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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131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0권 0호 (2018)

『증참의공적소시가(贈參議公謫所詩歌)』를 통해 본 이광명(李匡明) 한시(漢詩)의 일고찰

이승용 ( Lee Seung-yo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9-37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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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匡明(1701 1778)은 號가 海嶽丈人으로, 江華學의 개창자인 霞谷 鄭齊斗(1649~1736)의 제자이자 孫壻이며, 椒園 李忠翊(1744~1816)의 養父이다. 이른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江華島로 이주하여 1755년 乙亥獄事가 일어나기 전까지 鄭齊斗의 江華學을 전수받아 학문에 침잠하였지만, 치열한 老少黨爭의 소용돌이에서 일어난 을해옥사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을해옥사가 일어난 그해에 伯父 李眞儒(1669~1730)에 追律되어 北關의 甲山으로 귀양을 갔다가 24년간의 유배 끝에 결국 무술년(1778, 정조2)에 謫所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광명이 비록 기나긴 유배로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甲山은 그에게 새로운 문학 창작의 공간이었으며, 그 속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색채를 지닌 詩作을 남겼다. 이광명의 한시를 한 마디로 말하면 ‘孤獨과 哀愁의 悲歌’라 할 수 있다. 沈魯崇(1762~1836)은 機張 유배지에서 이광명의 從弟인 李匡顯이 남긴 1首의 시를 보고 “고통으로 가득한 情境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다 읽지 못하게 만든다.”라고 말하였다. 이광명의 한시도 이와 유사한 詩情과 詩境을 내포하고 있는데, 孤獨과 悲哀가 지배적 정조를 이루고 있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정서를 절제와 꾸밈없이 그대로 표출하였다. 이는 이광명의 한시가 다른 유배 한시와 지니는 변별점이며, 한시의 창작에서 수사적 기교나 語句의 조탁보다는 진정한 性情의 발로를 더 우위에 둔 그의 창작경향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광명은 甲山의 풍물과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漢詩에 담아내었다. 북관의 ‘風土記’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조선후기 유배시의 범주에서 보더라도 큰 의미가 있다. 유배지의 문화, 풍속, 인물 등 갑산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여 그 당시 지역민의 현실과 생활상을 담아내었고, 당시 유배객들처럼 양반 관료의 의식과 시각이 아니라, 평범한 선비의 시선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공간을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유형의 한시에서는 이쥬풍속통 에서는 볼 수 없는 좀 더 다채로운 갑산의 인문지리적 환경과 풍토를 엿볼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마지막으로 형식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광명은 古詩를 적극적으로 창작에 활용하여 시험적 시도를 하였는데, 이러한 점에서 5언과 7언의 정형성을 탈피하여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내면의 감정과 소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詩作化했던 그의 노력과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古詩는 이광명 개인의 시적 재능과 역량을 가늠하는데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韓國) 시화(詩話)에서의 『시경(詩經)』의 수용(受容)과 운용(運用)

김수경 ( Kim Su-kyu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39-77 ( 총 39 pages)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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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 시화에 반영된, 『시경』의 수용과 운용 양상을 고찰하여 조선시대 『시경』 受容史의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데 주요 서술 목적이 있다. 본고에서 도출한 유의미한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화 자료를 통해 여성층이 『시경』의 관용구를 암송 운용한 면모 및 문인 학자들의 『시경』 감상 활용에 대한 층차를 편린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의 『시경』 주석 자료에서는 살피기 어려운 것으로, 한국에서의 『시경』 수용층과 운용 과정상의 일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둘째, 한국 전통시대 『시경』 주석에서는 보기 드문 『시경』의 문학 감상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우리 시화에 초록된 중국 시화 총서 유서 가운데 유관 자료를 詩料로 파악하고 일부 사례를 추출해 소개하였다. 이러한 자료 또한 과거의 다양한 『시경』 수용 양상을 파악하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오늘날 『시경』 감상에도 유효한 참고가치를 지닌다고 사료된다. 셋째, 申景濬의 시론과 『靑邱韻鉢』의 편차를 예로 들어, 『시경』의 賦比興論 및 風雅頌 편차가 시화에서 논의 활용된 사례를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詩評者들이 전통 경학의 입장보다는, 중국 시화에 반영된 관점을 수용하거나 『시경』에 대한 자의적 심득을 바탕으로 시화를 재구성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시화에서의 『시경』의 수용과 운용 양상은 일정한 경향성을 지닌다기보다 편린적이며 산발적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이러한 편린 속에서 다양한 독자가 『시경』을 문화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창작 역량으로 자양화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본고의 탐색은 또한 유가경전 텍스트의 언어가 조선시대 문학의 문체로 이해되고 문학 창작에 작용하는 기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여전히 유용한 참고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18세기 일본 고문사파의 중국 시선집 간행과 한시 학습 방법의 보급

