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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이 찬술한 조식 선생 ‘신도비’논란에 대한 고찰

A Study on Heo Mok’s Cho Sik Memorial Stone Controversy

조주희 ( Cho Joo-hee )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 발행년도 : 2021

-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 페이지 : pp.157-188 ( 총 32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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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제목
초록(한국어)
한자의 도입과 함께 전래된 유학은 혈연공동체의 생활규범과 사회공동체의 행동규범을 보편화하여 도덕·윤리의 근간을 이룸으로써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를 제공하였다. 문화란 자연 상태에 있는 정신적·물질적 실체를 인간이 가공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문화생산의 촉매제로는 문자에 의해 정리된 학문이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한 사회에 특정 학문이 정착되면 그 학문이 통치의 이념을 제공하여 사회변동이 일어나고 사회변동은 문화 변화를 일으킨다는 학문과 사회와 문화 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이 패러다임의 틀에서 미수 허목이 찬술한 ‘남명 조식의 신도비’인 『덕산비』에 대한 논란을 사회·문화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성리학의 경우 고려 말에 도입되어 왕조교체의 명분을 제공하여 사회 변동을 불러 왔을 뿐만 아니라, 혈연공동체의 생활 규범과 사회공동체의 행동규범을 제시하여 불교와 도교를 멀리하는 문화변동을 일으켰다. 실학은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공리공담에 치우친 성리학을 개혁하여 實事求是의 논증을 중시함으로써 영·정조의 문예부흥기를 태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허목이 찬술한 『덕산비』가 신도비의 원래 취지인 揚善隱惡 보다는 자신의 의도인 陽尊陰擠를 각인하여 놓았다는 논란을 정파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후손의 효심에 의존하여 판단하는 문화변동을 가져왔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얻은 망자에게 주어지는 은전으로, 망자가 학문 연구를 통해 고고한 인품과 깊은 학문을 지녔었다는 증거였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과 가문 그리고 망자가 속한 학파에게 긍지를 안겨주는 영광스러운 특전이었다. 이러한 영광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남명 조식 (1501~1572)의 신도비문 찬술 역시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에게 청문하였다. 1617년에 세워진 정인홍의 『남명선생신도비』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훼철되고, 그 이후에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에게 청문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이후 서양학문의 전래와 함께 1685년에 세워진 허목의 『덕산비』가 남명에 대하여 양선 은악 보다는 양존음제의 경향이 짙다고 하여 조씨 문중과 노론이 한편이 되어 1926년에 훼철하였다. 그 후에 진주향교의 남인계 유림이 소송을 제기하여 5년간에 걸친 소송 끝에 조식 후손이 승소함으로써 250년 동안 계속된 허목의 『덕산비』에 대한 논란이 종지부를 찍게되었다. 이 논문은 조식의 신도비 청문 과정과 立碑 과정에서 후손의 孝보다는 정파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학문의 정착, 사회의 변동, 문화의 변화라는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탐구하였다.
초록(외국어)
In this study, the dispute stemming from the cenotaph erected in memory of Nammyeong (Cho Sik's nickname), and its subsequent destruction leading to a lawsuit between the Namin (southern people) faction and the descendents of Cho Sik was examined through a sociological lens. The writing on the cenotaph was also a cause for dispute between Namin and the descendents of Cho Sik, as well as between Namin and Noron (another faction). Cho Sik was active in the 16th century during the early development of neo-Confucianism. Neo-Confucianism in Joseon was centered around familial blood ties which determined norms for the whole community and the ruling ideology for the nation state. These neo-Confucian norms pervaded in all facets of society, including kinship communities, wider society, and culture. These norms also permeated in mental or intellectual outputs such as artworks and symbolic systems such as linguistic rules. All these in the Joseon era were included under the umbrella of the concept of culture, with culture being defined as the mental and physical aspects of nature as it is created by humans, and that which is transformed or created as new. The academic discipline called Confucianism also contained the term culture as the concept of a human mental output leading to new creations. Neo-Confucianism was a philosophy that added metaphysical reasoning to early Confucianism, and was introduced in late 13 century Goryeo by Ahn Hyang, thus playing a critical role in the creation of a new culture in the dynastic transition period. Neo-Confucianism rejected the doctrines of Buddhism and Taoism as empty, characterizing them as a destructive force of familial and societal ethics and discipline, as Buddhism tended toward eschewing the secular world and Taoism favored seclusion. Buddhist and Taoist doctrines were effectively rendered a taboo paving the way for neo-Confucianism to take root in the culture, and as a result, causing a great societal change. From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until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Realist School (Shilhak) of Korean Confucian academic tradition was established, and its practitioners reflected upon the exclusionary and intolerant nature of neo-Confucianism. They also stressed the importance of pragmatism and carefully analyzed and debated each and every proposition they faced. Accordingly, the 喪葬祭禮, or Confucian rituals, was elevated to the status of an academic discipline. However, the rituals outlined in the Sangjangjerye became the source of intense struggle among the political factions behind closed doors, thus leading to social change which in turn caused cultural change. The establishment of the Shindobi, which was used as a means of strengthening the class system, became the subject of profound studies, and the focus of a power struggle between factions, including Yesong surrounding funeral rites of a queen's mother, served as the catalyst for great social change. When viewed through this lens, the sociological meaning of Heo Mok's cenotaph erected for Cho Sik entitled “Deoksanbi” is revealed.

논문정보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 -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 - 발행년도 : 2021
  • - 페이지 : pp.157-188 ( 총 32 페이지 )
  • - UCI(KEPA) :
저널정보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수록범위 : 1988–2021
  • - 수록 논문수 :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