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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Journal of Humanites


  • - 주제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3021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75권 1호 (2018)

해방 이후~1970년대 초반 한국사 개설서의 ‘근대’ 규정 및 시대구분의 변화

류기현 ( Ryu Keehyun )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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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출판된 한국사 개설서·통사에서 ‘근대’라는 역사적 시대를 규정·구획하는 양상을 통시적으로 탐구한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19세기 중·후반을 기점으로 하고 1945년 해방을 종점으로 잡는 근대라는 시대 규정은 근대 역사학 도입 이래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 연구의 전개과정, 한국의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따른 구성물이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개설서에는 ‘근대’가 부재했다. 이 시기의 개설서들은 주로 정체론적 관점에서 한국사를 서술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나온 개설서들은 처음으로 ‘근대’ 및 ‘근대화’라는 개념을 동원해 조선후기-개항기의 역사를 서술했다. 해방 직후 개설서의 정체론적 서사가 부분적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이 시기의 개설서들은 갑오개혁을 비롯한 몇 가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한국의 근대 기점으로 제시하면서 발전과 변화라는 시각에서 한국사를 파악하고자 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에 나온 개설서는 조선 후기-개항기에 이르는 시대의 사회경제적 역동성을 강조하고 이 시기의 한국 사회가 자생적 근대화를 이룩할 맹아를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는 근대화 담론의 전 사회적 확산 및 내재적발전론에 입각한 연구성과들이 축적된 것을 배경으로 한다. 60년대 중반 이후 개설서들은 한국이 근대 전환기에 단순히 수동적 존재가 아닌 적극적으로 근대에 대응하는 존재였음을 보이고자 했다.

근현대 한국 통사(通史)에 나타난 전근대 피지배층 저항 서술의 변화

최혜린 ( Choi Hyerin )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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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통사가 갖는 근대 프로젝트적, 계몽적 성격에 주목하여 각 시대 주요 통사들에 나타난 전근대 피지배층 저항 관련 서술을 개항기, 일제시기, 해방~6·25전쟁기, 1950~60년대, 1970~80년대의 5개 시기로 나누어 고찰했다. 이를 위해 현채의 『동국사략』(1906), 황의돈의 『신편 조선역사』(1923),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 이청원의 『조선역사독본』(1937), 이병도의 『조선사대관』(1948), 전석담의 『조선사교정』(1948), 손진태의 『국사대요』(1949), 이기백의 『국사신론』(1961), 이기백의 『한국사신론』(1967, 1976), 한국민중사연구회의 『한국민중사』(1986)를 검토했다. 일제시기는 통사에서 전근대 피지배층 저항에 최초로 적극적 의미 부여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 근대 국가 모색 과정에서 나타난 자유주의적 서술과 사회주의적 서술은 해방 이후 출간된 통사들에서도 계승되고 변용되며 피지배층 저항 서술의 주요한 양대 서술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6·25 전쟁 이후 공고화된 남북 역사학계의 분단으로 사회경제사학이 남한에서 자취를 감추며 피지배층 저항에 대한 공식적인 사회주의적 서술 또한 사라졌으나, 식민사관 극복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 문제의식 속에 사회경제사학의 요소들이 일정 부분 변용되어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분단 극복을 위한 ‘민중’ 중심 역사를 표방한 『한국민중사』에서 사회주의적 서술은 ‘민중’ 중심 역사 서술을 위해 재등장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민중사』의 피지배층 저항 서술은 한국사학사상 최대의 근대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근현대 한국 통사서에서의 ‘빈곤’ 인식 ― 전근대사 서술을 중심으로

