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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가연구검색

Korean Classical Poetry Studies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6-5578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9권 0호 (2015)

17세기 전반 시가사 이해를 위한 예비적 고찰 -17세기 전반 정치, 사회 변동과 시가사(1)-

최재남 ( Jae Nam Choi )
한국시가학회|한국시가연구  39권 0호, 2015 pp. 5-35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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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세기 전반 정치·사회 변동과 관련하여 시가사의 추이를 살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시기 시가사의 추이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17세기 후반 이후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17세기 전반 시가사를 첫째 17세기 이전의 태평시대의 문화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 대한 이해, 둘째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방향, 셋째 변화와 관련한 시가사의 과제 등 세 축으로 살피되 본고에서는 첫째 축에 중점을 두고 진행하며, 둘째와 셋째 축은 별고로 다루고자 한다. 17세기 이전 문화의 지속을 위한 노력과 그 과정을 다시, 감찰계회의 지속과 <상대별곡>의 풍류, 전승 노래의 수습과 속편.대응편의 마련, 중앙 권력 세력의 연회 전통과 그 의미 등으로 나누어 살핀다. <상대별곡>은 사헌부의 위상과 사정(司正)을 맡고 있다는 자부심이 배인 노래로, 사헌부에 근무한 사람들은 상대계(霜臺契), 감찰계(監察契), 총마계(총馬契) 등의 이름으로 계회를 조직하여 공무 이외에도 그들 모임에서 <상대별곡>을 부르면서 집단적 결속을 이어갔다. 그런데 17세기 전반에 서울에 기반을 둔 이들 사대부들은 현실의 변화로 사헌부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에 근무한 경력을 내세우면서 그들의 집단적인 결속을 강화하고 <상대별곡>이 지닌 풍류의 내면을 이으려고 하였다. 이들 중앙 기반의 관리들은 사헌부가 권력의 중추를 차지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상대별곡>의 함의를 포함하여 그들의 집단적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17세기 전반에 전승하는 노래를 ‘번가(飜歌)’, ‘번사(飜辭)’, ‘언가(諺歌)’ 등으로 수습하거나 한역하였는데, 이는 노래의 민멸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일차적이지만 개별 작품의 경우 “사군(思君)”, “사미인(思美人)”, “연군(戀君)” 등의 상황이나 내용과 관련된 맥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님이나 대상에 대한 화자의 내면을 토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앞 시기에 창작된 기존의 작품을 전범으로 인식하고 속편(續篇) 또는 대응편에 해당하는 새로운 작품을 마련한 사실도 주목할 수 있다. 서울 근처에서 부원군이나 부마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서호나 동호를 비롯한 한강 주변에 별서를 마련하여 연회를 즐기는 전통이 16세기 이후 이어졌는데, 정치의 중심에 섰던 대부들도 동참하였다. 그런 가운데 16세기 초반의 상림춘(上林春), 16세기 중엽의 석개(石介) 등의 가기를 보호하고 풍류의 자리를 이어가게 한 후원자의 역할을 주목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에는 칠이(七伊), 옥아(玉娥) 등의 가기가 이러한 자리의 중심을 차지하였고, 김제남이 국구가 된 뒤에 집안에서 가기(歌妓) 등을 동원하여 연회와 잔치를 베풀었던 사례에서 보듯 정치적 변화로 주도층은 바뀌지만 17세기 이후에도 서울의 중요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연회 자리에서 부른 노래의 레퍼토리를 주목할 수 있다. 이상의 세 장에서 검토한 내용은 17세기 전반 시가사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에 긴요한 지남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17세기 후반 이후 시가사의 추이를 살피는 데 참조의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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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영언』에 수록된 주의식과 김유기의 작품에는 현실인식이나 정서의 측면에서 전혀 이질적인 작품들이 존재한다. 본고는 이들의 작품이 현행 삭대엽 한바탕과 유사한 방식으로 창작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패턴은 이들뿐만 아니라 김천택과 김유기의 제자 한유신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삭대엽 한바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일까? 본고에서는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전개-마무리’라는 연행문화의 일반적인 구조에 주목하여 현전 금보들에 존재하는 노래들의 일반적인 패턴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궁중음악을 담고 있는 『琴合字譜』(1572)는 <오리>로 시작하여 고려가요 등 흥겨운 노래들을 부르다가 마지막에 <感君恩>으로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패턴은 민간에서 가곡(중대엽)을 노래한 『梁琴新譜』(1610)과 『白雲庵琴譜』(1610~ 1680) 등에서도 ‘심방곡-중대엽-감군은’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즉 중중연희의 패턴이 민간 연희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한편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心方曲이 <오리>에서 <잘새는> 등의 가곡으로 바뀌고 <感君恩> 대신 ‘界面 數大葉 第四(현행 界面 二數大葉)’이 마무리하는 곡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는 현행 삭대엽 한바탕을 界面 二數大葉인 <太平歌>로 마무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또한 18세기 중반에 이미 弄·樂·編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현행과 유사한 삭대엽 한바탕이 만들어질 환경은 충분히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주의식과 김유기, 한유신, 김천택 등의 작품을 살펴본 결과 첫 작품은 작품 전체의 판을 여는 노래로써 주제를 포괄하고, 마지막 작품은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이라는 점에서 <태평가>로 마무리되는 현행 삭대엽 한바탕과 유사하다. 또한 주의식의 노래가 19세기 가집들에는 삭대엽 한바탕의 흐름과 유사한 곡조들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도 유사한 곡조에 얹혀 가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주의식과 김유기, 한유신, 김천택 등의 작품은 삭대엽 한바탕이 형성되던 초기의 모습늘 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제국신문』 소재 시가 연구 -“시사논평형” 시가의 게재양상과 기능을 중심으로-

