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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bang Korean Classics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6-668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0권 0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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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韓國散文文學에 대한 관심 속에서 韓國漢文學의 미학적 접근의 一環으로 작성된 것으로, 무신란 이전까지를 전기, 무신란을 전후한 시기를 중기, 무신란 이후 고려의 멸망까지를 후기로 나누어 고려 산문의 美意識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고려 전기는 羅末의 문풍을 그대로 이어받다가, 광종의 科擧制度, 성종의 崇文政策, 예종과 인종 등 好文主 등의 요인으로 내용보다는 꾸밈에 치중하여 화려함을 보여주는 纖麗美가 뛰어났다. 엄격한 4?6의 字數와 對偶의 구사, 平仄의 강구, 비현실적 이야기 등으로 이루어진 政敎的?儀禮的인 글에서 綺麗美를 발견할 수 있으며, 記文 중에는 李預의 「三角山重修僧伽굴記」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전기 纖麗가 지나쳐 唯美的 形式主義로 치닫자, 騈儷文에 대한 폐단을 비판하고 古文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고려 전기 문벌귀족의 몰락과 고려 중기 新進士人의 등장으로 무신란 전후에 이르면 이전에 일기 시작한 古文에 대한 바람이 거세지고, 古文家들도 散文史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려 중기는 화려한 纖麗美가 아니라 꾸밈없이 작자의 생각을 평이하게 전달하는 質朴美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林椿?李奎報 등의 작가에게서 이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고려 후기 新興士大夫은 지방 중소 지주로서 그리고 일부 신진 관료로서 자기네의 정치적?사회적 세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대장원주이며 중앙 권력층인 世臣巨室들과의 이해의 대립에서 승리의 방향을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 性理學을 강력히 내세웠다. 性理에 대한 공부가 깊어지면서 精緻한 논리를 전개하다 보니, 고려 후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내면적으로 미세한 것을 분석하여 치밀하게 논의를 전개하는 精密한 글쓰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李穡을 비롯해 權近, 李崇仁 등의 글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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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시사에서는 죽음을 소재로 한 시들이 계속해서 창작되었는데, 이를 보통 ``挽詩``라 일컫는다. 죽은 자를 기리는 인간의 행위는 어찌보면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만시는 동양과 서양, 옛날과 지금 모두에서 끊임없이 작품이 만들어졌다.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을 소재로 한 만시는 사랑을 다룬 염정시와 더불어 가장 보편성을 띠고 있는 한시문학 영역이라 할 수 있겠다. 만시는 ``悼亡詩``, ``悼朋詩``, ``哭子詩``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는 각각 아내, 벗, 자식의 죽음을 다룬 시를 일컫는 말이다. 사실 만시의 창작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위진남북조시대 문인 潘岳이 자기의 부인이 죽자 이를 슬퍼하며 「悼亡」시 세 수를 지었다. 이후로 唐나라의 元진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에 의해 ``도망시``가 지어지게 되었다. 도망시 외에 친구의 죽음을 노래한 ``도붕시`` 계열은 가장 많이 창작된 장르로 唐나라 白居易와 杜甫가 유명하다. 자식의 죽음을 다룬 ``哭子詩``는 宋나라 劉克莊, 元나라 王沂?宋경을 비롯하여 明?淸代의 많은 시인들에 의해 계속해서 지어졌다. 특히 명나라의 저명한 문인 李東陽은 그의 문집 『회麓堂集』의 권98을 「哭子錄」이라 하여 여러 문인들과 차운한 시들을 실어놓을 정도로 곡자시의 창작에 애정을 쏟았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만시 창작의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전해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는 김부식의 만시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 시인들 중 만시를 남긴 작가로는 김부식을 필두로 김극기, 최해, 이규보, 임춘, 최자, 안축, 이제현, 이곡, 이색, 이집,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등을 꼽을 수 있다. 문학사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치고 만시를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시의 창작은 묘지명과 더불어 글 잘하는 문인이 갖춰야 할 필수 요소처럼 되어 버렸다. 본고에서는 특히 목은 이색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후기 만시의 창작 경향과 미적 특질을 고찰해 보았다. 목은은 고려시대 시인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만시를 창작했으며 그 대상 인물과 내용 역시 다채로워 만시가 갖는 문학성을 규명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시인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목은의 만시는 대략 76수 정도이다. 