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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기타제어문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1452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3권 0호 (2012)

조선 전기 지성사의 관점에서 본 점필재(점畢齋)와 그 문인(門人)들의 관계

김남이 ( Nam Yi Kim )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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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畢齋 金宗直(1431:세종13∼1492:성종23)과 그의 문인들은 조선전기 ``士林``의 시대를 연 지성인들이다. 다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이들에 대한 연구는 ``사림파``라는 특정한 정치적 집단을 전제해 놓고, 그 ``집단의 像``을 그에 선험적으로 포함된 개인에게서 추출하고, 이렇게 추출된 상을 다시 ``사림파``라는 집단에 적용하는 일종의 순환론적인 방식을 반복해온 점이 없지 않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어 점필재와 師友의 오랜 교분을 나눈 이들이, 실제로 점필재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기대했으며, 그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교감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조선전기 지성사의 맥락에서 이를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점필재와 그 ``門人``들의 관계의 실제와 의미를 점필재의 ``문인``에 관한 세 가지 기록을 중심으로 살폈다. 제자인 南孝溫의 『師友名行錄』과 金馹孫의 <供招>(1498), 그리고 후대의 李獻慶(校)의 <점畢齋門人錄>(1789)이 그것이다. 점필재의 ``문도``는 제자뿐만 벗과 선배 및 동료 관인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이어 지역에서의 학문 연찬과 한양에서의 문화 사업으로 나누어 그들이 함께한 활동을 살폈다. 젊은 시절 점필재에게 자발적으로 찾아온 제자 그룹은 학문 연찬과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직 생활에서 만난 인물들 또한 학문적 영향 관계에 인간적인 우의가 더해졌다. 특히 이들은 『杜詩諺解』나 『東國輿地勝覽』 編(改)纂 성종대의 중요한 문화 작업에 전격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점필재와 그 문도들은 자발적인 결집과 만남을 통해 재야에서 그룹 또는 개인으로의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스승 점필재를 넘어서는 어떤 비판적 의식과 이념을 갖추어가며, 16세기 이후에 구현될 확고한 사림적 의식과 실천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허난설헌과 이언진의 한시비교

서수금 ( Soo Keum Suh )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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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허난설헌과 이언진의 <궁사>와 <유선사>를 중심으로 두 작가의 공간 인식을 비교한 것이다. <궁사>에 묘사된 궁중은 현실공간을, <유선사>에 묘사된 신선세계는 초월공간을 상징한다. 허난설헌은 궁궐을 규방의 확대공간으로 보았다. 혼인한 여성에게 규방은 개인의 자유나 욕망이 거세된 상황에서, 가문이나 남편, 그리고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의무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당대 여느 여성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란 시인은 이 같은 현실이 심한 억압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시인은 자아를 찾아 규방 넘어, 궁중 여성들의 공간을 지향한다. 반면 이언진은 榮華와 疏外가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으로서의 궁중을 주목했다.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아 최고의 영화를 누렸으나, 아름다움이 사라짐에 따라 임금의 은총도 멀어진 궁녀. 이 소외된 궁녀가 머무는 곳은 궁녀의 극적인 삶이 상존하는 공간이다. 이언진이 다양한 품계의 궁녀 중에서 유독 극적인 삶을 경험한 궁녀에 주목한 이유는 자신이 역관으로서 일본사행에서 받은 환대와 귀국 후 국내에서 받은 차별적인 경험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허난설헌은 신선세계를 여성을 주체로 한 이상적인 공간으로 설정했다. 그곳에서 조선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과부의 재혼을 실현시켰고, 여신선 항아를 주체적인 여성으로 재창조하였다. 또한 선계의 패물 이미지를 통해 시인의 존재를 부각시키거나 적극적으로 자아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이언진은 신선세계를 꿈이 실현된 공간으로 설정하였다. 이 공간을 매개로 시인의 이상적인 군주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신선 항아를 선계에서 소외된 여신으로 인식하고 자신과 일체화시켰다. 이언진은 유선의 종결부에서 허난설헌과 달리 꿈에서 깨어나는 대신 자신이 품고 있던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박태보(朴泰輔) 문학(文學)에 나타난 현실(現實) 대응(對應) 양상(樣相)

