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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Cino-Korean Poetry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간
  • - 국내 등재 : -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0545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1권 0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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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집의 실상과 비평가들의 총평을 통해 이인로?김극기?이규보?이제현?이색 등 5인은 고려 후기 한시사의 주역으로서 한 시대의 시풍을 주도하였던 대가들이었음이 확인되므로,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 시기의 시사적 흐름을 개관해 볼 수 있다. 이들의 시세계의 중요한 기조를 검증하여 영향관계나 상통성이 인정되는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들과 견주는 방식으로 작풍의 실상을 검증해 보면 이인로는 황정견, 김극기는 육유, 이규보는 백거이, 이제현은 구양수, 이색은 소식과 공통적인 경향이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시대를 주도하였던 시인의 중심적 시풍을 인상적으로 규정해 보고자 한 이와 같은 검토방법은 커다란 한계를 지닌 점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이러한 방향의 노력은 진작부터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을 반성해 보는 게기로 삼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피상적인 비교문학적 접근을 지양하고, 구조주의적?해석학적 방법까지 보탠 비교검토를 면밀히 적용하는 노력을 한다면, 개별시인의 시적 특질과 시사의 이해를 다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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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牧隱 李穡의 한시에서 ‘老年’과 ‘日常’이 결합된 작품들을 주목하여 高麗後期 한시의 동력 중 한 갈래와 한국한시다움의 한 방향을 가늠해 본 것이다. 목은의 노년기 한시는 일상이라는 소재와 주제를 광범위하게 형상화하여 日常詩의 선구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논의의 가치가 충분하고 판단하였다. 본론에서는 목은 노년기 한시와 일상의 상관성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그 결과 노년기의 목은이 시쓰기를 일상화하면서 일상이 시의 영역으로 대거 유입되는 양상, 일상과 연관된 소재의 광범위한 확장, 시의 내부에서 기록성이 강화되어가는 추세, 노년기의 몸과 정신을 향한 자기 응시 경향과 치열한 자기 대면의 정신을 고찰할 수 있었다. 이는 목은 개인의 사례를 넘어 일상과 노년의 상관성, 노년기의 시적 특성과 그 지평을 성찰하도록 유도하였다. 연이어, 목은의 일상시가 시의 예술성을 훼손시켰는가[點金作鐵], 반대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는가[點鐵成金]? 라는 물음을 제기하여 그의 시에 함축된 양면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목은의 관점에서 본다면 觀物省察의 검증 공간이자 삶의 자세를 확인하는 영역이 일상이었음을 밝히는 한편으로, 일상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경로를 증명하였다. 생활 현장에서의 포착력, 긴장감과 생동감을 언어적으로 숙성시킨 예가 이에 해당하였다. 나아가 목은의 일상시가 조선후기의 ‘朝鮮詩’와 연결될 수 있음을 가설적으로 제기하였다. 노년의 한시가 제재, 작법, 감수성의 여러 층위에서 까다로운 제약으로부터 풀려남으로써 작시 주체의 삶과 환경에 밀착되는 과정이 조선시의 진로와 겹쳐질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노년기 일상시는 한국한시사에서 일상을 전면화한 시사적 의의와 함께, 일상과 한시의 접속되는 소중한 사례, 나아가 한국한시다움을 증명하는 선구자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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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의 한시 중에서 풍속과 관련한 작품은 250제가 넘는다. 이 시들은 표현과 제재 이외에 작가의 시각도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그의 중국에서의 유학 및 환로 경험을 바탕으로 중원문화의 보편성과 고려문화의 고유성 사이의 조화와 괴리, 중원문화에 대한 긍정과 고려문화에 대한 자긍이라는 점도 찾아낼 수 있다. 목은은 우리 풍속에 대한 착실한 기록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중원문화와 우리 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또 우리의 풍속을 중국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처지거나 가치 없다고 여기지 않고, 양국의 풍속은 상호간에 서로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을 보완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목은은 풍속 관련 한시에서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담은 진술을 많이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입장을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작시의 의도를 명확히 하고 있다. 결국 목은은 우리의 풍속과 의례가 중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풍속을 충실히 기록하여 후대에 전승할 필요가 있다는 의식에 기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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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시는 한시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만시의 속성과도 관계된다. 자고로 죽음은 우리 인생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죽음은 생자와 망자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 망자를 추억하고 기리며 슬퍼하는 만시는 본질적으로 감성적이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극적이기까지 하다. 한국한시사에서 만시 창작의 전통은 일찍이 김부식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부식 이후 고려후기로 갈수록 문인들 사이에서는 가까운 주변의 가족과 親友들, 스승, 선·후배의 죽음을 당하면 만시를 쓰는 것이 관례처럼 보편화 되어갔다. 