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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445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0권 0호 (2011)

조선조 <석전음복연악장(釋奠飮福宴樂章)> 연구

조규익 ( Kyu Ick Cho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3-33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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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대상인 <석전음복연악장>은 『조선왕조실록』에 ``新撰登歌樂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음복은 제사의 한 절차이면서도 잔치의 성격을 겸한 행위이다. 공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왕조의 문명성이나 임금에 대한 찬양 혹은 축수가 이 악장 전편의 주제의식으로 되어 있다. 당시 연주되고 있던 향악이나 당악의 곡조에 塡詞하는 방법으로 제작한 것이 이 악장들이다. 즉 당악으로 연주되던 제1작 <여민락>과 제2작 <보허자>, 향악이었는지 당악이었는지 불확실한 <천권곡> 등 세 작품을 제외한 <봉황음>·<만전춘>·<융화>·<한림가>·<오륜가>·<납씨가> 모두 향악으로 연주되던 노래들인데, <문선왕악장>과 달리 <석전음복연악장>에서는 조선의 독자성이나 개성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9장의 <석전음복연악장>은 내용 상 제5작을 경계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응된다. 제1작~제4작에서는 공자와 임금을 등장시켜 임금이나 조선왕조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했고, 제5작에서는 문치가 융성해져 나라가 억만년 동안 복록과 태평을 누릴 것이라는 신념을 표출했다. 후반부인 제6작~제9작에서는 전반부와 달리 임금이나 조선왕조만을 주된 찬양의 대상으로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 악장에 속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기존의 악곡에 전사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그런 제작방식은 고전시가의 통시적 흐름을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사직·종묘·영녕전 등 국가적 大祀들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음복연 악장이 있었는지 현재 확인할 수 없고, 이런 범주 밖의 제례들에도 이와 필적할만한 규모의 악장들은 흔치 않았다. 더구나 <문선왕악장>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연주되던 것을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조선왕조의 治者그룹이 갖고 있던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다거나 ``공자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이룩한 왕조의 文明性이나 제왕의 治功``을 찬양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석전음복연악장>은 왕조의 이념적 근원과 그것이 꽃 피어난 현실적 양태를 복합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악장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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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체가 가운데 16세기에 창작된 작품으로는 지금까지 김구의 <花田別曲>, 주세붕의 <道東曲> <六賢歌> <儼然曲> <太平曲>, 그리고 권호문의 <獨樂八曲>을 들 수 있었다. 여기에 이복로의 경기체가 두 편이 추가로 발견됨으로써 16세기 사림에 의해 경기체가가 향유된 방식을 더욱 다양하게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화산별곡>을 보면 안동 지역의 勝地와 민풍을 찬양하면서 고향인 안동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고려시대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에서부터 시작된 경기체가의 일련의 흐름을 잇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안동의 승지를 유람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면에서는 얼핏 처사적 강호자연의 취향이 나타나는 듯도 하지만, 주되게는 관직자가 자연을 활용하여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비해 <구령별곡>은 사림파의 처사적 자연관이 비교적 잘 드러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표현 방식이나 세계상에 있어 일반적인 어부가 계열의 작품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고, 6개의 장 모두에서 卜居와 吟風영月, 漁父의 삶, 踏靑浩歌, 江湖散人 등과 같은 어휘 등을 통해 隱逸之士의 풍모를 드러냈다. 김구와 이복로의 작품을 비교한 결과를 정리하면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작품에 향촌을 바라보는 처사적 자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상승하는 계층의 과시와 찬양``을 노래하는 경기체가의 본질이 아직은 유효했다는 말이 된다. 형식에 있어서 김구의 <화전별곡>에 약간의 글자 수 추가가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세 작품 모두가 경기체가의 기본 형식을 비교적 잘 지키고 있는 사실 또한 16세기 초기까지는 사대부층 내에서 경기체가의 장르적 본질이 유지되고 있음을 아울러 드러낸다. 이복로의 경기체가를 살펴보면 15세기와 같은 수준의 악장적 미의식은 드러나지 않지만, "위"로 시작하는 관용어구에서 그 흔적이 얼핏 발견되는 듯 보이기는 한다. 또한 <화산별곡>에서는 관인문학적 분위기가 <구령별곡>에서는 처사문학적 분위기가 다분히 짙게 풍기지만, 두 작품 모두 경기체가의 본질인 ``과시와 찬양``에 충실한 양상을 보이는 까닭에 <화산별곡>에서는 물론이고 <구령별곡>에서도 강호자연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긍정적인 차원에서 그려진다. 특히 <구령별곡>은 16세기 후반의 어부가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 처사적 미학을 보여주면서도 정치현실과 강호자연 사이에서 내부적으로 갈등하였던 사림파 어부가의 정서는 확인되지 않고, 강호자연 속에 귀일하여 조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화자의 심정이 그려질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복로의 경기체가는 15세기 악장적 미의식에서 16세기 후반 사림파의 강호가도의 미의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사대부시가의 양상을 경기체가의 형식을 통해 잘 드러낸다고 판단된다.

