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 민족문학사연구 > 56권 0호

조선 전기 지성사의 관점에서 본 사화(史禍) - 조선 전기 한문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 수립을 위한 탐색

The calamity of savants Sahwa from the perspectives based on the history of intellectual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nvestigation on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direction in Chinese-language literature of Kore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김남이 ( Nam Yi Kim )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 발행년도 : 2014

-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56권 0호

- 페이지 : pp.195-235 ( 총 41 페이지 )


학술발표대회집, 워크숍 자료집 중 1,2 페이지 논문은 ‘요약’만 제공되는 경우가 있으니,

구매 전에 간행물명, 페이지 수 확인 부탁 드립니다.

11,600
논문제목
초록(한국어)
한 나라의 체제를 갖춘다는 점에서 역사서의 편찬은 문명 구성의 핵심이 된다. 역사서의 편찬은 사회·정치·문화·지리·예악 등 문명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역사서의 편찬 과정은 역사 인식, 역사 기술의 방식, 그리고 역사 기록의 주체로서 史官의 문제를 환기했다. 조선 전기에, 처음에 역사 문제는 『고려사』와 실록 편찬을 위한 사관 ‘제도’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기록 주체와 기록 대상의 도덕성에 대한 판단, 준엄한 도덕적 평가를 관철시키는 문제를 둘러싼 신진의 지성과 기존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정치적인 숙청[士禍], 즉 사옥(史獄)과 사화(史禍)를 일으킨 정치적인 갈등으로서 부정적인 함의만을 남기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조선 전기의 문명을 구성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주체, 즉 조선 전기 지성의 형성과 직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기본 관점은, 이처럼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로서의 경험과 인식은 조선전기, 당대의 지성의 성장과 변화에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조선 전기 지성의 중요한 ‘역사 경험’으로 두 가지 사안을 다루었다. 하나는 1469년(예종1) 기축사옥(己丑史獄)으로, 『세조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차원에서 촉발된 역사문제들과 그 실천의 주체로서 사관의 의식이 드러난다. 다음은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기축사옥 이래 사관으로서의 인식과 실천이 어떤 지점까지 나아갔는지, 그 변화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498년의 무오사화에서는 ‘과거사’라고 할, 세조대의 일이 첨예한 사안이 되었다. 기축사옥과 무오사화라는, 30년을 사이에 둔 두 사화(史禍)에서 사관과 대신들이 보여준 태도는 매우 중요한 점을 제기한다. 기축사옥은 『세조실록』의 편찬으로 발생한 필화(筆禍)였다. ‘세조’라는, 명분상의 문제를 가진 왕과, 그런 왕의 정치를 비호하던 세조 측근의 신하들이 역사 기록의 대상이 되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사필(史筆)의 기본인‘무기명(無記名)’의 원칙이 갑자기 ‘기명(記名)’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기축사옥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신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사관들이 사초를 집단적으로 수정하고, 그로 인해 사관들이 처벌(죽음)을 받았던 사건이었다. 이 사옥에서 사관들은 자기의 사필을 어느선까지 관철시킬 수 있는가, 그에 대한 이념적·실천적 임계점을 드러냈다. 30년 뒤, 1498년의 무오사화에서 사초를 고치기를 원한 것은 반대로 대신(大臣)들이었다. 반면, 사관들은 자기 사필의 정당성을 삼대(三代)의 사관에서 공자의 『춘추(春秋)』, 그리고 좌구명(左丘明)의 『좌전(左傳)』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정통 계보에서 주장했다. 사관들이 자기의 사필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그것의 근거를 역사의 정통에서 찾아내어 원칙을 관철하려는 힘은 훨씬 투철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근저에는 새로운 지성들이 자기들만의 정보와 공론(公論)으로 만들어 갔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평가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 새로운 지성들은 ‘도덕적 존재’로서 자기정체성을 전면에 부각하며 그 타자로 ‘훈구(勳舊)’라 불리던, 기성의 지성들을 설정하였다. 이처럼, 기축사옥과 무오사화는 조선 전기 지성의 성장과 변화의 지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는 지성사적 위상을 갖고 있다.
초록(외국어)
History compilation becomes the core of composition of civilization in the sense of establishing the system of a country, because the compilation of history is the comprehensive issue covering all the fields related to civilization such as society, politics, culture, geography, manners and music and so on. The process of history compilation called attention to the issues of history consciousness, ways of describing history, and court-diaristsas the subjects who were in charge of recording history. The issue of history compilation which originally begun from the issue of the archives management and the court-diarists system in the early Joseon Dynasty gradually became the conflicts between new intellectuals and the old ruling power group on the issues of judgement on the moralityof the subjects who were in charge of recording history and the objects of