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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어문검색

The Journal of Yeongju Language &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언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9011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7권 0호 (2014)

<보현십원가>의 불경 실현화 양상

김문태 ( Moon Tae Kim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5-32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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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 전해오는 보현보살의 가르침과 게송을 기반으로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었다. 그는 성상융회사상과 성속무애사상을 토대로하여 세속의 도리인 노래와 미천한 언사인 향찰을 통해 불경의 내용을 우리 고유의 사유방식과 감정에 맞게 표현함으로써 민중의 선한 바탕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균여는 쉽고 구체적인 시어와 비유를 동원하여 민중이 보현보살의 가르침에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불경에 대한 대중친화성을 고양하는 한편, 불경의 토착화에 기여함으로써 고려시대의 이 땅에 불경이 실현화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최행귀는 이러한 <보현십원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시로 번역하고 ‘송(頌)’이라는 별도의 제목을 붙였다. 그의 한역시는 식자층을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민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창작된 균여 향가를 직역이 아니라 의역하였다. 그 결과 균여의 민중지향적 창작 관점과 의도와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정백석(新井白石)의 의례개정과 조선 정부의 대응

김상조 ( Sang Jo Kim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33-62 ( 총 30 pages)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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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11년 신묘통신사때에 일본이 조선에 요구했던 외교개정의 절차와 조선 정부의 이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았다. 7년간의 조일전쟁이 있고 나서 비정상적이게도 위조된 문서오 외교관계가 재수립되었다. 두 나라 사이에는 결과적으로 쇼군[將軍]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와 어떻게 외교사절을 대우할 것인가가 두 나라 사이의 논란거리였다. 일본은 통신사일행에게 일본을 여행하는 동안 관례적으로 행해지던 외교적 의례의 개정을 요구했는데, 이는 조선정부에서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선통신사일행은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 일본의 외교사절의 접대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이것은 일본측에서 강요한 것이었다. 조선사절단은 과거의 전례에 비추어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강력하게 환영절차의 재조정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그들의 방식대로 밀어 부쳤다. 일본정부의 이런 주장은 국서에서 과거 통상적으로 왕의 이름을 휘하는 것은 외봉서의 서식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개정은 新井白石이 주도했지만, 결국 한번의 사건에 불과했다. 德川家宣이 죽고 德川吉宗이 계승하였고, 德川吉宗은 新井白石이 개정한 의례형식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옳은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무례한 요구에 대해서는 조선통신사 사절 내에서 논쟁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였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이 문제는 사절단이 돌아오고 나서야 논란이 되었다. 사절단 통신사 사절단 중 정사와 부사는 엄한 처벌을 받았다. 세 명의 관리와 통역관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정부가 신중하게 일본과의 관계를 되짚어보았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결국 이는 일본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즉흥적인 분노였을 뿐이다. 만약 新井白石의 개정이 德川家宣이 죽고 나서도 유효했다면, 1876년 강화도조약이 있기까지 조선은 일본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성과 한음"의 교유(交遊) 연구

이병찬 ( Byoung Chan Lee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63-84 ( 총 22 pages)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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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은 선조와 광해군 초기까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외교와 국방, 행정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주요 요직을 맡아서 국난극복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순신처럼 무장은 아니었지만, 병조판서를 번갈아 맡아서 임란과 정유재란을 진두지휘했던 ‘구국의 영웅’이다. 여기에 그들의 평생에 걸친 ‘지기지우(知己之友)’로서의 행적은 포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설화를 양산해 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언급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명쾌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 따라서 이 글은 이들의 교유를 공적 교유(公的交遊)와 사적 교유(私的交遊)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러한 연구는 인물설화의 전승과 전파의 저력을 이해하고, 전해지는 다양한 ‘오성과 한음’ 설화를 올바로 수용하는 데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본격적인 교유는 둘이 같은 해(1580년)에 약간의 시차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34년 동안 벼슬길에서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비슷한 관직을 번갈아 맡으면서 교유를 갖는다. 관직생활 중에도 유배나 사직으로 인한 공백 기간이 거의 없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오성은 상대적으로 행정 실무에 밝았고, 한음은 문장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국가의 온갖 대소사(大小事)에 항상 뜻을 같이 하면서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관계를 이어 나갔다. 한음이 오성에게 보낸 77편의 편지를 분석한 결과, 약간은 한음이 오성에게 의지하는 일방적인 교유의 양상을 보였다. 편지의 내용은 사적인 안부를 묻는 것은 드물고, 대체로 공적인 사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고 나서 오성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그렇지만 때로는 오성의 처신에 서운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는 성장 환경과 기질, 나이 등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친구이면서도 대등한 관계라기보다는 형과 아우 같이 서로 존중하면서 예의를 갖추는 사이였다.

