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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9권 0호 (2014)

좌안동우함양(左安東右咸陽)과 천령삼걸론(天嶺三傑論)

김윤수 ( Yun Su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9권 0호, 2014 pp. 7-39 ( 총 33 pages)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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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拙庵梁喜(1515(중종 10)∼1581(선조 14)), 玉溪盧진(1518(중종 13)∼1578(선조 11)), 靑蓮李後白(1520(중종 15)∼1578(선조 11)) 등 天嶺三傑로 일컬어지는 3현은 唐谷鄭希輔에게 동문수학한 죽마고우로 다 함양군 지곡면(옥계)과 수동면(구졸암, 청련) 출생이다. 구졸암과 옥계는 함양 지곡에 묻히고 청련은 파주 선영에 묻히었다.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다들 효자이고 성리학자이다. 옥계는 효자 정려를 받았고 시호조차 文孝公이다. 옥계는 함양의 당주서원과 남원의 창주서원에 향사되었고 청련은 강진의 서봉서원에 향사되었다. 청련도 함양의 서원에 향사할 필요가 있다. 구졸 암은 함양의 구천서원에 6군자로 같이 향사되었다. 3현을 향사하는 삼걸사를 세울 필요가 있다. 옥계와 청련은 시조를 남긴 시조시인이고 청백리이고 판서를 지낸 고관이다. 청련은 청백리의 위상에 맞게 文淸公의 시호가 내렸으나 구졸암만 시호가 없다. 문집도 옥계와 청련은 단행본을 남겼으나 구졸암은 『용성세고』에 한 부분을 차지하여 소략하다. 『구졸암집』의 단행본 간행이 필요하다. 구졸암은 벼슬이 참판에 그쳤으나 증직으로 판서를 받아 사후 위상은 삼걸이 같아졌다. 천령삼걸인 구졸암 양희와 옥계 노진과 청련 이후백은 판서급 인물로 학덕을 겸비하여 지역 문화와 중앙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천령삼걸은 함양을 빛낸 인물로서 함양의 자랑스러운 인재배출, 덕성함양, 한문학, 선비문화의 모범·전형이라고 하겠다.

九拙庵 梁喜 硏究

( Kyung Hun J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9권 0호, 2014 pp. 41-67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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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九拙庵梁喜의 생애와 『龍城世稿』에 수록된 官僚詩에 대한 연구이다. 양희는 唐谷鄭希輔의 高足으로 玉溪盧진, 靑蓮李後白과 함께 지리산함양지역의 ‘天嶺三傑’이라 칭송받았다. 그리고 德溪吳健, 暘谷蘇世讓등과 함께 청렴한 관리로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인물이며 介庵姜翼, 梅村鄭復顯, 梅庵曺湜, 桃灘邊士貞등의 名賢들과 당대를 풍미하였다. 양희는 正言과 持平을 시작으로 여러 내외직을 거쳐 1579년 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고 1580년 冬至使로 명나라에 使行하다가 北京玉河館에서 순직할 때까지 열정적인 관료의 삶을 지내온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청백리였던 조부 逸老堂梁灌의 영향을 받아 40여 년 관료 생활에 청렴한 관료 정신을 계승 받았다. 자신의 號인 九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품, 용모, 언어, 문장, 벼슬, 교유, 정치, 爲身, 자손들에 대한 계책 등 아홉가지를 읊으며 스스로 權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 대응할 수 있는 덕목으로 여겼다. 그 결과로 양희는 66세의 노구로 명나라 사행 길에서 졸할 때까지 ‘肅將使命’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다. 그의 시가 당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문학적 명성은 이미 세상에 떨칠 정도였고 다양한 詩體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시에 대한 공력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의 문집은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다만 『龍城世稿』에 잔존하는 그의 시세계는 淸貧한 삶과 苦難한 官僚생활을 드려내고 있으며 백성들의 삶과 世態에 대한 感慨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九拙庵十詠은 그의 삶과 문학의 근본 사상을 이루는 작품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백성들의 삶이 왜곡 없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었고 지방관의 올바른 도리와 관리의 본분을 실현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리고 수령의 본분을 權力의 기반으로 삼지 않았고 백성들의 어려운 현실을 이해하고 보호하며 진정한 목민관의 자세를 강렬히 드러내고 있다.

