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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검색

Korean Classical Woman Literature Studies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9316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13권 0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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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여성 성별에 기초한 심미적 경험의 특수성을 밝히고 동시에 여성의 심미적 경험으로부터 여성 주체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를 위해 개인의 성별적 차이가 심미적 경험의 차이로 형성되고 동시에 심미적 차이로부터 개인의 성별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심미적 실행과 정체성 실행이라는 두 과정은 단선적이거나 순차적이지 않다. 이들은 서로를 추인하고 조응하면서 경계와 간극을 넘어 개인과 세계 안에 여성주의를 심미적 형성물로 현실화시키는 심미적 행동주의(aesthetic activism)의 두 양상이다. 따라서 심미적 행동주의는 성별 정체성의 토대주의를 반대한다. 1장은 전통 미학이 고수해온 탈성별화된 내포적 주체(implied subject)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다. 전통 미학에서 예술작품은 고정된 실체이다. 이때 심미적 주체는 오직 작품의 내적 논리에 의해 형성된다. 내포적 주체는 작품으로부터 허구적으로 구성되지만, 그 정체성은 작품을 통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다양한 해석이나 경험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심미적 주체를 내포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심미적 경험이 성별과 같은 개인의 구체적인 정체성 범주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여성 주체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장에서는 여성적 응시와 실제 주체(real subject, historical subject)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심미적 주체를 실제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초기 여성주의 문화 이론가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들은 현실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관점이 각자의 심미적 경험 안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실제 여성들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규정한다. 곧 실제 여성들이란 언제나 남성적 시선을 통해 규정된다. 따라서 실제 주체는 남성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여성 주체를 긍정적으로 모색할 이론적 여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한편, 실제 주체를 주장하는 미학이 갖는 더 심각한 결함은 `실제 여성`을 전제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실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다양한 여성들이 존재할 뿐이다. 여성들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 가운데 실제 여성 주체를 통해 다양한 여성들의 심미적 경험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장에서는 여성들의 심미적 경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심미적 주체를 가설적 주체(hypothetical subject)로 제안한다. 가설적 주체는 개인의 구체적인 맥락과 관점에 기반한 창조적 해석을 통해 독특한 심미적인 경험을 하며 동시에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재형성해나간다. 가설적 주체란 역사적 현실의 관점적, 맥락적 위치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심미적인 경험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현실적 위치를 변경할 수 있다. 따라서 가설적 주체는 존재 생성적이다. 심미적 행동주의가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은 가설적 주체가 역사적으로 위치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4장에서는 심미적 주체로서 여성들이 다양한 가설적 위치를 가질 수 있음을 주장한다. 다양한 여성들은 심미적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 기반하지만 동시에 창조적으로 재조정된 가설적 위치를 찾게 된다. 가설적 위치를 찾는 것부터가 심미적 행위이다. 여성들은 가설적 주체로서 심미적 행위를 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변경해나간다. 또 다른 가설적 위치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성의 주체 형성에서 성별은 중요한 가설적 위치이다. 여성들은 심미적 행위에서 어떤 순간에는 더 현실에 가깝게, 어떤 순간에는 더욱 가상적으로 자신의 성별을 재구축해나간다. 이처럼 성별을 가설화한다는 것은 가부장제적 성별 체계를 변혁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심미적 행위를 통해 포스트-성별의 주체들을 구축할 수 있다. 이것이 가설적 주체의 심미적 액티비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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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풍속화는 18세기 전반 恭齋 尹斗緖(1668~1715)와 觀我齋 趙榮祐(1686~1761) 같은 문인화가에서 시작하여 18세기 후반 檀園 金弘道(1745~?)에 이르러 조선적 전형이 완성되었다. 김홍도는 민중의 노동현장부터 시정의 생활상, 남녀의 애정표현에 이르기까지 畵材를 확대하고 회화적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그 바통을 19세기 초반의 蕙園 申潤福이 이어받아 사실성 뚜렷한 풍속화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710~50년대에 활동한 윤두서와 조영석부터 1780년대 김홍도까지의 풍속화와 1810~20년대 신윤복의 풍속화를 비교해 보면, 일 풍속에서 도시의 유흥 풍속으로 변화하였다. 