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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3권 0호 (2016)

만전당 홍가신의 생의 자취와 삶의 지향

송기섭 ( Song Gi-seop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7-42 ( 총 36 pages)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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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전당 홍가신은 삶을 영위하면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분이다. 기축옥사, 임진·정유왜란, 이몽학의 난 등 大患亂의 중심에 있었고, 또한 개인적으로 가난과 身病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이처럼 공적, 사적으로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훌륭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관리로서의 혁신적 행정력과 善治는 물론 임진왜란 시 의병활동, 이몽학의 난 평정 등이 이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만전당의 자취에서 그가 추구하고 지향하고 있는 것을 조명해 보면 그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만전집』을 비롯하여 『선조실록』 등 여러 기록에서 정직성, 청렴정신, 충정심이 읽혀지고 있으며, 그가 남긴 詩文에서 자연귀의에 대한 욕구, 求道에 대한 갈망, 나라를 향한 충정으로 그가 지향했던 삶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를 역사적 기록과 그의 시문을 根底로하여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진다. 첫째, 만전당의 삶의 자취에서 ①花潭 서경덕에서 習靜 민순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만전당이 계승하였다. ②정직을 신념으로 한 원칙에 입각하여 엄격한 법집행을 구현하고 있다. ③그는 평생을 청렴한 삶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그가 벼슬하고 있는 동안 보여준 혁신적 행정은 후대에 귀감이 될 만하다. ④기축옥사,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등 역사적으로 큰 사건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모습에서 충정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둘째, 그의 삶에서 지향하고자 하는 모습이 그의 시문을 통하여 살펴보면 ①벼슬길에 있으면서도 늘 자연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구가하고 있다. ②學道에 대한 갈망이 主靜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③군주에게 荒言을 서슴지 않은 것은 忠을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만전당의 정직, 청렴, 荒言(직언), 귀거래, 求道 그리고 충정심은 그의 私意私慾이 없는 정신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정신은 화담, 습정으로부터 이어받은 주정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로써 만전당은 생활자체를 主靜에 바탕을 두고 이를 실천한 결과이다.

홍가신(洪可臣) 경세사상(經世思想) 연구(硏究) ― 상소문(上疏文)을 중심으로 ―

복대형 ( Bok Dae-hyo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43-74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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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全堂 洪可臣(1541~1615)은 宣祖朝에 활약한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만전당이 살았던 시기는 수탈적 조세수취를 필두로 하는 제반 제도와 기강이 해체되며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壬辰倭亂으로 국가기능이 마비되고 전국토가 황폐화된 대 혼란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는 해체된 제도와 기강을 바로잡아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가를 중흥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과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였다. 만전당은 오랫동안 지방관으로 복무하면서 이와 같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고 민생안정과 국가중흥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깊이 고민하고 실천하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적극적으로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 차례에 걸쳐 宣祖에게 올린 「民弊疏」·「賊退後封事」·「應求言封事」라는 上疏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만전당의 현실인식과 경세사상의 전반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만전당의 경세사상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爲民意識에 기반하여 수탈적 조세제도 개선을 통해 민생안정을 추구하며 생명존중의식에 근거하여 형벌을 신중하게 사용할 것[愼罰]을 주장하였다. 둘째, 德治主義에 근거하여 군주가 修身을 통해 도덕성을 확립함으로써 매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셋째, 民本主義에 토대하여 군주의 독단적 정사운영을 지양하고 言路를 개방함으로써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함께 당대의 정치를 개선하기 위한 時務策을 제시하고 있는데, 모든 관리의 專門性과 責務性을 제고할 것, 贓吏에 대한 처벌을 엄격히 하고 賞罰을 공정하게 시행함으로써 사회기강을 확립할 것, 능력 있는 장수를 선발하여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軍政을 확립할 것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전당은 儒學정치사상에 근거하여 정치의 목적을 爲民에 두고, 德治라는 방법을 통해 民本의 理想을 추구해야 한다는 경세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당대의 모순을 시정하고 민생안정과 국가중흥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시급하게 요구되던 구체적인 정치개혁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경세가였다.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의 은둔사상(隱遁思想)과 문학세계(文學世界) 연구(硏究)