옥계 노진(玉溪 盧□)의 시에 나타난 풍격 고찰

김근태 ( Geun Tai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9권 0호, 2014 pp. 69-91 ( 총 23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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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옥계 노진의 시에 드러난 풍격을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옥계는 전문적인 시인이 아니기에 조선시대 漢詩史에 있어 뚜렷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성리학자의 깊은 학식과 고결한 인품에서 나온 시들은 평이하면서도 담백하여 속세를 벗어난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시의 풍격을 平澹으로 규정하였다. 옥계는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깊은 학문적 지식을 축적하였고,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이기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하고 급변하는 정계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학문을 연마하며 살기를 갈망하였으나 끝내 이루지는 못하였다. 다만 지방관으로 부임하거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는 짧은 시간이나마 지리산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유람하며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따라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는 시들은 고향이나 산수 전원에서 보고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읊은 것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수 있다. 그가 지은 시는 특별한 기교나 시적 장치도 없고 시어를 단련하거나 조탁하지 않았으며, 어려운 전고를 사용하지 않아 외형상으로는 평이하게 보인다. 또한 작자의 정서나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 담백하다 못해 무미건조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그의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시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어 무한한 여운이 오래도록 남게 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밖에 산수를 유람하며 지은 시에서는 유람을 통해 심성을 수양하고 호연지기를 키우고자 하는 성리학자의 의식이 담겨 있고, 그의 고결한 정신세계가 시 안에 내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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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는 靑蓮李後白(1520~1578)의 絶句에 활용된 詩語와 素材分析을 중심으로 唐詩風의 受容樣相에 대하여 考察하였다. 청련 唐詩風의 외적 특징을 살펴보면 대우의 美感에 관심과 特長이 있어, 17수의 절구에서 대우가 활용되었고, 詩語의 경우 抒情과 敍景에 적합한 시어의 활용 빈도가 높았다. 특히 ‘淸’한 풍격의 작품 구성에 적합한 시어의 활용빈도가 높았다. 청련은 매화 같은 경물도 고향의 표상으로 제한하여 인식하였고, 풍경시는 淸新한 시어와 색감의 대조를 통해서 ‘淸奇’한 풍격의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또한 ‘閨怨’이나, 조선의 전설 및 지명도 과감하게 작품화하였다. 청련의 당시풍은 절구시에 잘 구현되었고, 당시풍의 서정적 意境을 구현하였지만, 지나친 대우의 활용이나 唐詩의 模擬에 머문 한계가 있다. 그러나 思庵朴淳과 더불어 學唐의 선구자로서 청련의 위상은 재조명 받아야 한다.

청매인오선사(靑梅 印悟禪師)의 시문학연구(詩文學 硏究)

( Mi Seon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9권 0호, 2014 pp. 125-149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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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영남지역 한문학의 유산물 중 靑梅印悟禪師의 詩文學硏究이다. 청매선사는 우리 한문학의 연구범위에 있어서 지역적으로 볼 때 영남지역의 한문학 내용에서 불가 선시의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겠다. 담양의 지리산 연谷寺·靈源寺등의 사찰에서 수행하며 悟道嶺를 넘나들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十二覺詩의 선시가 현재에도 지리산 오도령을 넘나드는 뭇사람들에게 吟誦된다는 것은 영남 한문학 유산의 중요한 일맥을 차지하고 있음이 적실하다. 청매 한문학의 특질은, 선종에서 옛 선사들이 제자들을 지도하기 위해 제시한 公案·古則에 대해서 『靑梅集』 卷1에서 148가지의 公案을 하나하나 요지를 설명하고 송고시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매가 당나라 선종의 공안송고시의 맥을 달마의 禪跡을 송고한 法演禪師를 비롯해 선종 제5조 弘忍에서 제6조 慧能이 偈頌을 지어 의발을 전수 받은 것을 公案으로 삼아 송고한 葛廬覃禪師의 송고시, 南泉普願禪師의 「牧牛頌」, 楚雲南禪師가 大梅法常의 공안 내용을 송고한 법맥을 우리나라 고려 무의자 혜심이 계승하고 이를 청매 인오선사가 수용하였다는 의의이다. 이상과 같이 더 이상 닦음도, 깨달음도, 얻음도, 잃음도 없음을 증득한 결과를 禪과 詩가 融合한 禪詩세계를 영남지역을 토대로 하여 남긴 靑梅禪師를 통하여 접근하여 고찰함에 매우 의미가 있었다. 청매선사 및 영남지역 한문학에 대한 관심을 기대하며 후고를 남겨둔다.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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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潭丁時翰(1625~1707)은 조선후기의 학자로, 집안 대대로 벼슬을 해온 서울의 양반 명문가 출신이다. 우담 정시한에 대한 선행 연구는 사상적인 측면에 집중된 경향이 강하며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집안에 보관해 두었던 여러 문학 작품이 산일되었다는 점과 정시한의 글 짓는 성향이 학문을 강론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연구자는 정시한의 기행집인 『山中日記』라는 텍스트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 텍스트가 정시한에 대한 연구를 보다 다각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정시한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시한은 “산수를 좋아하여 팔방에 두루 다녔다. [喜山水遍遊八方]”라고 하였는데, 이 『산중일기』는 그가 늘그막에 기획한 네 차례의 산행에 대한 하루하루의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정시한의 평범한 일상을 엿볼 수 있었고 사상가로서의 정시한이 아닌 또 다른 작가의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본고는 우담 정시한에게 ‘사는 곳’이 아닌 ‘떠나온 곳’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즉 평생을 강원도 원주를 근거지로 하여 살았던 정시한에게 산행이 갖는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산중일기』에 담겨 있는 네 차례의 산행 중에 1차 여행에 집중하여 분석하였다. 정시한의나이 예순 두 살 때 행해진 이 여행은 그가 기획한 여행 중 가장 긴 기간에 해당되는 여행이었는데, 그 중 6개월 가량을 경상남도 함양지역에서 체류하였다. 따라서 본고는 『산중일기』 안에 보이는 함양 체류 기록만을 발췌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정시한에게 함양 지역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공간인지를 찾아보았으며, 더 나아가 정시한이 山水癖을 갖게 된 원인을 살펴보았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역사(歷史) 의식(意識) -시문학(詩文學)을 중심으로-

