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한문고전연구검색

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7권 0호 (2013)
6,900
초록보기
성현이 부휴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말하고 있는 『浮休子傳』 과 『浮休子談論』을 중심으로 부휴자의 말하기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성현은 자탁전의 형식을 가진 『부휴자전』 에서 부휴자의 성품과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寓言의 형식을 갖춘 『부휴자담론』은 이야기 방식에 따라 『雅言』, 『寓言』, 『補言』가지 양식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양식마다 부휴자와 허구 인물, 역사인물을 등장 시킴으로써 현실문제에 대한 직설적인 화법을 피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 고 있다. 성현이 자신을 드러내어 직접 말하지 않고 부휴자라는 인물을 내세워 말하 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임금에 대한 강한 勸戒와 諷刺임을 알 수 있다. 부휴자를 통해 이전의 훈구관각파가 주장한 ‘임금은 하늘이다’ 라는 의견을 따르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임금은 다만 백성을 위한 하늘의 대리자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렇게 간접화법을 통해 말함으로써 자신을 드 말하는 데에 따르는 화를 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성현은 표면적으로 ‘재주와 능력은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결국 ‘능력 과 재주는 타고나는 것이며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타 고난 재능과 능력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훈구관각파와 도학 사림파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편도 아닌 중간자적 입장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현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직접 말하기 어려운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강한 자긍심을 간접적으로라도 드러내기 위하여 부휴 자라는 인물을 통해 주장을 펼친 것이라 볼 수 있다.

16세기 후반 시대상의 전변과 일탈의 문예미학 -許筠前五子(허균전오자)를 중심으로-

신영주 ( Young Ju Shi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7권 0호, 2013 pp. 37-67 ( 총 31 pages)
7,100
초록보기
선조 시기 한양 도성에서 있었던 문예 분위기의 성장 및 허균의 동인 가운데 前五子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들의 활동이 이 시기 문단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역동적 문예 활동 양상의 특징적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기존의 문단을 구성하고 있던 인적 구성과는 달리서얼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의 아웃사이더들이 무리를 형성하여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기존 관념에 저항하면서 풍류와 일탈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문예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들의 활동 양상을 정치하게 밝 히지는 못했지만, 향후의 활발한 연구에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

17세기 中國繪畵(중국회화)의 流入(유입)과 그 題畵詩(제화시)

이남면 ( Nam Myon L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7권 0호, 2013 pp. 69-98 ( 총 30 pages)
7,000
초록보기
17세기 중국회화를 대상으로 한 조선 문인들의 제화시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논한 것이다. 17세기의 문인들은 사신 왕래 과정이나 심양 인질생활 중에 다량의 중국회화를 입수하였고, 이후 여러 문사들과 회화를 공유하며 시문 창작을 권유한 만큼 현재 적지 않은 제화시가 전하고 있지만 주로 17세기 회화사나 회화관 연구를 위한 보조 자료로 쓰이고 있을 뿐 작품 자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는 인식에 따라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우선 17세기의 문인들은 중국의 회화를 보고서 비참한 시대적 현실을 떠올리고 반청의식을 드러내는 등 적극적 현실 인식을 보일 때가 많았다. 즉 명나라의 멸망에 슬퍼하고 치욕적 현실에 분개하며 복수설치를 희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림 자체의 예술적 성취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 감정의 표현에 더 충실했던 것이다. 반면 당시 문인들은 제화시속에 현실을 벗어나 고자 하는 뜻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반정과 전란, 당쟁 등 극도의 혼란과 무 질서를 경험했던 그들에게 탈속과 은일의 희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 경우 밝고 차분한 분위기 외에 때로는 격정적이거나 감상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당시 문사들은 중국회화를 접하고서 한편으로는 탈속을 지향하면 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적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식인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 그들이 창작한 수준 높은 시는 중국의 우수한 회화작품 에 더해짐으로써 회화의 소장 가치를 한층 높였다고 하겠다.
7,100
초록보기
玉所權燮(1671-1759)의 夢記와 海巖柳慶種(1714-1784)의 『意園誌』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상상의 공간을 소재로 한 기문의 창작 배경과 그 특징을 고찰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몽기』와 『의원지』 는 모두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을 소재로 하고 있고,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함께 제작되었 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문학사.예술사에서 주목해 볼만하였다. 옥소는 노론, 해암은 남인으로 당색은 달랐으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정점으로 치달은 당쟁 속에서 소외.고립된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같은 처지였다. 그리하여 옥소와 해암은 현실에서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욕망을 『몽기』 와 『의원지』 라는 상상의 공간을 설정하여 정신적인 淸福을 누리고자 하였다. 해암은 비록 정치적으로 소외.고립된 처지였으나, 경제적.문화적 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옥소는 청풍의 한천장.능강동과 문경의 화지장 등의 장원을 경영하였고, 해암은 안산에 근거를 두고 해암동천을 경영하며 만권장서가로서 문화교류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옥소와 해암은 18세기 문학과 예술을 주도하였던 農淵그룹이나 안산의 남인 그룹에 소속되어 일찍부터 京華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이에 힘입어 문학과 회화의 교섭이 활 발하였던 풍정 속에서 성장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향유하였다. 경화 문화 속에서의 성장과 장원 경영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문학과 회화가 교섭을 이루고 閑適한 삶을 즐기는 自娛의 공간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는 전대 상 상의 공간을 소재로 한 기문에 주로 보이는 불우한 지식인의 표상이나 세상에 대한 비분강개한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秋史論畵詩(추사논화시)에 드러난 藝術境界(예술경계)

