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한문고전연구검색

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5권 0호 (2012)
초록보기
명나라 사신들이 한양에 머물 때, 그들에게 한강 유람을 제공하는 것은 중요한 접대 행사였다. 이때의 한강 유람은 왕실 소유의 漢江樓(濟川亭)에서 거창한 연회를 펼친 뒤, 배를 타고 楊花渡와 蠶頭峰일대를 거쳐 다시 왕실 소유의 望遠亭(喜雨亭)에서 마무리 연회를 갖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이과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 문인들과 詩를 수창하며 한강의 풍경과 개인적인 흥취를 표현하였다. 또한 일부 명나라 사신들은 한강 유람이 끝난 뒤, 그 여정을 記文으로 표현했다. 이에 명나라 사신들은 기문을 지을 때, 사신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는 자의식을 견지하면서 한강 유람의 여정과 그 풍광의 아름다움 및 개인적인 흥취를 서술하였다. 그중에서도 이른 시기에 한강 유람을 했던 倪謙의 「漢江遊記」와 祁順의 「漢江記」는 절제된 내용과 정형화된 구성을 바탕으로, 풍경 묘사와 개인적인 흥취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사행이 어느 정도 관례화 된 뒤에 한강 유람을 했던 華察의 「遊漢江記」와 王夢尹의 「漢江船遊圖記」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내용과 파격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풍경묘사와 개인적인 흥취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에 비해서 명나라 사신들이 한강 유람을 하면서 지은 시작품들은 순간적인 풍경의 포착과 즉각적인 흥취의 표출이 두드러졌다. 다만 유람의 방식과 그에 따른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동일한 시적 제재를 바탕으로 비슷한 형상화 방식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들은 율시의 對偶法과 章法을 공교롭게 구사하는 가운데 풍경 묘사와 서정 표출을 적절하게 가미함으로써 개성적이고 수준 높은 意境을 창출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조선조 문인들에게도 큰 문학적 자극이 되었다. 또한 한명회는 사신의 신분으로 중국에 가서 狎鷗亭이라는 이름과 그에 관한 기문을 예겸으로부터 받아내었다. 이후 두 번째 사행에서는 명나라 문인들로부터 압구정에 관련된 시도 받아내었다. 이는 결국 개인 소유의 정자인 압구정이 명나라 사신들에게 한강변의 명소로 여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초록보기
본고는 서울의 한강 가에 있었던 제천정에서 이루어진 송별연과 계회에서지어진 시, 국가의 행사의 일환으로 행하는 宴會에서 지어진 시를 살펴보아제천정이 갖는 문화사적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제천정은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의 한강 가에 세워진 왕실 소유의 정자로, 주로 왕실과 관련이 있는 행사와 외교 사절의 접대, 고위 관료들의 계회, 고관대작이 외직으로 나가거나 퇴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 전별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李适의 亂때 소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천정에서 펼쳐진 사적인 송별연에서 지어진 송별시는 그 명성에 비해많지가 않다. 이는 송별의 장소가 나루터나 갈림길 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주된 원인이지만 제천정이 왕실소유의 누정이었기 때문에 시인묵객들이 쉽게이곳에서 송별연을 개최할 수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契會는 관료사회에서 원활한 직무 수행과 인적 결속을 위한 관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모임이다. 계회는 한강 가 누정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제천정은 왕실 소유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다는 누정에 비해 많이 이루어지 못했다. 따라서 계회에서 지어진 시 가운데 제천정을 무대로 하거나 소재로 한 한 시는 다른 누정에 비해 그 수효가 많지가 않으며, 작시도 주로 고관대작에 의해 지어졌다. 제천정은 사신들을 위한 연회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사신들도 의례적으로 이곳에 와서 연회를 즐겼다. 이때 외교사절과 이를 수행하는 문인들은 서로 시를 주고받았으며, 이를 盛事로 여겼다. 또한 국가의 원로대신을 위로하기 위한 연회, 임금이 민정을 살피거나 농사의 豊凶을 점검하기 위해 도성밖으로 출타할 때에는 잠시 이곳에 머물며 연회를 베풀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어진 시의 양과 내용의 분류, 이것이 갖는 문화사적 의미를 축출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초록보기
매천 황현(1855~1910)은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훌륭한 스승을 찾아 이웃 고을인 구례까지 왕래하며 학문을 했다. 그러나 약관이 되자 더이상 시골의 고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서울을 출입한 지 만 10년간 그는 다양한 名士들을 만나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도 하고, 고향에서는 가기 힘든 금강산과 천마산을 유람하며 견문도 넓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정의 失政을 직ㆍ간접적으로 목도하여 ‘도깨비세상’이라고 비난하며 은거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울은 그의 일생에 큰 전환점이 된 곳이었다. 매천이 서울에 있을 때는 아직 학문이 완숙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삶과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쉽게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매천이 서울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시도 하였다. 서울 경험을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었다. 첫째, 서울에 있을 적에 유람하며 지은 시를 중심으로 거기에 드러난 내면의 자각을 살펴보았다. 둘째, 서울에서 교유한 명사들에게 받은 영향을 알기 위해 평생토록 그들을 읊은 시를 살펴보았다. 셋째, 나그네의 처지에서 새롭게 인식되는 가족과 고향을 시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처럼 서울 경험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접근하면서 서울이 그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었는지 다소나마 이해할수 있었다.