만시를 포함한 죽음을 주제로 다룬 시들은 지극히 사적인 정서를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보면 매우 주관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인류 보편의 문제임을 고려한다면 매우 객관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주관성과 객관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 죽음을 주제로 한 시들의 문학적 매력이자 연구해볼만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가장 서정적인 시인 도은 이숭인의 만시를 주목하여 그 특질을 살펴보았다. ??도은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 만시임을 직접적으로 표방하고 쓴 것은 대체로 19제 남짓이다. 이 가운데 오언율시가 10제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는 동시대 다른 시인들, 예컨대 이색이나 정몽주등과 비교할 때 양적으로는 적은 분량이다. 하지만 내용적인 서정성이나 시의 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그 누구의 만시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숭인의 만시가 적은 이유는 만시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 대부분이 개인적 친분관계의 친우들이고, 그것도 시인과 아주 가까운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즉 의례적인 부탁 등으로 지은 시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이숭인은 본인의 사적인 감정에 의해서 망자에 대한 깊은 애도와 추억이 있을 경우에만 만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숭인의 서정성 짙은 만시는 그 후 조선시대로 계승되어 한국한시사에서 만시 창작의 전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극관(南克寬)의 「사시자(謝施子)」에 나타난 문학의식(文學意識)

박수천 ( Soo Cheon Park )
한국한시학회|한국한시연구  21권 0호, 2013 pp. 153-183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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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관은 오랜 질병으로 인해 26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20세 때에는 生員試에 2등으로 급제해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병으로 인해 立身의 꿈을 접고 집안에서 칩거하며 괴롭고 힘든 투병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문학의식을 다듬어 나갔고, 그것을 잡록의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 「謝施子」이다. 「謝施子」는 제명의 뜻처럼 쓸모없는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학문세계를 드러낸 저작이었다. 남극관은 성품이 곧고 깨끗해 별다른 욕심을 갖지 않았으나, 침식을 잊어 버릴 정도로 책읽기만 극히 좋아했다고 한다. 여러 잡기적 기술을 모은 「謝施子」에는 문학 분야 외에도 천문, 역법, 지리, 역사, 서법, 금석학, 언어, 문자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견해를 두루 담고 있어 그의 평소 독서가 아주 광범위했음을 증명해 보여준다. 「謝施子」에는 중국 문단에 대한 관심과 문학 비평의 기사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 당시 조선 문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公安派와 竟陵派의 문학론에 대한 전체적 평가를 내리고, 그 중 竟陵派를 주도한 鍾惺의 논의가 더 우월하다고 말했다. 남극관은 문장이란 세상의 治亂을 따라 그 盛衰를 같이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라의 흥망에 따라 그 문장의 성쇠가 나타나니 明나라 말기의 문학이 그렇게 낮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문학과 時運의 관계를 그가 처음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견해가 남극관의 문학에 대한 기본 인식이었던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남극관의 문학적 관점은 公安派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있다. 남극관은 袁宏道의 논의를 수용하면서 일단 적극적인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 문학이 개인의 정감과 얽매이지 않는 개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을 같이하고, 각 시대의 변화를 따라 문학도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견해에도 동감을 했다. 그러나 남극관은 袁宏道의 시작품이 복고론자들이 썼던 일상의 恒語를 애써 기피하느라, 도리어 辭語의 편폭이 좁아져 진실한 개성의 표현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지적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公安派와 竟陵派가 제시한 문학론을 남극관이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또한 그들의 미흡한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극관은 金昌協의 문학과 문학론을 거론하면서도 그의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남극관의 집안은 소론의 명문가라 노론계 인사들과는 政論이나 문학론에서 의견을 같이 하기 어려워 그의 논의에서 黨論의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겠지만, 일단은 남극관이 자신의 문학론적 견지에서 비판론을 개진한 것이라 하겠다. 金昌協이 주안점을 둔 것은 작품에 표현된 意趣였는데 비해, 남극관이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氣格이었다. 남극관은 문장의 경우 體裁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시에서는 우선 氣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남극관은 金昌協 시론의 성취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鄭斗卿 평가의 경우 그의 氣格이 가장 뛰어난데 단지 思致만으로 그를 낮추어 말한 것은 작품의 한 측면만을 본 편협한 처사였다고 비판했다. 작품의 평가는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또한 그 작품에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측면에 중점을 두어야 올바른 비평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남극관의 생각이었다. 남극관의 문학의식은 前後七子의 의고적 문학론을 기반으로 公安派와 竟陵派가 주장한 개성 발현 중시의 문학론을 함께 수용하고 있다. 