다산 정약용의 시문학 공간으로서 진주(晉州)

하강진 ( Ha Kang Jin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85-113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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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시문학 공간에 대한 연구는 전라도 강진(康津), 경기도 마현(馬峴)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세 차례 방문한 진주와 관련해 지은 여러 편의 시문(詩文)을 통해 공간적 성격과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다산 문학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다산이 진주를 처음으로 여행한 때는 1780년 3월이었다. 예천군수로 재임하던 부친을 뵈러가던 중에 장인 홍화보가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주재하고 있어서 들렀다. 이때 접한 촉석루의 삼장사나 논개의 순국 사실과 장인의 강개한 역사의식은 젊은 시절 그에게 충(忠)과 열(烈)의 정신을 내면화하는 데 큰 작용을 하였다. 두 번째 방문은 1791년 2월 진주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부친 정재원에게 인사드리려는 동기로 이루어졌다. 촉석루를 거듭 유람하게 된 사실을 크게 만족스러워한 뒤 기녀들과의 재회 기쁨을 나누며 시문을 지었다. 그러던 중 자식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경했는데, 아들은 결국 한 달 만에 세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촉석루에서 기녀들과 즐겼던 낭만적 풍류는 회환의 정서로 이내 반전되었는 데, 내리사랑의 사연이 투영된 이 시기의 작품은 다산의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배여 있어 각별한 의미를 느끼게 한다. 세 번째 방문은 1792년 4월 진주에서 갑자기 별세한 부친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인생과 학문의 사표였던 부친의 죽음은 큰 충격이라 진주에서 시문조차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진주는 삼장사와 논개에 함축된 충렬 정신의 내면화, 요절한 자식으로 반전되어 버린 화락(和樂)한 풍류 경험, 부친을 여읜 애통함이 간직된 현장 등은 시문학 공간으로서 타 지역과 차별화된 특색을 지닌다.

백석의 북방시편에 나타난 문학치료적 양상

강연호 ( Yeon Ho Kang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115-142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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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문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일련의 작품 쓰기/읽기 과정을 통한 문학치료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그 양상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아울러 백석의 북방시편을 통해, 창작자 자신이 작품 창작을 통해 보여주거나 이행하고 있는 문학치료적 양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문학 자체가 가진 치료적 속성에 주목하면 문학치료에서 문학텍스트는 그 텍스트를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생산자 자신에게도 치료의 모형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백석의 일련의 북방시편은 그 자체가 문학치료 양상을 보여주거나 창작자 자신의 문학치료 과정을 스스로 이행하고 있는 텍스트로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백석의 북방시편이 보여주고 있는 문학치료적 양상은 이들 텍스트를 한편으로는 개별적인 독립된 텍스트로 읽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텍스트의 상호 텍스트성을 고려하여 전체를 하나의 연작 텍스트로 연결해 읽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특히 북방에서 에서 시작하여 두보나 이백같이 나 흰 바람벽이 있어 등과 같은 작품을 거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에 이르는 일련의 연작시로 읽어볼 때 문학치료적 양상은 확연해진다. 문학치료에 입각한 비평적 작품 읽기에 따르면, 백석의 일련의 북방시편은 작가의 자기서사에 기반한 창조적 작품 서사가 다시 작가 자신의 자기서사의 변화가능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김광협의 농민시 고찰 -『농민』을 중심으로