가곡창과 시조창 노랫말의 기본 유형에 대하여

양태순 ( Tae Soon Yang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65-89 ( 총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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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로 통칭되어온 가창 텍스트들은 그들을 얹어 부르는 음악적 형식이 가곡창과 시조창의 두 가지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가곡창과 시조창이라는 음악적 형식에 고유한 두 가지 노랫말 유형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양자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즉 겸용이 가능한 노랫말 유형을 추가하면 모두 세 가지 노랫말 유형이 기본적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가곡창은 5악장 형식이고 시조창은 3악장 형식이기에 그 노랫말도 자연 그에 걸맞는 방식으로 짜여질 것이다. 양자 사이의 변별적 양상에 유의하면서 가곡창 노랫말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시조창의 노랫말이 3행으로 표기되는데 비해 가곡창은 5행으로 표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시조창의 노랫말은 초장과 중장이 병렬관계인데 비해 가곡창은 초장과 2장(시조창으로 보자면 초장의 전반부와 후반부)이 병렬관계라는 사실이다. 세 번째로 가곡창의 3장(시조창으로 보자면 중장)은 초장과 2장(시조창으로 보자면 초장)을 합친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물론 시조창의 경우는 초장과 중장이 병렬관계이므로 같다. 가곡창 노랫말 3장의 이러한 특성은 율격적으로 4음보가 아닌 3음보에 근사한 모습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음수율로 보자면 보통의 형식인 ``3-4-3-4``이 아니라 ``5-3-4``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의미 구조로 보았을 때 3장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병렬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그래서 적확하게 양분이 가능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율격적으로 3음보, 의미상으로는 대등한 양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가곡창 노랫말 3장(시조창으로 보자면 중장)의 특성이라 하겠다. 초장과 중장이 병렬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장이 3음보에 근사하거나 의미상으로 온전한 양분이 불가한 양상을 보이는 것들도 있는데 이들은 시조창과 가곡창을 겸용하는 노랫말 유형에 속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가곡창을 위한 노랫말 모음집인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 3대 가집과 시조창을 위한 노랫말 모음집인 『남훈태평가』를 보면 이 세가지 노랫말 유형이 혼재해 있음을 본다. 이로써 가창이라는 연행의 실제에서는 이들이 서로 넘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둘, 혹은 세 가지 유형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가곡창에 적합한 노랫말 유형과 시조창에 적합한 노랫말 유형이 어떠한 것인가는 당대인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동일한 노랫말이 가곡창과 시조창에 적합하도록 변개된 양상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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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가>와 <별한가>는 동일 여성이 쓴 가사이다. 이 논문은 두 가사의 작품론을 목적으로 한다. 2장에서는 먼저 작가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했다. 작가는 全義李氏(1855~1922)로 李彦會와 星州李氏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19살 때 재혼하는 독립운동가 韓溪 李承熙(1847~1916)와 결혼함으로써 한주종택의 종부가 되었으며, 이후 1녀 2남을 낳고 살았다. 