윤두서와 조영석에서 김홍도까지의 풍속화에는 직접 경제활동을 나선 여성 또는 가사노동의 여성이 주로 등장한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나들이나 놀이를 즐기는 여성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들은 상당히 주체적이고 활달하였음을 확인케 해준다. 조선시대 여성에 대하여 폐쇄적이며 부계 중심에 눌린 문화였다고 인식해온 상과 크게 다르다. 또 조선후기 풍속화는 조선의 여성들이 생활 속에서 인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선을 살리는 형태와 색채감각을 간직한 문화사료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상하층의 복식이 혼돈된 사례도 없지 않으나, 김홍도와 신윤복 같은 대가의 풍속도에는 계층구분이 정확한 편이다. 드문 삼회장저고리는 상류층 여성에만 보이고, 몇 사례만이 춘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기생은 양반가 여성의 복식을 패션화하고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는 그룹이었다. 이들이 주도하던 의상은 회장저고리의 세련된 색채감각과 함께 상체에 꽉 끼게 입는 저고리의 길이를 짧게 줄이고 치마를 부풀려 `上薄下厚`의 몸매 선을 강조한 형태로 정착되었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신체미를 극대화한 것이다. 크게 과장한 머리모양과 더불어, 이러한 복식의 형태미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한 인간으로서 여성성을 찾으려 했던 결과이다. 풍속화에 나타나는 다채로운 의상에는 白色에 靑色, 곧 쪽물 염색이 압도적이다. 푸른색을 유독 애호했던 조선후기의 여성 미의식인 셈이다. 또 이 배색은 흰색 바탕에 코발트 블루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의 유행과 동시대성을 지닌다. 조선의 白雲이 흐르는 투명한 가을하늘 靑天아래 살던 심성에서 유래했을까. 자연을 닮은 민족색의 아름다움을 조선 여성들이 그 같이 服色에 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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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19세기 조선시대 복식에 나타난 여성성을 고찰한 것이다. 남녀유별이 강조된 조선사회에서 여성의 복식은 남자와 달라야 함이 강조되었다. 첫돌 이전의 어린이에게는 남녀의 복식차가 없지만 돌옷부터 남녀 옷차림에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으며 기혼 여부는 물론 남편의 생존 여부도 복식으로 드러났다. 남성의 경우 신분을 나타내는 관모와 외출용 의복인 포류가 발달한 것에 비하여 여성의 경우 내외법으로 인해 외출을 금기시함에 따라 내외용 쓰개가 발달되었다.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적용됨에 따라 기생에게는 여성성을 강조한 옷차림과 사치에 대해 너그러웠다. 기녀나 의녀들은 얼굴이 노출되는 쓰개를 쓸 수 있었으며 의복사치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았다. 반면, 지나치게 외모를 치장하여 이성의 눈길을 끄는 것은 기녀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이므로 여염집 여성은 피해야 할 태도로 여겼다. 조선전기에는 풍성한 실루엣으로 몸매를 드러내지 않았던 여성복식은 조선후기에 들어서 여성들의 복식은 다분히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도록 변화하였다. 가냘픈 여성의 상체의 곡선이 드러나는 좁고 짧은 저고리와 하체를 강조한 풍성하고 긴 치마가 등장하여 상박하후(上薄下厚) 실루엣은 양반층 여성에게까지 유행이 확대되었으며, 19세기 복식에 보이는 당의(唐衣) 도련의 양 귀퉁이, 저고리의 섶코, 버선코와 신코 등에서 나타나는 뾰족한 곡선은 부드럽고 유연하되 작고 여린 모습을 이상으로 한 여성미를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 보인다. 또한 가문의 혈통을 잇는 것이 우선시 되었던 가치관으로 인해 겹겹이 입는 속옷과 정절과 다산을 상징하는 문양의 옷감이나 장신구가 선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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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이후 1910년대까지의 신문과 잡지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여성 담론은 여성교육에 대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최초로 여성들을 위한 제도교육이 형성되는 이 시기에 대중 매체의 기사들에 여성들이 재현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1898년 제 1기 여학교 설립운동을 주도한 찬양회 부인들 중에는 북촌의 양반 부인들뿐만이 아니라 중하층의 다양한 계급의 여성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중하층 여성들은 찬양회의 활동을 본격적인 운동성과 실천성, 조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또 찬양회가 개화파 지식인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제국신문>을 비롯한 개화 지식인들은 찬양회의 활동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찬양회는 여성의 교육과 지식 획득의 의미를 온전히 여성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906년 다시 시작된 제 2기 여학교 설립운동은 한 개의 관립 여학교와 그 외 많은 사립 여학교들의 설립으로 현실화되었다. 실질적인 여학교의 설립 과정을 통해 많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직접 여학교를 설립하거나, 설립을 후원하거나, 기부금을 내거나, 학생들을 가르쳤다. 연설하고 토론하는 여자들, 거리낌 없이 운동회를 하는 여자들의 재현을 통해 여성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드러났고, 그로 인해 사치하고 타락하는 여학생의 서사도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교육에 관련된 활동을 한 여성들은 여성의 근대적 주체화에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 획득`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근대 `국민`으로서의 권리 획득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은 스스로 아직 `국민`으로 호명되지 못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고, `여학교`라는 제도교육 기관의 설립을 통해 그것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보 사위> 설화 연구 -바보 우행(愚行)의 의미와 수용양상을 중심으로-

