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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0권 0호 (2015)

한문고전 번역 및 표점에 있어 현토 활용의 문제 -"한대"와 "(이)어늘"을 중심으로-

이규필 ( Gyu Pil L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7-38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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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번역과 표점에 현토가 과연 유용한가를 논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그를 위해 먼저 현토의 성격과 기능을 정리하였고, 연구 현황을 통해 과제를 진단하였다. 그 과정에서 현토의 의미와 용법에 대한 기초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했고, 그와 관련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함을 절감했다. 현토의 의미와 용법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검증하기 위해 빈도수가 많고 논란의 소지가 있는 吐 ‘~한대’와 ‘~(이)어늘’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 두 토는 의미와 용법이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 나름의 일관된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은 문장 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 吐들이 지닌 규칙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반영한다면 한문고전 번역과 표점의 수준 제고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예측되었다. 이에 따라 ‘~하니’, ‘~하여’, ‘~하고’ 등 다른 현토들도 용례를 조사하여 정리하면 그것이 구어적 관습에서 혼용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정보를 담고 일정한 규칙 아래 쓰였다는 결과를 얻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되었다. 이어 현토가 한문고번 번역과 표점의 수준 제고에 기여할 가능성은 탐지되었지만, 낯선 한문 문장을 대상으로 그 현토를 정확히 달 수 있는 학자가 많지 않은 현실을 지적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현토 교육의 필요성을 또한 아울러 제기하였는데, 이 지점에서 정확한 현토 교육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현토 연구와 정리의 필요성을 다시 절감하였다.