노경희 ( Kyung Hee Rho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79-103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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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일본 고문사파의 중국 시선집 간행과 그들의 한시 학습 방법의 보급 활동을 살핀 것이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를 필두로 한 일본 고문사파는 명대 전후칠자 중특히 이반룡과 왕세정의 문학론에 경도되어 그들의 ‘문장은 반드시 진한이요, 시는 반드시 성당이라. (文必秦漢, 詩必盛唐)’는 문학강령을 바탕으로 복고의 문학을 주장하였다. 다만, 이들 두 문파는 각각 명나라와 일본, 16세기와 18세기라는 공간과 시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만큼 유사한 문학론을 주장한다 하여도 실제 모습에 있어 차별점을 지닐 수 밖에 없다. 본고는 이들의 실제 문학 활동에서 나타나는 차별적 지점들, 즉 일본 고문사 파만의 특징에 주목하였다. 특히 ‘시론’에 집중하여 오규 소라이와 그의 문학 방면의 수제자인 핫토리 난카쿠(服部南郭)를 중심으로 이들의 한시에 대한 인식과 중국 시문선집의 편찬 간행 활동을 살피었다. 그 결과 에도의 고문사파 문인들은 자신들의 한시 이론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서적들을 간행하였고, 이를 한문을 잘 모르는 계층까지 널리 보급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였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는 곧 어려운 고문사를 배울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한시와 한문의 보급을 실현하고자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가장 고대의 시문을 추종하는 이들이 한문에 숙달되지 못한 계층까지 독자로 포섭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점에서 대중의 시대인 근대로의 길을 열고 있다는, 일본 고문사파의 문학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선조(宣祖) 연간 문단(文壇)의 추이(推移)와 최립(崔岦)의 시문(詩文)

김우정 ( Kim Woo-jeo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105-136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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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崔岦(1539~1612)의 詩文을 통해 조선 宣祖 연간(재위 1567~1608) 문단의 동향과 최립 문학의 특징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선조 연간은 이른바 ‘穆陵盛世’로 호명될 만큼 다양한 문학적 조류가 명멸했던 시기다. 詩에서는 江西詩派의 영향이 여전한 가운데 소위 三唐詩人을 필두로 한 唐詩風이 부각되었고, 文에서는 唐宋古文에 대한 趨向이 심화되는 한편 先秦文을 모범으로 한 복고풍의 문장이 출현했다. 여기에는 前後七子를 핵심으로 하는 明代 復古派 문학의 유입이 큰 역할을 했는데, 최립은 ‘學明’ 풍조를 주도한 近畿 西人과 친밀한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深晦奇澁’한 문장이 전후칠자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에 전후칠자를 배웠다는 혐의를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그의 詩를 살펴본 결과 ‘奇健精深’한 강서시의 시풍이 주로 나타나며 제가의 논평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최립이 宋詩를 철저히 배격한 전후칠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결과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즉, 최립에게 있어서 전후칠자의 영향설은 ‘學明’ 풍조에 비판적이었던 문인들에 의해 날조된 허구이자 주관적 인상비평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오해의 산물이다. 최립은 司馬遷班固의 秦漢文과 韓愈文에 대한 집요한 연찬을 통해 독자적 문풍을 구축했던 것처럼 시에서도 江西詩를 기초로 ‘刻意湛思’한 자신만의 시풍을 구현했다.

