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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Journal of Humanites


  • - 주제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3021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74권 3호 (2017)

『만문원당(滿文原?)』에서 『만문로당(滿文老?)』으로의 내용 변개에 관한 연구

김주원 ( Kim Juwon ) , 이형미 ( Lee Hyoung M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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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청나라 초기의 역사 기록에 대해서 그 변개 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원자료인 만문원당과 그것을 바탕으로 중초한 만문노당을 대상으로 개수의 흔적을 관찰하여 그 변개의 과정을 살피고 각 기록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개수가 만문원당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이는 흔적이 만문원당 기록에 남아 있으며, 이 개수의 결과는 대부분 만문노당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가끔 만문원당에는 같은 내용의 기록이 두 번 나타나는 이른바 중복 기사가 나타나는데, 본고에서는 이러한 중복 기사를 특히 집중적으로 관찰하였다. 중복 기사의 경우에는 한쪽 기사에 개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다른 쪽 기사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으며, 이 경우 원당에서 노당으로의 내용 변개가 두 번 이상의 개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개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단일 기사의 경우] 만문원당 ― 변개 → 만문노당 [중복 기사의 경우] 만문원당 ― 변개 → 만문원당 ― 변개 → 만문노당 이와 별개로 단일 기사이든 중복 기사이든 상관이 없이 만문노당에 기록할 때 변개한 것도 있는데, 최종 원고를 중초하되 수정 표시가 없는 부분에 대한 변개가 간혹 보이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한편, 드물게 위의 일반적인 경우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독특한 경우도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列字?과 冬字?의 중복 기사 및 중초 작업에 대한 지시문을 살펴보면, 列字?이 처음 써진 것이고 冬字?이 그것을 수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문노당의 기사는 冬字?이 아닌 列字?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위에서 보인 중복 기사의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다음과 같은 변개의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중복 기사의 경우] 만문원당 ― 변개 → 만문원당└→ 만문노당 이 연구는 기초적 연구에 불과하며 청나라 초기의 역사 기록들 사이에 이루어진 개수의 과정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를 정밀하고도 체계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만주어 복합문의 대격 주어 현상 연구

도정업 ( Do Jeong Up )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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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만주어 복합문에서 나타나는 대격 주어 현상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통하여 대격 주어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다. 대격 주어 현상은 만주어 복합문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특히 인용문에서는 매우 생산적으로 쓰이고 있다. 대격 주어는 상위문의 주어와 하위문의 주어가 다른 경우에 의미상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하위문의 주어에서 나타나며, 상위문의 주어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에는 수의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be가 문장 내에서 주어와 다른 요소를 구분하여 주는 역할을 한다는 특성과 만주어의 타동문에서 목적어가 한정되거나 문장에서 유표적인 위치에 있지 않는 한 수의적으로 나타난다는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만주어 문법서에서 기술한 -ra와 -ha의 의미 ― 시제(時制)인가 양상(樣相)인가

박상철 ( Park Sangchul )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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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만주어의 시상 어미 가운데 특히 비종결형에서 정연한 대립관계를 보이는 -ha와 -ra가 Comrie (1976, 1985) 등의 일반언어학 이론에서 정립된 시상 범주 가운데 어떤 위치에 속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초기 만주어 문법서에서 만주어의 시상(時相) 어미들은 전통적인 `과거/현재/미래`의 시제 대립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는데, Avrorin (1949) 이후 이들을 양상(樣相) 대립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생겨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Avrorin (1949) 이후의 소위 `완결된` 상황을 가리키는 -ha와 `완결되지 않은` 상황을 가리키는 -ra의 양상 대립은 Comrie (1976)에서 정립된 완망상(perfective)과 비완망상(imperfective)의 대립과는 차이가 있으며, 상대 시제적인 관점에서 과거와 비과거의 시제 대립으로 볼 수 있다.
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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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보이는 2열의 초석 배치는 어느덧 `둔산식주거지`의 표지적 특징 중 하나로 인식되어, 가락동유형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돌대문토기가 출토된 주거지에서 2열 초석이 확인되는 사례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서, 2열 초석 주거지에 관한 실증적 검토와 그 계통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점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2열 초석은 물론, 2열 주공이 확인된 `2열 기둥 주거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살펴보았다. 분석의 공간적 범위를 영서지역으로 한정시킨 것은 이 지역에서 非가락동계열의 2열 기둥 주거지들이 가장 높은 빈도로 확인되기 때문이며, 또한 2열 기둥배치를 포함해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문화요소들이 역동적으로 어우러진 곳이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이루어진 분석의 결과, 화천, 홍천, 정선, 영월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장방형에 중심공간과 측면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위석식노지를 사용하며 바닥에 초석을 설치한 주거지`가 영서지역 2열기둥 주거지 전통의 초기 모습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이러한 `원형`에서 변화된 다양한 2열 기둥 주거지 전통들이 춘천과 평창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치를 통해 이러한 2열 기둥 주거지의 원형은 이미 기원전 1800~1700년경에 홍천 지역에 등장했으며, 기원전 1400년 이후로 지역적 특색을 보이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른 형태의 2열 기둥주거지들에서는 돌대문토기 및 이중구연토기가 출토되는 반면, 공열토기는 대체로 늦은 형태의 2열 기둥 주거지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2열 기둥 주거지의 원형은 압록강 중·상류유역의 2열 기둥 주거지와 유사하고, 늦은 형태의 2열 기둥 주거지는 동북한지역의 2열 기둥 주거지와 유사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만주와 백두산 탐사

