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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4권 0호 (2012)

백제 초기 도읍지와 天安위례산성(慰禮山城)

서정석 ( Jeong Seog Seo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7-37 ( 총 31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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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호당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위례산성(위례산성(慰禮山城))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던 위례산성(위례산성(慰禮山城))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천안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것으로, 백제 초기의 도읍지가 한강유역이라고 믿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는 위례산성(慰禮山城)을 백제의 시조온조왕(始祖溫祚王)의 초도지(初都地)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위례산성이 백제의 초도지라는 설명은 이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 기록 중에는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기록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위례산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가 추진되었다. 조사 결과 위례산성이 백제산성 이라면 그 만큼 백제의 초도지(初都地)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후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처음에는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三足土器)가 출토되기도 하고, 백제토기편으로 판단되는 토기들도 발견되어 백제산성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지만, 2차 조사와 3차 조사가 추가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산성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위례산성이 백제 초도지(初都地)일 가능성이 사라진 셈이다. 사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백제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을 직산지역에 비정하였지만 이보다 먼저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위례성을 이름만 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地分)``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미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1145)에는 위례성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아울러 삼국사기 보다는 늦지만 삼국유사 보다는 이른 시기에 편찬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215)의 석마라난타조(釋摩羅難陀條)에서도 백제가 처음 개국한 한산(漢山)을 경기도 광주(廣州)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처음 위례성에 즉위 하였다가 말갈과 낙랑의 공격을 받아 하남(河南)으로 천도(遷都)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백제 초도지가 직산의 위례산성 이라면 말갈과 낙랑의 공격을 피하고자 천도한 곳이 오히려 말갈이나 낙랑과 가까운 곳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모순은 결국 천안 위례산성이 백제 초도지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천안의 누정시(樓亭詩) 고찰

송기섭 ( Gi Seop So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39-71 ( 총 33 pages)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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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는 일부 상류층 및 식자층의 문화와 휴식공간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조선 이후 유가(儒家)정신과 결합함으로써 풍류를 즐기고 이념 등을 논하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장소로 그 역할을 다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느낌을 시로 읊었으며, 그 내용의 양상이 누정의 역사, 위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천안의 누정에서도 역시 역사, 지리, 그리고 환경의 특색에 따라 시의 내용적 양상이 달리 나타나는데 북부지역은 백제 초기의 도읍이었고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기로(岐路)였기에 내용상 백제 망국의 슬픔과 갈림길에서의 자신의 유수(幽愁)를 표현하는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중부지역은 고려태조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고 선비들이 남북으로 오가면서 머물렀던 곳이어서 누정의 많은 시들이 태조의 발자취와 향수를 달래며 고민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남부지역은 아름다운 승지(勝地)가 많고 이곳의 정자들은 자연 속에 위치해 있어 자연산수를 소재로 노래한 시가 대부분이다. 이에 천안 누정의 지역적 특색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시의 특성을 살펴보면 서거정의 제원루(濟源樓)와 구봉령의 차직산제원루운(次稷山濟源樓韻)에서는 망백제국의 슬픔을, 박장원(朴長遠)의 제천안군루(題天安郡樓)와 금종직(金宗直)의 등천안선화루(登天安宣化樓)에서는 고려 태조의 자취를, 숙종의 영소정(靈召亭)은 조선 임금의 자취를 남기고 있어 우리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누정에 배어 있다. 이승소(李承召)의 선화루(宣化樓)와 오(吳)의 천안수선정(天安水仙亭)에서는 향수 때문에 그 고민을 노래하고 있는 반면 申濡의 척수루(滌愁樓)와 임방(任防)의 한식등척수루(寒食登滌愁樓)에서는 자신의 시름을 씻어내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어 이곳을 지나다 머무르며 느끼는 감정이 다양하게 시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지리적 특색을 잘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승지(勝地)에 위치한 정자에서 읊은 시들은 산수를 벗 삼고 또한 가까운 벗과 화답하며 주변의 경관을 그리고 노래함으로써 옛 선비들의 교유와 철학적사고를 느끼게 하고 있다. 유광흥의 자한정(自閑亭)과 한상욱(韓相旭)의 용주정(龍珠亭)에서는 정자에서의 선비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고, 금득신(金得臣)의 복귀정(伏龜亭)과 곽시징(郭時徵)의 경한정(景寒亭)에서의 자연에 동화되어 즐기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으며 박윤원(朴胤源)의 등복귀(登伏龜)는 우주만물의 생성소멸과 순환의 이치를, 신광한(申光漢)의 시제안정(題安亭)에서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깨닫고자 하는 고뇌에 찬 모습을 잘 그리고 있어 이곳의 환경적 요소가 깊이 가미되어 있다하겠다. 이처럼 누정의 위치에 따라 역사적, 지리적, 환경적 요인이 내용에 적극 반영되어 있음은 이곳의 누정시 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이고 이외에 누정 속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읽을 수 있어 누정(樓亭)이 우리의 훌륭한 문화로 발전하는데 그 역할이 매우 지대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충북제영시(忠北題詠詩)의 양상(樣相)

