려 있다. 이두 <서문>에는 1444년 2월 20일에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올린 <상소문>에서 비판한 신문자의 문자론적 특성, 신문자 사용의 문제점 등을 반박하거나 신문자 사용을 합리화한 내용이 적지 않다. 이에 <상소문>과 대비하여 ≪훈민정음≫의 두 <서문>을 살펴본 결과, <정인지 서문>은 <상소문>에서 지적한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언문 사용의 장점을 부각시키고자 하였고, <어제서문>은 <상소문>을 읽은 세종이 최만리 등과 나눈 <대화>의 `이음(異音), 편민(便民), 이효(易曉) 등을 근간으로 작성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훈민정음≫은 <상소문>에서 지적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신문자 사용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초·중성의 제자 근거, `음소 : 문자`의 대응, 초성·중성·종성 및 그 합자의 문자론적 특성과 사용 지침 등을 설명하고 그 용례를 보여준 것으로 이해하였다.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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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연구를 통하여 本稿에서는 『詩經諺解』 중 나타난 대량의 중세한국한자음 중 類推音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는 河野六郎(1968) 및 伊藤智ゆき(2002)가 논한 중세한국한자음의 유추음과 전염(Contagion) 현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河野六郎(1968)의 방법과는 다르게, 本稿에서는 나고야 대학 所藏의 19세기 전후 판본을 참고로 하지 않았으며, 原本시기와 가까운 1613년의 판본을 기준으로 자료를 정리하였고, 더불어 이를 『經典釋文』의 音切과 비교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에서, 本稿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발견을 하였다: 우선, 『廣韻』 중에는 해당 자에 한국한자음과 대응되는 反切이 있기는 하였으되, 다음과 같은 실제적으로는 맞지 않는 대응도 발견하였다: `?` *kopsa > kwαj 의 異文일 뿐인 `會`를 `회`로 기록하였으며, djwi이라는 음절에 대응되는 `?`의 독음을 `□`로 적었고, `우는 소리`란 의미일 대의 `?`은 독음이 hwæŋ임에도, `황`에 대응시켜, 실질적으로는 類推音인 대응현상을 보였다. 그리고, 本稿에서는 한국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에도 생겨날수 있는 유추음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한국한자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가령: `昭昭`의 `昭`는 *tewb > `t?jεw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照` *tewsb > t?jεw의 通假일 따름이다. 그러나 한국어와 중국어는 모두 이때의 `昭`를 平聲으로 읽어 대응시키고 있다; `祉` *thri??b > `th??에 대해서는 한국어와 중국어 모두聲符인 `止` *ti??b > `t???에 근거하여, `止`와 완전한 동음으로 읽는다. 마지막으로, 本稿에서는 河野六郎(1968)의 선행연구에 오류가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가령: 河野六郎(1968)에서 제시한 “?”의 聲母는 羽母(本稿의“于母”)h?-로 제시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j?p 에 대응된다는 점; djwi `로 읽어야 하는 `?`를 隊韻 -woj `으로 대응시킨 것 등이다.
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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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세기 초 전통 가곡 문화의 변화상을 여러 문헌 기록과 자료들의 검토를 통해 그 연행과 공연의 실제적인 모습들을 살펴보는 데 있다. 필자는 이미 1900~1910년대까지의 전통 가곡 문화의 변화상과 공연의 실제적인 모습들을 앞선 연구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연구의 후속 작업으로 1920년대 전후 시기의 자료들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1920년대 가곡창 공연은 과거의 연행 형태를 탈피하여 새로운 공연의 형태로 탈바꿈하게 된다. 풍류 공간에서 여러 악곡을 연이어 부르며 가곡 한바탕을 구성하여 연행하던 방식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대중 무대 공연과 같은 공간에서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공연 양상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미 이 시기에 가곡은 `조선 고악`으로 대우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공연에서 `옛 음악`, `고상한 음악`의 대표격으로 불리며 향유되었다. 궁중정재<경풍도>에서의 가곡창 편(編)의 공연, 납량연주회에서의 `편` 곡조 연주, 각종음악회에서의 단편적인 가곡 공연들은 1920년대의 가곡 공연 양상을 잘 보여준다. 또한 가곡 연행의 주 담당층인 기생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잡가류만부를 줄 알고 시조, 가사 등의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기생들에 대한 비판은 20년대 초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1920년대의 가곡 공연은 주로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가곡 한바탕과 같은 연행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인 음악학자 다나베히사오가 들을 수 있었던 남녀 교환창 12수는 20년대 대표적인 가곡 한바탕의 모습이다. 이외에도 기생 교습용 가집으로 만들어진 『가인필휴』나 『가곡보감』을 통해서도 이 시기 가곡 한바탕의 구성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에도 가곡창의 유성기 음반은 발매되었다. 전체 유성기 음반 발매비율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양이지만, 가곡창 음반이 제작된 것은 음악매체에 따른 가곡 문화의 변화상이다. 전체 가곡창 음반 비율의 절반이 넘는 음반들이 1920년대에 발매되었다. 또한 하규일을 비롯한 관련 인물들이 음반 취입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음반들이 제작되었다. 특히 남창 삼삭대엽 등의 본가곡 계열작품들도 녹음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1920년대 가곡 문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라디오 방송의 시작이다. 가곡창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낮았는데,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전파될 수 있었다. 방송 초기에는 한두 곡, 두 세곡 정도의 곡목들이 불렸지만, 점차 가곡 한바탕 방식이 방송되었고 이후에는 여창 한바탕, 소가곡 한바탕, 남녀창 한바탕 등의 형태가 가곡창 방송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라디오방송에 의한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가곡 향유의 20세기적 변용이며 새로운 가곡 문화의 창출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양계초(梁啓超) 저술에 나타난 아동관과 아동 문학론

