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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연구검색

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2권 0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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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화시대의 추세는 각 지역의 정체성 정립과 경쟁력 강화를 촉구하여 다양한 지역학을 활성화시켰다. 지역학은 지방의 역사, 자연환경, 지리적 여건, 문화전통 등에 관한 연구를 기초 작업으로 하면서, 지역 주민에게 지역의 정체성을 되찾게 하는 등 그 지역의 주민들과 그들의 삶을 생각하는 연구이어야 한다. 지역학과 관련하여 한문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지역학으로서의 한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살펴보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역에서 발굴되는 옛 전적들은 그 지역과 관련된 지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학으로서의 한문학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분야이다. 둘째, 각 지역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道誌와 시·군 단위의 邑誌이다. 이들 자료의 발굴과 번역, 그리고 그것을 기초 자료로 한 연구는 지역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이다. 셋째, 지역마다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회는 정기적인 학술발표나 책 발간 등을 할 수 있는 주체이다. 이 때문에 학회의 활동은 중차대하다. 학회는 지역의 다양한 양상을 기록한 자료의 개발을 통하여 해당 지역을 가르치고 배우는 지역교육에도 힘써야 한다. 넷째, 중앙 문단에서 행세를 한 적이 없거나, 벼슬에 나가보지도 못한 채 고향에서 평생을 보낸 문인들의 작품에 시선을 돌려야한다. 또한 그동안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하던 여성들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째, 지역학은 지방의 자연환경, 지리적 여건 등을 주제로 삼는다. 특정지역 및 관련 인물에 대한 종합적 연구는 지역학으로서의 한문학이 지향할 곳이다. 여섯째, 지역학은 지방의 문화와 문화재 등을 주제로 삼는다. 이러한 연구들은 문화 관광 자료의 구축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한문학이 다루어야할 한 분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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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의 시 창작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고 더 좋은 시를 짓기 위한 노력은 치열했다. 그는 737제 1144수라는 많은 분량의 시를 남겼다. 양도 많고 작품성도 뛰어난 시를 창작한 시인 원천석에 관한 연구들에서 원천석의 시 인식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였다. 기존의 논저들을 원천석의 절의와 은사로서의 명성에 압도되어 그의 역사 의식이나 사회 의식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원천석의 시에 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원천석은 시를 곧 삶 그 자체로 인식하였다. 원천석은 그의 종교관이나 가치관을 시로 직접 진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상의 모든 것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그의 시는 그의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고 모든 시가 삶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시만으로도 그의 삶의 궤적 유추가 가능할 정도이다. 원천석은 ``시란 뜻을 말한 것이되 진솔하고 간절한 정서의 표현``으로 인식하였다. 시란 ``언지`` 즉 뜻을 말하는 것이란 유가의 전통적 시 인식을 따르고 있다. 한편 시는 사람의 정서를 겉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인식을 보인다.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각양각색의 정서들을 사실적으로 시 속에 구사하는 것이 시라는 생각이다. 원천석은 당시 사회의 중요한 사실들을 밝히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시를 창작하였다. 시 창작의 동기로 사실의 기록을 중시하였다. 이런 면은 그의 시집을 일컬어 흔히 ``시사(詩史)``라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려말 조선 초의 역사적 사실의 시적 표현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주변의 일들에 대한 사실적 기록과 감회를 시로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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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의 목적은 「석담야사·일기」에서 「경연일기」까지 간행과정의 사상적 추이를 연구하는데 있다. 조선조 유학자들은 평소에 고민했던 공·사적인 일을 꼼꼼하고 성실한 자세로 일기체를 기록하였는데, 그 중 율곡 이이의 일기체인 필사본과 정본 등을 탐독하였다. 「경연일기」는 율곡 이이가 46세 때 완성한 것으로 17년간에 걸쳐 경연에서 군신간에 논란이 되었던 당시의 주요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비밀과 세밀한 편년체의 일기체 기록이다. 이 기록은 간행본인 「경연일기」라는 표제 이외에도 일명 「석담일기」, 「석담야사」, 「석담유사」라는 명칭으로 불리워 왔다. 「경연일기」는 율곡 선생이 직접 정사에 참여하여 목도한 사실들을 사회개혁에 적용한 율곡의 사회사상을 살필 수 있는 사료이다. 