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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Journal of Humanites


  • - 주제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3021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73권 3호 (2016)
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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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진의 기원과 관련해 최근 중요한 자료로 떠오른 「계년」 제3장의 기록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함으로써, 진의 ‘동래설’을 논박하고자했다. 진의 ‘동래설’은 이미 서주시기에 농서 지역에 중원문화의 영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 고고학적 근거를 마련하고, 『사기』 「진본기」에서 진의 조상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또 동일한 영성에 속하는 많은 씨족이 동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계년」에 나오는 상엄지민을 ‘진의 선인’으로 읽어 이들이 진의 기원이라고 이해해왔다. 그러나 첫째, 진의 옛 땅인 농서 지역의 지리 환경을 보면, 농산에 의해 중원과 지리적으로 격절되어 있었으며, 이는 고고학적으로도 쉽게 확인된다. 둘째, 『사기』 「진본기」 중 진의 분봉 이전 기록은 기본적으로는 주로부터 분봉을 받은 진의 제후를 기준으로 그 직계 조상이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느냐라는 관심에서 기술하되, 계보를 따라가는중간에 방계 조상 중 ‘중국’과의 관계가 확인되면 이들을 추가 기재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본기」의 내용은 마치 진의 조상이‘중국’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셋째, 『사기』 「진본기」와 「계년」은 근본적인 내용의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자료를 선택했기 때문이므로, 양자의 내용 일부를 적당하게 절충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하나가 반드시 옳다고 할수 없지만 「계년」에는 여러 기존 문헌의 기록과 명백히 다른 내용이 확인되므로, 「계년」을 그대로 신뢰해서는 곤란하다. 「계년」 기록 자체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계년」의 상엄지민은 비렴의 종족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주가 상엄씨를 멸망시킨 이후 종족 분산 정책에의해 그 곳의 사람들을 주의 다른 지역으로 천사했을 뿐이다. 따라서 상엄지민은 진 분봉 이전에 미리 천사되어 살고 있었던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데 기존의 독법처럼 상엄지민을 뒤편의 ‘진선인’과 붙여 읽게되면, ‘진선인’은 단지 ‘진에 먼저 거주하고 있던 자들’ 즉 진 일반인의조상 중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필자는 상엄지민과 ‘진선인’을 떼어 읽는 새로운 독법을 제안한다. 그러면 ‘진선인’을 진 제후의 조상이라는 정상적 용법으로 읽을 수 있으며, 주의 천사 정책이라는 수동적 방법이 아니라 진이 주체적으로 주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진이 춘추시대에 강대해졌다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계년」의 서사 목적이기도 하다.

전국진(戰國秦)의 국가형성(國家形成)과 군현제(郡縣制)