초록보기
陶谷李宜顯은 숙종, 경종, 영조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하던 정치가이자 문인학자이다. 세족으로서의 명망을 얻은 가문에서 출생한 도곡은 비교적 순탄하게 벼슬길에 올라 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도곡은 청음의 증손인 農巖金昌協의 문하에 들어가 老論洛論의 학맥을 계승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으며, 대체로 관료로서의 정치적 야망을 꿈꾸기보다는 문인 학자적 삶에 치중하여 새로운 지식 정보를 소개하고 시문을 창작하는 일에 진력 함으로써 학문과 문예에 공을 남길 수 있었다. 도곡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거의 산문 이론과 연관되어 있다. 산문 창작과 비평에 관한 이들의 이론을 추적하여 조선 후기 산문이론사의 실체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서술범위를 도곡의 생애 분기와 시문집의 형태적 양상으로 한정하였다. 현재 진행중인 『도곡집』 역주와 교점 작업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방향에서 도곡의 생애를 분기로 나누어 살피고, 간행본 『도곡집』의 형태적 양상에 대해도곡, 이의현, 산문, 연행록, 신임사화 대략의 윤곽을 조망하는 수준에서 서술을 진행하였다.
초록보기
陶谷李宜顯(1669~1745)은 肅宗~英祖연간의 문신으로, 金昌協(1651∼ 1708)을 이어 당송고문의 논리를 강화하고 확산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문장가다. 이러한 면모는 200편에 육박하는 墓道文에 잘 나타난다. 묘도문을 짓는다는 것은 당대의 일류 문장가로 인정받음을 의미한다. 또한 정사에서 다루지 못한 역사를 후세에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때문에 묘도문의 찬술자는 자신의 문장력을 과시하는 한편 사관의 입장에서 엄정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찬술과정에서는 묘주 및 청탁자와의 관계, 정치적 역학구도, 사상적ㆍ학문적 견해차 등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하게 되고, 그 결과 일반적인 산문과 다른 여러 가지 다층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의현은 묘도문의 태생적 문제인 ‘阿諛’의 혐의를 피하고 ‘揄揚’의 미덕을 담아내기 위해 부심하였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 취향을 접고 청탁자 및 주변인물들과 협의하여 내용이나 표현을 수정하기도 했고, 집단적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경우 상당히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물의 형상성을 제고하기 위해 서사적 구조를 과감히 차용하여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였으며, 전후칠자에 대한 실제적 비판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등 문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초록보기
본고는 이의현의 금강산 유기인 「유금강산기」를 분석해 본 것이다. 분석결과, 이의현의 「유금강산기」는 그가 1709년 9월 1일부터 12일까지 총 12일간금강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와 쓴 기록으로, 전통적 산수유기의 典型을 준수하면서도 조선 후기 산수유기의 특정을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다. 서술 방식은 여행 경로를 따라가며 금강산의 실경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으며, 제한적이긴 하지만 산수에 대한 품평도 일부 시도하고 있다. 또한 그의 「유금강산기」는 다른 금강산 유기에 비해 문물과 지리에 관한 정보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의현의 기록과 수집ㆍ정리의 습성이 반영되고, 문장은 세교에 효용적 가치가 있어야 하며 道를 담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문학론이 투영된 결과로 보인다. 요컨대, 이의현의 「유금강산기」는 산수 자연의 사실적 묘사와 다양한 인문학적 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초록보기
이 글은 陶谷李宜顯(1669-1745)의 성리학적 衛學論을 다룬 연구이다. 도곡은 정치적으로는 선명하게 老論洛論系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핵심적 인물이었고 문학적으로는 당대의 文衡으로서 唐宋古文派의 주요한 문장가였다. 정치 활동에 있어서 도곡은 노론 정당을 이끄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당대 노론의 주요 인물들을 평가하는 수많은 神道碑銘와 墓誌銘등을 지어 노론의 의리를 천명하였다. 문학 활동에 있어서도 도곡은 詩와 산문을 고루 짓기는 하였으나 詩의 경우 輓詩가 반 이상이고 산문의 경우 碑誌類가 대부분인데 당연히 그 대상은 노론의 인물들이다. 그는 文章論에 있어 『朱子文集 』을 전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소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朱子學을 높인 노론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였다. 