본 논고의 체제는 『전서』와 판본 및 표제 검토, 판본의 사상적 추이, 사상적 추이에 관한 검토를 그 내용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석담일기」 및 「석담야사」와 「경연일기」로 불려지는 명칭의 문제 고찰과 「경연일기」의 표제와 진위문제 검토 및 결론에 있다. 또한 더 연구·진작되어야 할 문제지만 권수와 내용의 동이문제이다. 「경연일기」는 「석담일기」와 동일한 표제를 지니고 있으며, 「경연일기」는 『율곡전서』 판본의 표제이지만 「석담일기」 또는 「석담야사」는 정식 판본이 아니라 여러 식자들에게 필사되어 읽혔음을 알 수 있었다. 논자는 이러한 간행본과 간사본의 체제에 의문을 품고 「경연일기」와 「석담유사」의 명칭 및 특징을 판본의 해석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또한 「경연일기」가 언제 어떤 형태로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간행되었는지의 편찬자의 사상사 연맥 계보도 그려 보았다. 따라서 『율곡전서』 간행본의 판본문제와 「석담일기」 등의 필사본 체제를 정리해 보았으며, 『조선왕조실록』 및 『한국문집총간』 등의 「경연일기」와 「석담일기」 수록의 해석문제도 다소간 살필 수 있었다. 본 논고에서는 율곡 자신의 학문과 사상, 나아가 정치적 이념과 경세에 대한 비전 등을 종합적으로 담아 서술한 경세서의 일기체를 살필 수 있었다. 논자는 「경연일기」의 체제와 사상적 추이를 사마천의 『사기』와 견주어 보았다. 민감하고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는 후일 율곡학파들은 표제 선정 문제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는 당시 시대의 문제이자 사상의 추이에 관한 전개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연일기」가 「석담일기」 등으로 병칭되어 불려왔듯이 그것이 공적 일기인지 사적일기인지 아니면 正史인지 野史인지의 문제도 인물평 및 비판론과 관련하여 엄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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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로는 많은 편이 아니지만 질적으로는 허균은 한국 사부문학을 대표하는 辭賦家이다. 그의 작품 14편 중에 3편이 강원도에서 지어졌다는 사실은 강원도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3편의 작품을 가지고 사부의 형식적 요건을 귀납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무작위로 표집된 3편에서 그것을 추출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 신뢰도를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각 작품은 3단 구성, 다양한 字句, 押韻의 구사 등을 고루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얻어진 3가지 형식적 요소는 사부를 규정지을 수 있는 일반적 기준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직 이러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형편에서 이 작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사부로 여겨지지 않았던 許筠의 숨겨진 작품 3편을 들어 같은 방법으로 그것이 사부임을 입증하여 연구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한다. 유감스러운 일은 형식적 요건의 추출에 치우쳐 작품의 내용적 면모에 소홀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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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 丁若鏞(영조38, 1762-헌종2, 1836)은 두 번에 걸쳐 춘천을 여행한다. 1차 여행은 59세 때인 순조 20년(1820) 3월이고, 2차 여행은 3년 뒤인 62세 때 순조 23년(1823) 4월 15일에서 4월 25일까지이다. 1차 여행 때는 『穿牛紀行』이라는 시집을 남겼고, 2차 여행 때에는 『汕行日記』라는 여행 기록과 여행이 끝난 후 『汕水尋源記』라는 글을 남겼다. 이 중 『穿牛紀行』이라는 시집은 시로써 행로를 기록하여 7언절구 25수, 和杜詩 12수, 잡체시 10수가 실려 있다. 『汕行日記』에서는 여행 일자별로 날씨와 묵은 장소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여정별로 행적, 관찰, 감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1차 여행 때보다는 여행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직접 답사하여 심증을 굳힌 기록이 『汕水尋源記』이다. 다산은 洌水란 곧 한강이고 汕水는 북한강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2차 여행에서 직접 답사를 통하여 汕水란 산골에서 나오는 춘천의 물과 狼川[화천]의 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본고에서는 다산의 1차 여행시집인 『穿牛紀行』을 중심으로 여행 목적 및 여정, 여정별 형상화 양상, 춘천의 역사 고증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제 본고에서 고찰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일차(남일원에서 금허촌까지)에서는 출발 당일의 느낌과 산수 간에 노닐고 싶은 심정, 그리고 배에서 바라본 주변 풍광을 노래하고 있다. 제2일차(남이섬에서 마적산까지)에서는 남이섬을 지나며 南怡 장군에 대한 회고와 춘천이 가까워짐을 노래하였고, 마적산에서 묵으며 경전을 늘 가까이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제3일차(기락각에서 청평사까지)에서는 기락각을 통하여 청평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으며, 李資玄을 회고하며 그의 고고한 인품을 드러내고 있다. 제4일차(우수주)에서는 지인이던 李檗의 종형제 李목을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헤어짐을 아쉬워하였으며, 다산이 벼슬할 때 만났던 사람의 아들 윤종원을 만나 학문의 이치를 연구하기를 당부하며 떠났다. 