그런데 을미사변 이후 남편은 抗日운동에 앞장 서기 시작했다. 급기야 남편이 1908년에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만주로 망명하자 막내아들도 부친을 돕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이 때 작가는 두 가사를 지어 남편과 막내아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이다. 다음으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서술 내용을 사실적으로 고증했다. 3장에서는 두 가사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았다. 먼저 1) ``그리움과 한탄의 중첩적 서정``을 통해 신변탄식류 가사로서의 양상과 특징을 살폈다. ``그리움``과 ``한탄``의 서정이 반복·중첩되는 가운데, ``그리움``이 ``병``이 된 심적 상태를 보여준다. 2) ``여성인식``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드러낸 작가의 여성 인식을 살폈다. 작가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욕망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사후에라도 남자로 환생하고 싶어 하는 비극적 인식을 지닌다. 그리고 3) ``만주망명자를 둔 고국인의 민족의식``에서는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민족의식과 그 특징을 살폈다. 일제의 폭압으로 민족의 역사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한 여성이 민족과 개인,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두 축 사이에서 갈등하고 화해하는 양상을 반영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두 가사의 가사문학사적 의의를 살폈다. 두 가사는 19세기 신변탄식류 가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근대기의 역사와 삶을 수용함으로써 근대기 가사문학의 지속과 변용 양상을 작품 안에 구현한 전형적인 작품이라는 가사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불교 영험서사의 전통과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정환국 ( Hwan Kuk Jung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123-159 ( 총 37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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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불교의 동아시아 동점 과정에서 형성된 영험기의 전통을 개괄하고, 『法華靈驗傳』의 집험기적 성격을 통해서 영험기의 해동에서의 전승/향유 양상을 일별한 것이다. 이는 초기 서사문학사에서 불교 영험기, 즉 영험서사의 서사적 의의를 규명하기 위한 예비작업에 해당한다. 後漢 무렵에 본격적으로 전래된 불교는 이후 중국 및 동아시아 세계의 사상과 문화를 재편시켰던 바, 문학 방면에서의 첫 사례가 高僧傳과 靈驗記였다. 이 중 영험기는 魏晉 시기에 성립되어 唐宋을 거치면서 소재와 내용을 다양화하면서 고유한 서사 양식으로 정착하였다. 이 영험서사는 동아시아 초기서사에서 독자적 위상을 선취한 예다. 이런 영험서사의 전통은 향후 불교의 전파에 따라 주변국가에도 자연스레 성립되었다. ``해동``은 기실 6,7세기 백제에서 영험서사가 형성된 사례가 확인되나 초기에는 중국의 영험기를 채록하는 수준이었다. 이것이 7세기 후반의 『法華經集驗記』이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오면 본격적인 해동의 영험전이 등장하는 데, 『海東法華傳弘錄』이다. 이 영험기는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라는 대표적인 불교서사물과 함께 13세기 불교서사의 축적 양상을 규명하는데 긴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책은 현존하지 않는데, 바로 『法華靈驗傳』에 그 잔편이 수록되어 그나마 13세기 불교서사의 밑그림을 그리기에 유용해졌다. 『법화영험전』은 또한 당송대까지의 많은 영험서사의 자료들을 선별적으로 수록함으로써 集驗記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자료이기도 하다. 요컨대 『법화영험전』은 고려시대 영험서사의 전승과 향유의 일단을 응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영험서사의 전통을 새롭게 음미하여 傳奇 위주로 재단되어 온 초기서사의 양상을 재고하는데 관건이 되는 영험기이다.

