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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Yon Min Hak Chi


  • - 주제 : 어문학분야 > 기타제어문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
  • - 해외 등재 : -
  • - ISSN : 2092-7428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3권 0호 (2015)

연민 선생의 시가 연구

윤덕진 ( Dug Jin Youn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5-26 ( 총 22 pages)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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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이가원 선생의 시가 연구는 선생의 문학 연구 전반을 지배하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사회 기여 목적의 사실주의에 의거합니다. 선생이 활동 하신 기간의 한국사회가 일제 강점기에 이은 좌우 대립, 그리고 단독 정부 수립 후의 독재 정권들로 조건 지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성향이 문학 연구를 지배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퇴계 선생과 혈맥으로도 연계되는 만치 유가 사상의 전통이 연민 시가 연구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선생이 누누이 강조한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詩敎)”가바로 유가적 시가관의 요체일 것입니다. 이 시교, 곧 인간의 원초적인 정서를 중시 하는 시가관으로써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 자세가 경직되기 쉬운 폐단을 극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민 선생이 한글문학을 미래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본다던가, 직접 한글 시조 가사를 적극적으로 지어낸다던가 하는 태도는 그러한 정서와 이성의 통합을 시가의 가장 이상적인 내용으로 보는 시가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민 선생의 문학에 대한 태도는 문학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문학, 사회를 위한 문학을 지향하였습니다. _조선문학사_의 시가 부문을 보면, 한시와 국문시가가 병존하는 실태를 반영하기 위하여, 시가라는 장르 항목을 견지하면서, 조선 시가가 국수적인 영역에 함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대적인 추수에 끌려가지도 않는, 자존적이면서도 국제 교류적인 온건한 자세를 높이 샀습니다. 익재 이제현, 자하 신위 등등으로 이어지는 소악부 제작의 의의를 심중하게 평가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연민 선생님 자신이 한시와 국문시가의 제작에 직접관여하기도 했지만, 또 다시 동아시아 일계의 문학 교류가 절실해진 작금에 즈음하여 열려 있는 시가관이 요청되기도 하는 사정을 헤아려 후배들에게 충정으로 권면한 것으로 보아야겠습니다. 연민 선생의 시가관을 몇 차례에 거쳐 탐토한 까닭이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연민 선생의 별호(別號)에 대하여

이우창 ( Chang Liu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28-42 ( 총 15 pages)
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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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이가원(1917-2000)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문 경전을 공부해서 한문에 익숙하기 때문에 한문 연구 방면에 탁월한 성취도 이루고 대량의 한시와 한문 작품도 창작했다. 뿐만 아니라 한문이 이미 연민 선생의 생활에 융합되어서 별호를 만들기 좋아하고, 스스로 별호를 많이 만들었다. 전면적으로 문집을 살펴보면 연민 선생이13살부터 80살까지 거의 해마다 별호를 하나씩 만들어서 합계 67개를 만들었다. 고대 한국은 한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한국 고대 문인들이 점차 중국식의 이름, 자(字)를 활용할 뿐만 아니라 서재와 방을 위해 이름도 짓는 풍조가 생겨났다. 별호는 방의 주인 자신의 상황과 취미와 심미관을 보여 주는데, 이 풍조가 당대까지 지속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문인 방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유교 경전이나 노장이나 명편·명언이나 주인의 시에서 방의 이름 글자를 얻는다. 2)방의 용도나 재질이나 특징대로 방의 이름을 만든다. 3) 위치, 즉 산수나 지명대로 방의 이름을 만든다. 4) 구체적 기물이나 자연 환경이나 식물 이름을 따라 방의이름을 만든다. 5) 사실을 기록한다. 즉 어떤 사건을 경험해서 방의 이름을 만든다. 6) 주인이 자신의 특징이나 행위 관습대로 방의 이름을 만든다. 7) 주인이 어떤 기분이나 감정 때문에 방의 이름(을) 만든다. 8) 고인을 사모하여 그 사람과 관련 된 것으로 방의 이름(을) 만든다. 9) 은거 생활과 관련됨. 10) 사상과 관련됨. 11) 후세 사람들에 의해 와전된 것. 그리고 연민 선생의 별호는 대체로 상술한 제1) 3) 4) 5) 6) 7) 8)의 경우가 포함되었다. 이 논문은 한국 문인 서재와 방의 이름을 종합하여 서술하기 위하여, 연민 선생이 서재와 방의 이름을 만든 방법을 살펴보고 연민선생의 생활 상황과 별호 사이에 있는 관계를 분석하였다.