사서(四書)의 경문(經文) 및 주문(註文) 해석에서 현토(懸吐) 논란 사례에 관한 고찰

신상후 ( Sang Who Shi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39-63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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懸吐는 입말과 글이 달랐던 환경에서 그 이질감을 극복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다. 우리 先人들은 원문의 原型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어 사이에 우리말 조사와 어미를 끼워 넣음으로써 원문의 문법구조와 의미를 드러냈다. 현토는 소재언어를 변형하지 않으면서 목표언어의 문장형태소를 사용해 목표언어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즉 현토는 문장 해석의 기능을 갖는다. 반대로 말하면, 현토자가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현토가 달라진다. 따라서 현토를 살펴보면 그가 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현토의 해석적 기능을 보이기 위하여, 四書의 經文과 註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들 가운데 현토가 그 소재로 사용된 사례들을 고찰하였다. 사례는 크게 경문의 해석과 주문의 해석으로 나누어 제시하였는데, 경문 사례는 관본언해와 율곡언해의 차이에 대하여 토론한 사례들을 분석하였고 주문 사례는 朱子 『集註』의 내용을 토론하면서 현토를 소재로 한 사례들을 분석하였다. 이들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현토와 문장 해석의 상관관계를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토에 대한 논란이 문장을 정교하고 엄정하게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주문 사례를 통해서는 특히 성리 담론에서 현토가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 토의 결정에 현토자의 철학적 견해가 반영됨을 알 수 있다.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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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한문교재에는 漢語文字學 관련 진술과 이를 활용한 교수학습법이 다수 보인다. 교재에 반영된 漢語文字學 활용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일한 聲符를 공유한 한자들을 系聯한 교수학습법이다. 예컨대 聲符가 各인 형성자 格, 洛, 絡 등을 한데 모아 敎授·學習하는데, 이는 한자의 形과 音을 학습하기 용이하다. 둘째, 여러 가지 뜻을 소유한 한자들을 系聯한 교수학습법이다. 이는 한문교과서에 흔히 보이는 漢字, 漢字語 교수학습법이다. 예컨대 ‘塞’자의 경우 塞翁之馬(변방 : 새), 要塞(요새 : 새), 拔本塞源(막다 : 색)과 같이 한자의 뜻이 쓰임에 따라 달라짐을 제시한다. 셋째, 한자의 구조를 분석하거나 한자의 部件을 조합하여 교수학습 한다. 예컨대 掌(장)의 구조를 ‘手(뜻) + 尙(음)’으로 분석하여 ‘손바닥’이란 뜻을 학습자가 유추 할 수 있도록 한다. 반대로 部件 양을 제시하고 이를 ‘月, 木, 申, 水’ 등과 조합하여 腸, 楊, 暢, 湯 등의 한자를 학습 한다. 넷째, 부수가 같은 한자를 系聯한 교수학습법이다. 예컨대 부수가 같은 鋼, 鑛, 鎖, 銃 등을 한데 모아 교수학습하는 것이다. 이는 한자의 義와 形을 학습함에 유리하다. 다섯째, 모양이나 뜻이 비슷한 한자를 系聯한 교수학습법이다. 예컨대 모양이 비슷한 ‘險, 檢,’ 뜻이 같은 ‘年, 歲’ 등을 한데 모아 교수학습하는 것으로, 形과 義를 학습하는데 효과적이다. 한어문자학의 진술이 미진한 경우도 있다. 소전은 ‘漢나라 때까지 국가의 표준 書體로 쓰였다.’와 육서를 뭉뚱그려 ‘한자를 만드는 원리’라고 진술한 것은 미진하다. 문장해석에 한자의 뜻 제시가 부적절한 곳도 있다. ‘薄集龍門下數千’의 薄을 ‘모이다.’로 제시 하였는데, 이는 本義 ‘풀 무더기’로부터 引伸된 ‘밀집’이 옳다. ‘我國本聖人之都’의 都를 ‘아름답다.’ 世襲의 ‘襲’을 ‘세습하다’로 제시하였는데 각각 ‘국가’, ‘이어받다’가 옳다. 字源 분석이 부적절한 경우도 있다. 嘗, 島를 회의자로 분석하기도 하고, 多의 夕을 ‘저녁 석’으로, 示는 하늘, 해, 별, 달을 그린 것이며, 路는 각(各) 사람의 발(足)’이라고 하였다. 嘗, 島는 형성, 多의 夕은 月(肉)의 생략, 示는 신주의 모습, 路의 各은 움집으로 들어오고 있는 발을 그려 ‘들어오다.’가 본의이다. ‘각각’과는 상관이 없다. ‘緣木求魚’의 緣을 ‘쫓다.’로 풀이하였는데 ‘오르다’가 적합하다. 緣의 本義 ‘옷의 가장 자리의 장식’으로부터 ‘오르다’라는 뜻이 引伸되었다. ‘獻諸子罕’의 ‘諸’를 ‘之於의 의미’라 했는데, ‘之於’의 축약이다. ‘之於’를 빨리 읽으면 ‘저’가 된다. 이를 ‘諸’로 나타낸 것이다. 朱子는 『詩』, 「召南·行露」 제 2장의 韻字인 ‘角, 屋, 家, 獄, 獄, 足’에서 ‘家’가 압운이 되지 않는다 하여 ‘谷’으로 읽어 和韻 하였다. 이는 한자의 독음 변천을 모르고 자신의 시대의 음으로 선진시대의 음을 재단한 愚를 범한 것이다. 우리도 이런 愚를 범하지 않나 되돌아 볼 일이다.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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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허백정 홍귀달의 시세계를 구성하는 미학적 중추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연구 결과, ‘허백’의 의미가 하나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시세계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허백정이 지은 비명이나 묘지 등은 당시에 이미 ‘문장에 법도가 있다’, ‘곱고도 굳세다[麗而健]’라고 평가되었는데, ‘문장에 법도가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형식을 잘 지켰다는 것을 의미하고, ‘곱고도 굳세다’라는 것은 표현이 화려하면서도 내용의 전달에 충실했음을 의미한다. 허백정은 조선 초기의 시단에서 사림파와 관각파의 양면을 공유하고 있다. 문형을 지낸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관료문인으로서 격식을 갖춘 전형적인 시문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강호에서 혼자 누리는 자유롭고 고독한 삶을 추구하는 작품도 지었다. 이러한 이중성은 그의 시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허백의 개념을 미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의 시세계에서 중요한 개념인 ‘虛靜’과 ‘天眞’의 이미지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작품을 분석해 본 결과, 겸허한 심중의 독백, 유유자적한 경지의 술회, 안빈낙도의 추구 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시세계가 이러한 미학적 배경에서 형상화되었다.

