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 백제학회 > 백제학보 > 4권 0호

백제학보검색

The Baekje Hakbo


  • - 주제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005-946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권 0호 (2010)

논문 : 백제 수막새 제작기법과 생산체제(生産體制)의 변화(變化) -풍납토성 출토품을 중심으로-

소재윤 ( Jae Yun So )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5-26 ( 총 22 pages)
5,700
초록보기
백제 수막새의 형성은 풍납토성을 필두로 몽촌토성 및 석촌동고분군 등에서 확인되는데 자료의 양은 풍납 토성이 압도적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풍납토성 출토품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였으며, 수막새의 제작기법을 통하여 기와 생산체제의 변화양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형성기의 백제 수막새 문양은 전문 등 총 16개로 분류할 수 있고, 이에 따른 주연부 단면형태는 외반형과 나팔형, 그리고 직선형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드림새 단면 등에서 등기와와의 접합흔적이 확인됨에 따라 일체형 접합기법과 분리형 접합기법으로 크게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일체형 접합기법은 토기 제작방식처럼 드림새 뒷면에서부터 점토띠를 쌓아올려 점토원통을 제작한 후 분할하여 수막새를 완성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주로 주연부 단면이 외반형이거나 나팔형인 경우에 해당된다. 반면에 분리형 접합기법은 미리 제작한 점토원통을 드림새 뒷면에 부착한 뒤 분할하여 수막새를 제작하는 방법으로 주연부 단면이 직선형인 것과 나팔형 일부 예가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제작기법 등에 따라 기와 생산체제는 크게 2단계로 점차 변화하게 된다. Ⅰ단계에서 기와생산은 소량 생산체제와 대량 생산체제의 양립에 따른 와도겸업 공인집단의 분업화가 시작된 단계로 기와의 출현과 낙랑 수막새 모방 및 조와술 유입 등으로 특징을 지울 수 있으며 토기공인에 의해 수막새를 제작하게 된다. Ⅱ단계는 일체형 접합기법에서 분리형 접합기법으로 넘어가는 단계로 중국에서 선진기술의 추가 유입에 따른 와도겸업 공인집단의 전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후 웅진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와통제작과 와범의 규격화 및 대량 생산체제가 완성된 시기로 이어지게 된다.

논문 : 백제의 수리(水利)시설과 김제 벽골제

노중국 ( Choong Kook Noh )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27-41 ( 총 15 pages)
5,000
초록보기
근래에 안동 저전리 저수지 발굴, 보성 조성리 수리시설 발굴 등은 저수지 축조 시기를 청동기시대로까지 올려볼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저수지 관련 기사도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나오는 國名 가운데 저수지의 의미를 포함하는 국명의 경우 그 지역에 저수지가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하였다. 그러나 초기백제 시기에는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집권력이 아직 미약하였기 때문에 저수지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대규모 저수지는 중앙집권력의 성장과 궤도를 같이 한다. 백제도 중앙집권력의 강화를 위해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제 벽골제이다. 벽골제의 초축 연대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A.D.330년으로 나오고 『벽골제발굴보고서』에서는 4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6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백제는 3세기 후반에 거대한 풍납토성을 축조하는 등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집권력과 토목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4세기에 들어와 전북지역을 영역으로 편입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벽골제의 초축 시기는 4세기 전반 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벽골제의 기능에 대해 저수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근에 방조제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현재 보이는 석제 수문은 만조 때에 닫아 해수의 침입을 막고 간조 때에 열어 제방 안의 불필요한 물을 배수하는 수문이며, 河□에 제방을 축조하여 개발을 진전시키는 저지대 개발 방식인 ``築堤開田``의 시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벽골제는790년에 增築되었고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도 증축되었다. 방조제설을 주장하려면 이 증축 공사가 해수면의 상승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검증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벽골제는 방조제는 아닌 것이다. 문헌자료에 의해 修築 과정을 보면 원성왕 7년(790)의 증축, 고려 顯宗(1010~1031) 대의 修完, 고려 仁宗 21년(1143)의 修復, 조선 太宗 15년(1415)의 重修에 걸치고 있다. 여기에 510년 무령왕의 ``完固堤防`` 조치도 포함하면 모두 5번에 걸쳐 수치가 이루어진 셈이다. 한편 「벽골제중수기」에 의할 때 1415년의 수축 작업은 潮波의 奮激이 심한 大極浦 지역에는 조파를 막는 제언을 세웠고, 큰 웅덩이가 만들어진 楊枝橋 지역에는 목책을 세웠으며, 제방 위의 頹碑된 부분은 흙을 메워 평평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벽골제발굴보고서」에 의하면 A지구에서는 2번에 걸쳐, B지구에서는 4번에 걸쳐 수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제방의 전체 높이는 4.5m 정도였는데 1차 築土의 높이는 약 2.5m였다고 한다. 발굴조사에서 얻어진 결과와 문헌 자료의 내용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를 종합하면 1차 축토의 높이 2.5m는 초축 당시의 제방의 높이이고, 약 1.6-l.7m의 높이의 2차 축토는 원성왕대의 대대적인 증축 사업의 결과로 파악된다. 그리고 B지구에서 빈번한 보수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이곳에 食物炭化層이 두껍게 쌓여있다는 사실과 또 石傀들이 混築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지반의 연약성 때문인 것 같다. 이로 미루어 보면 문헌 자료에 보이는 보수공사도 대개는 B지구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논문 : 백제 초기 정치체제의 성립과정과 구조적 특질