한효 ( Han Xiao ) , 우림걸 ( Niu Linjie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44권 0호, 2016 pp. 223-251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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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의 발견은 인류 사회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생긴 개념으로 더 이상 아동을 어른의 축소판으로 여기지 않고 독자적인 존재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경우 아동의 발견은 근대 계몽기에 커다란 사회변동의 역사적 배경에서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특히 사회진화론, 근대적 교육관의 유입과 함께 생긴 것이다. 양계초(梁啓超)는 중국 근대 아동의 발견과 아동 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아동교육을 민지(民智) 계발의 일환으로 보고 이 분야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논유학(論幼學)>에서 그는 중(中)·서(西) 교육을 비교하면서 중국 전통 교육의 폐단을 비판하고 나름의 주장을 펼쳤다. <소년중국설(少年中國說)>에서는 소년들에게 소년중국(少年中國)을 건설하는 책임을 부여하면서 미래와 새로움을 상징하는 소년들을 극찬하였다. 또한, 양계초는 프랑스의 탐험소설 『15소년 표류기(Deux Ans de vacances)』를 번역하기도 하였으며 아동 가요까지 창작하여 아동교육과 문학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보여주었다. 양계초는 아동을 민지 계발의 대상으로 보고 그들에게 신국민(新國民)이 되어 국가를 부흥시키는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에 아동과 아동교육을 중요시하였다. 나아가 그의 이러한 아동관은 단순히 아동의 지적 발전과 인격양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동들에게 민족과 국가를 새롭게 만드는 정치적 책임을 부여하고 그들을 자강의 힘으로 보았다.

지배와 언어:식민지 검열의 케이스

이혜령 ( Lee Hye-ryoung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44권 0호, 2016 pp. 253-283 ( 총 31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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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느 정도 연구 성과가 집적된 식민지 검열 연구를 지배와 언어라는 문제틀에서 검토하여 제국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 사회의 형상을 부감하려는 시도이다. 제국의 검열은 `언어`와 `문자`로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대신 기술하고자 했던 지배의 실천이었다. 검열은 그녀/그 또한 말하는 사람인 피식민지인을 언어과 관련하여 어떤 존재로 특정할 것인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어떻게 지배의 도구로 전유할 것인가에 대한 식민주의적 관념 속에서 운용되었다. 검열은 궁극적으로 피식민자의 (집합적) 신체를 겨냥했다. 이는 식민지 검열, 그리고 사상통제가 식민지인들의 언어의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뱉어진 말과 쓰인 글을 그 입과 손을 가진 인신(人身)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잠재적으로 피식민자의 텍스트를 식민지 지배에 반하는 `불온`한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으로 간주한 제국 일본은 그 불온성을 감지하여 공격당하는 제국을 상상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피식민자의 텍스트와 피식민자에게 가하는 형벌로 되갚아주는 메커니즘에서, 제국 일본은 사도-매저키즘적인 독자의 형상을 띠었다. 더욱이 검열은 피식민자가 되어보는 일종의 흉내내기의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피식민자의 귀를 가져야 했던 레코드 검열에서는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다른 한편, 검열에 대해 무엇보다 문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문학은 근대 미디어에 있어서 소유권, 즉 저작권 의식이 가장 일찍 확립된 매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검열에 의해 저작권이 침해당하거나 빼앗기는 순간 자신의 말이 자신이 아닌 종족이나 집단에 속한 것임을 깨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검열은 근대적 개인을 기초로 한 저작권의 성립이 현전되는 순간 그 저작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으며 피식민 종족이나 특정 집단의 것임이 선고되기 때문이다.