6세기 문인들의 백제 회고시 연구

이동재 ( Dong Jae L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129-161 ( 총 33 pages)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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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세기 문인들에 의해 지어진 백제 회고시의 현황과 내용, 그 문학사적 특징을 고찰하여서 백제 회고시에 대한 이해와 백제사 인식의 단면을 살펴보았다. 백제 회고시는 백제사와 관련된 유적, 인물 등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를 말한다. 16세기 문인들에 의해 지어진 백제 회고시는 沈彦光을 비롯한 15명의 문인에 의해 44편이 있다. 시의 내용은 대부분 역사의 무상함을 드러내고 있고, 당대 현실을 寓意한 시는 많이 지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에 대한 무관심의 고조이다. 조선의 16세기는 건국이념인 성리학적 가치관이 이미 다방면에 심화된 사회였으나 여전히 權貴들과 士林들 간의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문인들은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전 시대에 비해 현실 문제를 寓意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둘째, 16세기에는 성리학이 심화되고 보편화되면서 문인들은 성리학적 역사관에 부지불식간에 훈습되어 있었다. 經筵의 중심 교재가 六經과 주자에 의해 재정리된 『資治通鑑綱目』이었다. 『자치통감강목』은 성리학적 관점에서 중국사를 재정리한 책으로, 문인들은 이를 통해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보다는 중국사에 관심이 많았다. 셋째, 백제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이 시기에는 우리 역사에 대한 재정리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백제사에 대한 지식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식도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백제사에 대한 회고적 감정을 드러낸 시는 전 시대인 鮮初에 비해 많이 지어지지 않았으며, 지어진 시도 거의 대부분 역사의 무상감만 드러내고, 감계의 정서를 드러낸 시는 소수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지치주의 관점에서 의자왕을 비판하고 成忠을 褒揚하는 시각으로 드러났다.

환학당(喚鶴堂) 조여심(曺汝諶)의 교유시(交遊詩) 연구(硏究)

조희창 ( Hea Chang Cho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163-200 ( 총 38 pages)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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喚鶴堂 曺汝諶은 1518년 (中宗 13년, 戊寅)에 태어나고 1594년(宣祖 27년, 甲午) 77세에 卒한 호남의 대유학자이며 시인이었다. 字는 常仲 또는 誠仲이며 호는 喚鶴으로 自號한 것이다. 그는 號처럼 학과같이 살다 간 전형적인 선비였다. 중종, 穆陵盛世의 호남시단에서 송순, 임억령 등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들과 詩友로서 교유하고 선비정신을 견지하면서 處士로 청정한 일생을 보냈던 환학당 조여심에 대한 조명은 아직껏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行狀」을 쓴 서파 오도일이 “聲韻이 淸絶하고 色澤이 朗潤하여 근세의 문필가가 미칠 바 아니었다.”는 詩評을 하였고 그의 정자인 환학정의 騷客들 중 문장의 출중함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일대에 ‘鶴仙’으로 전설처럼 불리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정비된 문집이나 연구 자료가 일천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많은 전적들이 선조들의 遺文과 함께 書庫에 불이나 소실된 이유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다행히 그의 정자인 환학정 편액들과, 흩어진 遺文들을 모아 후손들이 편집한 유일한 작품집인 『喚鶴堂遺稿』가 있고, 당시 환학정을 중심으로 교유했던 林億齡, 蘇世讓, 高敬命, 奇大升, 鄭澈 등의 문집에 자료가 다소 散在되어 있으며, 창평 鄕校 등에 그의 行錄이 남아있어 이를 취합하여 환학당 조여심을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조여심은 종형인 觀水亭 曺汝忠과는 翫水亭을 共遊하면서 우애가 각별하였고, 종매형인 양곡 소세양은 그의 資稟을 각별히 자애하였다. 특히 指呼之間에 위치한 ‘息影亭’의 石川 林億齡과는 깊은 친교를 유지하며 그의 사상과 문학을 수렴하였다. 조여심의 시풍이 만년의 석천시와 닮아있음은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석천은 무려 20여수의 山居詩를 조여심에게 주었다. 그의 문집 『환학당유고』에는 환학정 「原韻」을 비롯한 수편의 교유시가 수록되어 있어 교유작가들의 문집에 남아있는 시들을 함께 취합하여 분석 자료로 삼았다. 삶의 志向이 陶淵明, 석만경, 엄자릉 등을 추종하였으며, 작품 전반에 흐르는 시의 성향은 守拙하고 平易하며 과장하지 않는 자연주의적 특징이 있다. 그의 律詩에서는 禪 사상과 道家思想의 여운이 감지되며 그의 山居詩 전반에서 느껴지는 것은 현실세계가 그의 포부를 수용해주지 못하는 屈原의 비애를 느낄 수 있고, 이를 엄자릉과 석만경과 같은 隱者的 삶과 도가사상에 기대어 독자적으로 아픔을 극복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중건했던 三峰書舍[學求堂]를 통하여 교육에 끼친 업적과 당시 지방 私學 기관으로의 기능과 배출된 인사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본 연구를 통하여 16세기 호남 문단의 方外作家로 남아 있었던 조여심을 조명함으로써 그의 작품세계와 그를 통한 交遊詩人 간의 인간관계와 시 성향, 문화 풍토 등이 점검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효종 시문학 연구