주영아 ( Young Ah Joo )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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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 후반 신진지식인으로 유학의 실천적 삶에 궁진했던 박태보의 문학과 그의 문학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 대응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그의 일생 중 자신감과 패기가 가장 충만했던 시기인 1675년 충청도 결성과 부여의 명승지를 유람한 시기의 작품과 정치적으로 첫 번째 좌절을 맞보았던 시기인 1677년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갔던 시기의 작품을 중심으로 문학작품으로 표출되는 현실과 유람과 객지에서의 所懷, 역사해석의 이해를 탐색하였다. 박태보는 17세기 붕당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의 유학자로 인현왕후 폐출 사건을 반대하기 위한 상소를 했다가 극한의 고문을 받고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 노량진에서 졸한 사람이다. 비록 36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정치적 소신은 매우 확고하였고, 정치적 행동 또한 주저함이 없었기에 당대 붕당의 축에 있던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서 주요 타깃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정치적 소신과 분리되어 나타난다. 그는 충청도 결성과 부여의 명승지를 유람했던 시기의 작품에서는 자연에 대한 흥취에 충만한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고, 유배시에서는 유배객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없이 신음을 토해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문학에 자신의 즐거움과 고통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으로 드러났고, 정치와 군사, 사회와 역사에 대한 견해의 피력에서는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으로 나타났다. 본고에서 탐색한 유람시와 유배시에서는 박태보가 인간으로서 품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 감정의 표현이 분출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충청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바라본 역사에 대해서는 백제의 멸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노출시켰고, 군사적 요충지로서 築城과 백성의 관계를 좀더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충남 서천군 설화의 내용과 그 의미

조상우 ( Sang Woo Jo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3권 0호, 2012 pp. 103-124 ( 총 22 pages)
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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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서천군 설화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내용면에서는 서천군 설화를 풍수설화와 불교설화로 유형화하였다. 서천군 마서면에는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풍수설화와 부처의 영험이 전 설화의 기저에 나타나고 있고 중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설화의 내용도 그리 길지 않은 단편이다. 서천은 바닷가이고 중국과 교류가 있으며 모시를 생산한 곳이고 풍유하게 살았던 덕택으로 후손에 대한 복덕을 기리고 부처에게 공덕을 비는 설화가 많아 보인다. 본고의 풍수설화에서는 계란을 이용해 명당을 빼앗은 한산 이씨의 시조 설화와 <월명산에 얽힌 설화>가 있다. 특히 <월명산에 얽힌 설화>에서는 풍수설화와 함께 <박씨전>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다. 불교설화에서는 <밖미륵골의 설화>와 <제일가는 사위를 얻은 설화>가 있다. <밖미륵골의 설화>는 한 여인의 부스럼으로 인하여 동네의 부정을 막기 위한 이야기로 미륵을 도구 삼아 부처의 영험함을 전승하고 있다. <제일가는 사위를 얻은 설화>도 부처의 영험함을 나타내는 설화다. 또, 중의 부정적인 모습과 부처로 현신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교의 영험과 맹목적 맹신을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다.

『적성의전』에 나타난 청각적인 소재의 역할과 의미

박성호 ( Sung Ho Park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3권 0호, 2012 pp. 125-152 ( 총 28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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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의전』에는 피리소리, 거문고소리, 기러기, 닭, 삽입시 등 다양한 청각적인 소재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청각적인 소재들은 작품 안에서 인물 간의 인연을 맺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악기소리나 삽입시 등은 인물의 非凡함을 드러내는 소재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런 청각적인 소재들이 『적성의전』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근원설화인 「善事太子入海品」과의 비교를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청각적인 소재의 빈번한 활용이 『적성의전』과 「선사태자입해품」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극을 메우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였음을 밝혔다. 여기서 시간적 간극이란 고대인도의 설화와 조선후기의 한글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의미한다. 고대설화와 한글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틈을 메우기 위해 『적성의전』의 작가는 작품의 인과성을 좀 더 치밀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적성의전』이 「선사태자입해품」에 비해 좀 더 치밀한 구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선행연구에서도 이미 밝힌 바이다. 본고에서는 청각적인 소재들이 등장인물들 간의 인연 맺기 방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서사적 인과성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작가는 불교가 성행했던 인도와 억불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던 조선 사이의 공간적 간극 역시 매울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선사태자입해품」에 나타난 불교적 색채를 감소시키고 『적성의전』에 유교적 색채를 덧씌우기 위해 초현실적인 소재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작품 속에서 仙官이나 天地神明과 같은 초현실적인 소재가 ‘孝’라는 유교적 가치를 보전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중국 우주개벽신화 속 혼돈과 빅뱅이론의 유사성