박애경 ( Ae Kyung Park )
한국시가학회|한국시가연구  39권 0호, 2015 pp. 73-102 ( 총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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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여러 기관에 산재된 『제국신문』 원 자료를 수집하여, 신문에 실린 시가 자료를 일차적으로 정리하고, 『제국신문』 소재 시가의 자료적 가치를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국신문』 소재 시가는 그동안 다른 매체 소재 시가에 비해 연구자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상당 부분 일차 자료 확보의 어려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제국신문』이 근대 초기 계몽언론 중 가장 오랜 발행 실적을 가진 한글 신문이며, 한글을 통한 다양한 언어·문화적 실천을 시도해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여기 수록된 시가가 공적 담론의 장에서 활용되는 방식을 해명하고자 한다. 『제국신문』 소재 시가는 전통적 악장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의전용 가사에서부터 시사단평 류의 가사, 시조창 형식을 유지하고 있시조와 창가, 언문풍월, 민요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가 양식을 게재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특히 ‘시사논평형’ 시가를 중심으로 『제국신문』 소재 시가의 의미를 탐색하였다. ‘시사논평형’ 시가를 주목한 이유는, 『대한매일신보』의 ‘사회등 가사’ 이전에 시가가 근대 공론의 장에 시가가 어떤 방식으로 진입했는지, 그 자취를 밝히는 데 유효한 방식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시사논평형’ 시가의 게재 경위와 담화전략 분석을 통해 『제국신문』 소재 시가의 특이성과 매체와의 관련성을 해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다. 『제국신문』 소재 시가는 가창의 전통이라는 기반 위에 감정의 노출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설득의 기술을 구사하거나 독자들의 집단적, 정감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구어를 활용하고 있다. ‘시사논평형 시가’의 이러한 담화 전략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국신문』 뿐 아니라 저널리즘 소재 시가에서 시의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시도되었던 담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구어의 효과를 살린 ‘시사논평형’ 시가의 담화 전략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근대담론에 의해 전근대적, 정념적, 비합리적, 비주류적인 것으로 폄하되었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가창의 전통을 일정 부분 계승하면서 한글 중심, 구술언어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국신문』 소재 시가의 분석을 통해 근대를 향한 다양한 통로를 확인하는 한편, 지식인 중심, 서구 중심, 활자 매체 중심으로 근대를 이해하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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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20세기 초 전통 가곡의 변화상과 공연의 실제적 양상을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글은 그 첫 단계로 먼저 1900∼1910년대 후반까지의 변화들에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시기 근대 신문.잡지에 기록된 내용들을 토대로 유성기 음반의 발매 양상과 기생 공연의 변화상에 중점을 두고 가곡 문화의 변화와 공연의 실제적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유성기 음반에서 가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다. 하지만 초기 발매 시기 때부터 가곡창 음반은 녹음되어 발매되고 있었다. 이 시기 음반 작업은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가 높은 관기(官妓) 출신 기생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음반에는 여창 곡목인 <화편(花片)>과 같은 레퍼토리들이 선정되어 녹음되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하규일과 같은 가곡 전승의 주요 인물들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기생들의 신분 제도 철폐와 공연 방식의 변화 역시 가곡 공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관기제도의 철폐, 관기 출신 기생과 삼패(三牌)들의 소통은 가곡 공연이 대중적으로 선보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궁중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가곡, 가사, 잡가가 함께 공연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무대 공연화 된 가곡창 연행은 기존의 가곡 한바탕의 방식 보다는 한두 곡정도 불리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당대 대중 유행곡들과 함께 공연되면서 <가곡대경쟁>과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향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곡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여러 평론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수많은 유행의 흐름에 따라 전통 가곡의 공연 양상이나 그 인식도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 경탄가 > 연구 -한 명문대가 후예의 봉건적 지식담론과 가문의식-