박태원과 신감각파, `감각`의 양상과 의미

이화진 ( Lee Hwa-jin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44권 0호, 2016 pp. 285-312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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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에 영향을 미친 일본 신감각파에 주목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신감각파를 받아들인 박태원과 그의 소설에 나타난 신감각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감각이란 개인이 육체를 통해 반응하는 자각적 인식형태로, 근대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전 낭만주의 문학에서 보인 감각의 양상은 감정의 우월함이 전제된 주관주의가 기반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신감각의 모습은 근대문명을 읽어내는 방식의 하나로 주관적 감정보다는 객관화된 감각에 집중되어 있는 양상을 띤다. 일본 신감각파의 경우, 요코미츠가 그 선봉에 서 있다. 요코미츠는 종래의 자연주의에서 변형된 형태로 물적 세계에 대한 감각적 양상에 주목하여 근대적 감각을 창조해 냈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의 구인회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만 일본 신감각파는 대역사건이나 대지진, 경제공황 등 일본의 혼란한 시대상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경향아래서 형성되었다면, 한국에서는 근대와 식민지라는 두 가지 외연 안에 놓여 있는 현실을 자각하는 도구로서 신감각을 불러온다. 박태원이 소설 속에서 신감각을 구현해 내는 양상은 식민지 조선에서 감지되는 불모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채워진다. 곧 박태원의 신감각은 현실에 대한 치열한 탐색으로서의 현실감각의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밤의 침묵과 자유의 타수 -김수영의 해방공간과 임화의 4.19-

장문석 ( Jang Moon-seok )
반교어문학회|반교어문연구  44권 0호, 2016 pp. 313-374 ( 총 62 pages)
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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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북`에서 운명을 만난 임화가 일본을 경유하여, `영인본`과 `연구의 대상`이라는 형식으로 `남`으로 귀환했던 것은 1970년대였다. 1950-1960년대 한국의 반공주의적인 정치적 상황과 검열이라는 문화적 조건으로 인해 임화는 공식적인 표상공간에 등재될 수 없었는데, 이 글은 그 시기에 만취한 시인 김수영이 못다 불렀던 해방가요 <인민항쟁가>를 통해 섬광처럼 귀환하는 임화의 형상에 주목하였다. 김수영이 부른 <인민항쟁가>는 그가 목격하였던 해방공간임화, 김순남, 오장환 등의 문화적 실천을 환기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전위이자 미학적 전위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의 문학자들은 해방 이전 조선문학의 성과를 물질화하여 새로운 창작을 위한 `전통`으로 자원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기반으로 음악, 미술 등 여러 양식의 미학적 전위들 및 새로운 세대의 문학자들과 소통하였다. 또한 해방공간 `거리의 민주주의`와 인민항쟁을 통해 그들이 창작한 해방가요는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로 확산되었다. 만취한 김수영이 부른 <인민항쟁가>는 냉전과 분단으로 인해 단절되고 망각된 혁명의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었다. 1960년 4.19 혁명은 해방공간 전위의 실천과 혁명의 기억이 활성화하는 `지금시간(Jetztzeit)`이었다. 김수영은 시쓰기의 전위적 재구성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1950년대 헌책방에 유통된 해방공간 출판물을 읽으면서 세계관과 자기의식을 형성하였던 1930년대 생대학생들은 4.19 혁명의 선언문에서 임화의 시를 인용하였다. 다만 임화는 `혁명`의 상징이었지만, `전향`의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복합성을 가진 문학자였으며, 그 결과 그의 시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의미의 `뒤틀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비롯한 근대적 이념들은 선진적 서양과 후진적 한국이라는 대립구도 안에서 `유비`의 대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혁명`과 `실패`의 모순을 한 몸에 구현한 임화라는 `전통`이 뒤늦게 활성화되었던4.19 혁명이라는 역사적 경험은, `실패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탈구축해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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