金美善 ( Mi Seon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73-101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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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忠北의 제영시(題詠詩)를 통하여 충북지역의 정서 및 역사, 지역의 특성을고찰 하였다. 충북지역에는 많은 사적(史蹟) 명승(名勝) 산수(山水) 루정(樓亭) 서원(書院) 향교(鄕校) 영당(影堂) 등이 있어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승경(勝景)과 교육 중심의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지역이었다. 이에 이렇게 살기 좋고 아름다운 충북을 노래한 제영시를 통하여 충북의 제반 분야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먼저, 문제의 제기에서 필자는 충북 출생으로서 지역 제영시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충북 제영시의 문예 미학상에 드러난 면모를 통하여 충북지역의 위상을 찾아보고자 함을 연구 목적으로 밝혔다. 연구 범위의 지역으로는 고려시대(高麗時代)충북의 해당 현(縣)으로 충주목(忠州牧)에 괴주(槐州) 제주(堤州)와 청주목(淸州牧)의 청주(淸州) 진주(鎭州)의 주변으로 한정하였다. 연구 범위 내용으로는 충북지역의 사찰(寺刹) 누정(樓亭) 산수(山水)를 제영한 작품으로 하였다. 이를 토대로 본론에서 충북 제영시 작품내용의 양상(樣相)을 ``탈속(脫俗)의 사찰(寺刹) 교유(交遊)의 누정(樓亭) 진경(眞景)의 山水``로 분류하여 고찰하였으며, 이렇게 충북 제영시의 양상에 비추어 본 수사적미(修辭的美)의 특질(特質)은 사실성(寫實性)을 중심으로 탐착하였다. 제영시의수사적 특질인 사실미(寫實美)는 제영시가 대상에 대한 정(情) 경(景)을 작자의 기(氣)로 빚어낸 작품 속에서 대상을 사실적(寫實的)으로 표출하려는 수사적 특징임을 고찰하였다. 이안눌(李安訥)의 「제청주동헌(題淸州東軒)」, 김창흡(金昌翕)의 「작천무량(鵲川無梁)」, 서거정(徐居正)의「충주만경루(忠州萬景樓)」를 통하여 사실미가 제영시에 나타난 수사적 전통미(傳統美)로 고찰 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충북의 명승 유적지 및 역사를 제영시를 통하여 고찰하였다. 논고의 전개과정 에서 소재로 삼은 모든 지역들은 필자가 모두 다 답사를 하였고, 유년 시절부터 익숙한 곳이다. 모든 사람들이 충북의 대표 지역으로 칭송하는 곳과 지역인이 아니면 관심을 두기 어려운 지역을 아울러 살펴보려고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충북의 제영시를 통하여 충북의 지리(地理) 역사(歷史) 행정(行政) 종교(宗敎) 교육(敎育) 문화(文化) 인물(人物)등 제반 분야가 제영시를 통한 문학사상에 드러난 면모를 확인하고 그 위상을 가늠해 보았다.

탁영김일손(濯纓金馹孫)과 도동서원(道東書院)