임다은 ( Lim Da-eun )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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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로서 ‘빈곤’은 근대사회에서 발견된 담론적 구성물이다.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통치방식의 변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정치이데올로기의 발달은 ‘빈곤’을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제기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에 따라 역사서술에서는 과거의 ‘빈곤’에 대한 인식과 재현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며, 통사서의 발간은 이러한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개항기 이후 한국에서도 근대적 형식과 내용을 갖춘 통사서가 발간되지만, 전근대 사서들을 주된 사료로 활용하면서 ‘빈곤’에 대한 유교적 인식은 상당 기간 통사서에 반영된다. 그러한 가운데 ‘빈곤’ 인식의 근대적 지평을 연 첫 계기는 유물사학으로, 백남운은 사회구조적 문제로서 계급의 발생을 빈곤의 근본 원인으로 제기하고, 사회구성체의 이행을 통한 대중적 빈곤의 해소를 전망하며 빈곤 문제를 적극적으로 통사서에 가져왔다. 그러나 해방·분단을 거치며 남한에서는 유물사학의 관점은 단절되었고, 이기백에 의해 전근대 시기의 사회제도인 신분제와 부세제로부터 비롯된 문제로서 ‘빈곤’을 인식하는 관점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빈곤’은 교육, 직업, 지식, 경제활동 등과 함께 종합적으로 사회적 신분을 구성하는 표지로 인식된다. 한편,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며 ‘빈곤’과 사회발전을 상충된 것으로 인식하고, 조선 후기 빈곤의 심화가 조선의 자주적 근대이행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서사가 일반화된다. 1960년대 내재적 발전론에 바탕을 둔 연구경향은 이러한 관점을 비판하며 서술의 초점을 ‘빈곤’에서 ‘분화’와 ‘발전’으로 옮김으로써 빈곤 서술을 축소한다. 1980년대 이후 민중사학은 일제 식민지기 유물사학의 계승을 표방하고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형성된 역사적 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이들은 빈곤의 원인으로 계급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회제도의 문제로서의 빈곤 인식을 비판하면서도, 계급에 대한 사회제도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함으로써 학계에 축적된 구체적인 연구성과들을 끌어안는다. 또한 조선 후기의 ‘대중적 빈곤’을 역사주체로서 ‘민중’이 형성되는 객관적 조건으로 제시하여 발전서사 속에 ‘빈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9,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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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계량적이고 거시적 접근을 통하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역사인식을 살펴보았다. 역사인식을 나타내는 용어 16개를 선정하여 이 용어들의 빈도 양상과 이 용어가 중심이 된 연결망의 구조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전근대사 서술과 근현대사 서술 사이에는 사용되는 용어의 종류와 빈도의 분포 등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연결망 구조를 볼 때 제5차와 제6차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제3기에 이르러 ‘민족’, ‘독립’, ‘운동’, ‘전개’를 핵심으로 하는 연결망이 근대사회 운동의 맥락에서 ‘사회’ 및 ‘농민’과 접속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연결 관계를 ‘내재적 발전’에 근거를 둔 역사인식의 핵심 구조로 판단 했다. 결국, 교과서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역사인식은 제3차 교육과정에서 등장하여 제5차 교육과정에서 확고하게 정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역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혁명’ 서사의 변화

윤현상 ( Yoon Hyun Sang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5권 1호, 2018 pp. 177-218 ( 총 42 pages)
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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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교과서에서 ‘혁명’은 서사의 형태로 정권의 지향을 보여주는 한 수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초반에 동학 - 4·19 - 5·16로 이어지는 ‘혁명’의 서사를 구축하여 5·16을 ‘민주 혁명’의 완결점으로 구성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유신 이후로는 이러한 ‘민주혁명’의 서사를 내세울 수 없었고, 신진사대부 혁명파 - 동학 - 5·16로 이어지는 ‘군인 혁명’의 서사를 통하여 정당성을 구축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혁명’을 자신의 서사로 사용할 수 없었고, 이에 동학이 혁명에서 탈락한 채 교과서에서 혁명의 서사는 점차 흐려졌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처음으로 4·19가 교과서에서 유일한 ‘혁명’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민주화의 완성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지만, 정권의 정통성을 ‘혁명’이라는 사건을 통해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전 정권의 시도와 일맥상통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한편 제7차 교육과정부터는 여러 세계사 속의 혁명과, 사회주의 용어로의 혁명이 교과서에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4·19 또한 ‘미완의 혁명’으로 정의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혁명’의 등장은, 혁명 자체가 가지는 서사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제2차 교육과정 교과서부터 이어진 혁명의 서사는 이렇게 상실되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혁명’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서사를 넘어 세계사적인 ‘혁명’의 정의에 다가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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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전환기 조선에서 발생한 유신 개념의 정치화에 대해 탐구한 것이다. 고종, 순종 시기 『승정원일기』의 유신 복합어를 추출하여 유신 복합어의 추세와 구조, 그리고 다양한 어휘 현상에 대한 역사적 독해를 추구하였다. 유교 경서에서 유래하는 고전적인 유신 개념, 그리고 조선 왕정의 수행에 따른 관례적인 유신 개념, 그리고 조선의 정치변동에 따른 근대적인 유신 개념을 분별하였다. 고전적인 유신 개념과 관례적인 유신 개념에서 근대적인 유신 개념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유신 개념의 정치화라는 맥락에서 접근하였다. 종국적으로 유신과 문명의 구도에서 추구된 문명화로서의 유신이라는 새로운 용법의 출현을 유신 개념의 근대적 변모로 평가하였다.

