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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Journal of Humanites


  • - 주제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3021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72권 2호 (2015)

기획의 말 : 1905년 러시아혁명과 동아시아 담론 형성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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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청사』에 나타난 "러시아-혁명" 이해의 양상

황재문 ( Jae Moon Hw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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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당대 한국인의 인식과 이해의 수준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오랜 유배생활을 경험한 적극적인 신문독자였던 온건 개화파 지식인 김윤식의 일기를 검토하였는데, 이는 이 일기가 당시의 한국 신문에 게재된 1905년 러시아 혁명관련 기사들에 대한 독자(讀者) 차원의 관심의 방향과 이해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기에서 서술한 바에는 사건 이전부터 김윤식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우선 김윤식이 보인 러시아에 대한 이해의 양상들을 점검해 보았다. 이러한 검토에 의하면 김윤식은 이른 시기부터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며, 제주도와 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1897∼1907년의 시기에도 이러한 이미지는 유지되고 있었다고 판단할수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즉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및 러일전쟁의 발발을 상세하게 언급할 때에도 이 이미지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과 관련해서는 패전의 원인 또는 결과로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김윤식이 당시의 신문 기사 가운데 노동자의 청원 조건이나 자본가의 문제 등을 다룬 부분은 일기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다만 1905년 러시아 혁명을 패전의 원인이자 결과인 일종의 내란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김윤식 이외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지적할 수 있을지는 다른 사례를 찾아서 살펴야 할 문제이지만,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러시아에 대해 가졌던 당시의 관심의 수준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혁명이라는 사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경향성은 지적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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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05년 러시아혁명 기간 중 일본 도쿄(東京)에서 발행된 잡지 『혁명평론』(革命評論)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주의자가 러시아혁명 및 중국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검토한 것이다.『혁명평론』의 참가 동인은 이미 아시아주의자로 활동하고 있던 미야자키, 히라야마, 기요후지, 가야노의 4명과 자유민권운동의 세례를 받은 저널리스트 출신인 와다, 이케 그리고 막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기타 등의 7명이 주축을 이뤘다. 이케, 기타는 『혁명평론』참가 이후 중국혁명동맹회에 참가하게 되고,『혁명평론』정간 이후는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하면서 아시아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들 아시아주의자들이 『혁명평론』을 발행하게 된 목적은 궁극적으로 일본이 당면한 각종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해결에 있었다. 아시아주의자는 중국혁명 운동의 지원을 통한 혁명 성공으로 우회적으로 일본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혁명평론』이 러시아혁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중국혁명 운동에 도움을 주기 위한 한 방편이었지 러시아혁명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한것은 아니었다. 또한 혁명평론 은 천황제 및 천황제 국가에 대해 비교적 맹목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그 이면에는 메이지시기 일본의 사회, 정치, 경제적 진보의 성취라는 자신감과 우월감이 잠재해 있었다. 이러한 특성은 일본의 아시아주의자의 특성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전후 일본 혁명가들의 톨스토이 수용 양상

임경화 ( Kyoung Hwa L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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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일본은 모두 비서구 후발자본주의국가로서 강력한 군국주의에 기반한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여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따라서 서구 문명을 비판하고 군국주의에 저항했던 톨스토이의 사상은 특히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양국의 혁명가들에게 다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는 톨스토이 사상에 심각한 모순을 느끼고 대치하면서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무정부주의로 향한 고토쿠 슈스이 등과, 톨스토이를 발판으로 삼아 레닌주의를 심화시켜 갔던 레닌이 있다. 고토쿠 등은 일본의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을 대표했고, 레닌은 소련사회에 톨스토이를 기념하는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양국 혁명가들의 톨스토이 전유 방식의 전형을 읽어낼 수 있다. 본고에서는, 동시대에 전개된 레닌의 톨스토이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톨스토이 수용 양상을 밝히고자 한다. 사회주의운동 초기 일본에서 톨스토이의 절대평화주의에 기초한 친사회주의적 주장은 합법 정당을 추구했던 사회당 이미지 구축에 유효했다. 이들은 비전론을 주장하면서 톨스토이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 대한 톨스토이의 비판이 일본에 소개되자, 그들은 개인적인 종교성의 회복에 기초한 사회의 근본 개조를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주장이 사회체제의 변혁에 기초한 정의의 실현에는 심각한 한계를 지녔다고 보았다. 이 인식은 레닌에게도 보였다. 또한 러시아혁명을 거친 후로는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해졌다. 이것은 고토쿠 그룹이 혁명을 경험하면서 무정부공산주의와 직접행동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루는 흐름과 연동되어 있었다. 레닌도 러시아혁명패배의 최대 원인을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에서 찾았다. 그러면서도,톨스토이의 사상에는 전형적인 농민혁명가로서의 부정적인 면과 함께, 착취 없는 사회주의적 사회를 창조하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보고,후자에서 톨스토이의 역사적 의의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대역사건으로 혁명가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가해져 톨스토이주의의 급진적인 부분의 수용도 종언을 고했다.