도곡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文學論에 대한 것이 많은데 대체로 도곡이 朱子의 문학론을 계승하면서도 개방적으로 다양한 문장을 섭렵하였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가 道와 文을 일치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文의 독립적인 가치를 인정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 전자를 도곡 문학론의 특징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자와 후자가 모순적으로 결합된 것이 도곡 문학론의 특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통적인 것은 도곡 문학론의 본령을 주자학적 문학론으로 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도곡은 기본적으로는 주자학적 문학론을 가졌는데 의외로 폭넓은 개방성을 가지기도 하였다는 것이 기존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설명방식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도곡 문학론의 출발점은 주자학적 문학론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도곡이 처음에 문장 수업을 하였을 때 집중적으로 읽었던 책은 『漢書 』와 『莊子 』이었지 『四書三經 』도 아니었고 朱子의 저작은 더더욱 아니었다. 道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책을 교재로 삼아 문장을 익혔던 것이다. 도곡은『朱子大全』이 문장의 근간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가 만년에 자신의 문장 수업이 잘못되었다는 회한을 표현한 것일 뿐이지 자신이 『주자대전』을 읽으며 문장을 익혔다는 뜻은 아니었다. 도곡은 이단으로부터 주자학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그 자신이 주자의 철학에 대해깊이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주자학을 옹위하려고 한 까닭은 주자의 철학이 이론적으로 완벽하다거나 주자의 문학이 미학적으로 수준 높다는 자신만의 體會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론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인의도가 강한 것이었다. 문장과 문학론을 통해 노론의 의리를 대변한 것이 도곡의 학문이 가진 중요한 특징이라고 하겠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두시(杜詩)수용 양상에 대한 시론(試論)

김근태 ( Geun Tai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5권 0호, 2012 pp. 225-251 ( 총 27 pages)
6,700
초록보기
본고는 耘谷元天錫의 시세계의 원류가 杜甫에게 있다는 전제하에 그의 시에 나타나는 杜詩의 수용양상을 살펴보았다. 먼저 외형적인 면에서는 운곡이 두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詩體를 통한 실험정신을 구현하였다는 점과, 律詩의 首聯에서 對偶法을 활용하는 破格을 즐겨 구사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시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산문의 기법인 議論을 시에서 활용 하였는데, 이는 시적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더하여 학문적 역량을 갖춰야 뛰어난 시가 됨을 살펴보았다. 또한 『詩經』의 시정신으로까지 소급되는 두보의 현실비판적 창작정신을 수용하여 여말선초의 정치상과 백성들의 고통 및 애환을 사실적으로 기록한시를 통해 운곡 시정신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운곡이 두시의 여러 풍격 가운데 淸新한 풍격의 시풍을 이어받아 참신하고 독창적이며 맑은 느낌의 시를 즐겨 썼음을 밝혔다. 운곡은 현존하는 시를 통해 볼 때,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고려시대 3대 시인이라 일컬을 수 있는 바, 향후 그의 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좀 더 부각시키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매계(梅溪) 조위(曺偉) 유배기(流配期) 작품에 형상화된 정회(情懷)와 그 의미

김진경 ( Jin Kyung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5권 0호, 2012 pp. 253-279 ( 총 27 pages)
6,700
초록보기
梅溪曺偉(1454~1503)는 成宗朝新進士人의 일원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문장으로 명성을 얻은 러나 梅溪는 스승인 점畢齋의 시문집을 撰集했다는 죄목으로 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하였고, 유배지에서 憂國衷情에서 비롯한 근심으로 인해 병을 얻어 삶을 마감하였다. 