퇴계와 율곡 수답시 재해석

이장우 ( Jang Wu Lee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43-68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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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문집에서는 율곡에게 지어 주었다는 시가 8수나 전하고 있지만, 통행본 율곡 문집에서는 퇴계에게 보낸 시가 4수밖에 전하지 않고 있다. 관례로 보아서 선배학자가 지어준 시를 보고서 화답하는 시를 짓거나 말거나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퇴계와 관련하여 지었다는 율곡의 시 4수조차도 그 문집 본문과, 그 문집의 부록의 일부인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뜻을 지닌 <쇄언(□言)>에 분산하여 실을 정도로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그런대 그 <쇄언>의 내용조차도, 율곡이 23세 때 58세로 도산에 은거하고 있는 퇴계를 방문하여 비 때문에 3일간이나 머물고 간 것으로 퇴계 쪽의 여러 기록에는 모두 일치하게 적고 있지만, 여기서는 겨우 “2일간”만 머물고 갔다고 적고 있다든가, 나이 많은 퇴계 쪽에서 먼저 우호를 표시하는 편지와 시를 보내준 것을 보고서, 율곡이 말지 못하여 인사치례로 답하여 쓴 것으로 적는 등, 상식적으로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노론에 속하는 통행본 율곡 문집 편찬자들이 될 수 있으면 율곡이 퇴계와 관계가 많았고, 또 퇴계를 존경하였다는 것을 기피함으로서, 퇴계학단에서 이야기하는 상호 사승(師承)관계를 부정하려는 저의의 안타까운 표현일 뿐이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의 생애와 후대의 평가: 수양명월(首陽明月) 율리청풍(栗里淸風)

윤호진 ( Ho Jin Yun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69-94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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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은 두문동(杜門洞) 72현(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고려에 벼슬을 하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덕곡에 물러나 은거하였다. 그는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 절조를 지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기도 하였으며, 벼슬하는 여가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게 나아가 성리학을 공부하기도 하였으나, 고려가 조선에 의해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조선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인 함양의 덕곡(德谷)으로 내려가 그곳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 은거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덕곡에서 금오산(金烏山)에 물러나 살았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교류하는 한편 시를 지어 수창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지은 시가 모두 7수가 전하지만, 이 가운데에는 덕곡의 작품이 아닌 것이 있으며, 덕곡의 작품 가운에도 온전한 작품 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도 있다. 이처럼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도 한 작품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여기에는 그의 성정이 드러나 있으며, 사상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행적과 남겨진 작품을 토대로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고려 왕실에 대한 절조를 굳게 지켰던 일을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망시키자 수양산에 들어가 살았던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비기고, 또 잘나가던 벼슬을 초개처럼 내던지고 고향에 가서 은거하였던 일을 벼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고향 율리(栗里)에 은거하였던 도연명(陶淵明)에 비겼다. 그래서 성종의 명에 의해 제문을 지었다는 유호인은 그 글에서 덕곡을 “수양명월(首陽明月) 율리청풍(栗里淸風)”이라고 극히 칭송하였던 것이다.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소장 묄렌도르프 방각본소설의 자료적 가치와 의의