藤田勝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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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초기 진문화(秦文化)의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특히 전국진 (戰國秦)의 국가형성과 군현제(郡縣制)의 전개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전 국진에서의 상앙변법(商?變法) 실시는 진의 군현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는데, 그 전개를 보여주는 자료가 (1) 사천성 청수현 진묘(四川省 靑 川縣 秦墓)에서 출토된 목독(木牘)과 (2) 감숙성 천수방마탄 진묘(甘? 省 天水放馬灘 秦墓) 출토 목판지도이다. (1) 청수현 진묘(靑川縣 秦墓) 의 목독은 무왕(武王)시대에 내사(內史)-현제(縣制)가 성립했는지는 명 확하게 알 수 없지만, 중앙에서 작성한 명령을 서방의 현(縣)에 전달하여 규정을 실시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군현제의 전개와 관련이 있다. (2) 천수방마탄 진묘(天水放馬灘 秦墓)의 목판지도는 전국말에서 진왕 정(秦王政) 8년(기원전 239년)이라는 설이 있고 지도의 범위는 서한수 (西漢水) 유역 혹은 화묘하(花廟河) 유역이라는 설로 나뉘고 있다. 이것 은 당시 주요 교통노선이었던 서한수 유역과 교통지선으로서 화묘하 유 역을 반영하고 있다. 전국말에서는 이러한 교통노선과 관소(關所), 식생 (植生)을 지도로 만들어, 영역 내를 통치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전국말의 통치방식이 동방의 점령지에서도 적용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보여주는 자료가 호남성 용산현 이야진(湖南省 龍山縣 里耶鎭)에서 출토된 이야진간(里耶秦簡)이다. 전국말에서 진제국(秦帝國)까지의 역사는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외에 이러한 출토자료와 현지조사에 의해서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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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후, 일찍이 5차례에 걸쳐 천하를 순 유(巡遊)하였다. 그중 4번은 모두 서에서 동을 향하며 새로 병합한 동방 의 각국을 순시(巡視)하였다. 유일하게 제1차 순유에서만 동에서 서쪽으 로 진나라의 구토(舊土)를 순시하였다. 2천년 전부터 학술계는 동쪽으로 의 4번의 순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으나 서행(西行)의 제1차 순유에 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이 순유의 노선과 목적은 오늘날까지도 불명확 하여 미해결 난제들을 남겨놓고 있다. 본문에서는 문헌 고증과 실지 조사를 종합하여, 진시황의 제1차 순유 의 주요목적이 고묘(告廟)와 제조(祭祖), 즉 선왕(先王)의 종묘(宗廟)에 제사 지내고 열조(列朝)와 열종(列宗)에게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함을 보고하는 것에 있었음을 논증하였다. 그 노선은 응당 진국(秦國)의 종묘 소재지를 따라 순유하는 것이었다. 우선 함양(咸陽)지역을 순행(順行)하 며 종묘에 제사를 지낸 뒤, 위하(渭河)를 따라 서쪽으로 옹현(雍縣)지역 에 이르러 그곳의 여러 선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묘(廟)에 고하였다. 뒤이 어 견하(?河)를 따라 북행(北行)하여 회중궁(回中宮)을 지나고 농산(?山)을 넘어 남하하여 농서군(?西郡)으로 진입한 뒤 서현(西縣)으로 향했다. 서현은 진나라의 첫 번째 도성으로 제1대 진공(秦公)인 양공(襄公)의 무덤과 양공묘(襄公廟), 즉 진나라의 조묘(祖廟)가 있는 곳이다. 진나라의 역사에서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곳이었다. 진시황은 서현에서 제조(祭祖)와 고묘(告廟)를 완수한 이후 계속 순행하여 농서와 북지(北地)의 산천신지(山川神祗)에 제사 지내고 마지막으로 경하(涇河)를 따라 함양으로 돌아왔다. 진시황은 제1차 순유을 마친 뒤 함양으로 돌아온 후 곧장 종묘제사를 포함한 일련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우선 제도를 바꾸어 생전에 위남(渭南)에 자신의 묘(廟, 信宮)를 세웠다. 이듬해에도 계속 제도를 바꾸어 종묘와 침전을 분리하였는데, 신궁(信宮)은 자신의 종묘로 삼아 극묘(極廟)로 개명하였으며 침전은 여산시황릉(驢山始皇陵)에 건축하고 극묘와 여산능침(驢山陵寢)의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연결하였다. 진시황이 이렇게 종묘제사제도 개혁을 시작한 것은 그가 고래(古來)의 익법(謚法)을 폐지하고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한 것과 아울러 이세원년(二世元年)의 종묘제사 개혁 등 일련의 거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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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20년대까지 백씨 집안 주력회사였던 대창무역주식회사(大昌貿易株式會社)의 설립과 경영에 주목하여 이 집안이 전통상인에서 근대 상인으로, 그리고 산업자본으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백씨 집안이 전통상인에서 몰락하지 않고 근대 상인자본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매개로 한 한상룡(韓相龍)과 한성은행(漢城銀行)이라는 배경이 작용했다. 1916년 설립한 대창무역은 그 결과물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전시호황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그러나 1920년 시작된 전후 불황은 대창무역의 이후 장기 경영난의 시작이었다. 1920년 한 해에만 12만 엔이 넘는 거액의 영업손실을 내었고, 1920년대 말에는 결국 파산하였다. 1930년을 전후하여 백씨 집안은 대창무역의 부흥을 기획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여기에는 대창무역의 주거래은행이자 장기채권자이기도 한 한성은행의 의도가 작용하였다. 한성은행은 대창무역의 부흥에 회의적이었으며, 그보다는 자회사 대창직물의 제품판매소 역할에 충실하기를 희망했다. 한성은행의 자금지원을 통해 1932년 설립되는 대창사는 한성은행의 의도가 철저하게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대창무역 시대의 종식으로 백씨 집안은 대창직물과 태창직물(泰昌織物) 경영을 주력으로 한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은 백씨 집안의 자발적 선택만은 아니었다. 자금지원을 무기로 한 한성은행의 강력한 영향력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수주 변영로의 초기 문학에 나타난 방랑과 이상적 공동체론