당시 新進士人들에게 있어서 유배는 정치현실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된 것이었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창작한 작품 속에는 失意한 개인의 절박한 심회가 오롯이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梅溪가 유배시기에 창작한 작품에 형상화된 情懷를 면밀히 검토하는 작업은 그의 삶의 궤적과 정신 지향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한 축이 될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梅溪曺偉의 삶과 정신 지향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서, 그가 유배시기에 창작한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그 속에 담긴梅溪의 情懷를 면밀하게 究明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아울러 본 연구는 梅溪曺偉의 삶과 정신 지향에 대한 究明을 통해 초기사림파 지식인들의 삶의 궤적과 문학 세계를 보다 精緻하고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梅溪는 5년 정도의 유배기간 동안에 時事에 관한 언급을 자제하며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유배 기간 창작한 그의 작품에는 당시 政勢나 世態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보다는 세상과의 강제적인 단절로 인해 생기는 개인의 鬱鬱한 정회를 절실하게 형상화한 것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유배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樂天知命하며 군자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梅溪의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들도 아울러 살펴 볼 수 있다. 이렇듯 유배객으로서의 鬱鬱한 情懷를 표출함과 동시에 樂天知命의 삶을 지향했던 점을 통해 유가적 도리의 실천에 충실하고자 했던 梅溪의 유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梅溪의 유자로서의 삶의 지향을 살필 수 있는 점이 바로 梅溪의 流配期작품이 지니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추후 심화된 논의를 통해 梅溪의 유배기 작품에 형상화된 정회와 정신 지향이 동시대 다른 新進士人의 그것과 비교하여 어떠한 다른 점이 있는지 보다 섬세하게 포착한다면 그의 인간적 면모와 문학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대 新進士人들의 다양한 면모를 구체적ㆍ종합적으로 考究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조위(曺偉) 시(詩)에 나타난 15세기(世紀) 후반(後半)의 관인상(官人像)과 그 의미

김창호 ( Chang Ho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5권 0호, 2012 pp. 281-303 ( 총 23 pages)
6,300
초록보기
이 글은 조위 시에 나타난 15세기 후반의 官人像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이 조선 전기 時代精神의 변화 가운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규명하는 데에목표를 둔다. 조위의 관인상 형성의 배경에는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자형이자 스승인 김종직으로, 그는 조위에게 유가적 근본이념의 탐구와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한편, 그러한 이념적 지향을 바탕으로 새 시대를 열어나가기를 기대했다. 또 하나는 당숙인 조석문으로, 조위를 경화 사회에 훈구가문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하는 한편, 그가 이른 나이에 경화문화적 체질을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상대적인 성향의 두 사람을 통해 조위는 당대에 필요한 관인적 능력을 갖추어 가면서, 관인으로서의 지향 정립에 필요한 사고와 감각을 갖추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관인상’은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지향하는 이상적 지점이면서, 직접적으로는 시대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을 규율하고 실천의 방향을 정립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조위의 관인상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태평 성세로 자부하는 당대에서의 ‘聖君을 보좌하는 盛世의 官人’의 像이다. 이는 시대에 대한 자신감 또는 낙관적 사고의 반영으로, 봄볕같은 성세의 혜택을 입으면서 그러한 성세를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는 책임 의식과 관련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진사류적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自己檢束을 바탕으로 道義를 견지하는 관인’의 상이다. 신진사류와의 연대 속에서 학문적ㆍ정치적신념의 실천에 대한 기대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민생을 우선시하고 時政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태도와 관계된 것이다. 시대적인 흐름을 볼 때, 조위가 활동한 시기는 정치권력이나 학문권력의면에서 훈구로부터 사림으로의 점차적인 이동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김종직 진출 이후 조위, 金宏弼, 金馹孫등으로 이어질 무렵에 사화가 일어나고, 극심한 피해가 있었지만, 종국적으로는 16세기 후반 사림의 승리로 귀결된다. 조위의 시에 나타나는 두 관인상은 훈구로부터 사림으로 정치ㆍ학문 권력이 이동하기 시작하던 15세기 중ㆍ후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時代精神의 점차적인 변화라는 측면에서도 설명 가능하다.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