박기범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43-67 ( 총 25 pages)
6,000
초록보기
백제사의 전개과정에서 3세기 후반 고이왕대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특히 정치사적인 측면에 서는 佐乎制와 官等制의 정비가 이루어진 시점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백제 정치기구의 골격이 이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고이왕대에만 주된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그 이전 시기의 정치구조와 고이왕대의 정치구조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편이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우선 고이왕대 이전의 정치구조에 대해 左·右輔制를 중심으로 검토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초고왕대 후반부터 주변 소국의 자치력이 통제당하여 小聯盟國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소연맹국 단계에서의 원활한 정국운영을 위해 고이왕대 초반에 우보가 설치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우보의 역할은 소연맹국에 참여한 수장층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의 실행에 있어 필요한 실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한편 좌평에 대해서는 그간 관료 내지 중앙정치기구적 성격을 부각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본고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 초점을 두어 좌평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했다. 고이왕대의 백제가 연맹왕국을 형성하긴 했지만, 당시 복속된 소국들은 아직 일정 정도 자치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면 좌평의 성격에 대해서도 재지 수장층들이 그들의 세력기반을 유지한 채 국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수여받은 칭호로 보는 것이 가능하게 돤다. 즉 좌평이 처음 설치될 당시에는 국왕 휘하의 일원적 관등제에 포함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당시 국왕 중심의 일원적 관료제를 목표로 정비된 것은 率系 이하의 관등이었다. 따라서 연맹왕국시기 백제의 정치는 국왕과 좌평을 칭한 세력들이 南堂에 모여 주요 국사를 의논하고, 그 실무적 처리는 솔계 이하 관등 소지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고이왕대의 정치기구 정비는 좌평 및 솔계 이하 관등의 설치, 그리고 남당회의의 탄생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두 국가 규모의 확대에 따른 조치로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보통 기존의 좌·우보제를 확대·개편하여 좌평제가 성립했다고 말하지만, 본고에서의 검토 결과에 따르는 한 우보가 지녔던 행정 관료적 성격은 솔계 이하 관등 소지자에게 넘어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렇게 보면 소연맹국 시기 후반과 연맹왕국 시기의 정국운영 방식은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면, 본질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백제에서는 기본적으로 연맹왕국에 가담한 주요 세력의 수장층들이 모두 정국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5부 혹은 5부의 지배층들만이 정국운영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고구려·신라의 정치구조와는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논문 : 백제(百濟) 멸망기(滅亡期) 방령(方領)의 성격(性格)과 왕성(王姓)의 분지화(分枝化)