아울러 춘천 맥국설이 잘못되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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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하면서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질서에서 종법내 모든 질서는 남성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嫡庶의 차별이 법제화 되어 있어 가정 내에서 처와 첩의 지위를 명확히 구분하기 시작하여 嫡子와 庶子의 차별도 심화되었다. 이처럼 여성의 학문이 자유롭지 못하고 嫡庶의 차별이 있던 시대에 태어난 朴竹西는 庶女이며 小室이기에 겪어야했던 슬픔과 외로움, 그리움 등을 많은 詩로 표현해 166편이나 되는 한시문을 지어 문집으로 남겼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일찍부터 시문을 지을 정도였지만 庶女로 태어난 그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못했다. 出生과 出嫁에서 비롯된 그의 애상적 정조가 병약한 몸과 함께 평생 그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 고적감과 그리움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小室이기에 자주 대할 수 없었던 님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마음의 위로가 돼주던 三湖亭詩社의 금원에 대한 그리움이 유달리 나타나고, 특히 부모 없이 어릴 때 함께 놀며 자란 형제에 대한 그리움은 다른 여성 시인들이나 같은 三湖亭詩社 회원들의 작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 애틋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죽서의 詩에서 이 그리움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지역학으로서 한문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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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명문 가문에서 서자의 자손으로 태어난 김도수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문학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유명한 사대부 문인 및 중인 계층, 같은 서얼 계층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시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말단이지만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회제도에서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제약으로 관직생활은 짧을 수밖에 없었고, 그는 춘천으로의 유거를 선택하였다. 春洲라는 호를 사용할 정도로 그의 길지 않은 생애에서 춘천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그가 춘천에 유거하게 된 배경과 그 속에서 지은 한시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춘천은 청평산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은일의 고장으로 명성이 났으며, 실제로 이자현, 김수증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들이 은거생활을 하였다. 또한 퇴계와 다산 등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들이 이곳에 들려 그들의 생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맥을 같이 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도수의 춘천 유거는 일반적인 은거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는 자신이 원하여 은거한 것이 아니라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인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춘천에서 지은 시문에는 현실지향적인 의식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춘천에 유거하면서 느끼는 한가로움을 읊기도 한 반면에 관직에 진출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였다. 또한 홀로 외로이 지내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벗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형상화 하였으며, 옛날 서울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희망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는 자연물을 통해 자신의 고고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고,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위정자들의 무능력과 안일함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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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북한강 유역이 신라 때 어떻게 郡縣으로 편제되어 있었는지 밝히는 동시에, 이 지역 군현의 사례를 통하여 신라 군현제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 것이다. 북한강 유역에는 신라 때 州 1(朔州), 郡 7, 縣 11, 총 19개의 군현이 있었는데, 대부분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수역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라 中古期의 지방 제도는 郡-城·村制로 아직 縣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일기 郡縣制로의 전환 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 고구려를 공격하여 북한강 유역을 포함한 ``10郡``의 땅을 차지하였다. 