이만한 양은 조선조 문인들의 문집에서도 쉽게 찾기 힘들 정도로 상당한 양이다. 또한 단순히 작품의 분량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인물들 역시 왕, 공주, 권신, 사대부, 귀부인에서부터 승려, 집에서 일하는 여종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이것은 목은의 교유관계가 폭넓었다는 것을 방증할 뿐만 아니라, 목은이라는 인물이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컸던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시의 미학은 애절함과 비통함에 있다. 잘 된 만시일수록 그 슬픔은 커서 망자를 전혀 모르는 독자일지라도 어느새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러한 ``悲壯美`` 또는 ``悲慨美``야말로 만시가 지어지고 또 독자들이 그것을 읽게 되는 가장 중요한 미적 특질이다. 또한 만시를 지음에 왕이나 권신의 죽음을 기리는 시와 여종의 죽음을 기리는 시에 시인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생전의 신분이나 업적은 분명 차이가 있었겠지만, 망자에 대한 시인의 안타깝고 애절한 감정은 동일하다. 사람은 귀천이 있었을지 몰라도 그를 기리는 시에는 귀천이 없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특히 만시가 갖는 매력이자 큰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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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5세기 조선의 한문학에 나타난 미학을 조명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의 악장혁신운동과 그 수성의 미학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다. 악장은 모든 행사에 공연되는 가사(詩)?음악(樂)?무용(舞)의 종합예술로서 15세기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백미이다. 세조는 조선 건국과 함께 꾸준히 진행되어온 선대 제왕들과 아버지 세종임금이 제작한 악장들이 실제 행사에 쓰이지 못하자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악장을 개혁하는데 공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의 악장혁신운동은 황제국을 지향하고 있으며 민족의 정통성과 민족의 진취적 기상이 들어있고, 조선의 자긍심이 들어있다. 그 악장혁신운동의 골격은 樂舞의 제도 정비와 樂譜 및 舞譜의 개혁 및 악기의 구비와 노래가사의 개혁 등이다. 세조의 악장혁신운동은 조선 수성기의 국가적 위상을 정립하였으며 민족의 주체성과 조선정신을 태동시킨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 악장혁신운동의 바탕에는 그의 수성의 미학 이념인 樂道一致의 신유학적 악장관이 깔려있었다. 세조의 악장혁신운동과 守成의 업적들은 대부분 조선 건국의 국시인 유교적 프로파간다로서 호건하며 우아하고 전아한 풍격의 미학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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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정극인의 江湖詩를 대상으로 거기에서 표출된 ``閑情``의 미의식을 구명하고, 미의식의 의의와 한계 등을 밝혔다. 정극인은 37세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 불교를 배척한 상소문을 올린 일 때문에 妻鄕인 泰仁에서 지내게 된다. 1차 강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의 강호 생활은 타의적이어서 현실에 그리 만족할 수가 없었는데, 시문에서 그러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속적인 出仕의 의지를 보여 강호에 머물고는 있지만, 자연과 가까울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정극인의 1차 강호 생활은 강호에 그냥 머무른 것이지 끝내 ``한가로운 정을 편[閑情]``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정극인은 70세가 되던 해에 벼슬에서 물러난다. 2차 강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의 특징으로는 1차 때와 대비해보면, 유달리 유유자적 한가롭게 노닐며 근심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1차 때의 강호 생활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2차 때는 자의적인 측면이 강해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상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생이 끝나는 얼마 전까지 사회 지향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때문에 2차 강호 생활에서 읊은 시문도 자연과 어울리려는 한정의 미를 표출했지만, 사회에 대한 지향을 떨치지 못한 二律背反的인 모습을 보여줌을 알 수 있었다. 정극인의 강호 시는 16세기 문인학자들이 남긴 山水詩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았다. 그렇지만, 16세기 문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吟詠性情의 단계까지는 가지 못하고 한가로운 정을 편 ``한정``의 수준에 그쳤으며, 아직은 性理學을 내면화시켜 시문을 창작할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한계로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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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逸은 예로부터 學德과 재능을 지녀 朝官이 될 자질을 갖추었으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자를 일컫는다. 