배성준 ( Bae Sungjoon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4권 3호, 2017 pp. 159-194 ( 총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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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세기 후반 왕립지리학회 기관지에 실린 7편의 여행기를 통하여 만주 및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들 여행기는 만주의 지형과 지리에 대한 세밀한 관찰 및 측정을 동반하고 현지에서의 견문에 기반하였으며, 유럽적 지식에 의한 토착적 지식의 전유를 통하여 만주의 풍경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여행이 가능하였던 기초는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수행하는 국가기구의 네트워크와 현지의 시설, 그리고 현지인의 실질적인 조력이었다. 19세기 들어 유럽에서 만주 지역 명칭인 `Mantchourie`가 등장하고, 이를 영역한 `Manchuria`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830년대부터 중국 본토와 구별되면서 동삼성을 포괄하는 만주 영역에 대한 인식이 등장하였다. 처음에는 퉁구스족을 기원으로 하는 만주족의 거주지이고 군사정권에 의하여 통치된다는 점에서 중국 본토와 구별되었으며, 만주 민족과 만주 역사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독자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심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백두산도 새로운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유럽인에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소시민문학론과 `근대화`

황정아 ( Hwang Jung-a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4권 3호, 2017 pp. 195-221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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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60년대 말 한국 문학담론에서 벌어진 시민-소시민 논쟁의 한 축인 소시민문학론을 상세히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둔다. 소시민문학론이 여러모로 독특한 소시민 개념을 제출함으로써 실제로 하려고 했던 바는 일종의 근대화 기획으로 요약될 수 있다. 소시민문학론은`시민` 대신 `소시민`을 근대적 주체로 내세우면서 풍속 혹은 인습으로 집약되는 전(前)근대성과의 단절로서 근대화를 강조한 반면, 반(反)근대 혹은 근대성 비판이라는 측면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소시민 문학론이 소시민-개인-자기의식-개성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공간은 관습적 모더니즘의 `내면으로의 선회`(inward turn)에 조응하면서도 특히 비대하게 부풀려져 있어서 현실은 그 대립항으로 설정되지도 못한 채그속에 흡수된다. 소시민문학론의 또 다른 요소인 트리비얼리즘론 역시 정치나 역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사소한 것들을 강조했으며 이는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다. 내면과 문학의 압도적 자율성을 담보로 모더니즘의 지표를 달성하는 것이 소시민문학론이 작동시킨 문학에서의 압축적 근대화였던 셈이다. 소시민문학론이 지향한 근대화에 주목하는 것은 한국의 문학담론을 오래도록 지배해온 모더니즘의 영향을 새삼 확인하는 동시에 그와 같은 모더니즘적 근대화 기획이 하나의 이념적 태도일 뿐임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특정한 이념적 산물로서의 소시민문학론이 야기한 주된 문제점은 근대화를 꾀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근대적 현실과의 발본적인 대결을 통해 근대 자체를 역사화하고 비판할 지평을 폐쇄한 데 있다.