김지연 ( Ji Yeon Kim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143-170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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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광협의 『농민』(태멘, 1981)을 텍스트로 하여 그의 농민시에 드러난 몇 가지 특징적인 면에 대해 살펴보았다. 논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농민의 농민의 생활, 농촌 상황 등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 그 궁핍하고 고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데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농민시는 현실을 밀착되게 그려내기보다는 농촌의 따뜻하고 넉넉한 정서를 보여주는 데 치중함으로써 농민의 삶이 다소 관념적으로 미화되는 경향이 드러난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농민시가 일노래로서 가능요의 구실보다는 민중 정서를 담은 비기능요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둘째, 그의 농민관에 따르면, 농민이란 민중의 일부였으며 민중의 다른 이름이었다. 농민의 개념을 민중 전체의 영역으로 확대하였으므로, 그의 작품들 역시 농민에 국한된 구체적 정서보다는 민중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정서를 드러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관념적 정서’와 ‘비현실적 묘사’라는 진단은 김광협 시의 방법론적 특장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셋째, 그는 지식인이면서 농민이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농민시에는 ‘지식인 농민’ 이 농민에 대해 쓴 문학으로서 그가 견지했던 농민 인식이 잘 드러나 노정된다. 이것은 두 가지 경향으로 드러나는데, 당대 농민문학의 계몽성에서 벗어난 차별화 작업 그리고 안빈자족하는 건강한 농민상 구현 등이 그것이다.

신석초 시에 나타난 고향의식 연구

김현정 ( Hyeon Jung Kim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171-195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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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신석초의 시에 나타난 고향의 의미를 추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찍이 노장사상을 섭렵한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찾아 유랑하였다. 그의 문학의 시원(始原)이자 시발점인 고향 서천을 원점(原點)으로 하여 발레리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고, 신라와 백제의 유적을 찾아 민족정신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 과정에서 서구와 동양,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에 나타난 고향의 의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고향의 편린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사후에 발간된 『비가집(秘歌集)』을 비롯하여 몇몇 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천석꾼의 토지까지 빼앗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향에 대한 상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그의 시에 고향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징후들이 담긴 작품들이 적잖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의 시 이면에 고향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이 숨겨져 있거나 고향의 의미가 확장되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 투영된 고향의 모습은 고향에 대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고향의 의미가 확장시켜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생채기(상처)의 고향을 뛰어넘어 그리움의 고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시인들과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

강원영동권 해양시문학의 사례와 전망

남기택 ( Gi Taek Nam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197-223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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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에 대한 논의는 관련된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일반화된 방법론이나 문학사가 정립된 단계는 아니다. 본고는 기존 해양문학 연구의 동향 속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되지 못한 강원영동권을 대상으로 해양시문학의 주요 양상과 경향을 논구하였다. 해양문학은 강원지역문학의 하위장르로서 주요 콘텐츠를 구성할 수 있다. 해당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상 해양은 지리적, 사회적, 문화적 특성의 핵심 기제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강원영동권 해양시문학의 정립기 양상과 현단계 대표적 사례를 일부 작고문인 및 류재만 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작고문인의 양상은 해양문학 장르나 범주를 구성할 만한 의도적 작품세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본고에서 예시한 김동명, 심연수, 최인희 등의 작품세계는 단편적으로 바다를 소재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전체 시세계와 시정신을 매개하는 주요한 문학적 인식소로서 바다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단계 강원영동지역의 해양문학 양상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바다를 인접한 환경에서의 삶의 경험과 추억, 인생과 현재적 삶을 바다에 투영하는 방식 등은 강원영동지역 해양문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방식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실존적 배경이자 삶의 장소성으로서 바다, 서사적 사건의 공간성으로서 대양 등의 범주로 대별하였다. 김시래, 김영준 등의 사례도 있지만 이러한 입장과 범주에서 현단계 주목되는 작가는 류재만이다. 바다를 소재로 한 강원영동지역문학의 실정은 이곳 지역문학적 특성인 동시에 한국 해양문학의 흐름을 형성하는 일 요소로서 주목되어야 한다. 류재만과 같은 일부 작가들에 의해 강원영동지역의 고유한 해양문학 장르가 실천되고 있는 점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서정주 시의 신체어에 대한 인지시학적 고찰