公安派와 竟陵派는 의고론을 강력히 부정했지만, 남극관은 그들 이론의 장점을 아울러 자신의 문학론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작품의 氣格을 중시하면서 그것의 전범으로 盛唐을 존숭하였고, 지나친 擬古에 빠져 개성과 독창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謝施子」에서 남극관은 그의 문학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았고, 또한 자신의 문학의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지도 않아, 그의 문학론은 실제 미완의 단계에 머무르고 말았다 하겠다. 그가 일찍 요절하지 않고 在世의 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더욱 심도 있고 독창적인 문학론을 형성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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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英祖朝 ‘東村派’의 실체를 究明하고 그 핵심 구성원들의 교유 양상과 교유시에 대해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東村派’는 李圭象에 의해 붙여진 이름으로 영조조에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 등을 중심으로 東村에 거주하면서 함께 어울리던 일군의 문사들을 가리킨다. ‘東村派’는 문학 유파라기보다는 교유집단의 성격이 두드러진 칭호다. 그리고 이 교유집단의 모임은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 등 이른바 ‘英祖朝 四家’라 불리는 핵심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지속되기는 했지만 거기에 참여한 인물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이들은 주로 吳瑗의 鐘巖 東亭에 모여 시주회를 가졌다. 따라서 ‘東村派’는 東村에 거주하던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을 핵심 구성원으로 하며 1724년 내지 1773년경까지 鐘巖 東亭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던 교유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동촌파 모임을 형성 및 정착기, 전성기, 침체기의 세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 이 그룹의 動態와 모임에서 이루어진 詩作들을 살펴보았다. 동촌파가 고정된 멤버와 빈번한 모임 횟수를 갖춘 교유집단이 된 것은 1724년 吳瑗과 南有常이 만나면서부터였다. 남유상의 아우 남유용도 이때부터 함께 어울렸고, 이윽고 이천보도 모임에 동참하였다. 그들은 빈번하게 종암 동정에 모여 文酒會를 가졌다. 이후 1728년 봄, 남유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임은 한때 활기를 잃게 된다. 1732년이 되어 황경원이 모임에 가담하면서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을 핵심 구성원으로 한 이 모임은 1740년, 오원이 죽을 때까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시기에 모임의 핵심 구성원들은 여러 차례 四郡을 함께 유람하기도 하고 北漢山, 貞陵, 冠岳山 등 한양의 승경지를 찾아다니며 文酒會를 가졌다. 吳瑗·南有容·李天輔 세 사람은 특히 자주 東亭에 모여 시를 지었으며 그때 지은 시를 시집으로 엮기도 하고 唐 이전의 시를 선발하여 시선집을 엮기도 했다. 1740년, 오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임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오원은 이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고 그의 종암 동정은 이 그룹의 주 모임 장소였기에 오원의 죽음과 함께 모임은 침체일로를 걷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예전과 같은 종암 동정에서의 성대한 문주회를 재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에도 함께 어울리던 吳瓚(吳瑗의 弟)이나 南公弼(南有常의 子)이 모임을 이어 나갔으며, 오원의 손자인 吳熙常이나 吳淵常에 이르는 19세기 초반까지 그 모임이 지속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東村派’는 문학 유파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공통의 문학적 구호나 특질을 선명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대체로 공감하던 바를 범박하게나마 정리하자면, 애써 꾸며서 시를 짓지 말고 天機를 그대로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시를 짓자는 것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그들 시의 대부분은 대체로 唐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東村派’는 이처럼 ‘天機’를 중시하던 조선 후기 한시의 흐름을 비교적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교유 집단이면서, 文酒會(雅會)를 통해 시를 지으며 고상한 취향을 지향하던 흐름이 이미 18세기 초부터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夢觀 李廷柱 詩 硏究

이현일 ( Hyun Il Lee )
한국한시학회|한국한시연구  21권 0호, 2013 pp. 219-252 ( 총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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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夢觀 李廷柱(1778~1853)의 시세계를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정주는 譯官의 名家인 牛峯 李氏 가문에서 태어나서 그 자신도 譯科에 합격하여 역관의 길을 걷다가, 40대 후반 이후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세상과 담을 쌓고 讀書와 作詩로 여생을 보낸 특이한 인물이다. 19세기의 대표적 閭巷 문인인 玉山 張之琬은 이정주를 希庵 玄錡(1809~1860), 夏園 鄭芝潤(1808~1858), 樵山 柳最鎭(1791~1869)과 함께 중인 출신의 불우한 문제적 시인으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한문학사는 물론 閭巷文學을 전문적으로 다룬 논저에서도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정주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정주는 중국 역대의 시 중에서도 특히 晩唐과 晩明의 작품을 좋아했던 바, 그의 詩風에도 이 점이 반영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淸의 문인인 吳嵩梁은 “幽妙淸警”하다고 극찬했고, 金弘集 역시 “淸警有雅韻”하다고 高評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평가에 착안하여 우선 淸警하고 雅潔한 특징이 두드러진 그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의식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卽興詩에 가까운 ‘偶題’類의 작품들을 고찰하여 그의 憂憤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이정주는 19세기 중반기의 시단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藕船 李尙迪(1804~1865)의 從叔으로서, 이상적의 생부인 天賴 李廷稷(1781~1816)과 함께 이상적의 시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논문은 이정주라는 한 작가를 발굴해서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상적의 시세계, 더 나아가 19세기 여항문학과 한시사 연구를 위한 작은 디딤돌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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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동 이서의 도학적 시문학 세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글이다. 