이현지 ( Hyun Jee L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201-229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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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로서의 처신을 고민하던 孝宗은 병자호란 직후 인질로 끌려가 武를 숭상하는 淸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장수의 기질을 타고난 자신을 재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인질로서 겪는 고난에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통찰했다. 북벌에 대한 집념은 이로부터 지속되었다. 효종의 처세는 대명의리, 복수설치, 왕권강화의 차원을 넘어 조선 군주로서의 ‘사명감’과 중원에서 오랑캐를 전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려는 ‘영웅심’에 기반을 두었다. 효종의 이 마음을 알아주는 지기는 아우 麟坪大君이었다. 효종은 인평대군과 시를 수창하는 시간 속에서 생기를 찾곤 했다. 朝淸 관계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해결자로 파견되었던 인평대군은 효종에게 더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효종은 한계 상황의 심리적 고통을 시에 의지했는데, 시를 창작한 것은 물론 시를 되뇌는 행위를 통해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면모를 보였다. 시는 그에게 귀의처였고 기도문이었다. 현실에 대한 개탄, 북벌을 향한 일념, 우애를 위한 정성 등으로 집약되는 효종의 시는 당대 문풍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은 자신의 북벌 의지와 문예 취향에 부합되는 정두경의 시를 혹애함으로써 시의 표준을 정했다. 효종의 의지와 취향은 독서 경향에도 영향을 미쳐 張維가 精選한 『戰國策』이 필사되어 널리 읽혔다. 효종이 갈구한 인간형이 선진의 복수 이야기인 『전국책』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영수합(令壽閤) 시(詩)의 미적(美的) 특질(特質)

김여주 ( Yeo Ju Kim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231-271 ( 총 41 pages)
11,600
초록보기
문화적으로 문학적으로 다양성을 구가하던 조선후기의 사대부 문학 활동, 곧 경화세족들의 문학 활동의 자장 안에서 조선 여성들의 의식이 한시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 있는가를 살펴보는 방식이 기존 연구였다면, 본고는 영수합의 작품 자체에 보다 집중하였다. 이는 작품을 통해 작가의 의식세계를 유추하고, 작품의 창작 배경을 살펴 문학적 의의를 밝혀내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적 특징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그 문학성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시적 관점에서 작품 자체에 드러나는 풍격과 순수한 감성적 면모에 포커스를 맞춘 연구라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 영수합 시의 대부분이 농서 시절에 가족과의 唱酬作品으로, 그 대상이 남편, 아들들과 두 딸이었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난 주 대상은 아들들이고 남편에 대한 情意는 거의 드러나 있지 않으며, 더욱 특이한 것은 『幽閒集』이라는 詩集을 남겨 놓은 큰 딸인 幽閒堂 洪原周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이것은 당시 조선후기 사회의 여성 시작활동에 대한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럼에도 문집으로 발간할 수 있었던 영수합의 시에 대한 자식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며, 『令壽閤稿』의 작품이 선별되어 선집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우선 룡西에서 주변의 경관과 일상의 흥취를 맑고 담박하게 그려낸 시들에서는 淸新한 감각이 맑고 담박한 자연과 어우러져 그려지면서 沖澹한 풍격을 형성해 놓고 있다. 또한 양적으로는 모성을 드러내며, 고향인 한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따뜻하고 절제된 감성으로 묘사한 시들이 가장 많다. 농서에 있으면서 자식들에 대한 애틋함, 고향인 한양을 그리워하는 향수의 정감이 교차되면서 그 감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편이지만 서글퍼서 애를 끓이는 감상으로 치닫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절제하면서 “哀而不傷”함을 통해 전아한 풍격미를 드러낸다. 擬作이라는 표현을 통한 남편과의 창수 작품에서는 여성적 감성보다는 노련하고 힘이 있는 선비 의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부드럽지만 세밀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자연스럽게 老健한 풍격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을 사대부가의 여성으로 자라면서 사대부적 시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해서 날카롭게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모성애를 지닌 따뜻한 눈으로 타자를-백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영수합 특유의 의식이 드러나면서 그것을 시적 미감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은 영수합의 시적 재능인 것이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유도(儒道) 존숭과 경세(警世)의 시문 창작에 관한 고찰