신두환 ( Shin Doo-hwa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75-121 ( 총 47 pages)
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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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杜谷 洪宇定(1593~1654)의 은둔과 문학세계를 조명한 논문이다. 두곡 홍우정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경전과 문학수업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특히 시를 잘 지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당파 싸움에 밀려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 쓰고 유폐되었다. 그는 丙子胡亂이 터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봉화 문수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전쟁이 끝나자 봉화 문수산 두곡에 머물렀다. 홍우정은 明나라가 망하고 淸나라가 들어서자 청나라에 항거하여 명을 계승하는 의리와 절의를 외치며 明나라의 마지막 연호를 따라 崇禎處士를 표방하며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여러 번 벼슬에 임명했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고 은둔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이러한 은둔사상은 유가의 춘추대의를 표방하고 있어서 당시 세상의 선비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절의의 지사로 인정을 받았다. 그가 은거지에서 교유한 인물들은 모두 뜻을 같이한 인물들로 소위 `太白五賢`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문학적인 교유를 하며 은둔생활을 영위해온 그의 행적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은거지에서 지은 시와 산문에는 은거의 정서가 물신 풍겨나는 작품들이 들어있다. 홍우정의 은둔의 문학세계는 중국 고대의 은거문학을 흠모한 부분이 드러나고 있다. 李白과 杜甫처럼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우국의 정이 드러나 있고, 인생에 대한 통한이 서려있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녹아있으며, 시국을 한탄하는 풍자가 들어 있으며, 은거생활의 고독을 노래한 서정이 들어 있다. 그의 산문에는 商山四皓나 陶淵明 같은 중국 고대의 은둔을 지향한 인물들의 전고가 풍부하며 고문의 명편을 읽는 듯 감동이 서려있다. 그는 절의를 지킨 숭정처사로서 한시대의 영웅이자, 은거의 정서를 시로 표출한 위대한 문인이었다.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의 일생과 시작 활동에 관한 고찰 ― 천안 유배기를 중심으로 ―

신영주 ( Shin Young-ju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123-141 ( 총 19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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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 홍우정은 문장이 雄健하고 奇?하며 특히 詩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던 문인이다. 스스로 자신이 詩律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雕蟲은 말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면서도 “두보 이후로 적막한데, 천년 뒤에 다시 누가 계승하려나?”라고 하여 두보의 계승자가 되고자 하는 의중을 보이기도 하였다. 부제학을 지낸 洪慶臣이 그의 시를 보고서 인력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무릎을 치며 칭송하고, 趙國賓이 국가를 살릴 솜씨라고 경탄하였다. 이는 그의 시가 뛰어난 경지에 올랐음을 말해준다. 두곡이 시에서 보여준 성취 수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가 구현한 시의 독특한 경계가 세상의 시인묵객들을 놀래게 만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본고는 두곡 홍우정이 거쳤던 일생의 행적을 살펴보고 그의 독특한 시 창작 활동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드러내고자 하였다. 특히 천안에 부처되었을 때에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 몇 수의 시를 선별하여 분석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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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주자의 「南嶽唱酬詩」 50수에 대한 이행과 조종진의 和韻詩를 중심으로 문학적 수용과 변주의 양상을 분석한 것이다. 분석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체시의 押韻 방면에 있어 주자는 首句에 通韻으로 압운한 경우가 있다. 이행과 조종진은 이를 수용하여 수구의 韻字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주자의 原詩에 사용된 운자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주로 시상을 끝맺는 부분인 마지막 구의 운자를 동일 韻目의 다른 글자로 전환하여 변주하였다. 이것은 운자의 변주를 통해 주제의식의 차별화를 구현한 것이다. 주제의식의 차별화는 주자의 原韻을 그대로 사용한 시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이행과 조종진은 각자의 `寓意`와 `言志`로 주자의 原詩에 담긴 주제의식을 수용하고 변주하면서, 각자의 뜻을 경물에 기탁하거나 전고를 차용·변용하고 의론을 개진하며 진솔하게 정감을 발현하여 주제를 부각시켰다. 고시의 경우에 있어서 이행과 조종진은 주자의 原詩에서 구사된 산문 어법과 重字 및 連環句를 수용하고 변주하면서 각자의 개성과 주제의식을 형상화 하였다. 특히 시공간을 초월하여 삼자가 공유하였던 山行과 作詩에 대해 `山`자와 `詩`자로 連環句를 구사한 조종진의 작품은 뛰어난 詩才와 함께 문학적 가치를 확보한다. 결론적으로 이행과 조종진은 주자의 原詩가 지닌 운율과 격식 및 내용을 수용하고 변주하여 단순한 형식의 답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학성으로 내면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사악부(詠史樂府)에 나타난 대백제사(對百濟史) 인식고(認識考)