즉 郡을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지역 군현 중심지에 남아 있는 신라 城址를 통해서 주요한 지점에 城을 축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城은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서 더 두어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郡은 일정한 면적과 호구수를 고려하여 설정된 것으로 파악된다. 양자는 다른 기능의 것이었지만 결국 효율성의 차원에서 郡 내의 각 城이 군의 영역을 분할하여 郡(중심 城) 또는 縣으로 전환, 郡縣制가 성립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북한강 유역에는 강을 따라 동서로 발달한 교통로와 유역을 가로지르는 남북 교통로가 있었다. 신라는 王都에서부터 이어지는 남북 교통로를 중심으로 朔州를 설정하였으며, 두 교통로가 교차하는 지점이 州治가 되었다. 城에서 전환된 각 군현은 대부분 이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州治인 춘천 지역은 수상 교통에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적어도 낭천, 양구, 인제, 홍천, 가평 지역의 물자 이동은 북한강의 수운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기 군현의 중심지에는 여전히 城이 남아 있었으며 영역 내에는 여러 村이 분포하였다. 城은 그 군현의 중심적인 구조물이었지만 통일기에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 즉 치소의 기능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앞으로 북한강 유역의 신라 성지와 취락 유적이 많이 조사된다면, 군현 중심지의 성과 주변 촌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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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遊淸平山記」를 통해 유산기의 구조를 도출하고, 그 구조를 통해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遊淸平山記」는 5단락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유산기의 일반적 구조인 준비-실행-총평을 세분화한 형태이다. 「遊淸平山記」는 시간적 구성과 공간적 구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5월 4일과 5일 이틀 사이의 산행으로 이루어졌으며, 작자의 발걸음을 따라 새롭게 나타나는 유물과 자연경개를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단락의 구성인 章法을 살펴보면 豫伏法과 提綱法, 問答法 등의 수사법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경물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 곳과, 작자의 의론이 두드러진 곳도 보이며,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잘 살린 단락도 있다. 「遊淸平山記」는 다양한 수사법을 동원해가면서 단락을 구성하고 있고,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였을 때 심도 있는 작품의 감상과 이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개정된 교육과정의 변화 중 7차 교육과정과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산문 분야이다. ``글의 구조와 내용의 전개 방식을 활용한 글의 내용과 주제 이해``를 강조하는 교육과정에 따라 본고는 교과서에 실린 유산기를 구조를 통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그동안 이루어진 한자의 쓰임과 어구 풀이, 문장의 구조 등을 중심으로 산문을 학습하는 것을 지양하고 글의 구조와 내용의 전개 방식을 활용하여 글의 내용과 주제 이해를 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효율적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곡 정제두의 『대학』관에 나타난 한국적 양명학의 탄생 고찰

선병삼 ( Beung Sam Su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2권 0호, 2011 pp. 249-275 ( 총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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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하곡 정제두 관련 연구들 중 연구 성과가 많지 않고 또한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 중 하나를 꼽자면 중국양명학과의 비교를 바탕으로 하곡 양명학의 한국적 특색을 잡아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하곡학에 대한 연구와 중국양명학(양명후학)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곡학과 양명학(양명후학)의 직·간접적 관계에 대한 구체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연구는 단기간 내에 완성되기는 어렵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작업의 선행적 시도로 하곡이 남긴 「大學說」(『하곡집』 권13)을 분석하면서 하곡의 『대학』관을 분석해 보았다. 본래 주자학과 양명학이 갈리는 지점은 양명이 주자의 『대학』관에 도전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하곡의 『대학』관을 통해 그가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전향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양명의 『대학』관과 차별화된 하곡 『대학』관이 무엇인지도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론에서는 하곡의 『대학』관을 ``至善``, ``致知在格物``, ``孝弟慈``라는 조목을 통해 살펴보았다. 만약 이상의 연구가 성공적이라면 한국적 양명학으로서의 하곡학의 특색을 탐구하는 기초를 마련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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