최호영 ( Choi Ho-young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3권 3호, 2016 pp. 147-179 ( 총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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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수주 변영로의 초기 문학에 나타나는 방랑의 모티프를 구체적으로 고찰하고 그에 따라 탐색하고자 하는 이상적 공동체의 상(像)과 의의를 해명하는데 있다. 변영로의 초기 시들을 검토해보면 일관적으로 상실한 ‘님’에 대한 지향성을 ‘방랑’과 ‘꿈’의 반복성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님’=‘조선’이 그에게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나아가 그는 ‘조선’을 ‘생명’의 근원인 ‘정신’에 위치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탐색하기 위해 상징주의나 신비주의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그는 ‘개성’을 도입하여 개인의 주체성과 조선적 특이성이 세계적 보편성으로 확장될수 있는 공동체를 구상하고자 했다. 192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변영로는 방랑을 기행의 방식으로 구체화하고 있으며 당대 문단에서 대표적인 전통적 양식으로 거론되었던 시조를 차용하여 이상적 공동체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가 특히 민족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백두산을 기행하고 이를 시조에 담아내려 한 것은 단순히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가 구상해오던 이상적 공동체의 원형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그와 영향관계에 놓인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의 역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변영로의 초기 문학을 민족주의의 이념에 환원하려는 관행에서 벗어나 거기에 얽혀있는 풍부한 의미망들을 읽어냄으로써 1920년대 초기 문학의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더욱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해방기 민족문학이라는 이념과 인민대중의 호명 - 김송의 문학 활동을 중심으로

오태영 ( Oh Tae-young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3권 3호, 2016 pp. 181-211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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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한국 근대문학은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민족문학이 되어야 했다. 당시 이념과 노선을 달리하는 다양한 정치 집단에 의해 민족 개념이 분기하고 있었고, 각종 문학단체가 결성됨에 따라 다채로운 민족문학론이 개진되었다. 하지만 이들 문학단체들의 활동은 대체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의 민족문학의 모색으로 수렴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송은 『백민』을 창간하여 우파 민족주의 담론을 형성하는 장치로 활용하는 한편, 그곳에서의 창작활동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지향점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의 문학 활동은 해방기 계몽의 대상으로 상정된 인민대중이 세대, 계층, 지역, 젠더 등에 의해 분화되어 있었음에도 그들을 민족국가 건설의 주체로 호명하면서 단일하고 통합된 존재로 회수하는 당시의 정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때 호명은 인민대중을 교양하거나 성장시켜 민족적 주체로 갱신하는방식을 취하였고, 문학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이 민족국가건설에 조응해 새로운 자기를 주조하는 성장의 내러티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성장의 내러티브는 내적 자기 완결성을 갖추지 못했고, 이를 통해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당시 인민대중의 성장 불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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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영화 <명량>의 괄목할 만한 흥행 성적이 한국 사회가 봉착했던 위기 상황인 세월호 참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명량>의 인기는 한국 사회의 위기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방어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라는 가설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살펴본다. 본 연구는 문화기억과 미디어의 관계에 대한 이론들을 참조하는데, 특히 마리타 스터큰(Marita Sturken)이 제시한 “은폐기억”에 대한 이론을 차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명량>의 영상이 세월호 참사로 인한 한국 사회의 문화적 상흔을 봉합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는 세월호 참사 보도 서사와 영상 전략의 특징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에 대한 문화기억이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가를 살펴본다. 분석에서 보여지듯 세월호 참사 보도는 한국 사회 시스템들의 총체적 부실과 부패, 국가위기관리시스템부재 상황을 비판한다. 또한 이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의 정서를 멜로드라마적 서사와 검푸른 바다의 영상을 통해 전달한다. 다음 단계로서 본 연구는 영화 <명량>의 영상 전략을 분석하며, 특히 이 영화 내 이순신 서사의 특이성, 가령 생략된 서사로서의 역사와 과장된 스펙터클에 주목한다. 이러한 <명량>의 서사와 영상은 실제 세월호 사고 영상과 많은 유사성을 띠며, 이를 통해 사고에 대한 한국 사회내 집단기억 변형을 용이하게 한다. 이렇게 볼 때 <명량>은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국가위기 상황에 처한 이순신이 해상의 전투에서 투쟁하고 승리하는 장면을 확인함으로써 참사 이후 한국 사회 내 팽패해 있던 슬픔과 죄의식을 ‘상상적으로나마’ 치유해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본 연구는 영화 <명량>이 세월호 참사로 인한 한국 사회 내 트라우마를 은폐하고 봉합하는 문화스크린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고찰한다. 또한 본 연구의 성과는 기존의 문화기억 연구에서 상세히 다뤄지지 않았던 블록버스터 장르의 스펙터클이 역사 재현과 문화 환타지 형성에 작동하는 방식을 논의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청대 문인화관의 쇄신 -옹방강(翁方綱)을 중심으로-