이동재 ( Lee Dong-ja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191-240 ( 총 50 pages)
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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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 詠史樂府에 수록된 백제사 관련 시의 현황을 살펴보고, 이어 작가들의 백제사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여 백제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여왔는가를 살펴보는데 일조하였다. 조선후기에 지어진 영사악부는 `海東樂府`, `東國樂府`, `箕東樂府` 등으로 그 명칭이 다르지만, 모두 우리나라 역사서의 기록을 재해석한 시로서 작가들의 역사인식이 드러나 있다. 한국 영사악부에 수록된 시 가운데 백제사 관련 시는 38수이고, 고구려 관련 시는 41수이며, 신라와 관련된 시가 313수로 백제사와 관련된 소재는 신라의 것보다 1/8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적다. 또한 시의 내용은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내용을 소재로 한 시가 7수이고, 백제의 패망과 관련된 시는 19수이며, 백제사 관련 인물을 褒貶한 시는 8수이다. 한국 영사악부에 백제사 관련 내용이 적은 것은 이를 지은 작가들이 백제사와 관련된 전설이나 전승된 문화, 노래 등에 별다른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백제사와 관련된 인식은 고려조에 기록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의 기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작가에 따라 인식의 범위와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백제사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첫째, 영사악부의 작가들은 溫祚의 백제 건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즉 마한의 왕인 箕準이 온조에게 인정을 베풀어 땅을 내주어 살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멸망시킨 것은 `不仁`한 것이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正統을 깨트리는 것이라고 하여 온조의 백제 건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영사악부를 지은 작가들은 백제 패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의자왕에게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다만 이학규는 백제 멸망의 책임은 역대 임금들의 荒淫無道와 귀족들 간의 알력과 다툼으로 인한 인재 등용의 실패, 여기에 더하여 잦은 왕권의 다툼이 쌓여서 생긴 결과라고 인식하고 있다. 셋째, 영사악부의 작가들은 都彌부인과 成忠에 대해 貞節과 忠節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 사회에 정절을 지키는 婦道를 널리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국가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다. 그러나 福信과 扶餘隆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이들은 복신이 사욕에 사로잡혀 내부 분열을 일으켜서 백제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부여융은 한 나라의 태자로서 망한 나라를 되찾겠다는 국권회복의 의지가 없고 일신의 安逸만을 생각하는 기생충과 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의 처의관(處義觀)과 절명시(絶命詩)