신영주 ( Young Ju Shi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273-306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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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매산의 삶의 행적과 그의 문학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매산은 전적으로 문학에 전념했던 문인은 아니지만 문학적 의미를 갖는 많은 분량의 작품을 남겨두었다. 학자로서 학문 탐구에 매진하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다하면서도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매산은 유도가 미약해지고 풍속이 쇠퇴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스로 이를 바로잡기를 바랐다. 매산은 몇 가지 방향에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우선은 학술적 대응으로서 자신이 혼란한 세태에 뒤섞여 출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물러나 위기의 학문에 종사하기를 원하였다. 또한 매산은 문학을 통해서도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지와 전장을 통해 민간에 묻혀 있던 윤리와 절의에 관한 미담들을 소개하여 풍속을 바로잡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시를 통해 가난과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대변하고 위정자를 경계하고자 하였다. 문학이라는 도구로 사회 변화를 도모하고자 한 매산의 시도는 19세기 문학사의 한 경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듯하다.

한시를 통해 본 의암 유인석의 반개화(反開化) 논리와 화이적(華夷的) 서양인식 연구

송기섭 ( Gi Seop So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0권 0호, 2015 pp. 307-334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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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에도시대 쇄국정책으로 서구열강의 개항요구에 반대하였으나 미국과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도 병인년과 신미년의 두 양요에 강력히 항거하여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1875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朝日守護條規에 의해 개항하게 되었다. 이렇게 개항하는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이 斥外의 입장은 같았으나 개방 후 개화의 입장과 서양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조선은 華夷적 차원에서 서양을 인식하여 유학자 중 대부분이 中華 중심의 문화를 崇好하고 華夷的 思考로 인하여 쇄국과 전수의 반개화적 논리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에 운양호 사건 이전에는 개항여부에 대하여 戰守派와 交流派, 운양호 사건 이후에는 개화에 있어 守舊派와 開化派의 갈등으로 甲論乙駁하였지만 戰守입장인 수구파의 세가 훨씬 강하게 나타남으로써 양이에 대항으로 맞섰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 달리, 메이지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그 결과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하여 모아진 자본을 토대로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華夷論的 차원에서 서양을 인식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화서 이항로며, 이 뜻을 이어받아 계승한 이가 의암 유인석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의암 유인석의 시를 통하여 당시의 교화 또는 개화파 논리에 대하여 우려하고 그의 서양관을 화이적 관점에서 알아 본 것으로 抄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암은 왜양식의 개화현상을 보면서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 「今曰維新守舊」 등 10수의 시에서 개화로 인해 우리 생활에 스며드는 서양문물에 대한 부당함을 반박하고 있다. 둘째, 그의 시에 서양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洋曆二首」 등 9수의 시에서 서양의 책력, 종교, 과학 등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이 짙다. 또 이러한 내용들이 그가 지은 「宇宙問答」에 잘 정리가 되어 있어서 시와 더불어 의암의 서양인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의암은 倭洋으로 개화되는 현상을 우려하고 서양에 대하여 화이적 입장에서 바라봄으로써 그와 뜻을 같이하는 수구적 유림들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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