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 우리한문학회 > 한문학보 > 25권 0호

한문학보검색

Han Mun Hak Bo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136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5권 0호 (2011)
7,000
초록보기
이 연구는 조선 후기 詩社(詩會, 契會, 雅集)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회고하고 이를 검토하여 새로운 방향을 조망하고 앞으로의 연구 전망을 제시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2장에서는 시사연구가 개별적인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종합적인 데에 이르기까지의 연구를 소개하였다. 시사에 관한 언급은 평민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시작이 되었고, 조선후기 중인층의 대표적 시사인 松石園詩社와 枕流臺詩社에 대한 고찰을 계기로 중인층 시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이후 개별시사에 대한 것보다는 조선후기 중인층의 문학활동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그 결과 중인층에 대한 수많은 저서와 조선후기 시사에 대한 종합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3장에서는 시사에 관한 연구가 확장 발전된 측면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전에는 시사 및 시사를 중심으로 한 활동을 고찰한 논문이 많았으나, 점차 그 성격과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갔다. 성격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는 시사뿐만 아니라, 시사와 관련이 있는 제반 문화현상에까지 관심을 두어, 시사와 풍류, 시사와 예술 등 조선후기 문화사 전반에 걸쳐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범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지역적으로 서울 중심의 시사연구가 지방의 시사연구로 범위가 넓혀졌다. 그래서 그 지역인사들 중심으로 오랜 세월 이어져온 시사에 대한 연구가 몇몇 지방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국내의 시사뿐만 아니라, 국내의 시사와 관련이 외국의 시사, 그리고 국내의 시사와 외국의 시사의 비교연구 등으로 범위가 확대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시사에 대한 연구논저를 개략적으로 살펴본 결과 앞으로의 시사연구는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첫째는 시사 연구가 시사연구에 그쳐서는 안 되고, 사설시조, 판소리, 가면극 등의 국문학 장르들과의 관계도 밝혀져야 하리라 생각된다. 둘째는 시사 연구가 중인계층 위주의 시사에 집중되고 양반층의 시사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셋째는 시사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이외에 개별적인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는 점이다. 끝으로 시사의 외연을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획주제 : 16-17세기의 시사(詩社)와 아집(雅集) ; 인왕산 청풍계의 문학적 전통