오경과 육경 ― 악경(樂經)의 위상과 관련하여

최진묵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4권 3호, 2017 pp. 223-254 ( 총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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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대 중국에서 5경과 6경의 기록이 병존하는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의미를 찾는 동시에, 5경에 자주 포함되지 못했던 악경의 존재여부와 그 형태 등에 일단의 추론을 전개한 글이다. 모든 사물을 5로만 분류하는 오행설이 당시의 주도적인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전통적으로 육예(六藝) 내지는 육경(六經)의 형태로 전승되어 온 고대인들의 지적 학문적 체계는 5경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오경의 성립은 학문과 지식에 국가주도의 권위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고 사상과 사유체계의 표준화와 규범화를 의미하였다. 오행설의 유행과 정착으로 고대사회는 급속하게 숫자 5를 기준으로 하는 사회체제를 구축되었던 것이다. 특히 오경의 존중은 도덕과 예의를 뛰어넘어 법률과 정치에까지 경전의 권위를 확산시켜 사회 모든 방면에 걸쳐 경전을 현실사회에 적용하게 하였다. 오경에 대한 독서, 해석, 신앙으로 창의적인 어떤 다른 의미나 가치의 추구 등은 차단되었고, 우주와 자연 및 사회에 대한 이해도 오경의 범주에서만 가능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권위나 제도와는 별도로 민간사회에서는 여전히 6경이 전통이 남아있었고, 5와 6의 병칭현상 및 악을 제외한 오경설이나 춘추를 제외한 오경설등 오경의 선택에 대한 다양한 이설들이 존재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무제 이후의 경전의 오경화는 정치와 행정을 넘어 철저하고 완벽하게 시행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6경에는 포함되지만 5경에는 제외되었던 악경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에서 가능한 모든 논리적 추론을 진행하였고, 더 이상의 추론이 가능하지도 않다. 따라서 필자가 별도로 연구할 여지도 없기 때문에, 필자는 악경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진대의 분서과정에서 소실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필자는 예악붕괴의 시대상황 속에 점차 소실된 것으로 보는 추론에 동의하였다. 악경은 다른 경전에 비해 기록화나 보존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산일되었고, 오경화의 과정에서 일단 누락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악이 오경에 포함되지 못함으로 박사관 등으로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지 못하면서 더욱 더 전승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고, 기존에 존재하던 다양한 악의 자료들도 여러 다른 서책에 흩어져 산발적으로 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래 발견된 청화간 등의 자료는 악경이 선진시기 이미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였고, 음악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방식에 관한 다양한 방식의 표현법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상대적 객관성` 구조와 `동양` 표상의 곤란성 ― 쓰다 소키치, 오카와 슈메이, 미노다 무네키의 착종