양계초와 "혁명" 개념의 전변 -『청의보』, 『신민총보』시기를 전후하여

이혜경 ( Hye Gyung Yi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2권 2호, 2015 pp. 123-160 ( 총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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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양계초가 계몽사상가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청의보』(1898-1901).『신민총보』(902-1907) 시기를 전후하여 사용한 ‘혁명’ 개념이 어떻게 함의를 바꿔 가는지 추적했다. ‘입헌파’로서 양계초는 ‘혁명파’와 대립했지만, 근대어로서 번역어 ‘혁명’을 중국에서 가장 먼저사용한 사람이었다. 초기에 그는 ‘혁명’을 ‘진화’와 동류개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까지는 ‘혁명’을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혁명파와의 대립을 통해, 그리고 1905년 러시아혁명이라는 현실의 혁명을 목도하면서, 혁명에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점차 정리해가면서 부정의 논리를 세운다. 그는 사회진화론을 국가경쟁력을 고양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식하는 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사심을 제어하고 국가에 기여한다는 도덕적 가치를 제공하는 체계로도 받아들였다. ‘혁명’에 대한 비판 역시 그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틀에서 이루어진다. ‘혁명’은 국내적으로는 국가에 헌신해야 할 사람들의 사적인 권력야망이며, 국외적으로는 국가경쟁력을 좀먹을 내란이라고 비판된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사심에 의해 자행된과거의 역성혁명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처리된다. 이처럼 진화로서 긍정되었던 ‘혁명’은 진화의 반동인 ‘야만적’ 정권 탈취로 부정되기에 이른다.

인문학의 이념과 한국인문학의 과제

백종현 ( Chong Hyon Paek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2권 2호, 2015 pp. 163-193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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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대의는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한 지식 습득이나 창출이 아니라 인격 수양에 있으니, 인문학도는 먼저 덕성을 기르고, 그가 닦은인품의 향취와 연찬의 결과를 이웃과 나눌 일이다. 인문학은 본디 ‘자기를 위한 공부’[爲己之學]이거니와, ‘위기지학’으로서 인문학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사람다움’의 품격을 스스로 함양하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이를 ‘교양학문으로서 인문학’이라하겠다. 그러나 인문학도 부차적으로는 ‘남을 위한 공부’[爲人之學]일수도 있으니, ‘위인지학’으로서 인문학은 이웃의 교양을 배양하는 데도움을 주는 직업적 기능을 갖는 것으로 이를 ‘전문학문으로서 인문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지난 5,000년 역사를 거치면서 한국은 주변의 수많은 문명들을 수용하고 혼융하여 ‘한국문화’를 이루어왔다. 문화의 주체는 ‘인간’이니 인간성을 북돋우는 인문학이야말로 문화의 중심이다. ‘한국인문학’은 인문학의 보편적 이념을 한국 사회문화의 토양 위에서 구현하고, 한국어를 거쳐 표출될 수 있는 인문적 향취를 인류사회에 확산시킴으로써 ‘세계문화’를 진보시킬 과제를 갖는다. 이제 한국인문학은 인간됨,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품격을 향상시키는 데 요소가 되는 동서고금의 모든 문헌적 자료를 우선 한국어로 펼쳐내어 한국 시민의 품격을 제고하는 데 본뜻을 두고, 그러한 범형을 외국어로도 옮겨 널리 확산시킬 것을 지향할 일이다. 똑같은 가치를 구현함에도 보편성 외에 문명권마다 고유의 양식이 있고, 똑같은 품격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개성 있는 방식이 있다. 한국인문학은 그러한 특수성과 개성이 발양됨으로써 인류 문화가 더욱 풍요로워지고, 인간의 삶의 다양성이 확대되어 오히려 인간 삶의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믿음 아래, 모든 특성 있는 인문학과 ‘서로 같지 않되 화합한다’ [不同而和]는 이념으로 이제야말로 세계만방의 문화권역과 상부상조(相扶相助)해 나가는 일을 과업으로 갖는다.