강혜선 ( Hye Sun Kang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5권 0호, 2011 pp. 33-71 ( 총 39 pages)
7,900
초록보기
도성 안에 있으면서도 산수의 풍광이 빼어났던 인왕산 청풍계는 조선후기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었다. 16세기 이후 朴淳, 劉希慶 등 이름난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남기면서, 청풍계는 점차 일상적 遊賞處에서 문학적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갔다. 또한 壯洞金氏 일문이 청풍계에 정착하면서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17세기 초 金尙容이 幽居地로 청풍계를 조성한 이후, 청풍계는 김상용의 삶과 결부되어 吏隱의 장소로 부각되었고, 그가 순절한 뒤로는 충절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이어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金昌協, 金昌翕 형제와 金時傑, 金時保 형제, 그리고 그 주변 문인들이 청풍계를 내왕하면서 雅集과 詩會를 통해 조선후기 문단의 변화를 이끌어 갔다. 北里文會, 楓溪詩會 등이 그러한 모임의 대표적 예였다. 이 모임들은 특별한 규약을 마련한 詩社라기 보다 자연스러운 만남과 교유를 통해 이루어진 비정기적 시회의 성격을 지닌 문학 활동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학 활동은 단지 인간적인 교유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비록 문학적 기치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청풍계의 아집과 시회는 당시 문단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킨 眞詩運動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진시운동이란 시문의 창작에서 眞景(眞境)과 眞情을 강조하며 전대의 擬古主義 사조를 극복하려 한 움직임을 이른다. 기존의 규범이나 전고에 매이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시인 자신의 성정을 가식 없이 표현하는 시작을 실천하려 한 진시운동이 자연스럽게 청풍계 詩作에서 실천되었다. 눈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청풍계의 풍광이 眞境의 구현이라면, 청풍계에서 느끼는 시인의 진솔한 정감과 청풍계에서 벌어지는 이러저러한 사연 들은 眞情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12,500
초록보기
『僧伽酬唱錄』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55장의 필사본(<奎 15468>)으로서, 1575년(선조 8)에 삼각산 僧伽寺에서 許筬·洪履祥·禹伏龍·李順慶 등의 젊은 문인들이 모여 詩會를 열고 수창했던 300여수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花潭學의 자장에 속한 연소한 문인들로서, 전해에 性理書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는 『性理大全』을 모여 읽었고, 다시 이 해에 모여서 새롭게 부상하는 『心經』을 읽었다. 또한 그들은 아름다운 삼각산의 봄을 만끽하면서 벗들과 함께 느끼는 흥취를 시편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우선 봄의 생동감을 감지하거나, 다가오는 봄의 환희를 상상하면서 전대 시편을 차용하여 春意를 표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들은 探勝尋芳의 유람을 통해서 詩興을 공유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시명이 높은 賤出 시인 劉希慶의 방문을 받아 함께 시문을 수창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모임의 일원이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리움의 회포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수창집은 개인의 개성적 문학세계를 보여주기보다는 집단적 문학 향유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수창집의 성격으로 인해, 여기에 담긴 시편들에는 문학성을 논할 때 흔히 언급되는 ``개성, 독창성`` 등이 일견 결여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더군다나 모임의 주축들이 주로 20대 후반의 젊은 문사들이었기에, 훗날 우복룡이 회고하였듯이 그들의 시편은 가벼운 낭만성을 띤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는 16세기 젊은 문사들의 문학 향유공간과 현장의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승가수창록』은 구성원간의 문학적 교감을 드러내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5,700
초록보기
이 글은, 최근 새로 확인된 『龍城唱酬集』을 중심으로 기존 판본과 대비하여 定本化의 가능성을 검토하고, 나아가 그 문학사적 의의를 상정하는 데에 최종 목표를 둔다. 『龍城唱酬集』은 현재 책 제목만이 전해지고 일부 시편들이 각 작가의 문집에 산견되고 있었다. 그러다 1997년에 처음 일부 시편이 소개되었고, 이후 몇몇 관련 판본들이 공개되면서 책의 전체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작가명 및 자구의 오류가 보이고, 무엇보다도 수록 작품의 배열이 모두 白湖 林悌의 原韻으로 되어 편차 상의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 새로 소개한 판본은 우선 일반적 酬唱 관행을 따르고 있는 점에서 앞서 소개된 판본의 문제가 해명될 수 있는 자료로서 일정 정도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따라서 『龍城唱酬集』의 정본화 작업에 있어서 단순한 자구 상의 출입을 넘는 이본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龍城唱酬集』의 문학사적 의의는 당대의 집단 향유 문화가 확산되는 배경 속에서 찾을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樓亭題詠과 詩會의 유행도 역사적 계기의 하나였음을 살펴보았다. 『龍城唱酬集』은 엄숙한 도학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시대에 시적 개성과 다양한 정감을 시창작에 도입하여, 17세기 한시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시회를 주도한 호남 문인들은 도학적 문학론을 기저에 두면서도 훨씬 다양하고 유연한 시적 개성과 상상력 및 감정의 자연성을 구현한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사림으로서의 自矜을 버리지 않으면서, 또 한편으로 경물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낭만적 시정신을 소유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수미에 심미적으로 몰입하며 자신의 감정을 적극 표현하고자 하였고, 자유분방한 호기를 표출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體現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문학적 성취는 그 시대가 열망하던 높은 단계의 문학적 성취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7,100
초록보기
이 논문은 1680년대에 활발한 시 모임과 한시 창작 활동을 통하여 조선후기 眞詩運動을 꽃피운 洛誦樓詩社와 重澤齋詩社 구성원의 시사 결성과 활동 양상, 나아가 이들 시사의 영향과 의의 등을 검토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金昌翕·洪世泰·李奎明·趙正萬·金昌業·金時保·金昌立·兪命岳·洪有人·洪重聖·鄭龍河·崔東標 등은 젊은 시절에 北里文會에서 독서와 강학을 통하여 시론을 정립하고 활발한 시작 활동을 전개하여 우리나라 한시를 일변시켜 큰 영향을 주었다. 北里文會는 낙송루시사, 중택재시사, 청풍계시회를 포괄하는 용어이다. 낙송루시사는 金昌翕·洪世泰·李奎明 등이 중심이 되어 1682년부터 1689년까지 활동한 시사이고, 중택재시사는 金昌立·兪命岳·洪有人·洪重聖 등이 중심이 되어 1682년부터 2년 남짓 운영된 시사이다. 두 시사의 구성원은 주로 10대 후반과 20대의 젊은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독서와 詩作을 바탕으로 眞情과 眞景에 기반한 古風의 진작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명나라의 복고적인 모의작을 배격하고 『詩經』과 『史記』, 漢魏盛唐의 고시 등을 주로 학습하면서 질박하고 天眞한 시를 지어 風雅의 기본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비록 이들이 초기에 지은 작품도 모의적인 성격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모의의 풍조에서 탈피하고자 한 노력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들이 두 시사에 참여하면서 지은 초기의 시작이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시적 성취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따라서 낙송루시사와 중택재시사의 의의는 시사 활동 기간 자체 내지 작품의 성취도가 아니라 이후 이들은 시론과 시풍을 변전시켜 조선후기 진시운동을 주도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후 이들은 우리나라의 역사, 풍속, 산천, 생활상 등을 시편 속에 담아 조선후기 한시를 크게 변화시켰다. 또한 18세기에 閔百順이 편찬한 『大東詩選』에 김창흡을 포함한 시사 동인들의 작품이 매우 많이 선발된 것도 당시의 풍상과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리산(智異山) 유람록(遊覽錄)으로 본 최치원(崔致遠)