김홍겸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3권 0호, 2012 pp. 153-183 ( 총 31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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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는 문자가 생겨나 역사가 기록되기 오래전부터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아주 오래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신화를 통해 세계의 문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의 근간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신화에 내재된 이야기들이 표면적으로는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화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허황된’ 이야기들의 나열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아직까지 신화에 담겨져 있는 내용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나 신화학과 과학의 학제간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성된 편견과 오해이다. 우주만물은 혼돈과 같은 카오스의 상태를 지나 빅뱅의 순간을 거쳐 우주 대폭발과 같은 순간적 충격에 의해서 반고가 알을 깨고 나오면서 음과 양의 기운이 외부로 방출된 것처럼, 우주가 팽창을 하게 된다. 빅뱅에서 결국 어느 시점, 반고신화에서 말하는 1만8천 년 후에는 지구와 같은 별이 생성되고 천지만물이 생겨나며 이후 인류가 출현하게 된다. 즉, 신화의 내용은 황당무계한 허구의 사실만을 나열한 것은 아니라 인류가 당시의 지식수준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자연 현상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지혜의 총체이다. 신화는 일상적인 문학작품이 아니라 한 민족 정신문화의 유아기에서 아동기를 거치며 인간으로써 불가항력적인 환경과 그로 인해 직면해야 했던 운명적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을 정리해 놓은 기록물이다. 따라서 신화를 원시인류가 기본적으로 당시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개별적인 사물과 현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인과관계를 분석하여 만들어낸 해답임을 인지하고, 중국 문헌 속에 나타난 창세와 관련된 ‘혼돈’의 의미와 현대과학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우주의 신비를 살펴보는 노력은, 신화의 창작 원리(상상력 또는 신화사유)를 찾아내고, 나아가 과거 인류가 가지고 있던 지혜를 통해 우리가 찾지 못하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탐구의 단초를 제공받게 될 것이라고 본다.

고대 한국불교와 남도육종의 전개

김천학 ( Cheon Hak Kim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3권 0호, 2012 pp. 185-214 ( 총 30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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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년 백제로부터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일본에 여섯 종파가 성립하는 나라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삼국의 불교는 일본 불교의 거의 모든 측면에 선진 기술, 제도, 사상 등을 전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서는 584년 고구려 혜변(惠便)에게 득도한 젠신니(善信尼)가 최초의 출가승이며, 백제로부터의 도래인 덕제법사(德濟法師)가 최초의 비구이다. 이 후 일본불교에서 점차 종파가 성립되어 6종의 성립을 보게 된다. 삼국의 불교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일본의 어느 종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를 제외하고는 개설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비교적 가장 구체적으로 연구된 부분은 신라불교와 일본 법상종· 일본 화엄종의 관련일 것이다. 법흥사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삼론학이 널리 전파되었음도 밝혀졌다. 일본의 성실종은 삼론종의 부종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삼론종과 성실종이 깊은 관계를 유지한 근원적 이유에 백제·고구려 승려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은 채 논의된다. 계율에 대해서는 백제로부터 전래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완전한 율종은 중국의 감진이 754년 내일하면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3사 7증 제도가 시행되었다는 견해이다. 감진을 율종의 초조로 보려는 견해는 백제와 신라에서의 계율의 흐름과 감진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계율의 흐름을 배제함으로써 일본의 율종을 낙후시키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고대한국불교와 남도육종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미해결 내지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동대사(東大寺)를 중심으로 성립한 6종으로 좁혀서 한국 고대불교와 일본의 남도육종의 관련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재검토하고 헤이안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던 신라 화엄종을 중심으로 남도육종의 전개 양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우선, 삼론종과 성실종의 문제에서는, 삼론종이 고구려, 백제 계통의 삼론종에 속해있으며, 그러한 전통 하에서 삼론종과 성실종이 동거하는 것이 가능함을 밝혔다. 법상종에서는 신라 섭론학의 영향이 농후하며, 원측과 도증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또한 고묘(護命) 이나 신에이(神叡)처럼 신라 유식학의 영향 하에 활동한 일본 유식학자도 거론할 수 있다. 한편, 구사종이 신라 지평(智平)법사에 의해 고취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율종에 관해서는 초기에는 백제, 그리고 감진(鑑眞)이 내일(754년)하여 새로이 율종을 창시하기 전까지는 신라의 계율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화엄종은 신라계 법상학자들과의 관계가 깊다. 그리고 저술에서는 원효의 화엄사상이 신라 화엄을 대표하는 학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등(見登)에 의해 『향상문답(香象問答)』이 전해짐으로써 의상학파의 화엄이 원효와 법장을 잇는 일본 화엄종을 혼동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백제의 유식학자 의영(義榮)은 천태종의 사이쵸(最澄), 가마쿠라 화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견등은 당시 일본 불교의 사정을 통찰한 후 성불에 관한 저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금후 일본 각 종파의 사적 전개, 사상적 동향 등을 염두에 두고 고대한국불교와 의 관련성을 밝혀야 하는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한당(漢唐) 경학사(經學史)에서 본 맹자학(孟子學) 연구(硏究)