이승철 ( Seung Cheol Lee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225-255 ( 총 31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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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서정주 시에서 신체어에 해당하는 ‘손톱’, ‘눈썹’, ‘피’를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인지주체의 인지특성을 고찰하였다. 서정주 시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이어가면서 인지시학 방법론으로 접근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손톱’에 대한 화자의 인지특성을 고찰하였다. 서정주 시에서 ‘손톱’은 ‘아내’와 ‘임’의 신체 일부이면서 동시에 이들을 환유하고 있다. 그리고 ‘손톱’은 [형태의 유사성은 내용의 유사성이다] 은유에 따라 ‘초승달’과 등가적 관계로 표현된다. ‘손톱의 분홍’ 표현에서는‘손톱의 분홍’을 용기(container)로 인식하고 그 안에 담겨있는 ‘꿈, 노래’의 현재성과 지속성을 부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손톱’는 서술어인 ‘깎는다’와 연결되어 아내의 고단한 삶에 대한 감사와 함께 지난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표출한다. 3장에서는 ‘눈썹’이라는 신체적 상관물을 통해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음을 고찰하였다. 먼저 [사랑은 임의 눈썹이다] 은유에 근거하여 ‘눈썹’은 여인으로 촉발되는 ‘사랑’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임에 대한 사랑은 보름달이다], [임에 대한 그리움은 보름달이다] 은유에 따라 ‘눈썹’은 달의 이미지 중 ‘그리움’의 정서를 수용한다. 4장에서는 ‘피’를 통해 드러난 화자의 존재의식을 고찰하였다. 雄鷄에서 ‘피’는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화자는 ‘피’의 분출을 몸에 갇힌 욕망의 해방으로 인지한다. 욕망의 상징으로서의 ‘피’는 花蛇에서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양가적 속성으로 이해된다. 自畵像에서는 ‘피’를 통해 존재론적 고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시는 피를 담은 용기이다]라는 은유와 함께 ‘피’는 혈연적이고 유전적인 존재 속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권환의 계급주의 아동문학 연구

한정호 ( Jeong Ho Han )
영주어문학회|영주어문  27권 0호, 2014 pp. 257-295 ( 총 39 pages)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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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환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대가다운 풍모를 보여준 문학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나라잃은시기와 광복기를 거치면서 특수하게 형성된 우리 겨레의 시대현실과 끊임없이 맞서면서, 현실 극복을 위한 실천적 의지를 다양한 문학갈래를 통해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계급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본보기로서 자리를 분명히 굳히고 있다. 이 글은 권환의 삶과 문학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묻혀 있었던 카프 활동과 계급주의 아동문학의 면모를 살피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에 글쓴이는 권환의 카프 활동과 계급주의 아동매체인 『신소년』과 『별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그의 작품 활동과 그 됨됨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소년소설과 소년시, 그리고 기타 산문 작품들을 대상으로 계급주의 아동문학적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명하고자 했다. 첫째, 권환의 문학행보는 카프 활동과 아동문학에서 비롯된다. 그가 카프에 정식으로 가입한 시기는 1929년 5월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카프 결성 무렵인 1925년 7월 『신소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주로 아동매체 『신소년』과 『별나라』를 중심으로 소년소설과 소년시를 비롯해 여러 산문들을 다양하게 게재하고 있다. 그의 아동문학은 계급주의 관점에서 식민지 현실과 모순 상황을 다각도로 담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만큼 권환의 계급주의 아동문학은 카프의 운명과 맥을 같이하며 든든하게 자리잡아가는 궤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둘째, 권환의 아동문학은 계급적 아동관에 바탕을 두고 무산계급과 현장성의 실천과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식민지 아동들이 겪고 있었던 가난 체험의 실상과 그에 대한 현실인식을 담아낸 소년소설, 식민지 현실과 가족의식을 보여주었던 소년시, 무산아동들의 계몽과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계급의식을 담아 내고 있는 산문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의 아동문학은 나라잃은시기의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갈망하던 계급주의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권환의 계급주의 아동문학은 카프의 시인이자 비평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문학적 이력과 행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의 카프 활동과 문학행보는 우리나라 계급주의 문학의 전형으로 설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아동매체 『신소년』과 『별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그의 아동문학은 우리나라 계급주의 아동문학이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을 여러 갈래에 걸쳐 보여준 값진 업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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