강정화 ( Jeong Hwa Kang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5권 0호, 2011 pp. 173-209 ( 총 37 pages)
7,700
초록보기
조선시대 士人들의 지리산 유람록은 현재 100여 편 이상 발굴되었고, 작품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단연 최치원이다. 작품 속 최치원 관련 유적은 주로 하동 쌍계사와 三神洞 방면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중 최치원의 글씨로 알려진 ``雙磎石門`` 石刻, 眞鑑禪師大功塔碑에 가장 많은 기록이 나타난다.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난 조선조 士들의 최치원에 대한 인식은 4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조선초기 士人에게서 보이는 최치원의 불우한 삶에 대한 연민이 그 첫 번째 인식이고, 임진란을 전후한 시기에 그의 서체에 대한 칭송과, 하동 청학동에 형성된 최치원 관련 신선 의식이 그 두 번째와 세 번째이고, 마지막으로 조선 말기에 이르면 그의 불가 및 仙趣 성향에 대한 혹독한 비판의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네 가지는 강약의 차이가 있으나, 조선시대 전 시기 동안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인식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기에 시대적 조류나 집단성에 의해 어떤 성향이 보다 장시간 그리고 더 강하게 나타나는 성향을 중심으로 분류해 보면, 시대성을 반영한 의식들이 은연 중 드러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지리산 유람록 속 인식들이 인식 대상인 ``최치원``이란 인물 자체보다는 조선조 士人의 시각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일컫는다. 곧 최치원에 대한 인식을 그 시대 그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모두 조선시대 士人의 관점에서 가늠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최치원은 천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용재총화(?齋叢話)』 소재(所載) "소화(笑話)"의 연구(硏究)

임명걸 ( Myeong Geol Im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5권 0호, 2011 pp. 211-237 ( 총 27 pages)
6,700
초록보기
이 글은 『용재총화』 수록 소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특히 『용재총화』의 모든 소화를 대상으로 소화의 성격과 유형을 살피고, 이들 소화가 한국문학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냐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우선 『용재총화』에 소재된 소화의 문학사적 의미를 한국 소화사에서의 위상과 기타 장르에 미친 영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소화사의 양대 계열은 사대부 逸話型 소화와 民譚型 소화로 파악된다. 즉 계통론의 관점에서 『용재총화』의 소화는 이 양 계열의 총화를 이룬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30%에 해당하는 호색담 또한 후대 문헌소화집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禦眠楯』, 『續禦眠楯』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다양한 야담집의 외설담에서도 그 관련양상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또한 『용재총화』 소재 소화들과 타 장르와의 영향관계도 알 수 있는데, 주로 풍자소설의 측면에서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소화 자체가 소설의 소재로써 수용됐을 뿐만 아니라 인물과 구성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진단해 본 것이다. 특히 『용재총화』의 경우 풍자와 해학 등 희극성을 갖춘 소설에 큰 변화 없이 적용되는 양상마저 보여주며, 소화의 소설로의 변모과정을 보여준다는 데서 일정한 서사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황진이(黃眞伊) 한시와 시조의 비교연구 -수사적 특성을 중심으로

김주수 ( Joo Soo Kim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5권 0호, 2011 pp. 239-263 ( 총 25 pages)
6,500
초록보기
황진이는 유명한 기생일 뿐 아니라, 한시와 시조 두 장르 모두에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졌던 시인이다. 다만 그녀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나, 현존하는 시조 6수와 한시 8수만으로도 그녀의 개성적이고 뛰어난 시적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수사적 차원에서 그녀의 시는 묘사보다는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은유와 환유를 통해 개성적이고 뛰어난 시적 표현을 이루고 있다. 시의 주제는 대개 님에 대한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적 특성이 기발한 상상력과 뛰어난 비유적 수사를 통해 형상화됨으로써 그녀만의 개성적인 시세계를 이룬다. 비유적 표현이 두드러지는 이러한 시적 특성은 한시와 시조 두 장르 모두에 공통적으로 들어나는 속성으로, 그녀의 시세계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떠한 방법에 의해 창출되었는지를 알게 한다. 아울러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특성은 이백과 같은 唐詩의 영향에서 배태된 것임을 한시 분석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무엇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녀의 활달한 성정처럼, 그녀의 시도 어떤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자유롭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특성이 있으며, 그것을 빼어난 비유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황시(黃時)간 시(詩) 연구(硏究)