세월호 참사에 드러난 기업,정부의 사회적 무책임 -중독조직 이론의 관점

강수돌 ( Su Dol Kang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2권 2호, 2015 pp. 195-233 ( 총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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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을 학술적으로 탐색하고자 한다. 근본 원인이 심층적으로 규명되어야 진실해명 및 책임자 처벌 등을 통해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어느 정도 풀 수있을 뿐 아니라 향후 비슷한 참사를 예방할 근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려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는 여당 일각의 주장처럼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지난 50년 이상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구조적 모순’의 결과다. 지금까지 사고의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의 원인이나 사후 대응 과정을 둘러싸고 SNS 등 일각에서는 “음모론” 또는 각종 루머들이 창궐하기도 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교통사고론”이나 “음모론”의 시각이 아니라 중독조직 이론의 시각에서 세월호 사고의 원인과 사후 대응 과정이 내포한‘구조적 모순’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은 현상적이고 부분적인 논리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미 발생한 참사의 실체적 진실 규명과 책임 소재의 명확화,나아가 향후 재발 방지에 기여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 내지 배경과 관련하여 본 연구는 정부나 기업의 조직 운영 과정에서 중독조직적 특성들이 만연해 있음을 낱낱이 적시하고, 나아가 사후 처리 과정에서도 역시 중독조직적 특성들이 명확히 드러남을 부각한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는 여타 접근방식과 차별성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한국 기업이나 정부가 그 본연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위해서는 부분적, 일시적, 표피적, 임기응변적 처방이 아니라 기업이나 정부를 불문하고 그간의 사회경제 발전 과정이나 조직 내 중독 과정을 명확히 인지한 위에서 이를 근본적으로 건강하게 쇄신하는 ‘시스템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국 현대사에 펼쳐진 무사유의 삶과 악 -세월호 침몰과 관련하여

김석수 ( Suk Soo Kim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2권 2호, 2015 pp. 235-269 ( 총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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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은 한국인 모두를 슬픔과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볼수 없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가 총체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은 다름 아니라 기억공동체의 상실과 무사유의 삶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이 찢어지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과거로부터 탈출해야 했던 우리는 그 어느 사회보다 과다 국가지배와 과다 시장지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의 명령시스템과 후자의 경쟁시스템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기억하는 주체’보다는 ‘창조하는 주체’가 되기를 요구해왔다. 이 ‘창조적 주체’는 급성장이라는 임무를 완수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명령과 경쟁 앞에서 제대로 사유할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명령을 하달 받는 무주체적 사유나 죽기 살기로 경쟁해야 하는 투쟁적 사유 외에 달리 사유하는 길을 모색할 수 없었다. 전자의 사유나 후자의 사유 모두 무반성적 사유, 이른바 무사유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아이히만의 악도, 세월호의 악도, 서로 차이가 존재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바로 이런 무사유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무사유를 낳은 국가와 시장의 과다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고진의 주장처럼 자율적인 시민들의 연대에 입각한 “어소시에이션이즘”을 추구해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길을 통해, 이른바 상상력의 연대를 통해 복종적 사유와 경쟁적 사유 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유의 빈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유와 현실 사이에 분열이 자리하고 있는 기존의 명령식 교육이나 경쟁식 교육을 넘어서 사유가 현실에 나아가 판단할 수있는 열린 교육을 일구어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교육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에야 비로소 국가와 자본이 결탁하여 범하게 되는 세월호와 같은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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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충남 보령 지역에서 구비전승되는 『도미설화』에 대한 연구이다. 충남 지역 『도미설화』는 다른 각편과 몇 가지 차별점을 갖는다.첫째, 도미의 직업이 목수로 나타난다. 둘째, 권력자가 도미 부인을 겁탈하기 위해 도미에게 건축을 맡겨 부재 상황을 만든다. 셋째, 도미 부인이 훼절을 피하기 위해 몸종으로 자신을 대신하게 하는 서사가 등장하지 않고, 자신의 부정을 핑계로 말미를 얻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러한 충남 지역 『도미설화』의 특징은 문헌과 구전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도미설화』의 전승양상과 비교할 때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충남 지역 .도미설화.는 서사무가 『성주풀이』와 매우 유사하다. 『성주풀이』에서도 주인공이 목수로 등장한다. 또한 황우양이 상부의 지시로 인해 건축에 동원되면서, 부재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점도 흡사하다. 게다가 황우양 부인이 훼절이라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몸의 부정을 핑계로 시간을 번다는 점 역시 충남 지역 『도미설화』와 유사하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충남 지역 『도미설화』는 전승에 있어 『성주풀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성주풀이』는 경기 남부의 화랭이 집단을 중심으로 전승되기에 두 자료 간의 간극이 느껴진다. 하지만 경기 남부의 화랭이는 활동 영역이 충남까지 이어졌으며, 충남 보령 역시 주요 활동 무대였음이 기존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렇게 볼 때,충남 지역에서 『도미설화』의 전승에 있어 『성주풀이』가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10년대 이광수의 해외체험 연구