지원구 ( Won Ku Ji )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69-97 ( 총 29 pages)
6,400
초록보기
지방통치체제에서 지방관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로서 중요성이 높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분석이 없어 이러한 분석은 지방통치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방법론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멸망기를 중심으로 백제 5方體制의 정점에 있는 方領의 사례 분석을 실시한 후 그들의 출자와 성격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방령으로 계백, 복신, 여자진, 윤충, 예식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들 중 출자를 알 수 있는 인물 모두가 王族 혹은 宗族이라는 특성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왕족 혹은 종족을 이용한 5방체제의 특징은 前代의 지방통치체제인 왕·후제 담로제와 연결되고 있어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이는 직접지배가 초현되는 단계에서 왕족과 혈연적인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지방관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다만 5방체제에서는 王姓에서 분지된 종족들이 파견되고 있어 혈연적 요소가 퇴색해 가고 있지만, 여전히 혈연적 관계가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즉, 5방체제 단계에서도 왕족 및 종족을 활용한 방식이 유존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혈연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지방관 운용 방식은 백제 지방통치체제의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나아가 백제 말기에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王姓의 分枝化 현상도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왕족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면서 그 지역에 정착하고, 대대로 지방관을 역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파악된다. 직계의 왕실에서 방계화된 집단들이 각각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으며, 이것이 고착화되면서 王姓에서 분지되어 새로운 異姓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은 왕·후제 단계부터 이지만, 5방체제에서도 왕성의 분지화 현상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논문 : 의자왕(義慈王) 후기(後期) 지배층(支配層)의 분열(分裂) 과 백제(百濟)의 멸망(滅亡)

남정호 ( Jung Hoo Nam )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99-126 ( 총 28 pages)
6,300
초록보기
의자왕대의 정치는 의자왕 15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특히 후기는 백제의 멸망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인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타당하다. 다만 그러한 정치적 혼란이 야기된 원인에 대한 탐구는 아직 미흡한 편이다. 의자왕대 후기에 발생한 정치적 혼란의 주요 원인은 이 무렵 의자왕의 외교 정책이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 쪽으로 변화하면서 의자왕과 그의 치세 전기의 세력 기반이었던 성충 세력과 갈등을 빚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은 다시 권력 다툼으로 증폭되었다. 즉 의자왕 치세 전기에 왕자 융의 태자 책봉과 정치 운영 주도에 불만을 가졌던 군대부인 은고와 그 아들 효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의자왕의 제려동맹을 지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고, 성충 세력을 축출하고 융을 견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왕서자들을 대거 좌평에 임명하였으며, 달솔층의 정치적 성장을 지원하여 그들을 우익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계개편은 태자 교체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백제 지배층 내부의 격심한 대립과 분열을 야기하게 되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은고 세력은 효를 소왕의 지위로 격상시켜 실권을 잡게 하였고, 더 나아가 융을 몰아내고 효를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왕족 내부나 귀족충들로부더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고, 의자왕 19년 이후에는 양 세력의 대립과 분열이 극에 달하였다. 이를 눈치챈 신라는 당에 이러한 사실을 전하면서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을 이끌어 내었다. 이 때 분열되어 있던 백제 지배층은 나당연합군의 공격 앞에서도 하나로 힘을 합하지 못하고 권력 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분열된 백제 지배층은 군사력을 총동원한 방어전을 펴지 못하고, 무왕대의 왕족 세력을 포함한 지방 세력들마저 등을 돌리면서 의자왕과 그 왕 자들은 나당연합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4,700
키워드보기
초록보기

자료소개 : 김포 운양동 유적 분구묘

김기옥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139-148 ( 총 10 pages)
4,000
키워드보기
초록보기

자료소개 : 화성 청계지구 백제토기 가마

강아리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149-160 ( 총 12 pages)
4,700
키워드보기
초록보기

자료소개 : 연기 송원리 백제고분군

조은하
백제학회|백제학보  4권 0호, 2010 pp. 161-178 ( 총 18 pages)
5,300
키워드보기
초록보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