허균의 「견가림신」(譴加林神)에 나타난 민속지(民俗誌)적 성격과 그 의미

김풍기 ( Kim Punggi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137-159 ( 총 23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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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가림신」은 허균이 함열 귀양 시기에 지은 작품이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함열이고 북쪽은 부여에 소속된 가림이라는 동네였다. 두 지역의 백성들은 서낭당을 모시고 있었는데, 허균은 작품 속에 그 풍속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며, 각 부분은 내용, 시적 목소리, 사상적 층위 등에서 차이를 가진다. 첫째 부분은 가림 지역 서낭당의 神인 가림신이 비바람을 불러 일으켜서 문제를 만들고 이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읊었다. 함열 서낭당의 신인 함신이 자신의 남편인데 다른 여성 신과 사이좋게 지내자 질투가 나서 문제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그는 남신과 여신을 따로 모시는 서낭당이 있는 두 지역 사이의 민속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소재를 허균이 자세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민속지적 성격을 지닌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가림신을 꾸짖기 위해 허균이 도교의 여러 신들을 부르는 내용이고, 세 번째 부분은 유교 윤리에 의해 지방관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들 부분은 민간신앙에서 도교로, 다시 유교에 의해 그 사상적 층위가 정리된다. 표면적으로는 유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도교와 민간신앙이 보이지 않는 기초를 만들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허균은 도교에 바탕을 두고 민간신앙을 다루고자 하지만, 유교적 윤리로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가야만 하는 유학자로서의 태도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견가림신」은 허균 시대의 일상이나 풍속을 자세하게 기록화함으로써 한 시대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민간신앙이나 세시풍속과 같은 내용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자기 시대의 삶을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살핌으로써 문학이 일상으로부터 비롯하는 것, 일상어는 그러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려고 한 허균의 문학론과 궤를 함께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의 민속을 관찰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아가 이를 내용으로 하여 기록을 남기는 행위는 민속지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값하는 것이다.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대한 고찰 -만명 유행 현상과 관련하여-

안나미 ( Ahn Nami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161-180 ( 총 20 pages)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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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품평서 屠門大嚼을 지어 조선 팔도의 진미에 대하여 산지와 요리법, 명칭 등을 소개하고 음식에 대한 품평을 다루었다. 허균은 <屠門大嚼 引>에서 그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첫째, 허균 집안에 전국의 많은 음식이 예물로 들어와 그것을 즐길 수 있어 음식을 품평할 수 있었다. 둘째, 중국 何氏의 『食經』과 舒公의 『食單』을 보았지만1) 천하의 진미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눈만 현란하게 하는 도구에 그칠 뿐이라고 하며 조선의 음식을 소개하려고 하였다. 셋째, 식욕은 인간의 본성이 라는 점을 강조하여 절제와 금욕을 강요하는 조선 사회에서 허균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의 하나인 식욕을 가지고 억압과 규율에 저항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허균이 도문대작 을 짓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선사회가 강요하는 예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이 내린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는 허균의 사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晩明 시기는 상업경제가 발전하면서 소비문화가 성행하였다. 이에 음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많은 음식서적이 간행되었고, 강남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문인들의 음식서 저술 활동이 성행하게 되었다. ‘美食’에 대한 욕망이 자극되면서 강남 문인들의 문인결사 활동은 詩社에서 시작하여 飮食社로 이동하면서 음식의 풍기를 연구하고 즐기게 되었다. 이때 허균은 명의 서적을 탐독하고 많은 명인과 교류하며 만명 문화의 유행 현상을 감지하였다. 그리고 식욕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면서 도문대작 을 저술하여 ‘음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사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 사회의 억압과 규제에 대한 반항을 인간의 본성인 식욕, 곧 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은 도문대작 을 통해 미식 그 자체에 탐닉하기 보다는 음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개성을 존중하며 개인의 자유를 발현하는 것을 추구하는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봉건 도덕의 억압과 허위를 반대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그의 개혁 사상과 창의적 사고가 문학의 개성을 강조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채제공 「정원록」 연구