조항덕 ( Hang Deok Cho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103-142 ( 총 40 pages)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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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考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과 그를 모셨던 충청도 목천(木川)에 있었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에 있다. 나아가, 천안(天安)의 발전을 위해 본받아야 할 위인으로서 선비정신의 표상이 되는 탁영의 모습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이제는 흔적만이 남아 있는 도동서원이 복원되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전통적 도의(道義)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15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사회는 낡고 병든 보수적 정치세력인 勳舊派를 청산하고 새로운 도덕과 사회질서의 확립을 요구하는 변혁의 시기였다. 이 같은 현실에서 탁영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절개와 士林의 도덕관으로 새로운 정치사회의 질서구현을 위한 선봉자적 역할을 자임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재였다. 유교적 家風속에서 김종직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을 강조하는 역사의식의 소유자로 성장하였고,또 벼슬길에 들어서서는 10여 년간 언관직(言官職)과 시종직(侍從職)을 두루거치면서 정치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정치의 요체를 안민(安民)에 두고 지행합일(知行合-)을 추구한 선비로서 항상 민중의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하여 국가의 정기를 회복하고 중흥(中興)의 길로 나아가기를 염원하였다. 비록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짧은 생애 속에서 남긴 탁영의 행적은 시대의 고민과 저항의식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으며, 그가 남긴 탁영금(濯纓琴)은 선비의 풍류를 상징하는 보물을 대표하고 있고,참혹한 변고를 겪고 남아 있는 아주 적은 유저(遺著)만으로도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도동서원은 조선 인조(仁祖) 때 충청도 목천(木川)에 건립된 서원이다. 탁영연보(濯纓年譜) 에 의하면, 탁영은 24세 되던 성종 18년(1487) 4월에 첫 번째부인 우(禹)씨를 잃고, 2년 후인 성종 20년(1489) 7월에 호서(湖西) 목천에서 김미손(金尾孫)의 따님 예안 김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이로부터인연이 되어 목천(지금의 천안)에 연고를 두게 되었으며, 성종 23년(1492) 작성산(鵲城山) 계곡에 있던 작은 별서(別墅) 인근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었다고 한다.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서원이 서게 된 것은 한강 정구(鄭逑,1543-1620)가 만년에 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죽림(竹林)``이라는 석각(石刻)을 발견하고,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주자(朱子)를 제향하는 사우를 함께 세웠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차례로 탁영 김일손과 한강 정구를 배향하였으며, 인조 기축년에 이 지역 출신의후천 황종해(黃宗海, 1579-1642)를 배향하였다.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과 병천면에 걸쳐 있는 은석산의 남동쪽 계곡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었던 서원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개목``으로 불렸는데 인조 때 도동서원이 들어선 후 서원리가 됐다가 병천리에 편입되어 현재는 마을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담헌홍대용(湛軒洪大容)의 성리학적견해소고(性理學的見解小考)

陳禮淑 ( Ye Suk Ji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143-181 ( 총 39 pages)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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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홍대용(湛軒洪大容)(1731-1783)이 활동하였던 18세기는 한국사상사(韓國思想史)의 흐름으로 볼 때 매우 다양한 학풍이 풍미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담헌홍대용(湛軒洪大容)이 가계와 학맥 모두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율곡(栗谷)과 우암(尤庵)을 계승한 유학자인 동시에 양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실학의 거두였음에 주목하였다.이에 그의 여러 저술 가운데 『사서문의(四書問疑)』를 주요 연구 자료로 삼아 조선후기 실학자 중 북학파의 비조라 할 수 있는 담헌홍대용(湛軒洪大容)의 경전이해에 대한 기본관점과 사상적 토대를 검토하고 조명하고자 하였다.홍대용은 새로운 시대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孔孟儒學의 합리적 현세치중적인 정신과 주자학의 일부 합리주의적인 요소를 계승하고 양명학(陽明學) 노장(老莊) 불교(佛敎) 천주교(天主敎) 묵가(墨家) 등 이단(異端)사상의 유용한 내용, 서양 과학기술의 성과 등을 종합 수용하여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였던 만큼, 인식론에서도 새로운 면모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식론에 성리학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사상을 잉태한 당시 사회적 환경의 桎梏과 더불어 실학발전사 중 제2기에 속하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홍대용은 새로운 환경에 조응하여 조선후기의 사상적 전환을 준비해 갔던 진보적인 사상가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안축(安軸)의 시(詩)에 있어서 의식(意識)세계와 주제(主題)의식