성아사 ( A Sa Sung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95-119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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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는 청나라 해관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고, 당대 실권자였던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오게 된 외교고문 겸 학자이다. 그는 19세기말 조선의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하며 숱한 기록과 수집품을 남겼다. 그의 장서와 수집품들은 현재 중국, 러시아, 독일 등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으나 그 중 러시아 동방학연구소는 현재 유일하게 묄렌도르프가 수집한 방각본소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또한 19세기 말 조선에서 수집된 방각본소설이 수십여 종이나 소장되어 있어서, 해외 최대 컬렉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초기 방각본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애스턴(Aston) 장서 외에도 새롭게 알려진 묄렌도르프(Mollendorff) 장서가 연구자들의 주목을 끈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허경진교수의 도움으로 2014년 6월 러시아 동방학연구소를 찾을 기회가 있어 이번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기존 연구를 확인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과제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묄렌도르프 장서 방각본소설은 초기 방각본의 형태를 띠고 있는 애스턴 장서 방각본소설과 한국에 많이 남아있는 20세기 초반의 방각본소설의 중간에 위치한 단계로, 이러한 방각본소설이 드물다는 점에서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소장 묄렌도르프 방각본소설은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 국내외 판본과의 면밀한 비교를 통해 그가치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수장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묄렌도르프 소장품 및 장서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따라 조사한다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도 있다.

조선과 명,청의 시가교류(詩歌交流)

이종훈 ( Zongxun Li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121-141 ( 총 21 pages)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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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이후 정주이학(程朱理學)을 치국의 이론 체계로 하고 명나라와 비교적 안정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수립하여, 두 나라가 통치이념, 윤리도덕적 가치, 문학형식에서 한층 근접하게 하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두 나라사절단의 상호 방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절단의 대다수는 문학소양이 높은 문인 이었기에, 그들 사이의 외교적인 예의(禮儀), 사무적인 소통, 개인 정감은 시부(詩賦)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시편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조에서 편찬한 _황화집_은 조선의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명나라의 시적 교류의 증거이기도 하다. 두 나라 사절단에서 이러한 특별한 외교방식 취하였기에, 학계에서는 “시부외교”라고 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선은 점차적으로 후금, 청초(淸初)문화에 대한 멸시를 극복하였는데, 특히 북학파의 형성과 더불어 여러 면에서 청나라와의 교유를 증진하였다. 이로 인해 조청 양국의 시적 교류는 더욱 활성화되고 심화되었다. 청나라 ‘강건성세(康乾盛世)’ 시기 시가를 포함한 중국의 여러 문학형식은 또 한 번 조선의 학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고, 조선 문인들이 당송팔대가를 추앙하는 새로운 고조(高潮)를 촉발시켰다.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온당하면서도 느슨했기에, 조청문인들의 시적 교류는 다양화의 발전양상을 보였다. 특히 조선의 시가가 각종 경로를 통해 대량으로 중국에 소개되었으며, 일정한 정도에서 중국 문단에 영향을 미쳤고, 역사적 의의가 심원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선과 명ㆍ청 문인들의 교류는 예의상의 간단한 접촉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우정, 감성 등 여러 방면의 교류였다. 동시에 두 나라는 다양한 시문집과 문학 작품의 편찬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고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조선의 일반 문인의 시가작품 역시 청나라에서 다량 유통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중국에 사행을 다녀왔던, 김상헌,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박지원 등 조선 일류 학자들은 자신의 연행일기와 연행록, 시문집에 다량의 시가(詩歌) 작품을 남김으로써 당대 내지는 그 후의 중한(中韓) 시가교류에 걸출한 공헌을 하였다.

『여사서(女四書)』의 판본과 한국 언해본의 특징

최묘시 ( Miaoshi Cui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144-172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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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서(女四書) 』는 명말청초의 유신(儒臣) 왕상(王相)이 여성의 덕행교육에 대한 4권의 책들을 취합하여 전주(箋注)한 후에 판각한 여성교육용 책이다. 『여사서』 중의 4권 책들은 각각 후한(後漢) 시기 반소(班昭)가 지은 『여계(女誡)』, 당나라 송약소(宋若昭)가 지은 『여론어(女論語)』, 명나라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가 지은 『내훈(內訓)』, 명나라 왕상의 어머니 유씨(劉氏)가 지은 『여범첩록(女范捷錄)』이다. 유가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았던 조선왕조는 여성교육을 어느 때보다 중요시하고 철저히 전개해 나갔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유입한 『여사서『를 무척 중요시하며 1736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언해를 하고 간행되었다. 본고는 『여사서』가 중국과 한국에서 유통되었던 다양한 판본과 한국의 『여사서언행』의 형식과 언해 특징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연구를 통해서 『여사서』가 중국과 한국에 유행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존하는 중국의 『여사서』 판본들 중에 서(序)와 발(跋)의 전후 순서를 제외하고는 네 책 편찬순서, 서와 발의 내용, 본문 부분의 내용은 똑같다. 현존하는 한국의 『여사서』 판본들은 언해본과 한문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한문본은 중국의 판본이라는 가능성이 더 크고 두가지 언행본은 언해된 한국어로 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판본의 형식과 내용은 중국에 현존하는 판본들과 같다. 그리고 두 가지 언행본은 『여사서』중의 원문만을 언해하였는데 왕상의 주석을 더 이상 해석하지 않았다. 『여사서』가 한국에 유입된 후에 모든 백성들에게 잘 받아들이게 하고 잘 전파하기 위해 왕상의 복잡한 주석과 의리(義理)적인 해석을 다 생략하였고 제거하였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한국 화도음주시(和陶飮酒詩) 국화 이미지 연구