김윤주 ( Yun Ju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7권 0호, 2013 pp. 132-164 ( 총 33 pages)
7,300
초록보기
논화시는 주로 제발문에 나타나고 또 그 그림을 그린 이의 비평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서 그의 화론의 전반적인 내용이 모두 집약되어있다. 추사 논화시를 예술경계적 측면에서 보면 ‘格物致知의 學畵觀’, ‘書畵一致의 批評觀’, ‘不一不異의 藝術觀’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格物致知의 學畵觀’에서는 추사가 그림에 대한 학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격물치지의 방법을 썼으며 이러한 성격을 드러낸 그의 논화시를 살펴보았다. 추사는 蘭畵에 대해 “대체로 이 일은 하나의 작은 技藝이지만, 그 전심하여 공부하는 것은 聖門의 격물치지의 학문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격물치 지’를 직접 인용하며 회화와 학습의 연관성에 대해 말했다. 격물치지적 문예 미학사상과 그 기반을 함께한 추사는 서예에 있어서 격물치지적인 학습법을 한의 비에서 찾으려 했다. ‘비학파’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서체가 고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원본의 서체와 더 가깝고 보다 충실하다는 고증적 주장을 해나갔다. 추사는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체계적인 학습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작한 연후에 가능하지 한순간 부처가 된다거나 맨손으로 용 잡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추사는 전통의 학습을 강조한 동기창의 화론에 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書畵一致의 批評觀’에서는 추사가 그림과 서예를 하나로 보고 그림을 그린인물과 그림에 대한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드러난 그의 논화시를 살펴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서화일치’는 서화용필상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동기창은 『화안』에서 글씨를 잘 쓰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고 그림을 잘 그리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 두 가지 일이 결국 같은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림에 서예의 필법이 담겨 있고 이러한 필치가 살아있어‘쇠라도 녹일 만’하다는 것이다. 추사는 옹성원의 그림에 담긴 서예 필법을 보고 그림의 진가를 평가한다. 이는 추사가 서예의 필법을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不一不異의 藝術觀’에는 추사가 추구하고자 했던 그림에 대한 생각이 불교의 선종적 측면과 물아일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시를 살펴보았다. 추사는 『題蘭』에서 이십 년 만에 그린 난화에서 우연히 ‘性中天’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추사가 性의 근원인 天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우연히 난화에 ‘性中天’이 드러났다고 표현한 것은 난화를 통해 ‘性中天’을 이해하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추사가 『題蘭』 ‘유마의 불이선’은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 에 나온다. 『유마경』은 평등의 不二사상의 실천을 담고 있다. 이러한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해 있다. 추사는 禪과 예술의 일치적인 성격을 발견한다. 선과 예술 모두 감성에 가깝게 느껴지는데 선종 역시 이성의 체계를 거부한다. 이른바 ‘不立文字’, 즉 직관에 바탕을 둔다. 최수강은 『흑백지간』에서 “직관 감수의 勃興은 또한 돌 발성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술가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원하는 像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수로에 물이 이르는 것이고 삽시간에 심미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임천고치』에서는 “경계가 완숙해지고 마음과 손이 서로 어울리게 된 뒤에야 비로소 가로와 세로 어디로 움직여도 법도에 맞고 왼쪽과 오른쪽 어디로 움직여도 근원과 통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는 『논어』의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자 하는 대로 그려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 즉 추사는 그림을 그리려는 법으로 그린 것이 아닌 경지에 이를 것을 요구한다