황만기 ( Man Ki Hwang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5권 0호, 2011 pp. 265-299 ( 총 35 pages)
7,500
초록보기
황시간에 대한 연구는 아직 학계에 소개된 바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의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 그리고 시에 대한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황시간은 상주(현 문경) 출신의 인물로, 방村 黃喜의 7세손이다. 장수황씨가 상주 대도리에 정착한 이후 황시간에 이르러 굳건한 자리매김을 한다. 특히 그는 시에 일장을 보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우복 정경세의 부와 함께 ``黃詩鄭賦``라 병칭되었다. 또한 그는 蒼石 李埈, 愚伏 鄭經世, 沙西 全湜과 함께 商山四老로 일컬어졌다. 이 외에 교유한 인물로는 月澗 李□, 月峯 高仁繼, 泰村 高尙顔 등이 있다. 황시간은 전원적, 은일적 삶을 추구한 인물이다. 비록 67세의 만년에 벼슬길에 올라 형조정랑의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이는 선비라면 누구나 한번 쯤 조정에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보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지, 삶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삼가현감을 마지막으로 5년간의 벼슬살이를 마감하고 결국 전원의 보금자리를 찾게 된다. 이런 그의 족적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그의 시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첫째, 부귀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만족할 줄 아는 安貧守道의 삶을 추적해 보았다. 둘째, 그는 역사의 최대 혼란기였던 壬亂과 丙亂을 모두 체험하였다. 이때의 애한을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셋째, 황시간은 벼슬에 대한 갈망이 내재된 그였기에 추천의 의한 벼슬을 마다하지 않고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5년간의 관직생활에서의 지향점이자 목표는 고향으로의 회귀였다. 이때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을 중심으로 규명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전원으로 돌아온 이후에 새롭게 맛보는 흥취를 추적해 보았다.
7,600
초록보기
靑雲 李瀣와 剡溪 李潛은 조선 중기 이후 노론 중심으로 정국이 정리되어 가던 17세기 중엽, 당대 남인계열의 명문가인 驪州李氏 家門에서 출생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생존 당시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가문 중흥의 포부를 키웠지만, 청운 이해는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여, 섬계 이잠은 격렬한 당쟁의 와중에서 원자 보호를 위해 올린 상소문으로 인해 47세로 장살당하여 가문의 기대와 자신의 포부를 꺾었다. 이들의 삶은 27세라는 짧은 생존 기간으로 인해, 또 장살 당해 죽었다는 삶의 질곡으로 인해 아직까지 그다지 알려진 것들이 많지 않다. 이들은 부친을 통해 家系 內에서 전해지고 있던 家學의 전통을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구축하였다. 형인 청운은 동생 섬계보다 13년 年上이어서 자기 스스로의 학문세계를 형성하며, 동생 섬계의 학문세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의 학문세계의 根底는 동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창작한 시문학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동질적인 모습보다 이질적인 모습이 더 쉽게 눈에 띈다. 물론 이들이 창작한 시문학 작품의 이질적인 모습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동질성 역시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질적인 모습을 시세계의 밑바닥에 깔고 있지만, 이들의 시문학 작품 속에서 보다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질적인 형상화의 양상과 정신세계의 표출 방법이다. 그것은 형상화의 양상과 정신세계의 표출 방법이 시세계의 표면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운과 섬계의 시세계가 지니는 공통점은 이들 가문의 전통적인 문학 창작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전통적인 문학 창작 경향은 이들이 동일 가계 내에서 성장하였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왔다는 점에서 이들 문학세계의 뿌리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반면 이들이 비록 한 가계 안에서 같은 부친 아래 동일한 학문을 익혔지만, 이들의 삶의 역정은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닌다. 이들의 시세계에서 형상화의 양상과 정신세계의 표출 방법이 달랐던 것은 삶의 역정이 달랐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청운과 섬계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동이점에 대한 검토가 확대된다면 한 가계 내 다양한 인물들의 문학세계가 지니는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해명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특히 이들 가문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성향에 대한 해명의 가능성을 기대해본다.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