옥동 이서는 조선후기 여주 이씨 가문의 가학 전통을 문학에서 경학으로 전환시킨 여주이씨 가문 가학 전통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의 한 사람이었고 당대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한 시대의 師表였다. 이와 같은 옥동의 이력은 그를 문인이 아니라 학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옥동 이서 시 세계의 근본이 되는 것은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도학적인 시 세계이다. 옥동 이서의 도학적인 시 세계는 옥동이 그 자신을 갈고 닦아, 그가 추구하는 이상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쓴 시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는데, 至高至純한 청정 세계의 묘사를 통해 개인적인 수양의지를 나타낸 시에서부터 실생활 속의 실수나 잘못을 방지하기 위한 警戒意志를 두러낸 시, 전범으로써의 성현과 학문하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 밝혀놓은 시에 이르기까지 그 층위와 범주가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옥동 이서의 이와 같은 도학적인 시 세계는 시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깊이 인지하고 있었던 옥동이 자기 자신과 대중을 도덕적으로 교화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교육의 도구였고,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 대사회적인 차원으로 적용의 범주를 확대시켜 나갈수록 예술성보다 교훈성이 강조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옥동의 도학적인 시 세계는 수양된 인간에 의한 凡人의 교육을 강조하였던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였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수단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옥동 이서의 도학적인 시 세계를 수양의 수단으로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옥동 이서의 도학적인 시 세계가 비록 예술성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문학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나름의 문학성을 지닌다. 특히 그의 도학적인 시 세계 중에서 愼獨과 篤敬이라는 내적 수양을 추구하며 창작한 시의 경우 오로지 문학성을 위해 창작된 시와 비교하여도 문학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시를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은 옥동이 그만큼에 시에 익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옥동 이서 시의 문학적 성격에 대해서는 後稿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도록 하겠다.

한국 한시에서의 도연명 <擬挽歌辭> 수용과 변주

임준철 ( Jun Chul Lim )
한국한시학회|한국한시연구  21권 0호, 2013 pp. 291-333 ( 총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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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한시에서 陶淵明 <擬挽歌辭>의 수용과 변주 양상을 검토한 것이다. 동아시아 고전문학사에서 도연명은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송대의 대시인 蘇軾은 도연명 和韻詩만을 묶어 별도의 문집을 출간하려고 했으며, 조선시대 수많은 작가들이 도연명 작품에 화운시를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의만가사>란 문제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수용 빈도가 낮은 편이다. 자신의 죽음을 읊는다는 독특한 주제성격 때문이다. 따라서 도연명의 작품 중 유독 <의만가사>를 수용한 작품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금기를 위반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만가사>를 수용한 한국 한시들을 검토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적 양상이 드러난다. 첫째, 우리 문인들은 <의만가사> 중에서 특히 “但恨我在世, 飮酒不得足”이란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정기안이나 남효온의 작품처럼 해당 구절을 부연하거나 변주시킨 특징적인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심지어 이 구절을 주제로 한 과체시 작품도 존재한다. 둘째 和陶詩가 대체로 도연명의 인품과 사상에 공감하여 지어지는 반면, <의만가사> 수용 작품들 중엔 도연명의 초탈적 생사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학적 사고로 포섭하거나 별도로 윤색하는 경우들이 보인다. 권시나 전우 같은 도학자들의 화운시는 <의만가사>를 문학작품으로서만 수용했을 뿐 작품에 담긴 생사관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셋째 <의만가사> 수용 작품들 중엔 의도적으로 주제를 변주하는 경우들이 발견된다. 최기남과 남효온의 작품은 <의만가사>의 주제의식을 뒤집는 방식으로 은연중 현실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그들이 이 작품을 수용한 이유가 도연명에 대한 존숭이라기보다 <의만가사>를 빌려 자신의 내밀한 의식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선 도연명의 <의만가사>에만 한정하였지만, 이런 방식의 연구는 한국 한시가 중국문학과의 연관을 맺으면서 그 수용과 자기화의 지평을 넓히고, 각 시대 및 시인마다의 개성을 이루어 나간 양상이 어떠하였던가를 밝히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연명을 숭상하고 그의 시를 전범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하였으며 또 어떻게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우리 한시의 개별성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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