18,9세기 과거제 문란과 부정 행위 -『무명자집』의 사례릉 중심으로-

이규필 ( Gyu Pil L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7권 0호, 2013 pp. 165-202 ( 총 38 pages)
7,800
초록보기
18,9세기에 과거제와 과장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부정행위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유형별로 고찰하면서 실제적인 양상애 접근해보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양반층의 비대화와 저속화가 과거에서 경쟁률 상승과 맞물리면서 제도의 문란을 부추겼다. 18세기에 이르면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시관의 자질이 극도로 저하되었다. 뇌물과 청탁이 횡행하였으며 사전에 문제가 유출되거나 합격자가 미리 내정되었다. 시험이 시작되면 응시생들은 자리싸움, 교란 행위를 통한 컨닝, 대리 시험, 조직적인 팀을 이루어 시험지 작성하기, 응시 장소를 바꾸어가며 응시하기, 시험지 바꾸어 내기, 과거장 밖에서 시험지를 작성하여 제출하기 등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시험지를 제출하는 과정에서는 試官과 결탁하여, 암호를 주고받거나 청탁자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인지시켜 합격을 종용하거나, 비봉을 바꿈으로써 남의 합격을 가로챘다. 과거가 끝난 뒤에서 試官을 매수하여 시험지를 묶음 단위로 교체하거나 성적을 조작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결과를 유출하여 당락을 재조정하기도 하였다. 이 수많은 부정에는 시관만 개입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문인, 서리와 군졸, 액례와 노복들까지 관련되어 있었다. 요컨대 18,9세기 과거장은 시험 고지에서 합격자 발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시관과 사대부가는 물론 하인배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이 부정의 끈으로 복잡다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윤기가 남긴 과장의 부정행위 행태는 그 자체로 당시 양반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 리포트이거니와 동시에 향후 19세기 관료 사회의 모순을미리 내다보는 창이라 할 수 있다.
7,200
초록보기
시경학이 한국 전통 시경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음에 불구하고, 종래 조선시대 시경학에 대한 연구는 주로 주희 시경학과는 다른 성격 내지 반대되는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주희설이 조선시대 시경학에 큰 영향을 끼친 만큼 그 수용 .해석 양상이 구멍되어야 조선시대 시경학의 전체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소위 ‘반주자’ . ‘탈주자’로 일컬어지는 시경학의 성격도 보다 온전히 구멍될 수 있읍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시경학에 수용.재해석된 주희 시경학의 연모를 고찰하여 조선시대 시경학의 다층적 면모를 밝히는 데 주요 목적이 있다 대상 주석서는 조선시대 주희설 수용 양상이 비교적 전형적으로 드러난 8종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다. 본고에서 고찰한 조선 시경학에 드러난 주희 시경학에의 접근 시각과 道學 思想, 詩義 脈絡, 문헌 대상으로서의 측면, 우리말 언어 전환 과정 네 가지 방면이다. 본고의 텍스트 선정이 주희 중심적 주석 경향을 모두 대변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조선시대 주희설 이해 양상을 전면적으로 고찰하는 데 발판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韓國(한국)의 『荀子(순자)』 受容樣相(수용양상)에 對(대)한 硏究(연구)

신두환 ( Doo Hwan Shi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7권 0호, 2013 pp. 235-267 ( 총 33 pages)
7,300
초록보기
논문은 荀子의 사상이 우리나라의 선비들에게 어떻게 수용 되었는가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순자는 제자백가 중 유가에 속한다. 조선에서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한 인물이란 점에서 이단으로 분류되었으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은 그의 성악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그의 인성에 대한 관찰과 사유에 대해서는 장점이 있다는 견해를 밝힌 학자들도 있었다. 순자가 언급한 교육·사회·문화·경제 등, 그의 경세사상은 조선 학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수용을 되고 있었다. 순자의 대표적인 학설인 禮사상에 대해서도 조선의 학자들은 성악설을 바탕으로 세운 예설이라고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수용하는 학자들 은 그의 樂論과 더불어 禮敎에 대한 여러 언급들을 탁월한 것으로 판단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 선비들은 순자의 문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배 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현란한 비유와 상징 및 명료 논문은 荀子의 사상이 우리나라의 선비들에게 어떻게 수용 되었는가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순자는 제자백가 중 유가에 속한다. 조선에서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한 인물이란 점에서 이단으로 분류되었으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은 그의 성악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그의 인성에 대한 관찰과 사유에 대해서는 장점이 있다는 견해를 밝힌 학자들도 있었다. 순자가 언급한 교육·사회·문화·경제 등, 그의 경세사상은 조선 학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수용을 되고 있었다. 순자의 대표적인 학설인 禮사상에 대해서도 조선의 학자들은 성악설을 바탕으로 세운 예설이라고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수용하는 학자들은 그의 樂論과 더불어 禮敎에 대한 여러 언급들을 탁월한 것으로 판단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 선비들은 순자의 문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배 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현란한 비유와 상징 및 명료논리전개는 조선의 학자들을 감동시켰으며 그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아 익히는 학자들도 있었다. 조선 선비들은 배우는 학자들에게 순자를 필독서로 정해 읽기를 권장하였으며 또 서당의 학습요목에 순자가 들어 있기도 하였다. 한국의 유명한 유가학자들의 문집에는 순자의 학설을 거론 한 것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약 500여 문집에서 순자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의 사상에 대해 비판과 찬양을 쏟아놓고 있다. 이로 보면 순자의 위대한 사상이 한국의 유교발전에 영향을 끼친 것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목은은 “유가의 우아한 선비”라 했고, 허균은 “맹자 이 후 유가의 일인자”라고 했으며, 농암은 “유가에 공이 큰 학자”라고 했다. 성호는 “전현들에게서 볼 수 없는 분별력의 소유자”라고 하였고 정조임금은 “유 도를 행하여 富大하게 하는 경세가”라고 하였다. 최근까지 학자들이 순자를 연구한 논문만도 약 500여 편에 이르고 있다.