이승재 ( Lee Seung-jae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181-204 ( 총 24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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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인 중국 강남의 문인 문화가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문인들끼리 시사(詩社)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각 당파별 시사 중 남인 시사는 채팽윤의 동벽단(東壁壇) 시사와 이중환의 연사(蓮社)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채제공이 남인의 영수로서 여러 차례 시사를 주관하며 18세기 남인 시사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의 시사 중 정원록(貞元錄) 은 영조 49년에 결성한 중 종남사(終南社)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시사에 각별한 의미를 두어 나중에 서문을 남겼고 여기에 구성원의 참석 여부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전후 남인 시사의 흐름을 살피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이전 풍단 시사 때는 볼 수 없었던 면학을 강조하는 시들을 여러 편 지어, 이것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 시사임을 드러내었다. 이후 시사에 참석한 이들 중 6명이나 몇 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는 상당한 쾌거를 거두었다. 종남사는 채제공이 남인들의 결속과 관로 진출을 위해 시사를 활용했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중종대(中宗代) 속찬증보(續撰增補) 사업과 그 정치적 함의

정용건 ( Chung Yong-gun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205-244 ( 총 40 pages)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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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中宗代에 이루어진 일련의 續撰·增補 사업과 그 안에 내재된 정치적 함의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무너진 국운을 회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군주로서 자신의 지위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각종 문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집단은 ‘金宗直’이라는 학문적 경험과 ‘士禍’라는 정치적 기억을 공유하면서 성장한 중종대 관료 문인으로서, 이들은 문화 사업을 통해 연산군에 의해 부정당한 자신과 그 동류들의 위상을 복구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의 담당자로서 자신들의 역량을 공인 받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목적성을 인지한 위에서 『續三綱行實圖』, 『續東文選』, 『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중종대 속찬 증보 사업의 실제를 들여다보면, 선배 및 동료들의 학문과 행적을 현양함으로써 자신의 집단이 세종-성종대의 문화적 융성을 계승할 적임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각 서적의 내용을 구축한 편찬 주체들의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먼저 『속삼 강행실도』에서는 특히 연산군대의 사례가 폐조의 폭정을 배경으로 삼고 그 속에서 목숨을 잃은 인물들의 절행을 기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속동문선』에서는 성종 이후 40년간의 시문, 그중에서도 김종직 문파 및 사화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의 작품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속삼강행실도』와 『속동문선』으로 대표되는 풍속·문학 방면의 성과를 하나의 지리서로 총집함으로써 그간의 문화 정비 사업을 완수해낸 데 대한 그들의 자부심을 간취할 수 있다. 이처럼 중종대 문화 사업의 주체들은 ‘국운의 회복’이라는 정치적 지향을 표방하면서도, 실제 추진 내용에 있어서는 자기 문인 집단의 권위를 복구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뚜렷이 내보였다. 문물의 정비를 표방하며 ‘윤리’, ‘문학’, ‘지리’ 등 문화 각 방면에서 전 방위적으로 시도된 속찬·증보 사업의 이면에는, 자신의 시대를 의미 있게 만들고자 고민했던 당대 관료 문인들의 이와 같은 분주한 움직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과거(科擧) 사서의(四書疑) 시문(試文) 일고(一考)

윤선영 ( Yoon Sun-you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0권 0호, 2018 pp. 245-278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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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자는 지금까지 거의 연구되지 않은 과거시험 과목의 하나인 四書疑 試文의 성격과 내용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각종 문집 및 시권에 보이는 조선 시대 사서의 300여 편을 수집·분석하였다. 사서의 시권은 전해지는 자료 수에 비하여 미상 처리된 부분이 많았다. 擧子의 인물 정보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 작성 연도를 알아내고, 함께 짝지어 기록된 五經義나 論의 시제를 대조하여 사서의 시제를 추적하는 방식 등,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미상 시권을 밝히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과문집 가운데서는 『臨軒功令』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 책에는 사서의 문답이 200여 편 이상 온전히 기록되어 있으나, 그 시기가 순조~고종대로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점이 보였다. 그 외에 개인 문집에 수록된 사서의 시문과 안정복 가에서 전하는 과거시험 대비 연습용 습작류의 책 등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 결과 시권에 비해 문집으로 전하는 조선 전기~중기 사서의의 科次가 뛰어나며, 후대로 갈수록 성적이 낮아짐을 알 수 있었다. 사서의 시문의 형식을 대책과 비교해 본 결과 유사한 가운데서도 약간의 차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최상위권 성적을 받은 사서의 제문의 실례를 살펴봄으로써 거자의 답안 구성과 표현 방식, 논리 전개 등을 분석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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