한국고전문학전집의 간행 양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

권혁래 ( Hyeok Rae Kwon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161-196 ( 총 36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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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고전문학전집의 간행 양상과 성격, 각 전집의 편찬의식과 구성, 수록 작품의 특색, 새로운 정전 구성을 위한 제안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1961년 민중서관에서 간행된 『한국고전문학대계』를 시작으로, 2000년대까지 발간된 20여 종의 한국고전문학전집은 서민대중들이 친근함을 가지고 읽는 ``재미있는 교양도서``와 민족 고전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엘리트) 독자들이 읽는 ``학술기초 자료집``의 성격이 동시에 존재하는 편폭이 넓은 책이다. 이에 따라 대상 독자층도 불특정 ``서민대중``에서 전공 대학생층, 그리고 전문 연구자층에 이르기까지 넓게 존재하지만, 무게 중심은 후자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수록 작품은 소설 장르가 중심이 되었고, 시가, 구비문학, 한문학 장르가 부차적이다. 대표적인 9종의 한국고전문학전집을 대상으로, 편찬의식과 구성을 분석해본 결과, 초기(1965)에는 대중적인 소설 작품 위주로 소개함으로써 고전문학의 존재를 서민대중들에게 알리고 친근함을 심어주는 방향에서 기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음사본(1970), 서영출판사본(1978) 등으로 갈수록 문학사적인 관심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많이 채택하였고, 원문도 수록하고 주석 작업을 보강하는 등 학술기초 자료집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민족문화연구원본(1993)에서는 원전과 현대역을 동시에 수록하여 서로 다른 독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고자 하였다. 특이 현상은 같은 내용의 重版 작업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전문학전집의 출판이하지만 결과적으로 출판 행위의 권위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편찬자 및 출판 관계자들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새로운 한국고전문학전집 전집 발간 및 정전 구성 작업을 위해서 유의할 점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먼저 현재까지 간행된 작품들이 ``민족 고전``으로서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후 작업에서 대중들의 교양 충동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획·선집 작업이 필요하며, 또한 독자층의 분화에 따른 다양한 연령대별 출판물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중국 황실(皇室)로 간 여인을 노래한 궁사(宮詞)

이종묵 ( Jong Mook Lee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197-230 ( 총 34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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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은 고대로부터 많은 인적인 교류가 있었다. 많은 중국인이 한국으로 왔고, 한국인 역시 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타의에 의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중국 황실로 들어간 한국의 여성을 형상화한 宮詞이다. 중국의 宮詞에 본격적으로 중국 황실에 들어간 우리나라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元代의 宮詞에서부터이며, 貢女 제도가 폐지되는 永樂帝 때까지 宮詞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淸의 황실에도 조선 여성이 있었는데 宮詞는 아니지만 다양한 형태의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琵琶에 능하였던 元의 宮人 李氏, 元末의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奇皇后를 소재로 한 宮詞를 살폈고, 明代에는 永樂帝의 生母 공妃, 피리에 능하여 宮詞의 주인공이 된 태종이 賢妃 權氏, 永樂帝와 先德帝의 궁인이 된 韓永정의 두 딸 등에 대한 문학 작품을 두루 살폈다. 그리고 淸代에는 太宗에게 시집간 懷恩君의 딸, 多爾袞의 계비가 된 義順公主 등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발굴하여 고찰하였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시문의 전고(典故) 운용(運用) 양상과 의미

박명희 ( Myoung Hui Park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231-263 ( 총 33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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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유희춘이 시문에서 운용한 전고의 원래 텍스트 범위와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미학적 의미를 구명하였다. 유희춘은 실제로 經部의 12종, 史部의 19종, 子部의 21종, 集部의 18종 등 총 59종을 시문 창작의 전고로 운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미암집』 소재 시문 282수 가운데 189수의 작품에서 전고를 사용하였고, 총 365회를 활용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전고 운용 양상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첫째는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과 의식 등을 대신할만한 전고의 어휘를 다양하게 찾아 반복 운용했다는 점과 둘째, 한 편의 시문을 완성하기까지 전고를 자주 운용하여 난삽함까지 안겨주었음을 지적하였다. 먼저 ``전고어의 운용과 상황의 代稱``에서는 ``흘간산의 참새``부터 ``北海의 孔融``까지 이들 모두는 거의 떠돌이, 유배, 궁핍함 속에도 절의를 지키는가 하면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미지로써 유희춘 자신을 처지를 대칭하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전고의 頻用과 의미의 難澁``에서는 유희춘은 한 편의 시문을 완성하기까지 인명, 지명, 사건 등이 어우러진 전고를 빈번히 운용하였는데, 이렇듯 전고를 시문을 완성하는 중요한 근거로 삼은 까닭에 다소 의미 파악이 어려운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유희춘이 시문에서 운용한 전고의 양상을 통해 시적 상황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동일시의 미학을, 의도적인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작품 안에서 布置에 힘쓴 점을 감안할 때 안배의 미학을 언급하였다.