강성숙 ( Sung Sook K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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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어리석은 인물인 `바보` 이야기 가운데 사위·남편을 주인공으로 하는 `바보사위`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여, `바보사위` 유형의 이야기가 형성된 사회·문화적 소인과 `바보`로 표상되는 남성의 이미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향유자들의 태도를 통해, `바보사위` 이야기의 소비가 어떤 양상과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파악해 보고자 한다. <바보사위> 이야기는 전통적인 혼인 풍속이었던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 영입되는 신입자로서의 사위를 희화화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인지감형(知人之鑑型)` 이야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위는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내부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지닌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구비 설화에 나타나는 <바보사위> 이야기 `문자 모르는 사위` 유형에서도 이러한 허위의식을 노출하고 비판하는 속성들이 나타난다. 바보사위는 가식과 허위를 차리려다 대상이 갖고 있던 원래의 이름을 망각하고, 사물의 `형태`와 `소리`에서 유추한 일차원적인 이름을 부여하게 됨으로써 희화화된다. 사위의 어리석은 행위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지만, 사위가 가진 바보스러움은 권위를 내세우는 공적 가치를 주관적으로 속화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음식욕심 부리는 사위` 유형에서 사위의 충족되지 않는 허기, 욕망은 그 자체로 무절제한 우행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혼인의 제의적 성격으로 본다면 그 열망은 오히려 성스러운 것, 새로운 창조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바보 남편` 이야기는 남편의 게으름이나 욕망이 더 이상 새롭고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아내의 적극적인 결단과 실천이 부각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겠다. 특히 이 유형군은 여성들의 구연과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여성에 의해 소비되는 남성 이미지`의 양상과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 전형적 남성 이미지와 거리가 있는 <바보사위> 이야기는 (1)그 자체로 `경계자`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과 (2)주로 여성들에게 소비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새로운 남성 이미지의 한 전형으로 설정될 수 있다. `바보 사위`는 가능성 있는 신입자(新入者)로서, 집단에 새로운 활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바보 사위`의 이야기는 여성 집단 내에서 즐길 수 있었던 이야깃거리였다. 주변의 남성들로부터 늘 `보이는 자`로서 존재했던 여성들에게 `바보 사위` 이야기는 `보는 자(seer)`가 되는 경험을 제공해준다. 동시에 남성에게는 `보는 자`에서 `보이는 자(seen)`가 되는 경험을 갖게 한다는 의의가 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아내와 딸에 대한 인식 고찰