김미영 ( Mee Young Kim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2권 2호, 2015 pp. 305-341 ( 총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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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광수의 1910년대 해외체험이 조선개혁론 구상에 미친 영향을 살핀 것이다. 이광수는 1913∼1914년에 상해, 해삼위, 치타(시베리아)를 여행하였고, 1915∼1918년에 동경에서 2차 유학을 하였다. 이글은 당시의 기행문들과 나중에 그때의 해외체험을 상세히 기록한 자전적 소설과 고백록, 여행지에서 썼던 조선동포에게 주는 글 등을 분석하였다. 20대의 청년 이광수에게 1910년대 해외체험은 ‘세계’를 보는 시각을 부여했고, ‘조선’을 객관화시켜 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나 국민에의 예우는 그 나라의 문명화 단계에 좌우됨을 목도했고, 러시아에서 조선이주민들의 가난과 지식인 망명객들의 당파싸움을 보았다. 그는 북방 방랑길에서 조선의 자주적 독립에의 가능성을 찾지 못했는데, 당시에 그가 쓴 글들에 탈식민적 의지가 퇴색해 있음은 이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대국에서 그는 조선이 소국임을 절감했다. 조선을 벗어나고자 북방으로 갔으나 그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조선인임도 통감했다. 1915년 이후 2차 동경유학에서는 일본근대문명이 세계적 수준임을 깨달았고, 진화론적 세계관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에 침윤되었다. 1918년 해외체류를 마치고 귀국할 무렵, 『무정』의 성공에 고무된 그는 『우리의 이상』에서 조선사회의 개혁방향을 국가 단위의 문명화에서 지역 단위의 문화론으로 전회한다. 이는 그가 2차 유학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과 오카 아사지로의 진화론적 세계인식을 익혔으나, 1910년대 실제 북방으로의 방랑과 해외체류 등에서 국가 간 ‘약육강식’의 현장을 목도하는 중에,‘약육강식’의 세계정세 속에서 ‘독립’을 말할 수 없는 ‘약자’인 조선은,‘문화’를 통한 ‘민족의 보존’에 매진함으로써, 진화론의 한 원칙인 ‘적자생존’의 논리에서 ‘적자’로서 생존을 보장받는 것이 끝내 미래의 어느 날 국권을 회복할 가능성을 말살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길임을 직감한 때문으로 보인다. 진화론적 세계관에 비추어 보아도, 민족의 ‘생존’은 ‘독립’의 전제일 뿐 아니라, ‘독립’ 자체보다 중요한 ‘목적’임을 그는 해외체험에서 통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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