강동석 ( Dong Seok Ka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183-204 ( 총 22 pages)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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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축의 시세계에 있어서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두 의식세계와 그주제의식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이는 그간 주목했던 안축의 현실주의적 작품군과 무관할 듯 보이는 내면주의적 작품을 동시에 고찰함으로써 그의 시세계의 문학적 편폭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이다. 우선 안축의 시는 ``풍속의 바른 것과 그른 것, 백성의 기쁜 일과 슬픈 일에관한 것이 열에 아홉이다.``라고 했던 이제현의 언급처럼, 풍속과 백성에 관계되는 것이 주를 이룬다. 특히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백성의 모습과, 관료서의 책임감을 통감하며 보이는 반성적 선언, 그리고 사회를 혁파하고자 노력했던 모습 등은 그의 대표적인 시세계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세계의 기저에는 성리학의 수입이 있으며, 결국 이와 같은 의식과 주제가 녹아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그의 시세계에는 현실주의와 층위를 달리하는 내면주의적 작품 성향도 많다. 이는 외부 세계나 주위환경의 영향을 내면적인 경험이나 정신에 적용시키려는 문학적 경향으로서, 그가 자연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의 유구함을 작품화하는가 하면, 현실과 거리가 있는 선계를 동경하는 작품을 남겼던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작가가 지속적으로 자연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선계로의 동경 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 이유는 자연이 주는 심적안정에서 기인된 것이며, 이는 현실세계에서의 고뇌로 인한 초세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이처럼 안축 시는 현실주의적 작품군과 내면주의적 작품군이 공존하여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서로 무관한 듯하지만 긴밀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서, 안축 시를 해석해내는 데에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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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사씨남정기」를 서사한시로 읊은 「유한림영사부인고사당가(劉翰林迎謝夫人告祠堂歌)」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사씨남정기 의 수용양상과 한시화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먼저 작품의 창작시기와 창작의 원천이 된「사씨남정기」 의 텍스트의 성격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대략 18세기 중반경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며, 창작에 참조된 사씨남정기 원텍스트는 김만중이 창작한국문본 계열이 아닌,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사씨남정기」 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 작품의 서사적 특징에 대해 「사씨남정기」 와의 서사의 차이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사씨의 남정 부분만 사씨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나머지는 모두 유연수의 시점에서 서사가 구성되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씨남정기」 에서 주요하게 나타나는 교씨의 문제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고, 주로 유연수와 사씨의 만남과 이별의 과정을 주요하게 처리하는 특징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그 만남과 이별의 과정에서 유연수와 사씨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부분이 부각되는 특징을 확인할 수있었다. 이러한 면모에 따라 「유한림영사부인고사당가(劉翰林迎謝夫人告祠堂歌)」는 「사씨남정기」 와는 구별 되는 주제의식을 구현하게 되었다. 가부장제의 모순이나 축첩제의 현실 등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사씨와 유연수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부각되었다. 부부가 겪은 여러 고난과 그속에 피어나는 서로간의 사랑의 감정이 작품의 주지로 나타난 것이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주인공 사씨의 형상은 「사씨남정기」 에 나타나는 이념적 인물이 아니라, 보다 생동감 있는 인물로 나타났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18세기 향촌사대부의 「사씨남정기」 읽기의 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서사한시 창작을 통해 새로운 사씨남정기를 구현하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경암응윤(鏡巖應允)의 산거문학연구(山居文學硏究)

李東宰 ( Dong Jae L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241-275 ( 총 35 pages)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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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후반 지리산 벽송사에 귀의하여 선교(禪敎) 대종사로 칭송을 받았던 경암 응윤의 산거문학을 살펴보아, 문학사적 의의를 찾아보는 것이 목적이다. 경암응윤(鏡巖應允)(1743-1804)은 조선 정조 년간에 활동한 스님으로, 俗姓은 려흥민씨(驪興閔氏)이고, 처음의 법명은 慣拭이었으나, 뒤에 응윤(應允)이라고 고쳤으며, 법호는 경암(鏡巖)이다. 경암은 생의 대부분은 불문(佛門)에 귀의했어도 조선 후기 이후 여느 승려와 마찬가지로 유가의 철학과 가치체계를 긍정한 유석부이(儒釋不二)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의 유석부이(儒釋不二)의 의지와 삶을 추구는 때로는 동료 스님과 반목하기도 했으며,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갈등을 낳기도 했다. 경암에게 있어서 지리산은 생을 영위하는 삶의 터전이고, 유락(遊樂)의 장소였으며, 수선(修禪)의 공간이었다. 그는 지리산에서 평생을 살며 다양한 형식의 시 83수를 통해 자신의 삶과 철학을 드러내었다. 그의 시세계는, 첫째, 승속부이(僧俗不二)의 실천(實踐)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는 그가 유불(儒彿)-치론(致論)을 주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유자들과 어울려 지리산을 유람하거나 시문을 주고받으며 승속부이(僧俗不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둘째, 안신락도(安身樂道)의 여유(餘裕)로 드러난다. 이는 그가 13세에 불문에 귀의한 이후 그의 삶의 터전은 지리산이었다. 그는 안신락도(安身樂道)의 여유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만행(萬行)에 대한 동경과 이에 따른 심적 갈등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생의 대부분을 지리산에 살면서 안신락도(安身樂道)의 여유를 즐겼기 때문이다. 셋째, -심법계(心法界)의 추구(追求)로 드러난다. 이는 그 자신이 선교양종(禪敎兩宗) 대종사답게 화엄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선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만유의 실체인 -심(心)을 강조하여, 그의 사상과 삶의 궤적은 대립과 차별 보다는 조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경암 산거시의 문학사적 의의는 시문학의 작가층이 지방의 在地승려들까지 확대되어 일반화 된 것을 보여준다. 또한 시문의 내용이 ``성정``을 바로잡는 도구라는 기존의 문학관과 거리가 먼 자신의 체험의 시화하는 변화된 문학관을 보여준 것이 의의가 있다.