김진 ( Zhen Jin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174-191 ( 총 18 pages)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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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에서 국화 이미지는 굴원(屈原)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는 도연명(陶淵明)이 국화를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각인되었고 지대한 영향을미쳤다. 도연명이 국화에 부여한 은일적 상징은 한국 조선시대 한시나 시조에 많이 인용되었다. 특히 화도시(和陶詩)를 창작한 조선시대 문인들은 도연명을 몹시 흠모했고 그들의 시에 나타난 국화 이미지는 거의 모두 도연명과 깊은 연관이 있을뿐더러 도연명의 시에 차운할 때도 여러 차례 국화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본고는 한국고전번역원 DB와 한국문집총간 영인본에서 수집한 437수의 화 도음주시(和陶飮酒詩)를 토대로 화도음주시의 국화 이미지를 고찰했다. 국화를 꺾는 이미지를 통해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소망하는 모습을 드러냈고 술잔에 국화를 띄어 마시는 이미지를 통해 번뇌를 잊고 속세를 초월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교산 허균의 논(論)의 교육적 가치 연구

이민지 ( Min Ji Lee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193-218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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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교산 허균의 산문 중 논(論)을 분석하여 그 문학 교육적 가치를 탐색해 보고자 했다. 교산은 논이라는 글의 장르적 특성을 잘 활용하여 조선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위정자 특히 왕으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지배 계급을 향한 경고의 행간을 통해 백성들에게 ‘모순된 현실에 저항하고, 부당한 압력에 맞서서 대응하는 호민(豪民)이 되라’고 추동(推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교산은 자신의 생각을 논에 고스란히 담아내며 백성을 다스림이 대상이 아니라 나라의 근본으로 여겨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기존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이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사유 방식과 이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교산의 글쓰기 방식은 오늘날 문학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유재론(遺才論)>, <호민론(豪民論)> <관론(官論)> 등에서 보여준 그의 사고 범위와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글쓰기 방식은 대단히 논리적이다. 또한 전통적 사고유형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견과 지각(知覺)하여 쓴 교산의 논은 꽤 창의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교산의 논(論)을 통해서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성, 논리성을 탐색하며 그 교육적 가치를 연구하였다.

후기 동성파(桐城派) 고문(古文) 연구

샤오샤오양 ( Xiaoyang Xiao )
연민학회|연민학지  23권 0호, 2015 pp. 221-240 ( 총 20 pages)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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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동성파(桐城派) 작가 가운데 요영박(姚永樸)과 요영개(姚永槪)의 문장은 동성파의 법도를 따라 고아(古雅)하면서도 시의(詩意)를 함축하고 있어, 마기창(馬其昶)과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통주(通州)의 범당세(範當世)의 글은 중국과 해외의 일을 탐구하여 더욱 통속의 풍격이 있고 경세(經世)의 글에 가깝다. 오개생(吳開生)의 작품은 신학(新學)을 포용하고 있어 정미한 가운데 청신(淸新)함을 보인다. 마기창의 고아함부터 요영박과 요영개의 시의(詩意), 범당세의 통속(通俗), 오개생의 청신(淸新)함까지 동성파의 문장은 극에 달하여, 심오하고 고결한 고문(古文)으로부터 청신하고 활달한 백화(白話) 산문(散文)으로 차츰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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