김경숙 ( Kyung Sook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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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신위는 자신의 시에서 아내와 딸에 대한 애정을 절절하게 숨김없이 표현하였다. 이러한 예는 다른 사대부 문사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내 특히 正室에 대한 일련의 시는 悼亡詩인데, 지극히 애절한 감정을 토로하였다. 신위의 정실은, 43년간 결혼생활을 하였으며, 신위가 32세에야 벼슬길에 나아간 뒤 부침과 견책으로 이어진 고난과 궁핍한 생활을 함께 한, 신위의 말을 빌리자면 `이 싫은 세상의 온갖 근심`을 함께 한 糟糠之妻였다. 또한 정실은 30살에야 딸 하나만을 낳았는데, 그 후 맞아들인 추실은 4남1녀를 낳았다. 신위는 두 아내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희망했고 사이좋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대부 가문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정실이 그 오랜 세월 흘렸을 피눈물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실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이와 같은 두 가지 이유가 더하여져 신위는 아내에 대한 情恨을 애절하게 토로하였다. 딸에 관련하여 쓴 시들은 죽은 딸이 아니라 `살아있는 딸`을 대상으로 했다는 가치를 지닌다. 이는 많은 사대부 문사들의 경우 딸이 죽은 다음에야 祭亡文, 墓誌銘, 行狀 등을 썼던 점과 비교할 때 더욱 의의가 있다. 특히 <送李婦洪鄕 作八十韻>은 160구의 長詩인데 딸을 어쩔 수 없이 시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슬프고 원통한 마음을 눈물로 형상화한 보기 드문 작품이다. 정실의 유일한 소생인 長女는 정실과 신위의 무한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아들보다 낫다고 하며 애지중지 키웠는데 이는 아들을 더욱 우위에 두었던 당대 풍속과 비교하자면 획기적인 것이다. 또한 당시 일반적이던 혼인형태인 `于歸`가 아니라 `男歸女家婚`을 통해 데릴사위를 맞이하였다. 지방의 인척 가문에서 둘째 아들을 선택해 영원히 데리고 살고자 계획하였으며 자신이 春川府使로 나갈 때도 딸 내외를 데려 갔다. 견책을 당해 10년간 이어진 궁핍한 생활 속에도 딸이 함께 살며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집에 온전한 치마폭 하나 없을 정도였던 긴 궁핍 뒤 조강지처가 사망하였고, 그 뒤 반년도 안 되어 딸마저 시댁으로 떠나야 하는 불행이 닥쳤다. 이에 신위는 딸의 떠남을 정실이 죽은 것과 같이 생각했고 나아가 딸의 죽음 자체로 여겼다. 이는 당시 여성들이 시댁으로 들어간 뒤 죽어서도 친정을 다시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위는 조선후기 결혼제도의 굴레가 `딸`뿐만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가혹한 형벌이었음을 역설한 것이다. 아내와 딸에 대한 묘사에서 신위는 다른 사대부 문사와 달리 公的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위에게 있어 이러한 겉치레의 언사는 전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아내와 딸을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그리워하는가를 읊었다. 아내와 딸은 신위에게 있어 오직 애정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신위는 자신의 애정과 슬픔을 숨기지 않고 나타냈으며, 아내와 딸을 떠나보내는 처절한 슬픔을 통해 여성(아내/딸) 못지않게 남성(남편/아버지)도 고통을 받았음을 나타내었다. 이는 신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남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통이었는데, 이를 솔직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신위의 아내와 딸에 대한 인식은 신위 자신의 입장에서 진행된다는 아쉬움을 지니지만, 다른 사대부의 여성을 화자로 내세웠으나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동감을 찾기 어려운 시문과는 달리, 아내와 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아내와 딸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아내와 딸의 형상화가 오히려 진실에 가깝게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점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더구나 문학적으로 우수하게 형상화하여, 우리로 하여금 공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은, 외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대부의 솔직한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하였기에, 신위의 아내와 딸에 관한 일련의 시들은 가치가 있다.

근대 전환기 <옥소선(玉蕭仙) 이야기>의 개작 양상과 그 의미

김준형 ( Joon Hyeong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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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0년대에 새로 쓰여진 <옥소선 이야기>, 즉 『동아일보』와 『병자임진록』에 실린 <옥소선>과 『월간야담』에 실린 <소설정획첨고인>을 통해 당시 야담이 어떻게 개작되었는가를 주목하였다. <옥소선 이야기>는 남녀간의 애정과 가족간의 결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야담집 가운데는 두 경향 중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한 경우가 없었다. 애정과 가문을 굳이 분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거나, 분리해서는 이야기가 지닌 묘미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30년대에 오면서 애정과 가문이라는 두 축이 애정 쪽으로 완전히 기운다. 그것은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가 대가족제도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있었기에 가문의 축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견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옥소선>이나 <소설정획첨고인>도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통속적인 형태로 쓰인 야담은 전대의 야담의 틀이나 주제의식을 준용하지 않는다. 당대의 시대적인 분위기나 대중들의 기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야담도 그 기호에 따른 방향으로 변개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야담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어떠한 형태로든 멈춰있지 않고, 변화된 시대나 변화된 대중들의 기호에 따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움직이고 있음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가족 제도보다는 애정에 관심이 높았던 시대적인 분위기와 대중들의 기호에 맞춰 변모된 <옥소선 이야기>를 통해 야담이라는 갈래가 근대 전환기에도 생생한 움직임을 보였음을 확인케 한다.