the history of the days, and of attainments of strict moral evaluation. However, this was not just merely negative entailment as political conflicts which caused political purges such as historicalcrimes and Sahwa(士禍). More importantly, this process became the initiative for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civilizati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became directly related to the formation of intellectuals of the days. The main focus of this article is to show that the experience and awareness as the main subjects of history compilation became the crucial breakpoint in the growth and change of intellectuals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This article deals with two important ‘historical events’ of intellectual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One was ‘Gichuksaok(己丑史獄)’ which happened in the year of 1469(Yejong1) and this event showed court-diarists attitudes as the main subjects of practice and historical issues caused in the process of compilation of Sejosillok(世祖實錄) The other event was ‘Muosahwa(戊午士禍) which happened in the year of 1498 (Yeonsankun4) and this event confirmed the court-diarists’ progress of their consciousness and practice to a certainpoint since ‘Gichuksaok’. In particular, the events, which happened in the period ofKing Sejo(世祖) and was considered past history, became very acute issues from the eventin the year of 1498, the year of Muo(戊午). The attitudes of the court-diarists and the ruling party posed a very important issue from two Sahwas (i.e., ‘Gichuksaok’ and ‘Muosahwa’)which happened in the years of 1469 and 1498 respectively. ‘Gichuksaok’ was an affair brought on by the compilation of Sejosillok, which was the event that ‘King Sejo’ and the ruling party supporting his grasping political power became the object of recording history. Furthermore, the principle and basis of Historical Manuscripts which should be recorded anonymously turned into a registered system all of a sudden and became theorig in of ‘Gichuksaok’. This made court-diarists feel afraid of the ruling party’s authority and thus revise the Historical Manuscripts collectively, which ended in their death penalty. This Sahwa showed how much the court-diarists could record history in an honesty way and the limitations of their ideological and practical approaches on history. Thirty years later, it was the ruling power that wanted to revise the Historical Manuscripts on the contrary. On the other hand, the court-diarists found their historical legitimacy about the Historical Manuscripts from the authentic history which was connected from the historiographers ‘Samdae’ to the Chunchu(春秋) of Gongja(孔子) and eventually to the Jwajun(左傳)of Jwagumyung(左丘明). Young court-diarists were rightfully aware of their own way of recording history and therefore their power to attain the fundamental principle became much stronger through the recognition of the grounds from historical tradition. The new recognition and the logic of evaluation about the history which had been established by their own information and public opinion created by young intellectuals were operated at the root of this phenomenon. As a result, those young intellectuals revealed their ownidentity as ‘moral beings’ in the foreground and selected old intellectuals called ‘Hungu’(勳舊) as the opposite party. In this way, ‘Gichuksaok’ and ‘Muosahwa’ had important status inthe history of intellectuals in that those events clearly revealed the crucial breakpoint in the growth and change of intellectuals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논문정보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 -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56권 0호
  • - 발행년도 : 2014
  • - 페이지 : pp.195-235 ( 총 41 페이지 )
  • - UCI(KEPA) : I410-ECN-0102-2015-800-002220269
저널정보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7-0962
  • - 수록범위 : 1991–2022
  • - 수록 논문수 : 1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