( Hee Kyung So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9권 0호, 2014 pp. 181-217 ( 총 37 pages)
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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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김상헌(1570∼1652)은 정계에서 당파적으로는 서인에 속해있으면서, 인조반정 이후는 功西派에 대립하여 淸西派를 이끄는 領袖로 활동하며 정국을 이끌고, 학문적으로 기호학파의 성향을 띠고 성리학의 首長으로 당시 학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청음이 살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 동아시아는 국제 질서가 재편된 격변의 시대였다. 김상헌은 선조 대에 태어나 조선 초기부터 형성된 당파의 당쟁기와 임진왜란을 거쳐, 인조조의 반정, 이괄의 난,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조선조의 커다란 사건이 연속되었던 시기에 국내·외적으로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온몸으로 맞서 확고한 소신과 행보로 사회적·정치적인 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편 광해군 대·인조 대를 거치며 兩亂을 통해 主和를 주장하는 최명길과대치하여 끝까지 斥和를 관철했던 행적으로 인한 척화신으로서 자리매김은학문적 성과의 평가가 소홀히 될 수 있으나, 일찍이 正祖는 『弘齋全書』에서청음의 節義와 함께 학문과 문장을 높이 평가한 바 있으며, 또한 40권 16책의 방대한 분량의 文集이 정치적 위상과 더불어 학문적 卓見도 충분히 입증하고 있으니, 뚜렷한 소신을 지니고 학문적 이념을 실천하고자했던 실천가로서 청음은 政·學두 방면에서 위상이 확고했던 것이다. 그는 出仕이후 進退를 거듭하였으나 평생 관직에 종사하며, 나라의 危難이 있을 때마다 榮辱을 함께 하였다. 國難이 있을 때마다 보여준 일련의 대응에서 그의 신념은 그대로 드러난다. 때로는 자기 혼자 명예를 구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압송된 이후 나타난 행적으로 오해를 풀기도 한다. 論者는 청음의 역사의식을 그가 남긴 문학 작품 가운데 詩作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역사의식 전반에 흐르는 의식 체계는 그의 학문세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性理學的實踐儒學으로서 도학의 특징은 義理와 節義를 중시하며 당시 儒風을 주도하는데 청음은 이런 성리학적 사고체계를 기반으로 현실을 인식하였던 것이며, 일생동안 자신의 학문적 신념에 진실하게 처신하며, 私利보다 公道를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지식인의 참 면모를 보여주었다.