김유정 소설의 폭력의 기억과 서사적 재현

천춘화 ( Qian Chunhua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5권 1호, 2018 pp. 271-296 ( 총 26 pages)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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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문학에서 폭력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모티프 중의 하나이다. 폭력의 양상은 여러 가지 변이된 모습으로 반복적으로 서사화 되고 있으며, 폭력에 대한 무감각은 독자들을 아연하게 하기도 한다. 이는 해학과 유머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김유정과는 사뭇 대조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김유정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그에게 있어서 가정폭력은 하나의 트라우마였음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도 그에게는 ‘말 더듬’과 ‘우울증’, ‘대인기피증’을 비롯한 여러 신경증적 후유증이 남아있었고, 이는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인식에서 출발하여 김유정의 문학을 트라우마 기억과 관련된 특징들에 기대어 살펴보았다. 결과 그의 문학의 도처에 산재해 있는 폭력의 양상들은 그의 트라우마의 변형된 재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의 문학은 외상의 흔적을 텍스트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였다. 이런 의미에서 김유정의 글쓰기는 본인이 고백했던 바와 같이 치유의 한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문학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서적 고통 위에 세워진 상처의 보루였다는 사실이었다.

‘소설’의 임계 ― ‘장편소설(掌篇小說)’이라는 관념과 양식적 규정이라는 문제

송민호 ( Song Minho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5권 1호, 2018 pp. 297-326 ( 총 30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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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장편소설(掌篇小說)’로 명명되어온 단형의 서사물에 대한 장르적 관념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1장 정도의 분량으로 된 짧은 서사물에 대한 창작이 이 시기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기원을 찾는다면 물론, 문자문화 정착기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며, 가까이는 개화기 언론에 등장했던 수많은 단형서사들의 예를 보더라도 마찬가지 ‘장편소설’이라 명명될 만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기원이란 이러한 단형의 서사들이 ‘장편소설’ 혹은 ‘엽편소설’이라는 명명을 통해 소설사 내부로 편입되는 계기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장편소설’이라는 양식과 관념은 소설의 임계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조선일보』에서 1929년 3월 1일부터 31일까지 거의 매일 문단의 좌우 17명 정도의 작가가 참여하여 연속 연재했던 ‘장편소설’들을 식민지 조선에서 최초로 ‘장편소설’이 등장한 계기로 파악하고 있다. 이 기획은 그해 2월 말 조선일보사가 열었던 제1회 문인좌담회와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등장했던 ‘장편소설’이라는 관념은 당연히 일본 내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이 양식에 관심을 갖고 있던 문학가들의 그것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장편소설’을 시에서의 ‘하이쿠’와 함께, 가장 일본적인 소설 양식으로 규정하면서, 이 양식을 소설사 내부로 안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문제는 이 ‘장편소설’의 기획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이 당시 문단의 좌우 경향을 망라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최독견’으로 대표되는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하는 대중문학계와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으로 대표되는 카프의 문학적 경향은 이 ‘장편소설’이라는 독특한 소설 양식을 두고 미묘한 배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카프 내에서도 이 ‘장편소설’이라는 양식이 갖고 있는 유용성에 공감했던 여러 논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한설야의 경우에는 이 ‘콩트’, 즉 ‘장편소설’의 계급문학적 가능성을 논하는 글을 통해 ‘장편소설’이라는 관념을 나름대로 전유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언론계 내부에서는 이 ‘장편소설’의 기획은 연작소설 등 보다 대중적인 소설 창작 기획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즉 20년대 말기에 도래한 ‘장편소설’이라는 생소한 관념은 단지 한 달간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후 소설이라는 것의 관념의 경계를 구획할 만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현상이었던 셈이다.