고순희 ( Soon Hee Ko )
한국시가학회|한국시가연구  39권 0호, 2015 pp. 143-168 ( 총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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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경탄가>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 작가가 일제강점기 폭압적 정치구도와 강력한 근대문명사회로의 진전에 대응하여 보여준 현실인식을 규명하는 데 있다. <경탄가>의 작품세계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한 명문대가 후예의 현실인식을 규명했다. <경탄가>의 작가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당시의 이념적, 역사적 변화 현실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다만 유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왕이 마련해 놓은 봉건적 체제와 질서 안에서 당대의 현실을 바라보았다.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조선시대와 관련한 봉건적 지식 담론의 전달이다. 근대 학문인 ‘신학’이 날로 증대되는 현실이었지만 새로운 지식에 대한 성찰을 스스로 차단하고 한학자의 특권인 봉건적 지식을 자녀에게 전달하며 지식권력을 발휘했다. 또 하나는 명문대가의 후예라는 가문의식이다. 작가는 승품을 따내고, 명문대가의 후예라는 인식을 가족에게 심어주고, 여성통제 이데올로기의 강조를 통해 가문의 영속을 기도했다. 작가는 대내외적 혼란이 극심했던 격변기에 직면했던 자신의 문제를 가문의식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작가의 현실인식은 근대담론이나 일제강점의 현실을 회피하고 봉건적 지식담론과 가문의식 그 자체에 함몰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탄가>의 작가가 보여준 현실인식은 당대 독립운동에 투신한 양반가 후예의 것이나 전통적 사고를 고수하던 도학파의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경탄가>는 일제강점기 역사적 변혁기와 근대문명사회에 직면하여 명문대가 후예가 보여준 다기한 현실인식과 그에 따른 행보 중 극단의 한 예를 보여준다.

한시의 근대적 전유, 자기화의 가능성 -김억의 『망우초(忘憂草)』(1934)를 중심으로-

구인모 ( In Mo Ku )
한국시가학회|한국시가연구  39권 0호, 2015 pp. 169-200 ( 총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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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억의 문학적 편력의 다면성을 염두에 두고 한시 번역 시집 『忘憂草』(1934)를 둘러싼 의미를 조망하고자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김억의 『망우초』는 국민문학과 시가개량을 모색하며 시의 음악화를 모색하던 시기의 한시 번역으로서, 시인이 아닌 번역가로서 김억과 한시 번역의 의의를 이해하고, 이후 그 맥락의 변화까지 감지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이러한 『망우초』는 김억이 한시를 통해 동양적 정서의 원형을 탐색하는 실천이자, 중세 보편어 문학의 유산을 전유하고 자기화하는 방법을 통해 근대기 자국어 글쓰기의 가능성을 모색한 결과라고 판단된다. 특히 이 글은 김억의 한시 번역과 『망우초』가 그보다 먼저 시도된 사토 하루오(佐藤春夫, 1892~1964)의 한시 번역과 『車塵集』(1929)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은 결과라는 데에 주목했다. 김억과 사토 하루오가 비슷한 시기 한시의 번역을 통해 동양적인 정서의 원형을 탐색했다는 점은 중세 보편어 문학의 전유, 자기화를 둘러싸고 근대기 동아시아 지역 혹은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 대화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정은 김억의 한시 번역이 단지 근대시의 이상과 가치를 거스르는 예외 혹은 퇴행의 일국적인 사건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리고 비서구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적인 글쓰기의 실천과 관련한 동아시아적 현상의 차원에서 김억의 한시 번역과 『망우초』의 의의를 다시 묻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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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전통민요 노랫말에 나타난 말하기 방식과 대중가요 노랫말에 나타난 말하기 방식을 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경북지역 논매는 소리와 어사용, 도시형 트로트를 대상 자료로 한정하여 노랫말에 나타나는 화자의 말하기 방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논매는 소리가 노동 공동체를 대표하는 남성의 목소리로 현장에서 행위나 상황을 묘사 혹은 설명하면서 작업을 독려하고 노동의 힘듦을 탄식하는 반면 어사용은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활용하여 노동과 신분적 불만, 현재 처한 상황의 고통을 탄식하는 양상을 보인다. 반면 도시형 트로트는 남성 목소리로 말하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리움과 외로움의 감정을 서술자 혹은 일인칭 화자 시점에서 독백하는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은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자발적으로 만들어져서 전승, 향유된 노래와 자본의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가 지니는 차이, 둘째, 노동과 같은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노래와 유희적 기능에 한정된 노래가 지니는 차이, 셋째,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구분이 없는 노래와 부르는 자와 듣는 자의 구분이 분명한 노래가 보이는 차이, 넷째, 공동체 혹은 특정집단의 연대감을 기반으로 부르는 노래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대중성 지향의 노래가 보이는 차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담고 있는 세계인식과 정서적 반응은 유사하다.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세계와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화자 반응이다. 화자는 노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내적 상황을 그대로 노출한다. 화자는 토로나 원망, 신세한탄이나 탄식 혹은 아쉬움, 쓸쓸함 같은 정서적 표현을 통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극복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 호소하거나 탄식한다. 논매는 소리, 어사용, 도시형 트로트 노랫말을 통해 나타나는 말하기 방식은 각각 향유방식, 기능, 시공간적 배경 등의 차이를 보이지만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와 세계인식 및 태도는 유사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하여 전통사회 평민 남성들이 공유했던 정서와 세계인식이 근대화 산업화 시대 이후 도시형 트로트를 통해서도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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