본고에서 다루는 16세기 명종연간 유일은 사화기를 거치면서 지방에 은거하였다가 유일천거에 의해 등용되는 인물로, 각지에서 출사하지 않고 심성수양과 학문연구에 진력하여 백성의 신망이 두텁던 당대 석학들이었다. 명종연간 유일은 다양한 성향을 보이는 16세기 문인 가운데 독특한 문학층을 이룬 부류이다. 이들의 성향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은거했더라도 현실에의 관심을 견지한 ``현실참여형``, 孔子?顔淵의 安貧樂道觀에 의거해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과의 융합을 추구한 ``은일자적형``, 마지막으로 자연 속에서 학문에 침잠하여 士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학문탐구에 진력한 ``지적탐구형``이 바로 그것이다. 조식?임훈?김범은 현실참여형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자연 속에서 은자적 삶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에의 관심을 거두지 않는 士의 처세로 일관하였다. 그들의 시선은 인간에게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은거해 있으면서도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외면할 수 없었고, 때문에 時弊에 대해 끊임없는 시정을 요구하고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현실참여 의식은 그들의 문학작품 속에서 ``자연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미의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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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풍의 한시가 높게 평가 받은 것은 情景이 交融된 형상 속에 흥취가 내재되어 그 형식과 미감이 잘 통합되어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경물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경물을 통해 시인의 정감을 투영하고 이를 통해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킨다. 이런 의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함축된 시어를 통해 작자의 내적 정서를 밀도 있게 시적 감흥으로 표현해 내어야 한다. 한시에서 형상화하는 방법은 정감을 설명하지 않고 대신 경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 재구성된 형상 속에서 정감을 연상될 수 있게 되면, 독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공감하게 된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감흥의 소리를 보여주는 방법이며 끝나지 않는 여운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한시는 형식적 단순화를 지향하면서 내면은 다양화를 시도한다. 적은 언어로 많은 내용을 담고자 하기에 생략이 존재하고 그 생략된 여백을 상상해내야 하며 그 여백이 바로 여운을 준다. 이런 경향의 시가 당시이며 특히 절구의 형상화 방법이다. 소리를 형상화하여 시 본연의 서정성을 확보하려는 방법으로 호남시인들은 율시보다는 절구를 선호하였고, 특히 七言絶句 樂府詩를 많이 창작하였다. 16세기 호남시인들은 唐風의 시를 배워 의경이 맑고 풍격이 담박하다. 그들의 시는 맑고 담담하면서 시원스런 미감이 두드러진다. 그들 시의 소리가 유려하여 탁하거나 막히지 않으며, 익숙한 제재와 표현, 완곡한 어법과 짜임새 있는 句法을 통해 어조가 급박하지 않고 자연스런 의경을 형성하여 담박한 맛이 느껴진다. 그들의 시는 한 글자 한 글자 모두가 명백하게 알기 쉬운 글자들로 시 구절을 이루고 있고, 억지로 시어를 짜 맞추지 않은 듯 표현이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그 형상화된 화면 속에는 시인의 興趣가 녹아들어 있어, 경물과 정감이 일체가 되어 조화된 意境을 이루었다. 그 속에 흥취를 내재하고 있어 무한한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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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는 다방면에 걸쳐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한문학에서도 많은 변화가 드러났는데, 이 당시 문단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明나라 復古思潮의 도입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입된 복고사조는 조선의 문단에 자극을 주었고 이후 散文이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본고는 이 복고사조가 도입된 이후 조선의 한문학 특히 산문의 미학적 측면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그 구체적인 면모를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본고에서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장르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비지류 문장이며, 대상 작가로는 尹根壽?李恒福?柳成龍?柳根 네 사람을 선별하였다. 비지류 문장은 예전부터 古文運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장르로 인식되어 이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조선 한문학의 여러 장르들 중에서도 16세기 전후 양적?질적인 면에서 가장 큰 변화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앞서 언급한 네 문인들은 여타 문인들에게 經世文章이라는 공통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이와 동시에 당시 유입된 복고사조에 관해서는 각기 다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이들 네 작가의 비지류 문장을 살펴보고 그 특징적인 면모들을 분석해 보았다.