전후 남성성 회복과 여성 욕망의 금기 - 최정희의 『끝없는 낭만(浪漫)』을 중심으로

오태영 ( Oh Tae-young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인문논총  75권 1호, 2018 pp. 327-360 ( 총 34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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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남한사회의 구조 변동을 추동한 ‘전후 레짐’의 문법 속에서 남성과 여성은 모두 젠더 정치의 새로운 장에 놓였다. 그리고 그때 젠더 정치는 대체로 상실된 남성성 회복과 여성 욕망의 금기로 점철되었다. 최정희의 『끝없는 낭만』에는 미군의 남성성에 기대어 몰락한 가부장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고자 한 남성과, 미군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한 여성을 ‘양공주’로 규정하여 비난하는 한편, 불행한 그녀를 구원하는 주체로 자신을 놓는 행위를 통해 상실된 남성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해방과 전쟁을 거쳐 오면서 자신들의 남성성이 상실되어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그들은 여성을 성적 교환가치의 대상으로 위치시키거나 여성의 사랑과 욕망을 불온한 것으로 낙인찍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남성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순혈주의와 민족주의로부터 자양분을 제공받고 있던 가부장제도와 남성우월주의의 시선이 웅크리고 있었다. 한편, 최정희의 『끝없는 낭만』은 미군과의 사랑과 결혼에 이른 여성의 파멸을 서사화하고 있다. 그녀가 파멸에 이른 것은 전쟁이라는 예외상태 속 남성성 상실이 욕망하는 여성을 타락한 자나 배반한 자로 규정하여 그러한 욕망의 발현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여성의 낭만적 사랑은 그 감정의 주체인 여성에 의해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남성성 회복을 욕망하는 남한사회의 남성 젠더들을 대상으로 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타락하고 오염된 여성은 스스로 단죄와 정화의 제의를 수행해도 민족과 국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남성성 회복의 젠더 정치가 여성의 주체적인 자기 기획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상실된 남성성 회복의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여성의 욕망을 금기시한다는 것, 전후 레짐 하 젠더 정치의 문법은 바로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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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약 천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전 세계에 걸친 지배 연수를 확정하는 데이터베이스를 작성하고 분석하여 최근의 경제사연구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지배 연수란 각 종주국에 의한 각 지배지역의 지배기간을 합산한 연수이다. Etmad (2007)은 면적과 인구를 기준으로 산업혁명 발생 이후 지배지역이 확대되었던 18세기부터 지배지역이 감소하기 시작한 19세기를 거쳐 20세기까지의 지배지역 변화과정을 매우 명쾌하게 분석했다. 그렇지만 산업혁명 이전부터 현재까지의 연속적인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본고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배 연수를 기준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연속적인 시계열데이터를 제시하고 각 시대의 특징을 설명했다. 대항해 이전 시대(1000-1487)의 최대 종주국인 이탈리아가 후반기에 침체하자 영국이 추격을 시작했다. 대항해 시대(1488-1689)에는 각 종주국이 군웅할거 하는 가운데 신대륙이 발견되어 지배지역 획득 경쟁이 격화되었다. 영국은 북미지역을 상실했으나 아프리카 및 아시아지역의 새로운 지배지역을 최고 속도로 증가시킨 결과 독보적인 종주국이 되었다(1690-1918).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지배지역을 확대했으나 퇴위 이후 급감했다. 이후 프랑스는 영국에 버금가는 지배지역 증가율로 제2위의 종주국이 되었다. 탈식민 시대(1919-1992)에는 제1차 대전 이후 대부분의 종주국 지배지역이 감소했다가 제2차 대전기에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제2차 대전 이후에 총 지배지역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감소율이 적었던 프랑스는 지배지역 수에서 영국과 비슷하게 되었다. 탈식민의 파급효과는 제2차 대전 후의 사상초유의 인구증가와 일인당 GDP 증가율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탈식민 이후 피지배지역 주민들의 자유로운 개인행위가 급격히 확대한 사실이 있었다. 한편 2015년 현재 잔존 지배지역은 탈식민 정체의 시대(1993-2015)를 거쳐 오랜 기간 지배당해왔지만 탈식민의 역사를 살펴보면 앞으로 탈식민할 가능성이 있다. 본고는 이상과 같이 지배 연수라는 척도를 사용하였기에 초장기적 관점에서 이제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대항해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비교할 수 있었고, 식민시대와 탈식민시대를 초장기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었다. 본고의 결론은 첫째, 식민주의의 역사를 시대별로 비교하면 지배 연수와 인구 및 GDP는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둘째, 피지배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생활수준의 전환점은 산업혁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제2차 대전 이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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