연암(燕巖)의 우정론과 서학(西學)의 영향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交友論)』을 중심으로-

김명호 ( Myoung Ho Kim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265-288 ( 총 24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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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은 그의 초기작인 『방경각외전』부터 말년에 쓴 <與人>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도 우정이 소중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연암의 우정론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은 그의 문학 세계의 핵심에 접근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회성원집 발> 등 우정에 대해 논한 연암의 글들에서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되었다. 필자는 그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면서, <회성원집 발>이 『교우론』을 전거로 삼은 사실을 연암의 『열하피서록』에 의거하여 더욱 분명하게 입증하고, <예덕선생전>이나 <與人>뿐 아니라 <회우록 서> 등에도 『교우론』의 영향이 드러나 있음을 구체적으로 논했다. 그러나 연암의 우정론이 『교우론』의 영향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방경각외전』 <자서>에서 연암은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지위를 격상시키고자 한 朱子의 說을 자신의 우정론의 근거로 삼았다. 이처럼 연암은 전통적 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서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연암이 ``당세의 벗``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신분과 華夷의 차별을 넘어선 우정을 추구한 것은, 『교우론』의 한계를 넘어 사상적 발전을 이룬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790년 열하(熱河) 사행(使行)의 "이도정(二道井)~열하(熱河)" 구간에 대한 인문지리학적 탐색

이승수 ( Seang Su Lee )
한국고전문학회|고전문학연구  40권 0호, 2011 pp. 289-322 ( 총 34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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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의 熱河(承德) 使行은 600년 燕行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과 청나라의 각별한 우호 관계 속에서 당대 최고의 몇몇 문사들이 참여하여 여러 기록을 남겼고, 新店에서부터 長城 밖으로 나가 熱河로 직행하는 경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1790년 7월 4일에서 15일 사이의 기록을 검토하여, 新店~熱河 구간의 길이 지니는 인문지리학적 의미를 탐색한 결과이다. 먼저 기초 작업으로 당시 노정의 재구와 자료 개관을 시도하였다. 노정은 두 차례의 현장 답사와 문헌 검토를 통해 대부분의 구간을 재구하였는데, 여러 사정으로 아직 몇몇 구간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자료들을 노정 공간을 기준으로 재배열하였다. 이 두 작업으로 여러 기록들을 지리공간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자료의 내용도 검토하여, 한국학의 관점에서 이 노정 공간이 지니게 된 문학사적 의의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사행에 참여한 이들은 초유의 공간 체험에서 남다른 자부심과 경이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는 그 자체로 작게는 문학공간의 개척이며, 크게는 세계상의 확대를 의미한다. 사행원들은 외교 사절의 공식적인 임무 중의 하나인 ``풍속을 살펴 정치의 득실을 파악한`` 결과를 충실하게 기록했다. 이는 새로 겪는 세상의 지리형세와 연혁 및 제도를 충실하게 기술하고, 나아가 풍속을 관찰하여 정치의 득실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북쪽 변방에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상은 목격하고는 주저 없이 이 곳을 樂土라고 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정치사회상에 대한 절대 긍정의 표현이었다. 이밖에 노중의 정서와 이들의 눈에 비친 풍경의 일부도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모두 이 지리 공간의 역사적 내포이자 문화적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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