경암김로수(敬菴金魯洙)의 자학고(字學考)에 대한 연구

申相賢 ( Sang Hyun Shi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4권 0호, 2012 pp. 277-302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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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암김로수(敬菴金魯洙)(1878-1956)가 편찬한 『자학고(字學考)』에 대해 고찰한 것으로, 먼저 편찬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고, 『자학고』의 구성과 내용을 분석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자학고』 편찬의 의의를 고찰하였다.경암김로수(敬菴金魯洙)는 구한말과 일제 시대에 걸쳐 살았던 유학자로 蔚山이 본관이며 하서김린후(河西金麟厚)(1510-1560)의 13대 후손이다. 연재송병선(淵齋宋秉璿)(1836-190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계은류악연(溪隱柳樂淵)(?-?) 등 당시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일생동안 性理學을 窮理하였다. 『자학고』는 경암이 67세 때인 1945년 겨울에 편찬된 것으로 다양한 형태로 유통되던 속자(俗字)로 인한 각종 폐해를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에서 문자를 통일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경암은 당시에 유통되던 속례(俗例)[속자(俗字)의 실례(實例)]는 이전 시기에 편찬된 『규장전운(奎章全韻)』과 『전운옥편(全韻玉篇)』, 혹은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뒤섞여 나온 것으로 파악하였고, 이를 교정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전운옥편을 참고하고, 『전운옥편』 가운데 잘못된 것은 규장전운을 참고하여 바로잡으며, 『규장전운』 가운데 잘못된 것은 『강희자전』을 참고하여 바로잡고 있다. 이것은 자학고의 편찬이 규장전운과 전운옥편에서 제시한 자형을 규범으로 삼아 이를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학고』는 크게 上中下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학고상(字學考上)』에는 『자학고소지(字學考小識)』와 『자학고의례(字學考義例)』, 『정이(訂異)』가 수록되어 있고, 『자학고중(字學考中)』에는 『변사(辨似)』, 『각부상사자(各部相似字)』, 『각부상동자(各部相同字)』, 『이자합위(二字合爲)-자류(字類)』『삼자합위(三字合爲)-자류(字類)』『사자합위(四字合爲)-자류(字類)』『오자합위(五字合爲)-자류(字類)』, 『자체변방해의(字體邊旁解義)』, 『옥편자부음의보유(玉篇字部音義補遺)』가 각각 수록되어 있으며,『字學考下』에는『고자류취(古字類聚)』가 수록되어 있다.이와 같이 경암이 『자학고를 편찬하여 俗例를 정리한 것은 당시에 미군정과 이를 지지하던 세력들에 의해 진행되던 한자 폐기 정책에 반대하고 國漢文倂用을 위한 기초자료로서의 한자 자형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조선후기 이래로 규범 자서의 역할을 해오던 『규장전운』과 『전운옥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규장전운』을 기준 자형으로 삼고, 『전운옥편』과 『강희자전』을 참고로 하여 교정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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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논어(論語)』 경문(經文)에 관한 해석의 다양성과 객관성을 찾아본다는 취지하에 연구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그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논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논어(論語)』 해석에 있어서 ``정확성``을 찾아내기보다는 ``다양성``의 지평을 열어보고자 함에 궁극적인 목표가 설정되어 있음을 차제(次第)에 미리 밝힌다. 이유는 주지하시다시피, 우리나라의 경전 해석이 대체로 주희(朱熹)의 『집주(集注)』를 매우 충실히 계승하는 것으로 일관하여 왔기 때문이다. 『집주(集注)』는 실로 대단한 권위와 정본으로 여겨졌으며, 조선(朝鮮)의 유자(儒者)들에게 있어 사상적 입론의 근거를 내세우는 제(第)-원칙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요즘 중국과 일본의 경학 연구자들은 경전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들은 음운학이나 역사학 어법학 등, 經書와 연관된 주변 학문과의 학제 연구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경전 해석에 관한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개방적인 연구방향을 새롭게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대외적 학문 연구 분위기에 편승하여 경전 해석의 다양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취지도 있겠으나, 필자는 무엇보다도 훈고(訓告)와 의리(義理) 그리고 考證에 입각하여 『논어』 경문의 해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각 편별(篇別)[시리즈]로 연구의 습작을 내놓게 된 것이다.본 논문에서는 (i) 『공야장(公冶長)』편의 체제와 구조적 특징, (ii)諸註釋에 근거한『공야장(公冶長)』편 경문의 해석上에 있어 다양한 양상 등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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