정의 ( Zheng Yi ) , 전성곤 ( Jun Sung-kon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4권 3호, 2017 pp. 255-294 ( 총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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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미노다 무네키(蓑田胸喜). 이들은 내적으로 차이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외현적으로는 동일한 근대 일본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은 동양이나 서구라는 `외래사상`을 통해 자국의 `내부 사상`을 완성하려고 한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 외래 사상을 내부 사상으로 변용시키기는 과정에서 이들 사상을 관통한 중요 개념은 `주체`와 `역사`였다. 쓰다 소키치는, 과거의 역사란 `역사를 기술하는 개인의 현재적 인식`에 의해 재현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쓰다 소키치는, 개인의 인식 그 자체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왔는지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반면, 오카와 슈메이는 역사에 나타난 사건들 속에서 현재에 필요한 논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역사라고 보았다. 그러나 미노다 무네키는 개인의 인식이란 객관성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과거에 고유하게 존재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현재 깨닫는 것이 역사라고 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 명의 논리는 갈라섰다. 그렇기 때문에, 쓰다 소키치는 동양 개념의 부정을 통해, 선험적으로 내면화 된 인식 즉 비(非)주체적으로 내면화 해 온 역사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양을 부정하는 이유는, 중국과 인도로부터 일본을 분리해 내고, 일본이 가진 특수성과 보편성을 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오카와 슈메이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이질성을 강조한 후, 동양문화의 완성체인 일본문화가 근대에 서양도 통섭하면서 보편문화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미노다 무네키는 외부와의 문화 교류에 의해 자국 문화가 소멸 아니면 보존으로 갈라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후자 쪽인 문화 보존을 중시하는 논리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미노다 무네키는 일본이 동양문화들과 교류하면서도 고대로부터 잃지 않았던 일본의 고유적인 것을 재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세 층위의 이론들은 내적 방법론에 차이점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중심=동양론`이라는 내부적 자국중심주의 교리를 동일하게 표면화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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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우사마 이븐 문끼드의 회고록인 『성찰의 서』에서 프랑크인들에 관련된 일화들을 분석함으로써, 작가가 십자군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고 때로 그들과 교류하면서 직접 목격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들은것, 그가 인지한 것을 살펴보았다.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사마가 회고록에서 프랑크족 문제를 중시해 기록했음은 대(對)십자군 관계가 당대 무슬림들에게 중대한 사안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이슬람 영토의 침략자들인 프랑크족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전함으로써 향후 무슬림들이 프랑크족에 대처하고 현실을 타개하는데 도움을 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적 진영인 프랑크족에 대한 우사마의 분노와 증오는 몇몇 일화에서 프랑크족에 대한 신의 저주와 징벌을 기원하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적개심과 반감이 『성찰의 서』에서 우사마의 유일한 對십자군 감정이나 입장은 아니며, 일부 일화들은 그를 포함한 일부 무슬림들이 프랑크인들과 친분이 있거나, 개인적 교류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점은 십자군과 무슬림들 양 진영 간의 갈등에 치중했던 기존 연구의 틀을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셋째, 우사마는 프랑크족의 문명 수준에 대해 대체로 경멸과 비하의 태도를 갖고 있다. 그가 보는 프랑크족은 전쟁 수행 같은 물리적 활동에 능한 반면, 세련되고 지적인 문명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때로 우사마는 프랑크족의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이해가 부재한 상태에서 자신의 시각에서 판단하는 경우가 있음이 발견된다. 넷째, 우사마는 대체로 프랑크인들을 열등한 족속으로 여기지만, 두부류의 프랑크인에 대해서는 예외로 둔다. 그중 하나는 십자군 기사로, 우사마는 그들에 대해서 존경과 관심을 보이며, 일부 기사들과 돈독한 우의를 유지하고 있음이 관찰된다. 두 번째 부류는, 오래전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이슬람 지역에 정착해 살게 되면서 이슬람 문화와 관습에 익숙해진 프랑크인들로, 우사마는 이들을 교분을 나눌만한 자들로 여긴다.

온건하지 않거나 의도주의가 아니거나 ― 온건한 의도주의 비판

이해완 ( Lee Haewan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4권 3호, 2017 pp. 329-364 ( 총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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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해석에서 작가의 의도가 하는 역할을 중시하는 입장을 의도 주의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의도주의는 `온건한 의도주의`로 진화하면서 극단적 의도주의가 가졌던 불합리함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절충에 의구심을 표한다. 먼저 의도주의와 반의도주의 간의 쟁점이 분명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반의도주의는 해석을 위해 의도를 고려할 필요 없다는 입장, 의도주의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으로 구별하는 것은 오도적일 수 있다. 대신 양자는 의도가 의미를 결정하는 경우를 허용하는 의도주의와 그래야 하는 경우가 없음을 주장하는 반의도주의로 구별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어 의도주의가 온건화 전략을 수행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가 검토된다. 온건한 의도주의는 온건함을 위한 동기와 원칙은 천명하였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절충적 이론의 형태로 수립될 수 있는지, 또한 그 결과가 정합적인 이론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는 상대적으로 간과해 온 듯하다. 결과적으로, 아무 의도나 의미를 결정할 수 없고, 성공한 의도, 곧 공적 요소와 부합하는 의도만 의미를 결정할 수있게 하려는 온건한 의도주의 동기는 자신의 이론에서 의도주의적 성격을 극도로 약화시킨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온건한 의도주의는 공적인 요소들만으로는 의미 결정이 어려운 경우에는 의도가 의미를 결정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애매한 경우`란 결국 의도와 공적인 요소들이 부합하지 않는 경우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 의도가 의미를 결정하게 한다면 이 주장은 공적인 요소를 존중하겠다는 이론의 온건한 측면을 상실한다. 나아가, 온건한 의도주의의 온건하고자 하는 동기는 `의도가 의미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사례`로 간주되어왔던 반어적 표현을 더 이상 자신을 옹호하는 사례로 사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결국 온건한 의도주의는 온건하고자 하는 동기와 의도주의에 머물고자 하는 동기가 한 이론 안에서 서로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이어서, 반의도주의 와 거의 유사한 이론으로 귀결되거나 아니면 극단적 의도주의의 문제를 그저 무원칙적으로나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이 될 것 같다는 것이 이 글이 논증하려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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