조원일 ( Won Il Cho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3권 0호, 2012 pp. 215-237 ( 총 23 pages)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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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철학사에 있어서 한나라 시기부터 당나라 시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학은 경학 위주로 발전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학은 서한 중기 이후 대대로 각 왕조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서 학술부문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학은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잠시 침체되기도 하지만 당시의 통치자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경학을 함부로 폐지하지는 못했었다. 이와 같이 한당시기의 경학 흥기는 유학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나라 시기부터 송대 이전까지의 맹자학의 발전은 경학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에, 경학사의 관점에서 언급 되어져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당나라 중기 이후 맹자학은 유학의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많은 관심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그때까지는 유학의 주류로 편입되지는 못하는 실정이었다. 송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축적되어진 맹자학 관련 연구 성과를 계승하고 그 위에 유학 부흥사조와 경세치용사상의 영향이 더해져 『맹자』와 맹자에 대한 관심이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맹자학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경학의 발전을 주축으로 하여 역대 경학 발전사의 분석을 통하여 송대 이전의 맹자학의 연구 상황에 관하여 먼저 한대에서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언급한 뒤에 다시 수대에서 당대에 이르는 시기로 구분하여 논의를 진행했다.

왕양명의 주륙관 연구

임홍태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3권 0호, 2012 pp. 239-273 ( 총 35 pages)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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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륙논쟁문제는 주자와 육상산 간에 진행된 변론 또는 논쟁 가운데 핵심문제이다. 이 문제는 송명이학을 다루는 학자나 주자와 육상산의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은 모두 다루는 화제이다. 역사적으로 진행된 주륙 간의 논변 및 주륙이동에 관한 토론이나 연구의 대부분은 주자나 육상산을 종주로 하는 학파입장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학술 연구에 있어서 요구되는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원대에서 명초에 거친 주륙화회 사조의 영향으로 왕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주이학과의 동일시 과정이 필요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학술 분위기상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러한 때에 양명은 당시 학자들이 다만 주자 중년의 완성되지 않은 학설만을 따르고 다시는 만년의 정론을 구하지 않음을 보고 주자만년정론을 지어 조이만동설을 제시하게 되니, 이는 양명과 주자의 학설이 다르지 않음을 표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만년정론을 지은 기본 취지이다. 주륙이동은 아호에서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명대에 이르러 가장 먼저 조이만동설을 제시한 학자는 조방이고, 정민정은 이를 이어 도일편을 짓게 되니, 조이만동설이 이에서 완성된다. 왕양명은 정민정의 도일편을 이어 조이만동설을 기반으로 주자만년정론을 편집하기에 이른다. 양명의 주자만년정론은 적지 않은 학자에게 비판을 당하게 되니, 당시 주자만년정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학자로는 나흠순과 진건 등을 들 수 있다.

明末,淸初亡命道士與朝鮮仙脈書

이봉호 ( Bong Ho Lee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3권 0호, 2012 pp. 275-287 ( 총 13 pages)
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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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명나라까지 참여한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결과는 명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나서는 도교와 중국의 황실사이의 밀월관계는 끝이 난다. 청나라 황실은 도교를 중국인의 종교로 인식하고 도교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이다. 당시 도사들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종교적 망명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정황들은 중국측 기록에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록인 『증보해동이적보』와 『청학집』 등에서는 명나라말기, 청나라 초기의 한족 도사들이 한반도로 망명하여, 도교적 술법을 전수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심지어 명나라 황실의 친척인 친왕이자 도사인 인물까지 한반도로 이주한 기록이 등장한다. 또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도를 전수하는 사승관계를 기록한 선맥서들이 대량으로 출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선맥서들은 그 내용이 민족주의적 경향을 띠거나, 한족 도사와 조선의 도사들이 혼재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들에 초점을 맞추면, 임란이후, 명청교체기에 한족 도사들이 조선으로 대거 이주하였고, 이러한 이주를 통해 도교와 도술이 전파되어 다양한 사승관계를 형성하여 선맥서들이 다양한 경향성을 보이게 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한국 도교를 두고서 말해지는 자생설, 전래설, 혼재설에서, 17,8세기의 상황에서 한국 도교는 전래의 도교와 중국 도사들의 유입으로 인한 혼재설의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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