중,고교 한문교과서에서의 "經書" 교육에 관한 발전적 제언

김용재 ( Yong Jae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7권 0호, 2013 pp. 269-306 ( 총 38 pages)
7,800
초록보기
1972 ‘漢文’이 독립 교과로 인정된 이후, 교육과정이 편성되고 이에 따라 교육내용을 담보하는 ‘교과서’가 수차례 제작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교과서內수록된 한문 문장, 소위 ‘글감’에 대한 질적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수 차례 교육과정 개편에 따라 한문교과서 내용은 다양한 측면에서 변모와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그간의 교과서 내용은 거의 동일시되어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경서’ 영역에 대해서는 경문의 양적 팽창만 있을 뿐, 기존의 수록된 글감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 정도로 일관되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냉정히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반성적 고찰이 필요한 부분은 ‘경서교육’에 대한 교육목표·교육내용·글감의 위계와 난이도 등이 구체적으 명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혹 이 분야에 대한 기술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내용이 매우 소략하였다· 이와 같이 ‘경서교육’에 관한 총체적 난제에 선제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현재 간행된 중·고교 한문교과서內수록된 경서의 글감들을 종합적으로 조 사·정리·분석해보고, 이를 토대로 경서교육에서의 문제점과 지향점을 모색해 보고자 한 것이 본고의 연구목적이다. 한문학습의 첫 발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흔히들 ‘논어’·‘맹자’라고 자임한다. (ⅰ)‘경서’가 한문 공부의 첫 관문이라면, (ⅱ)제도 권 내에서 한문 교과가 외면 받지 않으려면, (ⅲ)그에 상응하는 교과의 정체성 과 책임의 소재를 다하려면, 교과서內경문의 수록 양상과 교육방향에 대하여 새로운 모색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6,300
초록보기
대학에서 교양 과목으로 개설되는 ‘교양한문’의 웹기반 운영 사례를 소개하고, 강의 전후에 실시한 설문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교육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글에서 연구 대상으로 한 강의는 한국의 8개 대학이 연합하여 개발한 <한자와 한문>이라는 강의이다. 한문 관련 전공이 아닌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되는 교양한문 과목인 <한자와 한문>의 웹 콘텐츠 개발 및 사이버캠퍼스 운영 사례를 분석하고, 웹기반 강의가 가지고 있는 難點을 해소하고자 하는 교육방법의 하나로 f-class를 제안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우선, ‘교양한문’의 웹기반 운영 사례를 살펴보았다. 대학의 교양 교육이 점차 강화되면서도 그 강화의 방향이 실용교육에 치우치다 보니 한문 관련 강의가 점점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의 일례로 여러 대학이 연합하여 강의 교재와 강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개발한 교재 에 맞는 팀티칭 웹기반 강의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웹기반 강의로 운영하다,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새로운 교육방법을 찾은 것이 f-class이다. f-class는 학생들이 집에서 온라인을 통해 웹기반 강의를 듣고, 학교에서는 강의 내용을 전달하기보다 학습자들과의 직접적인 相互作用을 통해 보다 심화된 학습을 끌어낼 수 있는 토론과 조별 활동 등의 창의적인 학습을 수행하는 교육방법으로, ‘교양한문’에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웹을 기반으로 한 강 의처럼 강의 전달 방식이 직접적인 소통이 어려울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대학 ‘교양한문’의 웹기반 운영 사례를 소개하고, 학생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교육방법을 제공함으로써, 한문 관련 강의 개선에 대한 아이 디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