김삿갓의 만시류(挽詩類)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형상화와 미적특질

하정승 ( Ha Jung Se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29권 0호, 2014 pp. 219-245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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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에서 김삿갓은 조선후기의 한시 작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홍경래의 난에 집안이 연루되어 20대 이후로 관직으로 진출할 것을 포기하고 전국을 돌며 방랑시인으로 평생을 살아갔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다. 본고에서는 김삿갓의 시들 중 만시류작품을 살펴보았다. 김삿갓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또한 그 자신 역시 정처 없는 방랑시인으로서 항상 죽음의 문제에 직면에 있었기 때문에 김삿갓 시문학에 있어서 죽음을 다룬 그의 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그의 만시는 김립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도 문학성이 매우 뛰어난 작품들이 많아서 연구의 의의가 크다고 판단된다. 김삿갓의 만시류 작품을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아내의 죽음을 다룬 悼亡詩, 자식의 죽음을 다룬 哭子詩, 벗의 죽음을 다룬 悼朋詩외에 이름 모를 민초들의 죽음을 다룬 시까지 매우 다양하다. 작품의 분량은 적지만, 挽詩가 다룰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 역시 김삿갓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김삿갓은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피하여 방랑시인의 삶을 시작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시에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연민의 정이 가득하다. 특히 힘이 없고 가난한 민초들을 대할 때면 김삿갓은 항상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아 시를 써내려갔다. 이같은 모습은 만시류 작품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김삿갓이 쓴 만시류 작품의 대상 인물들은 모두 이름 없고 가난한 민중들이다. 이점은 사대부 문인들의 일반적인 만시와 많은 차이가 있다. 그 자신은 방랑 시인으로 부귀와는 거리가 멀었고, 매 순간 만나는 사람과 목도하는 현상은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이었으니 그의 시에는 자연스럽게 민초들의 지난한 삶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민중들의 삶의 이야기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역시 죽음을 두고 애도하는 시가 될 것이다. 김삿 갓의 만시에 민초들의 삶의 여정과 슬픔이 강하게 묻어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만시의 대상과 소재를 넓혔다는 점은 매우 의미 있는 일로 김삿갓이 이룬 또 하나의 문학적 업적이라 하겠다.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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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중기의 심의설에 대해 살펴보고, 구암의 方領深衣說을 통해 그만의 경전 해석방법과 방령 심의설의 특징 및 영향에 대해 고찰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禮記』 가운데 深衣는 역대 經學家들의 중요 연구 대상이었다. 심의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상례 및 제례에 착용되었으나 고려 말기에 주자학이 도입된 후부터는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冠婚喪祭의 四禮服, 사대부의 예복 및儒服으로 사용되었다. 심의에는 直과 方으로 인간의 심성을 바르게 하려는 것에서부터 만물생성변화의 근원인 陰陽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임란 이후 예제가 무너진 조선 중기에, 유학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지닌 심의에 주목함으로써 심성을 바로잡고 세상을 교화하는 유가 예절을 심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즉 심의는 그 형태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철학적 의미 때문에 儒服으로 선호된 것이다. 『예기』, 「深衣」편 및 「玉藻」편에 있는 심의에 대한 내용이 간략해서 그 용어들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정현과 공영달 등이 註와疏를 붙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고, 그 결과 후대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해석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쟁점을 일으킨 부분은 ‘續임鉤邊’과 ‘임當旁’, ‘曲겁’ 등이었다. 구암은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하여 古禮에 입각한 예설을 주장하였다. 끊임없는 기본 경전 연구를 통해 선현들이 해석한 경전 註疏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육경 본래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구암은 심의제도가 『예기』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 오히려 여러 註疏家들에 의해 왜곡되어 경서 본문의 의미가 흐려졌다고 하였다. 나아가 주자 만년의 설과 『주자가례』에 나와 있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에서 『주자가례』에 의문을 제기하여, 『의례』의 「상복」, 『시경』, 『이아』 등의 경전 원문을 근거로 해박한 고증을 하고, 字意를 중요시 하면서 『예기』 본문에 대한 정밀한 해석을 함으로써 새로운 심의 양식의 ‘방령 심의설’을 만들었다. 이것은 古禮에도 부합하고 착용하기에도 편리한 심의 연구에 대한 물꼬를 틔웠고, 당시는 물론 후대까지 심의설에 대한 관심과 논의를 증폭시켰다. 또한 후기 실학자들의 실용적 복식 개념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여 현실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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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沈大允은 陽明學을 家學으로 하는 少論系양반가의 후손이나, 증조부대에 역모죄로 滅門之禍를 당해 양반의 명맥만 근근이 유지할 뿐 생계를 위해 직접 木盤을 제작해 파는 工商활동을 하면서도 방대한 양의 경학 저술을남긴 19세기의 주목할 만한 경학가이다. 경전 해석 방법에 있어 양명학적 가학과 실제 工商활동의 영향으로 字句해석에 얽매이는 漢學과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정주학을 배척하고, 성현의 말씀과 사물의 實情및 人情에서 해석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경험적·실증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인간이 利를 추구하는 것은 天命之性이며, 利의 추구는 극단적으로 인류 멸망을 초래할 정도로 상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忠恕의 방법으로 與人同利하는 至公의 道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19세기의 대내외적 문제를 『論語』 해석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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