슬픔과 탄식속의 지아비/아버지 되기

김현미 ( Hyun Mi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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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 문학사상, 주된 담당층이 되었던 사대부 남성들은 그들과 동시대를 살며 마음과 생각을 공유했던 (사대부) 여성들에 대하여 어쩌면 의도적이라고 유추될 수 있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여성에 대한 기록을 찾고 살펴볼 문제의식을 제기해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망자를 그리는 애도의 글인 애제류와 비지류의 전통에서 온 기록들이며, 또한 그곳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기억되는 여성`의 외면적인 모습과 그를 `기억하는 남성`의 시각과 그 방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애제류와 비지류의 관습적 측면상 망자(亡者)를 좋게 그리기 위한 의도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모습은 `부지런하고` `결핍을 잘 견디며` `효성이 지극하고` `아이들을 잘 낳아 키우는` 이른바 이상적인 전형만 드러나기 쉬운 제한점이 있다. 그러나, 직암 신경(直菴 申暻, 1696~1766)의 경우는 이러한 전형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 주변의 여성에 관해 낱낱이 밝히고 더 나아가 그러한 상세한 기억 안에서 지아비/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제문 속에서 재구하고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볼 수 있어서 주목된다. 그의 후년에 가까운 1759년에 작성한 아내와 딸의 제문이, 그 이전에 거의 작성했었던 각종 묘지, 행장, 전(傳)에서 그려낸 이상적 여성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759년은 직암 신경 자신에게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해였겠으나, 그가 그해에 남긴 제망실문과 제망녀문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18세기에 존재했던 사대부가 가질 수 있었던 아내와 딸과의 관계, 그리고 그 마음의 한 자락을 볼 수 있는 귀중한 해였다. 마음 깊이 의지하고 믿었던 아내와 딸을 동시에 잃으면서 통곡하며 풀어낸 긴 제문 속에서,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아내를 벗삼고 평생의 조언자요 조력자로 삼은 지아비` `딸에게 흉금을 터놓으며 딸의 아픔을 그대로 안쓰러워했던 아버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면 `지나치다` `예에 맞지 않는다`며 걸러졌을지도 모를 이러한 자신의 모습들은, 다음해 지어진 아내 제문에서 그 감정이 아주 많이 절제된 채로 드러나긴 했지만 `삶의 중요한 조언자`로서 아내를 대했던 주요 요목이 유효하게 인정되고 있어서, `기억하는 남성`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17세기 소설에 나타난 시집간 딸의 친정 살리기와 "출가외인" 담론

박영희 ( Young Hee 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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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각종 교훈서와 계녀서를 통해 유교적 규범의 내면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出嫁外人` 이데올로기도 설파되었다. 본 연구는 17세기 여성들이 탐독했던 소설의 세계에서는 시집간 딸과 친정의 관계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17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姑母`는 시집간 딸이지만 남성 형제가 친정의 가부장이어서 친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딸이다. 17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고모는 <창선감의록>의 성부인, <사씨남정기>의 두부인, <소현성록>의 소부인, <숙향전>의 여부인 등이다. 이들의 친정에서의 활동상을 분석하여 가부장제 강화와 맥을 같이했던 출가외인 담론이 17세기 소설에는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소설 속 고모의 모습은 친정 내에서 아직 권위를 잃지 않은 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강화되어가는 출가외인 이데올로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시집간 딸의 현실을 보여준다. 17세기 소설에 드러나는 `출가외인` 담론은 시집을 가면 친정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남이 되어야 한다는 출가외인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집간 딸은 남편과 아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시가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친정 살리기는 歸寧 동안만 가부장이 허락한 한도 내에서 한시적으로 가능하다는 유교적 규범의 테두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누이의 죽음, 잔영(殘影), 그리움 -오뉘 형상의 전변과 관련하여-

이승수 ( Seung Su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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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문학사에 있어 오뉘 형상의 변천과 지속을 검토한 것이다. 논의의 출발을 위해, 죽은 누이를 그리는 박지원·이덕무·박제가 세 사람의 글을 분석했다. 세 편 글은 지극히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사의 보편적인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주 흔히 한국적인 정서로 일컬어지면서도 그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이 막연한 느낌을 해명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몇 편 설화의 분석에서 드러난 오뉘 관계가 지닌 원초적 친연성을 원용했고, 또 조선후기 가족제도의 변화에 대한 논의도 끌어왔다. 결과 세 편의 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누이의 혼인`에는 일종의 상실감 또는 분리감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세 편 글의 비애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판단했다. 또 그러한 미감의 지속성을 확인하기 위해 1920년대의 시 세 편, 그리고 1950년대와 1970년대의 시도 각각 한 편씩 분석했다. 이를 통해 막연하게 전통적인 정서로 일컬어져왔던 `누이에 대한 그리움`이 한국의 특수한 역사 속에서 배태, 탄생, 변모되어 왔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문제는, 종적인 차원에서 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촘촘하게 분석하고, 횡적인 차원에서는 사회학·심리학·인류학 등의 도움을 입어야만 설득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아, 결론은 잠정적인 가설의 상태로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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