최식 ( Choi Sik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241-273 ( 총 33 pages)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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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대전환·대변혁의 격동기에 충북 제천을 중심으로 講學 활동에 매진하며 학맥을 전승한 毅堂 朴世和(1834~1910)를 살펴보았다. 당시 상당수의 지식인은 自靖·亡命·武鬪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바 있다. 의당은 `斥邪衛正`·`尊華攘夷` 등을 주장하여 척사위정파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바 있으나, 병으로 의병투쟁에 참여하지 못한다. 또한 조선을 떠나 중국 西間島로 망명을 기획했다가 중도에 포기한다. 그는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채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庚戌國恥를 맞아 自靖을 결행하여 의리를 실천한 儒林이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의병투쟁도 아니고 해외로의 망명도 아닌 의리에 입각한 자정인 셈이다. 晦堂 尹膺善(1854~1924)은 의당을 `亂世의 大賢`·`不世出의 豪傑`·`時代의 儒宗`으로 추앙하며, 一節(自靖)로만 단정하는 세태를 경계한다. 무엇보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으며 華夏는 夷狄이 될 수 없고 사람은 禽獸가 될 수 없다.`는 斥邪衛正와 尊華攘夷에 투철한 處義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자의 `國可亡也, 道不可亡也.`을 신봉하던 다른 유림과는 달리, 의당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성통곡한다. 나라가 망하면 道와 華夏도 모두 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 현실은 더욱 암울하고 참담하다. 그는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자정을 결심한다. 단식 23일째 되는 날, 눈앞에 죽음을 앞두고 남긴 그의 유언은 처의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1904년 화양동에 강회에서 피력한 내용의 연장선이다. 화양동은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는 小中華의 상징적 공간으로 `華陽`는 바로 `華夏`를 의미한다. 이제는 나라도 망하고 道와 華夏까지 망하니, 華夏는 夷狄으로 변하고 사람도 禽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단식하여 자정하는 극단적인 선택도 주저하지 않는다. 더욱이 자정을 결심하고 남긴 絶命詩 2수에는 의당의 현실 인식과 처의관이 고스란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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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 金德承(1595~1658)의 1624년 동지사행은 정기사명의 수행이 주목적이었는데, 이때 少?은 淸廉無慾한 태도로 칭송을 받았다. 圖本과 圖說로 구성된 『天?大觀』은 1625년 2월 하순에 會同館에서 저술됐는데, 『大明一統志』의 내용을 충실히 수용했다. 다만 말미의 `前後航海路程`은 『通文館志』를 참고해서 부연한 내용이다. 『天?大觀』의 『大明一統志』 수용양상을 분석해 보면, 우선 登州府는 45개의 항목 중에서 40개의 항목이 『大明一統志』를 수용했는데, 登州府를 `神仙·蘇軾의 文學`과 연관해서 인식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또한 인용된 내용 중에서 誤記나 通假 사례가 확인되고, 인용과 견문의 서술상 경계도 명확하지 않다. 萊州府는 65개의 항목 중에서 52개의 항목이 『大明一統志』를 수용했는데, 萊州府는 유학과 연계된 서술의 비중이 높은데, `東萊書院`에 대한 서술 누락은 궐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天?大觀』이 『大明一統志』의 내용을 폭넓게 참고했던 사례도 확인된다. 靑州府는 90개의 항목 중에서 70개의 항목이 『大明一統志』를 수용했는데, 靑州府는 齊의 중심지로서 그 고적에 대한 서술 비중이 가장 높았다. 독서경험으로 동명의 장소인 `葵丘`를 혼동하여 인식하는 사례가 발견되며, `夷齊廟`처럼 중요한 대상은 여러 지역의 내용을 보충하여 서술 비중을 높였다. 濟南府는 124개의 항목 중에서 93개의 항목이 『大明一統志』를 수용했는데, 濟南府는 명승과 절경이 많아서 풍경시의 인용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풍부하였다. 또한 `大明湖`처럼 특정 항목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할 때, 일부 다른 내용이 혼재되는 사례가 보여서 『天?大觀』이 충분한 교감을 거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天?大觀』의 서술상 특징으로, 우선 도본의 설명이 용이하도록 시선과 동선을 고려하여 서술되었다. 다음으로 漢族 중심의 문명론이 뚜렷했다. 마지막으로 정확한 지리정보의 보강을 위해서 패루와 교량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天?大觀』처럼 도본과 도설로 구성된 燕行錄 중에서 壺亭 鄭斗源(1581~1642)의 『朝天記地圖』가 『天?大觀』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명·청 교체기 해로 연행록 중에서 『天?大觀』처럼 지리지적 서술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登州 노정을 왕환했던 연행록으로 한정되는 특징이다.