정혜린 ( Jung Herin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3권 3호, 2016 pp. 247-282 ( 총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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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청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인 옹방강(翁方綱)의 시문집을 통해 청대 회화 비평의 인식론적 기준과 비평의 실제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옹방강은 경학과 문학뿐 아니라 회화에 관해서도 방대한정보와 경험을 갖추었고, 이를 바탕으로 동기창의 남북종론이 직업화가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비판의 흐름에 동참하였다. 그는 회화 비평에서 문인화의 조건으로 화가의 직업과 계층을 배격하고 오직 문기(文氣)[혹은 신운(神韻)]와 서예 필획의 차용을 엄격히 적용했다. 나아가 그는 사왕 중 왕휘를 남종화와 북종화를 종합한 인물로 칭송하여 ‘남종문인화를 계승한 사왕’이라는 개념에도 균열을 내었고, 사왕에 의해 비판받은 금릉의 화가들, 지두화가, 양주팔괴를 격려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옹방강은 당시 화단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문인화관을 주변의 많은 화가와 감상ㆍ수장가들에게 피력함으로써, 동시대 문화를 반성하고 이끌어가는 지식인의 소임을 실천하는 비평가의 의미심장한 사례가 될 것이다.

메리 퀀트: ‘스윙잉 식스티즈’를 정의한 패션 디자이너

최지안 ( Choe Jian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3권 3호, 2016 pp. 283-303 ( 총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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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퀀트는 1960년대의 핵심적인 패션 디자이너로서 미니스커트를 비롯한 그녀의 복식 디자인은 ‘창의와 실험’이라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패션사에 한 획을 그었다. 전환기의 디자이너로서 그녀는 스트리트 패션을 혁신했으며, 상류사회 지향적인 파리 쿠튀르 컬렉션과 첨예한 대조를 이루는 대중적인 ‘퀀트 룩’을 창안했다. 동시대 런던에서 활동했던 젊고 도전적인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련의 독창적 스타일을 선보임으로써 그녀는 전통적인 영국 패션의 격식 및 보수적인 부르주아 복장규범을 전복하고자 했다. 퀀트가 길을 연 새로운 복식 문화는 패셔너블한 드레스의 유행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60년대 영국의 특수한 이념적 물질적 토대 위에서 구상되고 실행된 것으로서, 젠더, 계급, 근대성등 그 시대의 중심적 관심사를 복식의 언어를 통해 진술한다. 환언하면, 퀀트 룩은 전후(戰後) 유럽의 경제 재건과 소비주의의 도래라는 사회경제적 조건 하에서 배태되었다. 그것은 또한 ‘뉴웨이브’로 대변되는 60년대 유럽의 반체제 정서 및 진보적인 정신적 조류 안에서 형성된 것으로, 기성 제도권 문화의 엘리트주의에 반기를 든 당대의 전위적 대항문화 및 청년 하위문화의 부상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메리 퀀트 스타일은 단순히 이채로운 의장(意匠)이나 형식미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패션을 둘러싼 복합적인 역학관계 - 개인적 정체성, 사회규범, 그리고 의복간의 - 에 대한 표지(標識)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고는 퀀트 룩의 의의를 복장의 양식사라는 제한적인 범주를 넘어 60년대런던의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찰하며, 특히 그녀의 복식 혁명이 당대의핵심 이슈들인 청년문화, 페미니즘, 상업주의와 관계 맺는 양상들을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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