기획 : 한국한자학(韓國漢字學)의 미학적(美學的) 접근(接近)(3) ; 18세기 노론계 문인의 미의식

윤지훈 ( Ji Hun Yoon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50권 0호, 2012 pp. 239-262 ( 총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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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한문학의 미학적 접근"이란 기획 주제의 일환으로 18세기 노론계 문인의 미의식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검토 결과 18세기 노론계 문인들은 문예의식의 성장이란 당시 시대사적 조류에 발맞춰 상당한 수준의 문예의식을 선보였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천기론에 바탕을 둔 자연스러움의 미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취``의 구현이라는 문예물에 내재해 있던 본원적 가치에 대해 재인식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예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물적 토대를 결합시켜서 고동서화와 같은 문예물을 惑愛하고 문학이 주는 본래의 심미적 쾌감을 탐닉하였으며, 수려한 산수자연의 경관이나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문학에 담아내려고 했던 경향 등과 같은 풍부한 성과를 제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아 노론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의리명분을 문명의식과 결합시켜 ``문화``를 바탕으로 한 문명의식의 발현, 즉 盡善의 실현을 통한 盡美의 추구하는 미학적 가치를 구현하려는 경향도 보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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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散文의 美學的 特徵을 學術과 文藝를 中心으로 살펴보았다. 당시 學術과 文藝的 特徵은 漢學의 盛行과 ``實事求是``의 談論, 藏書家의 出現과 같은 讀書 熱風, 小說에 해당하는 ``三韓義烈女傳``의 擁護와 志向, 나아가 當代 學術과 文藝的 趣向을 대변하는 다양한 筆記類 著述이다. 19세기 訓고學과 考證學으로 대변되는 漢學의 盛行은 학계에서 漢宋 論爭으로 비화되고 漢宋折衷論으로 그 접점을 찾아간다. 이후, 李正履의 ``實事求是齋``와 金正喜의 ``實事求是說``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實事求是``의 談論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實用實踐을 중시하는 洪奭周와 洪吉周의 ``實事求是``이고, 다른 하나는 金正喜가 淸朝와 朝鮮 학계의 학술적 성과를 반영한 漢宋折衷의 ``實事求是``이다. 또한 博學의 추구와 맞물려 방대한 서적의 유입과 유통은 독서 열풍과 다변화를 이끈다. 따라서 다양한 중국 서적의 耽讀을 계기로 각종 독서목록과 독서록, 藏書家의 出現으로 이어진다. 金紹行의 ``三韓義烈女傳``은 변화하는 文藝的 土壤에서 탄생하며, 金邁淳과 洪吉周는 각각의 논리로 소설의 창작과 독서를 옹호하고 변론하는데 앞장선다. 더욱이 19세기 學術과 文藝的 趣向을 대변하는 다양한 筆記類는 그 특징과 양상도 제각각이다. 金邁淳의 『闕餘散筆』은 體用論에 입각한 통합적 思惟와 文道合一을 통한 文章論의 追求를 주장하고, 洪奭周의 『鶴岡散筆』은 주로 經學 방면에서 宋學의 입장에서 漢學과 考證學을 비판적으로 인식?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이와는 달리, 洪吉周의 ``睡餘三筆``은 독서와 문장에 대한 독특하고 참신한 기술이 주목되며, 洪翰周의 『智水拈筆』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筆記類 著述로 다양한 지식과 새로운 정보를 분류하고 배치한다. 따라서 19세기 散文의 美學的 特徵은 이러한 學術과 文藝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다. 더욱이 當代 學術과 文化를 선점하고 淸朝의 學術과 文藝 動向에 민감하게 대응하던 京華世族과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19세기 學術과 文藝的 特徵을 규명하는 작업은 당시 京華世族의 學術과 文藝를 정치하게 살피고, 나아가 19세기 散文의 美學的 特徵을 이해하는 초석으로 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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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청과 국교를 맺은 이후 지속적인 사신의 왕래를 통해 수많은 연행록이 쏟아져 나와 지금까지 알려진 연행록의 종류만도 377편에 이르고, 그 형식도 시, 일기, 일기와 산문의 결합 등 매우 자유롭다. 본고는 이러한 다양한 연행록 속에 담겨진 다양한 내용을 관통하는 심미의식을 두려움, 설레임, 그리고 그리움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미의식은 특정한 무엇으로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 날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설레임과 떨림, 그리고 약간의 알 수 없는 두려움 등일 것이다. 또한 집을 떠나 즐거운 것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 음식에 대한 그리움 등의 감정도 아울러 갖게 될 것이다. 연행 역시 이국 여행의 하나로 본다면 그 여행의 기록물에 이와 같은 복잡한 감정이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행록에서 이 두려움의 정서는 주로 예정에 없던 돌발 상황 및 미지의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으며, 설레임의 감정은 무엇인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거나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리움의 감정은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된 입장에서 이국에서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세계에서 만난 벗과 이별한 후의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연행록에는 이러한 복잡한 마음이 종합적으로 표출되어 있으며 연행록의 저변에 흐르는 심미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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