18세기 한문 산문 연행록 속 `풍속` 요소의 인지와 범주

김현미 ( Kim Hyun-m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321-349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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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후기의 중요한 문화적 文獻群으로서 존재하는 燕行錄의 주요한 내용 중 하나인 `風俗`의 구체적인 내용과 전개를 살피기 위한 첫 시도로 쓰여 졌다. `풍속`은 기본적으로 타 문화를 체험한 기록이라는 상황적·내용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연행록의 저자들에게 중요한 관찰 및 묘사 대상이 되면서, 연행록을 읽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하는 내용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풍속`은 `문헌군`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성격의 텍스트를 포괄하고 있는 연행록을 `타문화 관찰 및 체험 텍스트`라는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풍속`이 왜 18세기에 새로운 표제로서 나올 수 있었는가를 사행 기록의 전통 하에서 생각해보기 위해 이전 시기인 `대명 사행록` 속의 풍속적인 요소가 어떻게 등장하고 무엇을 중심으로 소개되었는가를 살펴본 후, 18세기 연행록 중 잡지 양식의 24개 연행록 중에서 일단 `풍속`이라는 개념의 총합적 이해와 전개 양상을 보기 위해서 풍속이라는 표제 하의 서술들을 분석하였다. 대명 사행 문학의 전통에서 형성된 풍속 요소의 서술 방식은 임금께 복명하기 위한 `문견 별단체`인 잡록 형식이었으며, 내용적으로는 문화적인 자부심을 표출하기 위해 언급된 `상례`의 발견과 지리적 요소와 긴밀히 연결된 풍속의 서술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었다. 18세기 연행록 중 `풍속`을 표제로 하여 단편서술 양식을 모아놓은 세 개의 기록, 즉 노가재 김창업의 『연행일기』(1712) 중 「산천풍속 총록」, 그리고 이의봉의 『북원록』(1760) 소재 「산천풍속 총론」, 김조의 『관해록』(1784)에 수록된 「민속잡기」의 기록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바라본 새로운 세계인 `청`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폈다. 우선 노가재의 산천풍속 총록에 수록된 72개의 항목들은 이전 시기 대명사행문학에서 소개되었던 상례와 지리 지형적인 요소를 포괄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양식인 의-식-주 영역을 고르게 소개하면서도, 이전시기별단체 잡록처럼 나라의 경영을 위한 정보로서 작가의 목표를 삼지는 않았다. 이상봉의 산천풍록총론 속 118개의 항목들은 18세기 초 노가재가 관찰하고 겪은 결과의 타국 풍속을 기반으로서 받아들이고 이러한 기초지식 위에서 자신의 관찰 결과를 더하여 타국 풍속의 관찰을 했다. 1784년 연행의 결과로 민속잡록을 남긴 김조는 30항의 기록 중에서 일반적인 `풍속`이 아니라 그곳의 인물을 중심으로 여정에 따른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 근거한 `민속`의 항목을 서술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감상이 보다 많이 투영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화서학파(華西學派) 문인(門人)의 소동파(蘇東坡) 인식과 비판

김근태 ( Kim Geun-tai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3권 0호, 2016 pp. 351-382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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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불었던 蘇東坡에 대한 열풍과 화서학파 문인들의 인식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있어 소동파는 뛰어난 문장가나 시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소동파의 시문을 뛰어넘어 그의 모든 것을 배우고 따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활약한 京華世族들에게 있어 소동파는 그들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삶의 典範이 된 것이다. 이전의 지식인들이 朱子를 삶의 전범으로 삼았던 것에서 그 대상이 소동파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화서학파 문인들은 기존 성리학자들이 견지했던 의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栗谷 - 尤庵 - 華西로 이어지는 그들의 學統이 소동파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소동파가 정이와 정치적 갈등을 빚었던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그들에게 있어 소동파는 天理를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혼란에 빠트린 문제아일 뿐이었다. 소동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正統을 바로잡아 華夷의 구별을 엄격하게 한다는 취지에서 편찬된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이라는 역사서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존 역사서에서 서술된 소동파에 대한 기록을 수용하되 소동파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쪽으로 수정하기도 하였고, 소동파가 매우 큰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여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소동파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사로 독립하지 않고 주석으로 처리해 버린 것이다. 화서학파 문인들이 이와 같이 소동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과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한 이유는 주자 등 송나라 도학자들이나 조선 중기 성리학자들의 생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즉 소동파가 어느 특정한 사상에 구애받지 않아 儒佛道를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타고난 문학적 능력을 토대로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사하였던 바, 당대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소동파의 문장에 매료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성리학자들이 주장하는 道學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에, 그들은 그런 상황이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소동파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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